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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막 10:1-22(마 19:16-22; 눅 18:18-23)
1. 본문의 위치

흔히 이 본문을 23-31절까지 포함해서 영원한 삶과 부에 대한 문제로 취급한다. 그러나 17-31절은 셋으로 구분되며 각 구분마다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17-22절까지는 율법과 관계지음으로써 참 복종이 어떤 것인지 취급되어 있고, 23-25절까지는 부에 대한 경고이고, 28-31절까지는 그의 제자되는 길과 경고로 되어 있다. 이것들에서 굳이 일관된 한 초점을 찾는다면 '참 복종'이 어떤 것이냐에 있지, 부 자체는 그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할 한 예이지, 그것으로 전체의 뜻을 규정할 수 없다. (1) 그러한 증거로는 '한 사람'이 예수께 찾아 와서 '영생'을 위해서 묻는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부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 '한 사람'에 대해서는 각 복음서가 일치한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 마태는 '청년'이라고 하고, 누가는 처음에 부자라고 하지 않고 한 ἄρχων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관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산헤드린의 대표(23 :13, 35)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바리새파의 지도자(14:1)라고도 볼 수 있다(K.H.Rengstorf). 따라서 이것은 곧 부자라는 전제가 없다. 이 '한 사람'은 영원한 삶을 추구하다가 율법을 지키라는 예수의 말에서는 자신을 표명했으나 예수의 그 다음의 요청에 응하지 못했는데 그가 이 때 예수의 요청에 복종 못한 이유로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 베드로의 질문에 뒤이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한다. 여기서 특별히 부를 버렸다는 뜻은 없고 집, 형제 자매, 모친, 자식, 그리고 전토를 버린 자 즉 무엇이든지간에 다 버리는 것을 말한다. (3) 본문 자체로 봐도 새로운 항목으로서 23절에 καὶ(또)로 시작해서 청중이 바뀌어 제자로 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시간적으로 동시적이라는 표시가 없다(누가는 마가나 마태에서 그 '한 사람'이 가버린 후에 부자에 관해서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수정해서 그가 '가버렸다'라는 구절을 빼므로 동시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에게 하는 경고와 관련시키려고 한다). 이상에서 17-22절은 독립된 자료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K.L. Schmidt, Bultmann, Loisy, Klostermann), 그럴 때에 비로소 그 대화 자체에 가로 놓여 있는 문제를 옳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율법을 지키는 일과 예수의 요구

'한 사람'이 예수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삶을 상속받을 것입니까(κληρονομήσω)라고 묻는다. 영원한 삶이란 말은 마가복음에 오직 이것이 유일한 것인데, 이것은 유대교에서 특히 다니엘 이후에 종말적인 기다림의 중요한 내용으로서 예수 당시에는 바리새파에 의해서 줄곧 추구하는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부활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었다(Lohmeyer). 사실상 그의 질문 형식 즉 "무엇을 할 것인가"는 바리새적 사고와 직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물음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1)은 이 질문 자체가 벌써 유대 전통으로서의 구원은 유대 민족 전체와 결부돼 있다는 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구원은 개개인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유대 사상의 흐름의 반영으로서 벌써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 전체와 하나님과의 계약이라는 사상이 희미해지므로 '남아 있던 참 이스라엘'이라는 사상이 대두되었고, 그러한 사상이 많은 종말적이고 배타적인 종파의 거점이며 바리새인도 '뽑힘을 받은 자'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러한 일을 말하고 있다. (2)는 율법 자체만을 고수해서는 어떠한 구원의 보장을 찾을 수 없다는 전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라고 해도 그의 질문은 다음의 이중적인 가능성이 있다. 첫째, 율법을 현실 생활에서 어떻게 이해하여 적응하느냐, 즉 그 해석의 문제이고 둘째, 율법을 넘어선 어떤 다른 삶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인데 마가의 묘사에서 보거나 또 그 묻는 자의 그 다음의 대답에서 보아 후자의 경우인 것을 나타낸다. 마가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대교에 있어서 단순히 율법의 해석을 기대하는 한 랍비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Lohmeyer) 더구나 '선한 스승이여'라는 대언(Anrede)은 유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선(ἀγαθός)이란 원래 신적인 칭호인 것이다(마태는 '선한 스승이여'라는 것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라고 바꾸어 놓았는데 그 다음 예수의 응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 마태가 '선한 스승이여'라는 대언을 피했을까 하는 것에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 그 다음의 예수의 대답인 "나를 왜 선하다고 하느냐…"가 그리스도론적인 반성에 의해서 부적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거나 둘째, 이 대화에서 예수로 하여금 율법을 지양하는 이로서가 아니라 율법의 새로운 해석자라는 한계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였을 는지 모른다). 다음 예수가 율법을 그대로 지켰다는 말에서 그가 율법 이상의 어떤 새로운 길을 예수에게 기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이 묻는 자의 기대와는 달리 단순히 십계명의 후반에 속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해야 할 율법을 그대로 제시하는 데 그친다(계명의 순서는 각 복음이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거기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은 마가는 희랍 텍스트를 따르고 마태는 히브리 텍스트를 따른 데서 온다. 단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뒤로 돌린 것은 그 묻는 자의 경우에 적응하려는 의도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Klostermann Lohmeyer]).

그런데 이러한 대답은 묻는 자에게 무의미하게 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단순한 랍비로 대했다고 해도 무엇을 물을 때는 어떤 것(Da)이 아니고 어떻게(Wie)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 대답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는 전제로서 누구나 다 아는 자명적인 것을 나열했을 뿐이다. 그런고로 이 대답은 벌써 그 묻는 자의 반응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대화의 발전을 예상한 것이 된다(Lohmeyer). 그러나 그렇게만 단순히 볼 수 없는 것은 왜 그가 그저 계명들을 그대로 나열할 바에는 토라 전체를 지키라고 하거나 또는 십계명 전체를 말하지 않고 단지 십계명의 후반만을 말했느냐 하는 것이다. 마태는 벌써 이 대답 자체에서 특수 의미를 보고 묻는 자로 하여금 "어떤 계명이냐"는 질문을 첨가함으로써 십계명의 후 반만을 지적한 의미를 간접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이웃 사랑'을 덧붙임으로써 그 뜻을 밝히고 있다.

사실상 예수가 구원이나 율법의 문제를 취급할 때에 대부분 이웃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그와 같은 예로서 산상수훈에서나 또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심판의 기준에서도 뚜렷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클라우스너(J. Klausner)는 유대교에서 있을 수 없는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보며(Jesus von Nazareth, 1952, 508-513), 브라운(Braun)도 이 사실을 주목하여 특수의미를 찾는다(Spätjüdlisch-häretischer und frühchristlicher Radikalismus, Bd 2, 61).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유의하면서 다음의 발전되는 대화를 주목할 것이다.

이 '한 사람'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이 사람 측에서 보면 그런 것쯤은 다 지켰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면 그는 확실히 구원을 위해서 율법만을 지키는 데서 확실한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전제한 물음이 된다. 율법은 구원의 길을 보장 못하니 전혀 새로운 계시를 예수에게 기대했거나 또는 유대 경건주의자들에게 흔히 있은 것처럼 모든 율법을 다 지키나 특히 어떤 율법에 더 집중해서(가령 금식, 기도 구제 등) 율법에서 요구한 이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의 전제가 전자의 경우라면 율법의 무효를 전제하는 것이 된다. 마태는 이러한 이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라는 말과 '모두'(πάντα)라는 말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예수에게서 보면 그가 나열한 계명을 유대인들이 아는 대로, 또는 그들이 지키는 대로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뜻이었다면 "그러면 족하다"라고 답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아무 새로운 것을 제공할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족한 것을 마가에 대해서 마태는 약간 달리 표현하고 있다. 마가에는 "네게 하나가 부족하다"(ἔν σε ὑστερεἲ)라고 한 데 대해서 마태는 무엇이 부족하느냐를 묻는 자의 물음에 포함시키고 예수의 말로는 "네가 온전하기를 원하면"(εἰ θέλεις τέλειος εἶναι)이라고 고쳤다. 그러면 마태는 왜 이렇게 고쳤을까? 우선 마가의 표현인 '하나'(ἕν)는 마치 십계명에서 또 하나 즉 11계명이 필요하다는 오해를 피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마태는 예수를 율법의 새 해석자로서의 완전한 이로 보는 것이고 율법을 가감하는 이로 보려고 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여기에 반영된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로는 그는 마가에서 소유를 다 팔라는 뜻을 포함한 ὅσα ἔχεις를 삭제해 버림으로써 유대교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즉 다 팔라는 말 대신에 그저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다는 것은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유대교에 있어서도 온전한 건강 생활을 위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Billerbeck).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역시 율법내에서 예수의 이 요구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가의(누가도 같은) '소유를 다 팔라'는 것은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선 극단적인 요구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은 마태에서 보는 것 같은 경건생활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고 이 요구는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는 유대적인 신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가에서의 '하나'라는 것도 의미 있던 율법에 덧붙쳐야 할 새 계명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이것은 십계명 중 첫 계명과 관련된 요구라고 보는 것이 옳다(Schniewind, Bornkamm, Klostermann, Lohmeyer 등등).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맨 처음에 "선한 선생님이여" 했을 때 그 말을 예수가 거부하면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에 반영되고 있다. 즉 처음부터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고 들어간다. 이 이해가 옳은 것이라면 참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유대교의 자세가 심판되고 있다.

정말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서 지키려는 사람에게 그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는 신념이 가능할까? 참 복종이라는 것은 복종하면 할수록 복종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그 즉석에서 "하나라는 것은 즉 네가 전체로서 부족한 것이 있다. 왜냐하면 너는 경건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위해서 내 소유를 버리려고 하지도 않으며 나와 더불어 수난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한다. 즉 그는 첫 계명 즉 하나님께 전체로 바쳐야 참 복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첫 계명은 신명기 6장에 있는 것으로서 마가에는(12:30) 다 하라는 것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즉 참 복종은 전체로 비치는 일이다. 전체로서, 복종한다는 말은 자기의 삶의 거점을 하나님의 뜻에 옮긴다는 일이다. 이런 데 대해서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켰다는 확신이 참 복종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의 삶의 거점은 자기의 소유였다. 그는 이 소유 위에 자기의 삶의 거점을 두고 그리고 영원한 삶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것에서 더 확실한 보장을 얻고 싶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돈이 많은 고로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돌아갔다고 보도하고 있다.

결국 '부족한 하나'라는 것은 지키지 못한 어떤 추가해야 할 것을 뜻함이 아니고 전체로서의 '복종'이란 말이 된다. 그런고로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 주라는 데 그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이것은 자기를 따르는 생활에서의 전향을 의미하며 그 때 비로소 참 복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라는 태도에서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는 결단을 요청받고 있다. 루터는 그의 대교리문답에서 "가장 사랑하는 하나, 그것이 그에게는 곧 그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성서에도 하나님과 맘몬들을 내세우고 둘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마 6:24 병행).

그런데 이러한 이해에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예수가 말한 율법을 다 지켰다는 그를 보고 예수가 "사랑하사"라는 구절과 관련된 것인데 마태나 누가에서는 이런 표현을 빼고 있으나 마태에는 "네가 온전하고자 하려면"이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예수는 일단 그의 현재 상태를 어떤 의미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며 그 다음의 요구는 특수한 요구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 가톨릭의 해석에서 단계적인 윤리적 요구의 근거로 삼고 있다. 즉 예수가 그의 현재 생활을 인정한 것은 일반 교인으로서 그 이상 요구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다음의 요구는 소위 '엘리트 윤리'로서 교직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교인에게는 재산의 소유를 인정하고 교회가 제시한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 대해서 교직자에게는 소유를 인정하지도 않고 결혼마저도 허락지 않는 것이다. 둘째, 위와 같은 단계적 윤리 요구를 보지 않고 일반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참 구원은 소유를 포기한 청빈생활에서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교회사상 금욕주의를 내세운 조류에서 줄곧 흐르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요구는 이 장면 외에는 한 곳도 나타나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많은 세리나 부자나 하여간 그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에게 그 재산을 다 팔아 버리라는 요구가 없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고 그리하면 비로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고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했다. 이렇게 그가 처음 요구하던 말을 반복하지 않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Lohmeyer). 여기서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요구에 응하지 못한 이유로서 그가 재물이 많았던 까닭이라고 하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격언과 관련시켰는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단 독립된 자료인데 거기에는 부의 위험성의 경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을 특수하게 취급해서 부 자체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며 이 말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데 대립되는 모든 인간적 세력과의 싸움을 위한 경고의 말씀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눅 6:24-26; 12:21; 16:15 참조). 예수는 재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부모 처자, 형제,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눅 14:26, 27; 막 8:34-37; 마 6:19-34). 요는 이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삶의 거점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 사람에게는 소유를 다 팔라고 했나! 그것은 찬(Zahn)이 말한 대로 하나의 교육적인 의도 즉 그렇게 요구함으로써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은 이미 클로스터가 지적한 대로 그 다음에 특별한 상을 약속한 것을 보면 안다. 이 요구는 그에게 향한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모든 것을 다 팔라는 말을 예수를 따르는 자, 특별히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한 제자들과의 관련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고백과 관련을 짓는다. 확실히 예수의 요구는 영생을 묻는 그에게 그 물음을 넘어선 어떤 것을 그에게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재산을 버리라 함은 그를 따르는 자(Nachfolge)로서 특별히 요청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확실히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특수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요구는 그 제자들의 특수 사명과 운명과 약속과 관련 되어 있지 엘리트의 윤리로서 요구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부를 버리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그저 나를 따르라가 앞섰을 따름이었다. 그의 제자됨은 그들의 고행주의와 상관이 없었다(Bornkamm, Campenhausen). 따라서 비록 그의 제자들에게 특수 요구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윤리적 특수 규율로 삼을 수도 없다.

3. 참 복종과 이웃사랑

끝으로 위에 언급한 문제, 왜 예수가 하필 십계명 후반 즉 오직 이웃 사랑에만 관련되는 계명만을 나열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봄으로써 전체적인 결론을 찾아보자.

우리는 위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어떻게 다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반문을 십계명 후반이 총체적으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뜻으로 이해했다면 어떻게 그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 사랑은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고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요구는 그가 이 이웃에 관계된 계명을 지켰다는 신념 자체를 심판하는 것이 된다. 그런고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일과 하나님을 복종(사랑)한다는 일은 유리돼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결부된 동시적인 일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철저히 해라. 그러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이요,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곧 우리 본문이 가르치는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중(二重) 계명 해석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참조) 이웃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곧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복종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향한 사랑이라고 볼 때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이웃 사랑을 떠나서 다른 아무런 가능성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이 말은 하나님께의 복종과 이웃 사랑은 '동시적'이라는 말이다. 동시적이란 말은 같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는 말이 되고 그런 경우 이웃이란 이 계명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물이 되므로 '이웃'은 너로서의 주체일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사랑은 하나의 기술(Technic)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웃만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이 도외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을 구체적인 너로 봄으로, 그의 요구에 전적으로 응함으로 사랑을 이루는 동시에 거기서 하나님의 요청과 복종을 경험하는 것이 예수의 요구다.

그런고로 예수가 말하는 계명으로서의 이웃 사랑이란 디알렉틱하게만 이해된다.

(『기독교사상』, 196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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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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