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규정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확정할 수 없으나 안식일의 의미는 여러 가지 변동이 있었다. 원래 안식일은 야웨를 위한 축제의 날이다(출 20:10). 그런데 그 축제의 뜻은 변동이 있었다. 신명기 5장 15절 등에서 보면 애굽에서 탈출시킨 '야웨'를 기념하는 뜻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출애굽 31장 13, 17절, 에스겔 20장 12, 20절 등에서는 '야웨'와의 언약의 표로 삼고 있으며 출애굽 20장 11절, 31장 17절 등에서는 창세기 2장 1-3절의 '야웨'의 창조의 마지막의 안식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포로시대에 와서 할례와 더불어 안식일은 '쉰다'는 뜻에 절대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방인 사이에서 유대인의 신앙의 고백의 표현이기도 했다(렘 17:21-22; 58 :13 등, E. Kutsch).
안식일은 철저히 쉬어야 한다는 계율은 점점 엄격해서 이것을 어기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며 죽음에 해당되었다(출 31:14). 이러한 안식일의 계율이 점점 세분화되어 마침내 그 본래의 뜻은 도외시되고 의식화되어 쉰다는 뜻은 뒤집혀서 유대인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돼 버렸다. 가령 본문과 관련된 조항을 본다면, 안식일에는 병도 고칠 수 없다. 그러나 거기 예외율이 부가됐다. 그것은 그 병이 생명에 위험한 경우에는 치료해도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병이 생명에 위험한 병인지 규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모든 병을 다 포괄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사람이 죽고 안 죽는 것을 고려하기보다는 오직 안식일 계율이 허락하느냐 않느냐에서 모든 것을 결정돼야 했다. 이 말은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킨다는 일이 고통을 받는 이웃을 돕는다는 일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이 예수의 안식일 해석은 율법주의적 의식 종교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Lohmeyer) 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보여 주고 있다.
(1) 세 복음은 이 안식일 논쟁을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발단된 안식일 논쟁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세 복음은 때에 대해서 약간씩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누가는 이 논쟁은 위의 논쟁과 다른 안식(ἐτερω), 안식일에 일어난 일로 서술하고 마태는 '거기를 떠나서'라는 서술로 그와 같은 날에 일어난 것을 나타냄으로써(Schmidt) 전기적(傳記的)인 서술법을 쓰고 있는데(마태는 '거기'라는 말인 ἐκείθεν(12회)과 '떠난다'라는 'μεταβαίγείνειν'(15회) 말로 전기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원래 마가가 쓴 'πάλιν' 즉 '다시' 또는 '그리고'라는 단어에는 시간적인 표시가 없다. 그런고로 이 두 논쟁의 연결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테마적인 것이다.
(2) 이 장면의 서술법을 보면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 자체를 역사적으로 보도할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유대 율법주의자들 간의 안식일 이해의 차이를 보이므로 예수로 하여금 유대교의 의식주의를 심판하고 있음을 보도하는 것이 목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증거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 장면을 전혀 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니 한편 손마른 자가 그 병을 고쳐 달라는 말도 없고 또 그 주위의 군중도 또 예수의 동반인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이기보다는 테마적인 서술임을 말한다(Klostermann).
(3) 마태는 적대자들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허락돼 있느냐를 묻게 하며, 또 예수의 대답에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구해내지 않느냐는 물음을 첨가하고 있는데, 마가나 누가에는 없는 마태적인 변동이다(G. Barth, Bultmann). '양이 구덩이에' 운운은 원래 Q에 속한 말로서 누가에서는 다른 관련에 쓰고 있는데(14:5) 누가의 것이 본래적인 위치다(G. Barth, T.W. Manson). 마태는 여기서도 유대적 계율과 예수의 말이나 행위 사이의 정면적인 충돌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왜냐하면 적대자들의 질문은 유대교 안에서 이미 제기된 질문이고 예수의 대답으로 된 첨가 구절은 유대교 안에서 허락된 것이고 문제가 될 것이 못된다. 여기서 문제점은 그러한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가의 표현대로 바로 한편 손마른 이 사람(αὐτόν) 같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 허락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 전통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질 수 있듯이 생명에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환자는 고치는 것은 허락되어 있는데 이 사람의 병은 생명의 위험은 없으니 안식일에 고칠 수는 없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4) 마가는 5절a "저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에서 예수의 격분을 표현하고 있는데 마태나 누가는 이 구절을 삭제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은 그리스도론적인 반성에 의해서 너무나 인간 감정적인 묘사는 점차 후퇴된 데 속하는 것인데 마가의 그 묘사는 예수가 그 적대자들의 어떤 점을 심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5) 적대자에 대한 서술이 약간씩 다르다. 누가에는 처음부터 그 적대자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있는 데 대해서 마가나 마태에는 처음에는 그것을 밝히고 있지 않고 끝에 가서 나타난다. 그러나 반면에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바라새인들이 헤롯당과 야합해서 예수를 죽일 일을 공모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는 누가와 함께 헤롯당을 등장시키지 않고 있다. 마가의 서술에 의하면 이 논쟁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는 최종적인 계기로 삼았다고 보여진다. 그 까닭은 2장부터 시작되는 다섯 가지 가장 중요한 논쟁(죄 사하는 권리 문제, 죄인을 용납하는 문제, 금식, 그리고 안식일 문제) 끝에 헤롯당을 등장시킨 것을 볼 때 그렇다(Schniewind). 이러한 이해가 옳은 것이라면 이 논쟁은 예수의 초기 활동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후기에 속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Dibelius, 마가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야합 것을 자주 전한다. 6:14 이하; 8:15; 12:13). 그런데 누가에는 헤롯 자신을 예수를 심판한 장본인의 하나로 보도(23:6 이하; 누가의 특수자료)하여 예수도 헤롯을 여우라고 하는 극단적인 비난을 한 것을 특수 자료로 보도하면서도 헤롯당이란 것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마태도 22장 16절에 단 한 번 마가의 것을 답습해서 헤롯당을 언급하나 그 외에는 없으며 마가복음 8장 15절의 헤롯당 대신 사두개인을 대치시키고 있다. 사실상 헤롯당이란 역사 기록에 보도된 데가 없으며 있다면 헤롯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일 것이다(헤롯당에 대해서는 Lake-Jackson, Beginnings of Christianity I, S.119). 그렇기 때문에 누가는 헤롯당이란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마태도 한 번 외에는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처럼 요약된다. 이 기사는 역사적인 서술이기보다는 유대교와 예수 간의 안식일 해석의 차이를 테마로 한 것이며 이 보도의 대상은 유대교 율법주의자로서 그들로부터의 방위가 아니라 저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마태에서 보는 것 같은 유대교에서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에게 보는 대로 유대교와의 대결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활동의 후기에 속한 것이며 이 기사의 초점은 마가복음 3장 4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안식일 해석은 간단한 반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 예수는 자주 반문으로써 그의 태도를 밝혔는데 물음은 벌써 대답을 결정짓고 들어가는 것이다. "안식일에 선을 하는 일과 악을 하는 일, 생명을 구하는 일과 죽이는 일, 어느 것이 옳으냐?" "살린다 또는 죽인다"의 구절을 빼버렸으며 누가에는 '죽인다'(ἀποκτείνω) 대신에 '멸한다'(ἀπολλυμι)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그 병 자체가 곧 이 날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견지에서 온 수정일 것이다. 이 질문 자체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안식일 계율의 의식적(종교적 예배적인 뜻이 포함된)인 면을 전혀 도외시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선이냐 악이냐 사람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라는 질문은 원칙적으로 허락돼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법으로서의 계율을 도외시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서 허락돼 있느냐 또는 허락돼 있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마 12:10 참조). 저들에게는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에서 그것이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질문은 이웃이라는 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마주서게 한다. 이웃이 아무리 정당한 도움을 요구해도 또는 내가 아무리 저를 도와주어야 할 것을 느껴도 그 자체로서 결행할 수 없고 율법에서 최후의 대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를 도와준 대도 그 이웃은 내가 율법을 준행하기 위한 매개물로 전락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선을 하느냐 악을 하느냐와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을 병행시킴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선, 악이 결정됨을 말하고 있다. 소박한 표현으로 하면 안식일에 대한 종교적인 질문에서 윤리적인 질문으로 바뀌어졌다. 이 말은 의식적 율법주의적인 복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본 유대인들에 대해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어졌다는 말이다. 하여간 이러한 질문으로 예수는 율법의 의식적 제사적인 의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안식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한다'에서 그 의미를 찾음으로 안식일의 재래적인 해석을 뒤엎어 놓았다. 여기서 예수는 안식일에 쉰다는 것을 '무위'라고 보지 않고 안식일에도 선을 하느냐 악을 하느냐, 사람을 살리느냐 사람을 죽이느냐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 있으며, 해야 하며, 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불트만의 해석대로 예수에게는 '무위'란 없으며 '거룩한 무위' 마저도 그 자리가 없다. 사람에게는 중립적 순간이란 허락되어 있지 않다.
사람을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는 중간적인 입장이란 예수에게는 없다. 살릴 수 있는 입장에서 살리지 않는 것은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라 죽이는 행위와 같다. '유대인들은 하지 않는다'에서 사실상 이웃에 대한 임무를 묵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하지 말라'에서 '하라'로 바꿈으로 '하지 말라'의 본래의 뜻을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입장을 요한복음에서는 극단화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가 안식일에 병고침을 고소할 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게 한다.
이러한 예수의 말은 유대교의 계율에서 금령(Verboten)과 계령(Geboten)과의 구별을 사실상 제거하고 있다. 저들이 613조의 계율 중에 약 3/5은 금령인 것은 유대교의 율법성을 나타내고 있는 데 대해서, 예수의 이러한 안식일의 이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에서 율법적인 요소를 뒤집어 엎고 있다.
예수의 이 질문은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별해서 거룩하게 하라는 유대교의 계율성을 파괴하고 있다. 선을 하느냐 악을 하느냐 사람을 살리느냐 사람을 죽이느냐라는 질문은 안식일에만 해당될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어느 날 어느 장소에 구별 없이 사람에게 부과된 질문이다. 이 말은 예수에게는 안식일의 특수 의미를 박탈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할일은 어느 특수 장소, 특수 시간이 없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 특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 문헌에는 안식일을 두 번만 율법대로 지키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안식일에 할 의무는 다른 날의 것과 유리시키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어떤 날을 구별하는 것은 일상생활과는 유리시킨다는 말이 되며, 그런 경우에는 일상생활은 안식일에 해야 할 사람의 임무를 소홀히 해도 좋다는 말이 되거나 또는 안식일에는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임무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이 된다. 사실상 유대인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특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람이 언제나 해야 할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율을 유린해야 했으며, 그러므로 언제나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위반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대해서 예수의 이 질문은 안식일의 특수성을 파기함으로써 안식일과 다른 날의 사람의 해야 할 일의 구별을 없이 했다.
이 말은 예수에게 있어서는 안식일이 어떤 의미로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매개적인 특수 의미를 박탈하고 만 것이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의 질문이 사실상 유대교의 안식일의 계율을 마비시킨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율법주의적 복종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로마이어(Lohmeyer) 등은 예수의 질문을 안식일에 내가 사람을 병에서 살리는 것이 옳으냐 또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음모하는 것이 옳으냐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이 기사는 역사적인 서술이 아니라 테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질문을 담은 '틀'과 관련 없이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며, 그렇게 볼 때 이 질문은 율법주의적 안식일 해석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Klostermann).
여기 한 구체적인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서 내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럴 때 어떤 것에나 구속되지 않은 적나라한 나는 내 힘이 자라는 한 그의 요청에 직접 마주 서서 두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 이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이웃의 요청에 직접 응하는 것을 가로 막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즉 내가 이 현실을 도피해서 판단을 받아야 할 제3의 것이 개입할 수 있다. 그 제3의 것은 내가 저를 구원하는 것이 옳은가 나쁜가를 다른 것에서 묻는 것이다. 이럴 때 그는 벌써 구체적으로 내 앞에 선 이웃에서 도피한다.
유대인의 율법이란 바로 이러한 제3의 것이 된다. 저들에게는 율법에 위반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다. 만일 저들이 율법에 위반된다는 결론을 얻으면 내 이웃을 내버린다. 만일 이 이웃을 도와주었다면 이웃의 호소에 따라 '한 것이'아니라 율법을 '지킨 것'에 불과하다. 이런 때에 율법은 내게서 이웃을 '너'로서 사랑할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지킨'다 형식의 율법적인 복종을 한다로 바꿈으로 비판한다.
'한다'는 산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한다'는 직접적인 것이고 지킨다는 언제나 간접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병에서 신음하는 자를 앞에 놓고 어느 것이 율법을 지키느냐에로 돌아가는 데 대해서 예수는 직접 마주 선 사람과 그의 요청에 직접 마주 서서 하지 거기에 어떤 율법적인 질문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그 병자를 고친 것은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에서다. 이를 살린 것인가 또는 죽일 것인가라는 질문은 율법적인 고려를 완전히 도외시한 것이고 오직 그 앞에 '너'만을 마주 선 데서 온 질문이다.
사랑! 이것은 율법이 아니다. 사랑! 그것은 오히려 율법적인 질문을 배제하고 오직 그 앞에 구체적인 이웃을 이웃에게 한 행위이다.
(『기독교사상』, 196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