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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막 7:1-23; 마 15:1-20
1. 머리말

본문은 부정론(不淨論) 즉 어떤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하는 문제를 밝힌 것인데, 이것은 안식일 논쟁과 이혼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모세의 율법 내지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낸 중요한 항목이다. 원시종교에서 고도화된 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에 '부정을 탄다'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본래 그 신앙의 대상의 거룩함 앞에 깨끗함을 가져야 한다는 종교심에서 온 사상이었을 터인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위생적인 요청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교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정의 사상이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못한다든가 또는 어떤 제일(祭日)에 참여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결례법, 또는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을 금하는 일 등은 그런 것이다. 그러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독하는 것으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 소위 '부정을 탄다'와 상통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의 사상이 일반 생활에까지 확대되어 여러 경우에 자세한 규율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본문에 문제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랍비(장로)들이 선정한 구전적인 계율이나 성문화된 율법과 같은 권위를 지닌 유전(παραδὢσις)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에는 이 항목이 제외되어 있다. 그 이유는 누가가 선 상황이 이미 이러한 유대교의 유전 같은 것은 더 이상 논의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Käsemann). 마태는 마가에 있는 이 자료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구조상으로나 용어에 있어서 많은 수정을 가하고 있다. 이 사실은 마태의 상황에 있어서는 아직도 유대교 전통인 유전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원시교회에 있어서는 유대 율법 내지 유전에 대하여 통일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긍정 또는 부정의 두 갈래에서 대립되거나 그 두 사이에서 방황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제 마가의 전승과 마태의 수정을 비교함으로 원시교회의 삶의 자리를 밝히고 예수의 본래의 뜻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2. 본문 분석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1절부터 23절까지 일관성이 없다. 1-5절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제자들이 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고 묻는다. 6-13절은 그 대답인데 사실상 대답이 아니라 반문으로 되어 있다. 즉 장로의 유전은 안 지켜도 좋다든지 안 지키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너희는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느냐 반문한다. 그리고 9절부터 "또 저희들에게 말했다"(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ἲς)로 새로 시작하여 위에서 지적한 것은 구체적 예를 드는데 이러한 접속법은 마가에 있어서 대체로 다른 자료를 연결시킬 때 쓰고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원래는 8절까지가 독립된 자료라고 본다(Bultmann, Klostermann). 14-16절이 비로소 처음 질문의 대답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같은 때에 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은 "무리를 다시 불러"라는 말에서 뚜렷하며 따라서 이것은 독립된 자료인 것이다. 17-23절은 은밀히 제자들에게만 하는 재해석으로서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제자들에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마가 4:13 이하. 제자들이 깨달음이 없음을 책망하고 시작) 마가적이며, 이것은 마가에 의한 설명으로 그의 입장이 나타나 있다.

이상으로 피차에 관련이 있는 여러 자료를 한데 모아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마가가 편집한 것을 재편성함으로써 유기적이며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마태는 9절까지 '고르반'에 관한 예까지 포함해서 질문과 반문을 유기적으로 만들고 10-11절과 16-20절에서 반복을 피하고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12-14절에 딴 자료를 첨부하여 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럼 마태의 입장이 어떤 것인가를 내용상의 수정에서 보기로 하자.

(1) 마가는 유대인들이 저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다(ἀϕαιρέω) 또는 폐한다(ἀθετέω)라는 극단적인 용어를 세 차례나 쓰는 데 대해서 구체적인 예로서의 고르반의 경우 외에 또 한 번 쓰는 데는 좀 약화된 용어 '범한다'(παραβαίνω)로 바꾸었다(3절). (2) 마가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사람들의 유전'(παρὰδωσις τὢν ἀνθρώπων)이라고 쓴 데 대해 마태는 '사람들의'라는 말은 피한다. (3) 마가는 '밖에서'(ἔξωθεν)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 것을 마태는 '밖에서'를 '입에서'로 바꾸어 놓았다. (4) 마가는 십계명에 속하는 부모공경 계명을 '모세'의 말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 마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정했다. (5) 마가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악의 종목을 열 가지로 쓴 데 대해서 마태는 여섯 가지로 축소했다.

(4)와 (5)의 수정은 마태의 대율법 태도의 표명이다. 율법은 비록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유대 전통적인 경건주의에서 온 것이다. 마가에서 나열한 악덕의 종목은 로마서 1장 29-31절을 위시해서 신약에 자주 반복되는 것으로 그것은 유대적인 것이 아니라 희랍적인 것이다(Schniewind, Klostermann, 특히 로마서 1장 31절의 부주 참조). 이에 대해서 마태는 십계명 후반의 이웃과의 관계의 윤리에 준해서 변동하고 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구약적인 배려에서 온 수정이다. 이것은 마태의 대율법 보수적인 입장의 반영이다. 저는 5장 17절 이하에서 보는 대로 율법의 절대 유효를 주장하는 원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문화된 율법 아닌 구전된 유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이 유전은 모세의 율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꼭같은 권위로서 복종을 요구하는 계율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몇 개의 토라를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성문화된 토라와 구전의 토라 둘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Schamais; G.F. Moore, Judaism in the fir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I, 251 이하 참조). 따라서 구전된 계율을 거부하면 율법 전체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됐다. 그럼 그리스도교회는 이 유전을 지켜야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원시교회에 있어서 율법의 태도와 함께 문제되는 것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 유전도 거부되어 있지 않다. 가령 23장 2절에 예수의 말씀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로 인해 규정된 유전은 모세의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이니 그 유전은 다 지키라는 말이 된다. 또는 23장 23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공격하는 말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하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박하 등등의 십일조의 규정은 역시 유전에 속하는 것이다(G. Barth).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소경된 인도자라고 공격하는데 여기서 마태가 본문에 12-14절을 첨부한 뜻이 밝아진다. 14절에 바리새인들을 소경이라고 단정하여 비판하는 데 위의 말과 일치하며 그 뜻은 그들의 유전을 존중하가 때문도 또는 저들의 유전을 강요하기 때문도 아니라 유전을 지키고 율법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23장 23절을 본문과 관련시키면 바리새인들의 유전은 지키고 단지 저들의 실천 없는 것만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고려할 때 비로소 그가 왜 "사람들의 유전이란 표현을 피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음식물은 다 깨끗하다"의 마가의 구절(19)도 제거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그의 입장과 상반되는 뜻을 지닌 전승된 말씀을 아주 묵살시키지 않고 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라는 말은 유전뿐 아니라 율법에까지 저촉되는 말인데, 그는 이 말씀은 그대로 전승하면서 '밖에서'를 '입으로'로 바꾸어 놓음으로 결례법 전체에 저촉되는 것을 음식물에 국한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그래도 제단의 제물에 관한 율법, 우상 제물에 관한 율법 또는 유전에서 규정한 일상생활의 정결 계율을 유린하는 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Bornkamm, G. Barth, Käsemann, Braun). 이상의 고찰에서 마태의 입장은 유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문화된 율법의 우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임이 밝혀진다.

마태에 대해서 마가에서는 율법 자체의 권위를 수호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율법 자체를 파기해야 한다는 태도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유전을 고집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에 대한 반문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행동을 규탄한 것이 아니라 직접 유대교에 대한 비판으로 되어 있다. 손 씻는 유전은 사실상 거부하고 있으며 '고르반'의 예로써 유대 종교의 허점을 정면으로 찌르고 있으며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는 선언에서 사실상 유전 내지 율법 자체의 권위를 저촉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에 있어서는 유대교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가 아니라 모든 의식적인 율례에서 자유하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울을 위시한 헬라 교회의 입장과 같다. 마가가 대상으로 한 것은 헬라 계통의 독자인 것은 그가 처음부터 '유전'에 대한 것은 자세히 설명한 데서도 곧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 유대교의 유전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되며 또한 율법의 권위를 수호하려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어느 입장이 예수의 뜻을 보다 가깝게 전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유전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인 태도에 접근해 보자.

3. 유전과 예수

예수는 소위 혁명가는 아니다. 그는 기존한 질서나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파괴하는 이가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다. 가령 율법이나 유대교 자체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서 그러한 태도가 보인다. 그는 대화에 있어서 무조건 구약의 율법을 제시하는 일이 많았으며 또 성전이나 회당을 드나들었고 유대교 제의 절기를 지켰다. 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무조건 적대시한 것이 아니고 상당한 깊은 교류가 있은 것이 도처에 보도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통(유전)에 대해서도 예수는 처음부터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그의 교훈으로 구사하고 있다. 가령 산 위에 성이 숨기지 못한다(마 5:14), 불을 켜서 마루 아래 두는 이가 없다든지(마 5:15),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 또는 목숨을 한 자라도 더하게 할 수 없다(마 6:27)든지 하는 말은 유대의 전승된 '지혜의 말'에 속하는 것이다. 또 유대 유전의 규례인 기도, 금식, 적선 자체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제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면에 도처에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본다. 그 중에 무엇보다도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안식일 논쟁(막 3:1 이하; 눅 13:10 이하; 14:1 이하 등등)과 이 본문의 정결론과 그리고 이혼론 등에서 이러한 사실이 뚜렷이 드러나며 적어도 유대인의 눈에는 유전뿐만 아니라 율법 자체의 권위를 모독하는 행위나 발언이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 충돌은 율법이나 유전 그 자체의 권위 문제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느냐의 차이에서 온 충돌들이다. 그 해석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하면 유대교는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서 완결되었다는 전제를 가진 데서 오는 문자주의에 매어 있지 않고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어느 것이 본질적인 것인가를 지적함으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며 그들이 상충될 때에는 주저없이 바본질적인 것을 폐기한다(이 점은 불트만의 『예수』, 52-76면에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성서의 외적인(Formal)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는 처음부터 율법 또는 유전론을 제기해서 시정하려는 경우는 전혀 보도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의 공세에 대한 답변에서 또는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서 위와 같은 태도가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유전'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예수는 그의 해석에 있어서 유대인에게서 보는 것 같이 어떤 조상의 권위를 업고 들어가려는 태도는 전혀 없다는 것과 반증으로 구약의 예를 드는 경우도 있으나 그의 해석에 있어서 재래적인 해석방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예가 많다(Braun). 이러한 사실은 그는 그의 해석에서 어떤 과거의 권위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이것은 그의 패러독스다.

이상의 사실을 전제로 할 때에 마태에서 보는 것 같은 질서 정연한 전개나 또는 유전은 지켜야 한다고 못박는 것은 예수의 입장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유전론'을 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으며 또 유전을 지켜야 한다거나 안 지켜야 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마가가 자기의 신학적인 입장을 별로 반영하지 않은 예수의 말씀 자체를 수식없이 전했다는 결론이 된다. 마가에서 그의 입장을 나타냈다고 생각되는 17절 이하를 빼면 유대교에의 반문(6-8절), 유대교 비판(9-13절), 그리고 참 부정한 것이 무엇이냐(15-16절)의 가르침은 예수의 본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반문은 하나의 결단을 요구하는 판단, 즉 사람의 유전(전통)이냐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계명이냐이다. 이 반문은 너희가 사람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실상 버리는 것이 옳으냐이다.

다음에 구체적인 비판으로서 어느 것이 본질적인 것이냐를 묻고 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는 유전에 의한 의식주의가 본질적인 것이냐 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계명 자체냐? 이 질문은 너희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본질적인 것을 폐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인데, 여기서 윤리적인 명령이 의식적인 율례에 대해서 본질적인 것이며 이 둘이 상충될 때에는 의식적인 율례를 폐기해야 한다는 선언이 내포되어 있다. 끝으로 참 부정한 것은 의식적인 율례를 이행 안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에 이미 부정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깨끗함의 문제는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실존적이라는 것을 17절 이하에서 해석된 대로 윤리적인 것과 결부된 실존이다. 이러한 단정은 의식종교적인 경건주의는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전제가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말씀을 발전시키면 '죄의 규정', '사죄의 길'에 대한 유전적인 해석을 전복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의식적인 종교행위에서 부정죄 또는 깨끗한 속죄 등을 해석하는 유대교의 해석을 비판하고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는 규정되는 또 죄의 해결의 길도 열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 결론

우리는 많은 전통적인 유산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세계 기독교사에서 이어 받은 전통과 함께 우리 한국 교회사에서 형성된 전통도 이어받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을 전승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무관할 수 없다. 교회의 전통, 그 안의 직제, 예배형식, 사크라멘트, 교리, 헌금 등등 신앙생활의 전통, 기도 생활, 금식, 주일 지키는 일, 식기도 등등, 한국 교회 전통의 유산으로 새벽 기도회, 조상숭배로서 제사 배격, 제물 안 먹는 일,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기도, 술담배를 금하는 일 등등, 많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한국적인 전통이라는 것은 반드시 한국 교회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나 한국적인 상황과 개척 선교지로서 규정된 외적인 규정에 한국적인 체취가 농후하며 서구의 기독교의 대체의 흐름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다. 신앙생활의 전통이나 교회의 전통은 세계 교회의 공통된 것이나 물론 그 해석에서 차이가 많다. 하여간 이러한 일련의 전통적인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역할을 했으며 또 그것이 도움이 되는 한, 일부러 내버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유전들이 그 본래의 뜻은 상실되고 의식종교화되고 마침내 죄와 구원의 기준으로 절대화됐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서의 본래의 뜻보다도 이러한 유전이 자기의 행위나 남을 규정하는 데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는 것, 주초를 하고 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고 아닌 것의 기준이 되므로, 그런 것을 안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라고 안도하거나 남을 심판하는 기준이 될 때에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비판한 그 비판이 적중될 것이며, 기도나 헌금이나 또 신앙생활의 습관처럼 되어 있는 것도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에도 꼭 같은 바리사이즘에 빠지고 말게 된다. 한걸음 나아가서 한국 교회 안에서 흔히 있는 일로서 신조 문제 때문에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 이웃 간에 결연 또는 원수시하는 것을 마치 신앙인의 권리 또는 찬양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이 신조란 유전된 신앙생활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신조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중심적인 계명을 파기하므로 바리새인과 꼭같은 스스로를 폭로하는 것이다. 끝으로 교회에서 듣는 말씀을 이해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 말씀에 복종한다는 인식이 없이 '예배를 드린다', '헌금 드린다', '새벽기도회에 나가야 한다' 등등이 그 자체로 신앙고백이 되고 그런 것을 하고 안하는 것을 죄와 속죄와 결부시켜서 자기나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그것은 손을 씻고 안 씻는 데서 죄와 무죄를 찾는 바리새인과 꼭같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책망이 해당된다.

반면에 전통적인 유전에 대해서 어떤 적극적인 이유 없이 쇄신한다는 단순한 모토 아래 거부하는 태도로 성서의 뒷받침을 받을 수 없거니와 그것은 반항을 위한 반항에 그치고 만다. 유대교 안에서 이미 그러한 파가 있었다. 그것은 사두개파다. 저들은 일체의 전통(유전)을 거부하고 오직 성문화된 율법만을 내세웠으며 따라서 부활 사상 같은 것도 율법에 없는 사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저들은 율법을 재해석해서 거기서 다시 새로운 거점을 찾아서 얻은 결론에서 온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확실히 전통적인 유전은 절대적인 것일 수 없고 고수되어야 된다는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유전을 거부하는 길은 그저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는 데서만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사상』, 196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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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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