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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이중 계명의 의미
(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34)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지상 명령임을 집약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할 것은 이 두 과제가 어떻게 병행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교와 윤리생활의 관계인데 우리는 흔히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이해에 따라서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게 되거나 또는 둘이 완전히 분리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상충될 수도 있는 일이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이웃 사랑을 계율로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율법으로 바꾸어 가짐으로써 둘은 완전히 분립되어 각각 독립된 의무로 되어 버렸다.

따라서 하나님을 공경(사랑)한다는 일은 제사 의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집중함으로 점차 성전 중심의 임무 수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완전히 둘을 분리시킬 때에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아 그것을 절대화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절대화할 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오히려 유린할 수 있으며 그런 자기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럼 예수는 이 관계를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세 복음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추구해 보기로 하자.

1. 본문의 비교 분석

위에 적은 세 복음의 기록을 비교하면 약간씩 다른 것이 있다.

(1) 마가와 마태에 의하면 그 전에 예수가 사두개인의 부활 이후의 삶에 관한 대화가 있은 것을 전제로 하고 유대 율법 선생이(마태는 율법사, 마가는 서기관) 예수에게 율법의 계명에 관해서 묻는 데 대해서 누가에는 그런 전제가 없이 완전히 독립된 얘기로 기록되어 있다.

(2) 마가나 마태에서 묻는 자는 어떠한 경의도 보이지 않고 참 알고 싶어하는 물음으로 보이며(마태에는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라는 말을 더 붙여서 예수에게 대항하는 듯한 인상을 주나 대화에서는 전혀 그러한 반영이 없다), 그 대화에서 랍비는 예수에게 전적으로 공명하는 인상을 주는 데 대해서 누가에는 '시험한다'라는 말로 어떤 경의를 품은 듯한 표시를 한다. 그러나 대화의 과정에서는 논쟁적인 것은 없고 오히려 공명하는 '무드'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마가의 33-34절에서 보는 두 사이의 적극적인 동의를 나타내는 부분을 빼버렸는지 모른다(K.L. Schmidt). 하여간 '시험한다'(πειράζων)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서 이미 그로티우스(Grotius) 같은 사람은 적극적인 목적을 위한 시험이라고 고쳐 읽으려고 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렇게 보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T.W. Manson).

(3) 마가와 마태에서는 율법상의 문제(Schema)로서 묻는 데 대해서 누가에서는 '영원한 삶'을 위해서 묻는다.

(4) 마가나 마태에서는 두 계명을 예수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누가에서는 묻는 자 자신의 입으로 대답하게 한다.

이상에서 보면 마가와 마태는 누가에 대해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마가와 누가가 마태에 대해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마태는 결론에서 "이 두 계명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대해서 마가는 묻는 자의 입을 통해서 "이 두 계명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는 말이 있고 누가에는 이 대화 뒤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따른다. 그런데 이 마가의 기록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공통점이 있다(뒤에서 다시 언급). 그럼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2. 율법에 대한 태도

위에서 본 세 복음의 차이점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율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오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가 문제되었다. 저들은 365항의 금계와 248항의 계명을 꼭같은 비중으로 준수해야 할 의무를 가졌으나 그것들이 구체적인 경우에 상충되거나 둘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는 경우를 거듭 체험함으로써 모든 계율을 꼭같이 지켜야 할 것인지 또는 그 중에 크고 작은 것, 중하고 가벼운 것을 구분해서 순위로 지킬 것인지 또는 전체를 일관하는 어떤 '강령'을 찾아 그것을 원칙으로 판단할 것인지를 문제로 했다. 힐렐(Hillel)이나 필로(Philo) 등은 어떤 '강령'을 모색했다. 그래서 힐렐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전체 토라(율법)이며 다른 것(계명)은 이것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유대교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저들이 비록 중하고 가벼운 것, 크고 작은 것을 구분했다고 하나 '필요', '불필요'라고 본 것은 아니다. 그 어느 계명도 꼭같은 약속과 벌에 결부돼 있는 것이며 어느 하나를 범하는 것은 율법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가벼운 계명도 범하면 중한 계명을 범하게 된 것을 거듭 경고 했다(Strack­Billerbeck, 1권, 900면 이하 참조). 유대교에서는 바울의 말대로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범하면 벌써 모든 계명을 범한 것과 동일하다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유대교의 율법 이해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어떤가?

우선 마태에서 우리는 힐렐 등에서 보는 형식인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라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러한 마태의 이해는 5장 17절, 7장 12절 등에도 있는 데 누가나 마가에는 없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것은 마태는 마가의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라는 물음을 '율법 중에 큰 계명'이라고 바꾸고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라는 것 대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

마가는 'πρώτη πάντων'과 'μείζων … ούκ ἔστιv'(31절)으로 이 두 계명의 절대 우위를 표시하고 있는데(E. Klostermann, Lohmeyer, T.W. Manson) 마태는 단순이 큰(μεγάλη) 계명이라고 한다. 이것으로써 마태의 대율법 태도는 그 윤곽을 보이고 있다. 마태는 어느 복음 기자보다 율법의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음은 5장 17절 이하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마가에서 보는 바와 같은 분명한 표현을 피한 것은 유대 율법자들이 염려한 것과 같이 다른 부분적인 개개의 계명은 소홀히 해도 좋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였을는지 모른다. 이러한 우리의 상상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우리말로 '강령'이라고 번역된 κρέματι의 뜻이다. 이 말은 영어에서 'hangs'로 번역된 말로서 '달려 있다'라는 뜻이다. "그의 생명은 그 아들의 생명에 달려 있다."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뜻으로 쓰는데 그럴 때에 아들의 생명이 없으면 그의 생명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뜻이다(Lohmeyer). 또는 "문은 문설 주에 달려 있다"(W. Bauer)라는 뜻인데 이런 경우 문은 문설주 없으면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 된다. 마태에 의하면 모든 율법은 이 두 계명이 성취됨으로써 비로소 참 산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 사랑의 계명은 율법의 기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는 그것은 곧 율법의 해석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G. Barth). 그러나 마태는 이 계명만 지키면 다른 부분적인 계율은 소홀히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5장 17절 이하에서 보는 대로 마태는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다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누가는 그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누가는 율법의 구속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는 마태와 원칙적으로 같다. 그러나 율법은 유대 민족사와 함께 그 구속사적 의미는 예수에서 완성됨으로써 그 끝을 보았다는 것이다(누가의 대율법관은 누가 신학 연구의 결정판으로 평가되어 있는 H.Conzelmann의 Die Mitte der Zeit, 1960에서 특히 146면 이하를 참조).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는 그리스도교회에 직접적인 의미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예수의 출현과 더불어 그 임무를 다한 것이 된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누가의 특수 자료)에서 보는 대로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과거'로 되어 버린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누가의 본문을 보면 우선 다른 두 복음에 공통된 계명이란 말(ἐντολή)을 율법(γόμος)이라고 바꿈으로써 그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으며(Conzelmann) 율법 자체의 문제를 영원한 삶의 문제로 바꾸어 버리고 또 율법의 내용도 묻는 자로 대답하게 한 것 등은 예수를 율법 해석자로 나타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마가에는 대율법 문제에 대해서 뚜렷한 반영이 안 보인다. 마가에는 서슴지 않고 후기 유대교의 쉐마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하는 신앙고백형을 그대로 인용하며(이스라엘아 들으라 … 누가, 마태에는 없음) 서기관으로 하여금 예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하는가 하면 예수로 하여금 그의 대답을 칭찬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율법이나 유대교에 대한 고정된 신학적인 입장을 안 가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사실상 마가에서 문제의 초점은 과거와의 관계보다는 오고 있는 미래 즉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마가에는 단순하나 명료한 율법관이 표시되어 있다. 33절에 사랑의 계명을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묻는 자로 하여금 단정하게 함으로써 성전을 중심한 제사 의식적 온갖 계명을 사랑의 계명과 대립시키고 있다(이 구절은 호세아 6장 6절에 있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교에 있어서 사랑(ἔλεος)과 제사적 임무(θυδία)를 대립시킨 것은 아니다). 마가에 보이는 이러한 뜻은 누가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뚜렷해진다. 우선 거기 등장하는 인물로서 레위인과 제사장은 '번제물과 제물'(θυδία)의 상징처럼 되어 있고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ἔλεος)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만일에 레위기 21장의 제사적 계율(제사장은 죽은 자를 만지지 말라) 때문에 그대로 지나갔다면 제사적 계율을 하나님께 향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과 분리시켜서 제일 큰 계명으로 선택한 것이 되며 사마리아인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지상의 의무로 한 것이 된다.

3. 이중 계명의 의미

다음에 이상의 고찰을 반영시키면서 이 두 계명을 말씀한 예수의 참 뜻이 무엇이며 어떤 특수성이 있느냐 하는 것을 물어 보기로 하자.

우선 주목할 것은 예수는 새로운 계명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두 계명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이 대답 자체로서는 별 새로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마가나 마태에서 '큰' 또는 '첫째' 계명(단수)을 물었는데 예수는 두 계명을 함께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신명기, 레위기에 따로 있는 이 두 계명을 함께 대답했다는 이 사실에 어떤 특수한 뜻이 있는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을 함께 나열한다는 것 자체는 예수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벌써 유대교에서 이 두 계명을 함께 취급한 예가 많다(Strack-Billerbeck 참조). 그렇기 때문에 유대 학자들은 이 예수의 대답에 어떤 새로운 것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만일 유대의 어떤 율법사에게 첫째 또는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 두 계명을 함께 대답하게 돼 있지는 않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교육적인 목적으로 이 둘을 나열했을 뿐이고(G. Bornkamm, Lohmeyer) 이 두 계명은 근본적으로 각각 독립된 계명이다(O. Michel). 이 말은 이웃 사랑의 계명과 관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가 한 계명을 묻는데 두 계명을 함께 말한 것은 이 두 계명이 유리될 수 없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Bultmann, Klosetrmann). 다시 말하면 어느 하나를 빼고 다른 하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계명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계명이면서 하나다. 이런 뜻에서 마가는 두 계명을 말하고 결론에 한 계명으로 묶어 이보다 더 큰 계명이(단수) 없다고 하며 마태는 그 뜻을 받아 '그와 같으니'(ὁμοία)라는 말로 그 동질성을 나타내며 누가는 구별없이 '그리고'(καί)로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웃과의 관계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직통로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얼마든지 보며 이것은 중요한 새로운 사실이다. 형제와의 관계의 해결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죄란 있을 수 없으며(주기도문) 형제와의 화해 없이 하나님께 직통하는 기도도(막 11:25) 제사(예배)도(마 5 :23-24) 있을 수 없다.

이상에서 예수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적어도 유대교의 제사 의식적인 계율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된다.

마태는 이 두 계명을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뜻이 만일에 이 두 계명이 율법의 모든 계명을 통일, 조화하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예수의 뜻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 두 계명을 직결시킴으로써 제사 의식적 계율과의 충돌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말을 모든 율법의 계율의 참 뜻을 가려내는 시금석이라고 이해하면 예수의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계명에 부합되지 않거나 또는 이 계명과 상충되는 계명은 무의미하며 거부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때에 가능하고 지극히 작은 율법 하나라도 다 준수해야 한다는 전제를 고집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본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오히려 마가의 제사 의식적 계율이냐 또는 사랑의 계명이냐에서 사랑의 계명의 우위성을 말한 것이 누가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더불어 예수의 근본 입장을 바로 밝힌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예수는 고난당하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저없이 율법의 제자 의식적인 계명을 파기한 예가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이 유대 율법주의자들과의 충돌의 이유였던 것이다.

4. 결론

끝으로 위의 이해를 중심하여 그것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살피기로 하자. 이웃과의 관계의 옳은 해결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향하는 길이 예수에게서 차단되었다면 이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체 신비주의적 요소는 그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사람에게는 역사 즉 이웃과의 관계를 초연한 어떤 황홀한 경지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 또는 예배, 나아가서는 교회생활에 관련된 경건주의 같은 것을 반성할 수밖에 없다.

예배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인가? 그런데 그 예배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는 일과 직결되어 있는가? 없다면 유대교의 제사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기도란 하나님과 통하려는 길인가? 그렇다면 산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찾아 마주 앉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기도의 내용이 언제나 내 이웃과의 관계에 직결된 문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에서 삶을 하자는 것인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다는 일과 내 이웃과의 화해가 동시적인 일이 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의 마술적인 기능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길이 없다는 말은 이웃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께의 직통로는 없기 때문이다. 예배도 기도도 신앙마저도 하나님과 나와의 직통로일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직통로가 없다는 말은 이웃 사랑을 유린해도 좋은 어떤 '공의'도 없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와 원수를 맺는다"—이런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로서 모든 종교와 더불어 기독교가 저지른 이중 계명에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을 사랑했으면 형제를 사랑했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일은 형제를 사랑하는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이 뜻을 유린하면서 '의'를 내세운다. 사실은 이런 일은 형제를 짓밟음으로써 하나님을 짓밟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은 현금의 기독교 안에서 여전히 빚어지고 있다. 그것은 소위 독실한 신자의 경우에 더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저들은 예배, 기도 등 교회생활에 철저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형제를 규탄하고 정죄하는 일에 빠르며 가정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파란을 이루되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는 방패로 정당화한다. 저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길이 형제를 사랑한다는 일과 분리되지 않고 동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사상』, 196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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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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