신약에서 회개를 촉구한 선구자는 세례 요한이라는 것은 복음서 전체에서 공통으로 보도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3:2)고 요약하여 예수의 설교의 요약과 꼭 같았던 것으로 전한다(4:17). 이대로 하면 양자의 경우에 공통된 것은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직결된 개념이다.
마가복음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고 예수의 설교를 집약했다. 학자들의 분석대로 '복음을 믿으라'가 후에 첨가된 것이 사실이라면 마태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마가에는 세례 요한도 이와 꼭 같은 설교를 했다는 보도는 없다. 그러나 첫 구절부터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세례요한의 회개운동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종말의 때가 도래하는 것과 회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같다.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회개를 연결시킨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여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9:2)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마태복음에도 예수의 명령으로 "가서 하늘나라가 임박했다고 전파하라"(10:7)라고 되어 있는데 그보다 전에 기록된 마가에는 이런 말이 없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세 복음은 같은 자료며 마가를 포함해서 제자들에게 명한 내용을 종합하면 역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라는 전제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나가서 죄에서 돌아서라고 외치라"고 했는데 마가에도 제자들 파견에서 회개와 하나님 나라 도래를 연결시킨 것은 틀림없다. 단지 '죄에서'라는 단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인데 그것은 다음 항에서 재론하겠다.
그럼 회개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뜻하는지를 세례 요한과 예수의 경우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회개의 도래를 좀더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3 :7-10)와 누가(3 :7-9)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같은 자료를 보도하는데 그것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 나라 도래는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음이 강조되어 있다. 이 심판은 철저한 것으로 어느 기득권(아브라함의 자손)도 인정되지 않고 죄인,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또 긴박성의 표현으로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한다. 둘째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회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좋은 열매'가 무엇인지는 여기서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누가복음은 이것을 풀이해서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 "너희에게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말라",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속여 빼앗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 등 각기의 처지에서 범할 수 있는 윤리 또는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열매'로 보고 있다. 누가의 설명을 그대로 세례 요한의 말로 치부할 수 있는지는 문제이나 그가 회개를 기존 윤리질서에서 해석하고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선 복음서에 전해진 그의 최후(이것은 세례 요한파의 문헌임에 틀림없다)가 바로 헤롯의 불륜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금욕적 생활양식 등으로 보아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만일 우리가 그를 에세네파와의 어떤 연관관계를 전제한다면 그러한 공약수는 아주 크다. 에세네파도 이제 올 새 나라를 기다리는 종말사상이 강했다는 점과 그리고 그들의 삶이 금욕적이었으며 그 나라를 위한 준비로서 정결과 토라연구를 중점적으로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분명하게 서자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예레미야 31장 31, 33절 등과 상통하며 시편 51편 10-13절과도 관련이 있다. 처음 것은 새 계약의 때의 약속으로 그 표를 가슴에 새겨줄 그날이 표지이며 시편은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고 빗나갔던 자가 하나님께 되돌아올 날에 대한 약속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회개와 세례를 불가분의 것으로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세네파에서 시행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것은 낡은 삶을 매장하고 새로 난다는 사실을 의식화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의 경우를 보자.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회개와 세례를 세례 요한처럼 직결시키지는 않았다. 예수가 세례를 받는 데 대해서 이론이 많으나 그가 세례를 죄에서의 회개와 연결시킨 흔적은 없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시킨 회개운동에 가담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상 예수의 선포의 초점이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 있었는 데도 공관서에는 어디에도 예수가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자들을 파견할 때에도 귀신을 쫓는 것 등의 권능(이것은 바로 낡은 에온의 종말을 행동으로 선포하는 표시다)과 그 나라의 도래를 선포할 것을 명했으나 세례를 명한 일은 없다. 단지 마태에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만민에게 세례를 줄 것을 명하는데(28:19)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일찍부터 세례를 주는 것을 그리스도 공동체에 들어서는 표지로 사용한 흔적이다. 그런 증거로는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지방에 머물면서 세례를 주었다는 보도가 있어(3:22 이하) 혼선을 빛게 하는데 4장에서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이었습니다"라는 삽입구가 말하듯이 그것은 초대 교회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면 예수에게 있어서 회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자료 상으로 판단하는 대로 세례 요한처럼 윤리적 죄에 대한 참회나 후회 또는 배상 따위를 의미하는가?
누가복음의 이해에 따르면 그러한 면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있다. 가령 그의 특수자료인 부자와 나사로의 얘기에서(16:19 이하) 나사로를 천대하던 부자가 "아브라함이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30절)고 한 것은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후회, 참회, 개전의 정 같은 뜻이 있을 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는 상관이 없다. 누가의 특수자료인 빌라도에 의해 희생의 제물이 된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질문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의 운명을 질문할 때 예수는 저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있어서 그런 비운을 당한 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을 암시하는 것으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13:3-5) 한 것은 역시 위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5장 32절을 그 병행구들과 비교하면 이런 누가의 경향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누가에는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구절이 끝에 있는데 이것은 마가나 마태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의 편집구다.
이같은 누가의 이해가 예수의 입장을 대변했는가? 그렇다면 구약이나 세례 요한의 경우와 대동소이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직결시킨 회개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 까닭은 위에 예를 든 누가의 특수자료에서 말한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기존질서에서의 범죄와 관계가 있는 것 뿐이다.
예수는 회개와 결부시켜서 어떤 '열매'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것에 참여할 조건으로 회개를 결부시키지 않은 경우가 압도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뜻하는 '죄'라는 의미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들의 설교의 축복은 하나님의 나라로 문을 연다. 그런데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로 시작되며 그 다음의 것도 꼭같은 것인데 요는 그 중간에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가난한 자는 회개하면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다'라는 따위의 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른바 죄인들과 사귀고 그들과 아무 간격 없는 친구로 식탁을 함께 하는데 그 사이에 어떤 윤리적인 의미의 회개 따위를 조건으로 했거나 맹세를 시키는 경우가 전혀 없다. 한 가지만 더 상기한다면 대표적인 비유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들면 족하다. 거기 어디 이른바 윤리적인 의미의 참회나 뉘우침을 조건으로 한 흔적이 있는가? 없다. 그러면 정말 아무런 조건도 없는가? 있다. 무엇인가? 그것은 방향 전환하는 일이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이같은 사실을 잔치 초대의 비유는 분명하고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눅 14:15 이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인데, 어떤 사람이 성대한 만찬회를 베풀고 만찬시간이 되자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라는 초청을 미리 예고한 자들에게 보냈다. 다드(C.H. Dodd)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는 바로 '하나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시오'와 꼭같은 뜻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내용상 그대로 적중한 말이다. 초청된 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물 때문에 그 초청에 자기를 폐쇄했다. 이에 대해서 빈 만찬회 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에서 아무나 초대해서 응한 사람들은 그 만찬회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할 일이란 그 초청에 자신을 개방한 것 뿐이다. 그러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못하는 데 죄를 묻는다면 그 새 나라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이고 회개란 바로 그 새 날에 대해서 자신을 개방한 것이 된다.
예수에게서 회개란 희랍어 metanoia의 본래 뜻처럼 뒤늦게(meta) 인식한다(novs)는 어원에서 보듯이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든지 윤리적으로 다른 마음을 가진 것을 알고 후회한다는 등의 지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존 질서에 어긋났다는 뜻에서의 범죄를 속죄한다는 뜻도 아니고,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의 도래 앞에서 전적인 존재적 전환, 즉 '돌아 앞으로 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심판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단 여하에서 낡은 세계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느냐 아니면 새 세계에 참여하느냐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회개란 결코 기존 가치체제—그것이 도덕이든, 율법이든—에 다시 돌아와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정착해서 안 될 것에 정착하여 거기서 보장을 구하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공관서에 명사로 된 metanoia가 겨우 세 번 쓰여졌을 뿐 그 밖에 14회는 그 동사인 metanoeo가 쓰여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누가복음에서 기존 윤리적 범주에서 회개를 이해한 것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수관계에 있다. 마가에는 그 나라의 임박성이 강조되었다. 우리가 '가까왔다(enggiken)'로 번역한 것은 차라리 '태동한다'고 하면 그 의미가 더 실감이 날 것이다. 마태에는 예수가 제자를 파견할 때에 그들이 이스라엘의 도시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10:23)라고 전한다(참조. 막 13:30). 그런데 누가는 이와 다르다. 우선 마가나 마태의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이 없다. 그 대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한다(8:1; 9:2; 9:60). 이것은 가까왔다는 말과 비교하면 현재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특수자료인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 얘기에 '현재성'이 밝혀졌다. 그것은 종말을 앞둔 '구원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것은 콘첼만의 정의대로 중간시대다. 그는 이미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묵시문학적인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에 대한 예민성을 무디게 하고 관심을 현재에 돌린다(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생각했기 때문[19:11]이라는 주에 주목). 그러므로 그의 회개의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울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사유로써 회개의 뜻이 달라졌다. 우선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거의 후퇴하고 가끔 사용되나 벌써 공관서적 의미가 아닌 퇴색한 것이 되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의가 그와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의란 구원의 조건이다(롬 1:7; 갈 3:11). 그런데 의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점은 유대 전통과 같다. 그러나 어떤 의냐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정면 충돌된다. 유대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됨으로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믿는 데 대해서 바울은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롬 10:10). 그러한 철저한 주장은 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현재화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후 5:21). 그러므로 대담하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하는 종말적 현재의 구원을 선포한다. 기한이 차서 예수가 왔고(갈 4:4) 그러므로 "보시오, 지금은 은혜의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라고 선포한다.
이상에서 분명해진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적 구원의 때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종말적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회개라는 자리에 '믿음'이 큰 비중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 구원의 때를 믿는 것이 의롭게 되는 조건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바울에게는 죄라는 것은 윤리나 율법의 상반 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상반 개념이 되었다. 즉 죄란 바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면 그는 낡은 의미의 죄 개념을 그대로 쓴다.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의의 세계를 거부하는 폐쇄적 인간들의 죄상을 폭로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 개념을 바울은 회개와 결부시키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로마서의 초반은 가장 극렬한 죄에 대한 공격으로 유명하다. 그 비판은 당시의 상류층의 죄악상이 그대로 폭로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윤리나 법을 알면서도 침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런 일 행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자기도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여,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까. 당신의 완고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날 그 진노의 날에 당신이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는 셈입니다"(롬 2:3-5). 이상의 냉혹한 비판은 종말사상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유대교처럼 심판이고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직결되지 않는다. 또 회개도 그것은 오고 있는 새 세계와 직결시키지 않고 낡은 선악의 규범에서 하는 말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편지는 음란을 위시한 모든 죄를 사정없이 비판했다. 그로 인해서 저들에게 변화가 온 후의 편지인 고린도후서에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 아파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마음 아파함으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7:9). 결국 회개란 선악과의 철저한 단절 또는 낡은 우상을 섬기는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상태에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살전 1:9-10).
이상에서 공관서의 예수와 바울 사이에 회개라는 뜻이 전적으로 다른 까닭을 지적했다. 바울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나 누가와도 차이가 있음도 언급했다. 그런데 달라진 이유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서 왔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공관서(예수)와 바울은 본질적으로 다른 방향을 취했다고 이해하면 잘못된 것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바울이 말한 회개도 종말론적 입장에서 파생됐는데 하나님의 나라 도래도 결국 종말을 뜻하기 때문에 거기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바울은 기존(과거) 질서와의 관계에서 죄를 규정하고 그 전제에서 회개를 촉구한 데 대해서 예수는 철저히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그럼 만일에 예수에게서 회개 않은 상태 즉 죄의 상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도래하는 새 나라에 대한 폐쇄상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득권(낡은 것)에 집착하여 그것에서 삶의 보장을 찾으려는 자세다. 예수 시대의 지배층을 안중에 둔 듯한 많은 비유 중 가령 탕자의 비유의 맏아들, 만찬회 초대 비유에서 초대를 거부한 무리들이 바로 그런 부류들이다. 저들은 모두 새 것에 대한 공포증에 걸린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회개한 자란 자명적이다. 그것은 낡은 것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새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에게 이와 유사한 개념이 없나? 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과거에서 탈출해서 미래에로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이 기본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주저없이 내세우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그가 믿는 자의 상태를 뒤의 것을 잊고 앞을 향해 달음박질한다는 말(빌 3:13)은 '회개'와 상통한다.
회개나 믿음이 종말론적 역사관에서 파악된다고 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신약에는 종말관에 약간의 차가 있다. 그것은 그 나라가 임박했다는 순수 미래적 차원에 오고 있는 것(the comming)에 초점을 맞춘 경우(마가)와 그 나라를 구원이라고 파악하고 지금은 이미 구원의 때(누가)라고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그 종말사건은 이미 예수에게 시작이 되어 이미 새 역사의 장으로 접어들었다는 확신과 그러나 종국은 아직 아니라는 입장(바울)도 있다. 이에 따라서 회개나 믿음의 의미가 약간씩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믿음이거나 회개거나 그것은 오직 역사의식과 직결된 것이라는 시실에는 아무런 이론도 있을 수 없다. 가령 한국 교회는 회개를 촉구하는 데는 어떤 민족의 교회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회개를 말하느냐가 문제다. 가령 도둑질하는 자, 방탕한 자 등등에게 회개하라고 할 때 도둑질하지 말고 방탕하지 않는 게 회개다. 한 걸음 나가서 교회에 나오면 만 점이다. 이따위 생각에 머물면 그것은 잘해서 협박으로 사용한 바울의 회개의 의미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가 뜻하는 회개와는 상관이 없다. 까닭은 거기에는 역사의식이 깡그리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촉구는 비단 그리스도교회만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이론 도덕도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일수록 도덕적 강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역사의식이 결여된 복음주의치고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또 그런 기대는 불가능하다.
예수는 인간들이 천기의 기상도는 구별하면서 때(역사)를 볼 줄 모르는 것을 비판했다(눅 12 :54 이하). 바로 이것이 참 의미의 죄의 온상이다. 또는 그날이 갑자기 온다는 것을 거듭 경고하면서 구체적 표적을 기대하는 자들을 오히려 책망했다. 그 책망은 당연하다.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서 산다. 그는 기상도를 관찰하듯이 역사의 지평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자신을 심판할 의무와 능력이 있다. 딴 말로 하면 인간은 역사적인 죄를 알고 그것에서의 회개를 알 때만이 회개의 의미가 단순히 수신(修身) 같은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러한 성서적 의미의 회개에 철저해서 과거를 회상한다면 과거는 다 빼고라도 4ᆞ19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죄를 철저히 의식하고 그것에 따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런 회개를 모르고 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오늘날도 여전히 강조하는 회개의 촉구의 결과가 어떤 꼴인가를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회개를 종말적 즉 역사의식에서 한다면 지금 어떤 사건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으며 그런 현장에서 내가 어떤 위치를 고집하는지에 대한 맹성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동시에 현재에 안주하는 타성에서 오고 있는 새 나라에 초점을 두고 그 미래에 거점을 두고 현재를 거스릴 때만이 참 의미의 회개의 행동화가 될 것이다.
(『기독교사상』, 197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