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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질서
마 20:1-16
1. 머리말

이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그 자체로 누구나 읽으면 곧 알 수 있는 명료한 내용이다. 이 얘기는 이 땅에서 있을 수 있는 민속적인 것이다(Bultmann). 그런데 이 비유의 해석이 구구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된 16절 때문이며 또 하나는 그 자의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어떤 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빚어낸 해석의 전통 때문이다. 이 비유에 정말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된 것이 있는가? 또 이 비유는 자의적인 것에서만은 이해되지 않는가? 우리는 먼저 그러한 것과 관련 없이 자의대로 이해해 보자.

2. 두 질서

이 비유는 '천국은 마치'로 시작된다. 즉 천국의 비유다. 무대는 포도원이다. 그러나 포도원 자체가 천국을 비유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포도원의 주인이 그 일군들에게 하는 처사를 비유로써 천국을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는 두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는 그 주인이 삯을 지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처사의 항의에 대한 주인의 답변인데 이렇게 구성된 비유는 언제나 둘째 분수령에 초점이 있다(Jeremias). 탕자의 비유(눅 15:11 이하), 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 이하), 그리고 혼인잔치의 비유(마 22:1-14) 등이 그렇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포도원 자체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는 전혀 없고 주인의 처사와 그것에 반발하는 항의와 그것을 답변하는 주인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령 탕자의 비유와 꼭같다.

유대교 묵시문학파의 천국에 대한 묘사는 극히 사변적이다. 이러한 유산을 신약의 묵시록이 받았다. 그러나 예수의 천국의 비유는 어떤 상황이나 공간적인 사변적 묘사는 전혀 없고 오직 주인과 그에 대한 사람과의 관계에만 국한한다. 이 비유에서도 이 포도원 주인이 중심이며 그의 처사와 그 처사의 뜻을 설명함으로써 천국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는 이른 아침 즉 해뜰 무렵에 품꾼들을 불렀다. 그것은 유대에서 노동자들의 상례적인 '출근 시간'이다. 그는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계약했다. 이것은 당시의 삯으로는 퍽 높은 보수다.

그 당시의 유명한 '힐렐'은 하루에 반 데나리온에 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퍽 높다. 당시에 소 한 마리가 백 데나리온, 송아지가 20, 양 한 마리가 8에서 4데나리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의 보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약속 자체에서 천국의 질서의 특수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 주인은 제 삼시(지금 시간으로 아홉시)에 장터에 나가서 '놀고 섰는 사람들'을 보고 다시 불러 들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장터는 실업자 군상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렇게 그는 다시 두 차례로 저들을 불러 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십일시(오후 다섯시)에 다시 거리로 나가 보았는데 거기에 여전이 아무것도 않고 배회하는 무리를 보고 저들을 불러 들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경우에는 특별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주인이 '왜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는가' 묻고 그 물음에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비유에서 특별히 이미 해가 저버린 시원한 때 한 시간만 일하게 된 마지막으로 온 저들에 대한 그 주인의 태도에 초점을 모으고 있음이 엿보인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른 아침에 부른 품꾼과는 확실한 계약을 체결한 데 대해서 그 다음부터는 상당한 임금을 줄 것이라는 여유 있는 약속을 하고 맨 마지막 부른 자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다음에 이 주인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주목을 끌도록 하고 있다. 일이 끝났을 때, 즉 별이 보이는 무렵에 이 주인의 처사가 주목되는데 마지막에 온 사람, 즉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불할 것을 명한다. 이러한 이 주인의 처사는 일반 경제질서에서 보면 으레 더 많이 일한 품꾼들에게는 그 노동에 해당한 더 많이 일한 품꾼들에게는 그 노동에 해당한 더 많은 분배를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일률적으로 지불하게 했다. 여기서 일반질서와 다른 딴 질서가 드러났다. 따라서 이 질서는 일반질서와 충돌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논쟁의 장면은 지금의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그것을 방불하게 한다. 15절에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과 말했다는 것을 보면 우선 먼저 와서 일한 노동자들은 현장 감독자에게 때를 지어 항의했던 것을 나타내며 현장 책임자가 혼자 처결할 수 없으니 노동자의 대표 한 사람을 뽑아서 고용주인 그 주인을 만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인의 대답은 그 항의의 입을 다물게 하고 오히려 저들의 항의를 곤경에 빠뜨림과 동시에 저들을 심판한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이 주인은 약속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았다. 만일 이 주인이 후에 온 사람들을 동정해서 처음 온 자들을 희생시켰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인은 자기 것을 희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의무와 권리의 질서 안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자기 권리만 찾아가면 될 것이고 남의 일 간섭할 권리는 없다(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주인은 그들의 항의를 거부하고 저들을 비판한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악하게 보느냐'는 원문에서는 악한 눈으로 돼 있다. 이 악한 눈이란 질투의 눈이다. 저들이 만일에 자기 손에 주어진 보수만을 보았다면 아무런 불평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과 비교할 때 자기는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되는 그런 질투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에 발을 디디고 있으므로 질투만 남고 그 주인의 선함에 감격할 여유가 없었다.

이 비유의 초점은 15절이다. 즉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그 주인의 선함이다. 이 주인의 행위는 일반 법칙적인 질서, 의무와 권리, 노동과 보수의 질서와 전혀 다른 질서다. 이 질서는 일반 질서를 침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질서가 이 새로운 질서에 관여하려고 했다. 이 주인은 그런 관여를 용서하지 않았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4절).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 아니냐?'(15절).

3. 은혜의 질서

이 주인의 대답의 초점은 '내 것을 내 뜻대로'다. 이 짧은 대답에 '내 뜻'이란 말이 두 번 나온다. 이 뜻이 바로 은혜의 질서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유대교 문헌에도 이와 비슷한 비유가 있다. 한 왕이 일꾼들을 살피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을 불러내어 하루 종일 놀게 하다가 저녁에 와서 품삯을 지불할 때에 다른 일꾼들과 꼭같이 하면서 저들의 불평에 답변하기를 이 사람이 두 시간 일한 것이 너희들이 하루 종일 일한 것보다 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28세의 젊은 랍비가 죽었을 때 다른 랍비들이 백년 동안 한 일보다 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빨리 일손을 놓고 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비유를 이처럼 이해하면 이 비유를 합리화하는 것이며 의무와 권리의 질서 안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주인은 '선'을 말한다. 일한 만큼 지불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그저 의무를 다한 것 뿐이다.

바울은 노동의 삯과 은혜의 삯을 구분한다. 일한 만큼 받는 삯은 지웠던 빚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인 데 대해서 은혜의 삯이란 일하지 않은 자에게 주는 것이다. 그는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고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롬 4:4-5). 이 주인의 선함은 바로 일한 데 해당하지 않은 삯을 주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보상의 사상이 전적으로 거부된 새로운 현실을 본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질서다.

은혜의 질서란 사람의 행한 것 또는 가진 어떤 것 위에 거점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주인의 일방적인 뜻에 의한 새 질서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그가 죄인이나 세리를 사랑하며 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할 때 저들의 어떤 보다 나은 인간성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본 뜻을 그릇되게 한다. 가령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을 때, 마음이 가난한 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해석해서 '마음이 부요한 자보다 나으니까'라고 해석하면 잘못이다. 마음이 가난하다 함은 성품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하는 것,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가진 것이 없음을 실감하는 자세다. 이같은 우리의 이해는 탕자의 비유에서 밝혀진다.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기뻐 맞이하는 아버지에게 원망하는 맏아들은 이 비유의 처음부터 일한 일꾼과 꼭같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일할 때에는 아무런 원망이 없던 그가 돌아온 형제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아버지의 '불공평'을 원망한다. 그 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너보다 낫다든지 사람됨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다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돌아온 아들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고 단지 스스로의 심정을 말하고 그 심정에 참여할 수 없는 막힌 마음을 나무랜다. 그럴 때 이 아버지는 맏아들의 '공로'를 부정하지도 않으며 또 아들로서 받을 '유업'을 거부하지도 않는데, 이것도 우리의 비유의 경우와 꼭같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하나를 거부하고 다른 하나를 위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의 질서임을 말한다.

4. 이 비유의 잘못된 해석

이상으로 이 비유는 그 자체로서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이 비유 해석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전제에서 잘못된 해석을 해왔다.

첫째는 이 비유의 문자적 의미 뒤에 어떤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온 잘못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고난절 전, 소위 회개 기간 첫 주일에 이 본문을 설교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에로의 초대'에 임박해서 사람의 한 일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벌써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초점을 두고 다섯 번 불렀다는 것의 '영적'인 해석을 아담 때부터 구속사적인 다섯 단계를 의미하며 예수의 부르심이 바로 마지막 단계라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했으며 오리게네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인 되는 다섯 과정을 말한 것이라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시도했다. 그 후부터 이 두 알레고리적 해석을 뒤섞어 해석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본문의 초점은 포도원에 불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주인이 삯을 지불하는 데 있는 것이며 거기에 대해서 항의가 나오고 그 주인이 자기 입장을 밝힌다. 또 다섯 번 불렀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그 결론에 아무런 반영이 없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설령 다섯 번 불렀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함축되었다고 하더라도 본문에 그 뜻이 나타나 있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우리는 제멋대로 어떠한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즉 '성서로만'이라는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이 비유의 자의가 보여주는 뜻에서 비약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는 이 비유에 붙은 결론처럼 된 16절에 의해서 이 비유를 풀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온 잘못이다. 이 전제에서 출발하면 이 비유에서 어느 것이 처음이다가 나중이 되고 나중이다가 처음이 됐나를 찾아야 한다. 이른 아침부터 일하던 자가 나중됐나? 아니! 그저 나중 온 사람과 꼭같은 보수를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에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저는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 온 사람은 나와 함께 있자!'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이해가 초기부터 있었다는 증거로는 많은 다른 사본에 16절 끝에 "부름을 받은 자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는 구절이 더 삽입되어 있음에서 본다. 그러나 우리 성서대로 가장 신빙성이 많은 이집트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

어떤 해석은 이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삯을 지불할 때 맨 나중 온 사람에게 먼저 지불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처음 지불받았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또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의 '시작하여'(αρξάμενος)는 '포함하여'라는 뜻 이상이 아니다(Schurmann, Jeremias).

이렇게 보면 16절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삼기는 곤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이 처음부터 이 비유에 속해 있는가를 문제로 해야 할 것이다.

16절은 마가복음 10장 31절, 누가복음 13장 30절, 그리고 마태복음 19장 30절에도 있다. 그런데 마가에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다는 말에 그것에 해당한 상을 받을 것을 약속한 다음의 말로 되어 있다. 그러면 그 뜻은 "그러나 안심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누가에는 제자라고는 안했지만 역시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안심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말로 돼 있다. 마태복음 19장 30절은 내용상의 관련으로 보나 또 이 구절 자체로 보나, 마가복음 10장 31절과 같으며 마가복음 9장 35절에도 제자들에게 하는 경고로 돼 있다.

이상에서 16절은 원래 어떤 얘기에 결부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Bultmann) 사실상 이것은 유대 문헌에 이미 있는 격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 비유에 처음부터 결부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문제로 한다면 마태가 어떤 뜻에서 이 '격언'을 여기에 첨부했나하는 것에 관심할 성질의 것이다.

마태는 바로 이 비유 전에 마가에서와 같이 베드로의 물음의 결론으로 이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19:30). 그리고 나서 이 비유 다음에 '이와 같이'(οὕτως)라는 말을 붙여서 이 구절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데는 없는 덧붙이로서 마태가 12회나 사용하고 있는 마태적인 접속법이다(Jeremias). 이 말은 마태가 19장 31절의 말에 뒤이어 그 실례로서 이 비유를 연속시고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를 첨부해서 그 격언으로 결론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용상으로 보아서 마태의 이러한 연결이 바로 들어맞지 않았다(T.W. Manson, Bultmann, Jeremias, Klostermann).

그러나 마태가 16절을 첨부한 의도를 15절에 국한해서 연결시키면 이 본 뜻이 이해된다. 즉 하나님이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한다. 그의 뜻은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미지수며 사람의 어떤 가치척도로 된 공로의식으로 잴 수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앞선 자가 뒤서고 뒤선 자가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16절은 그 전의 19장 30절의 구절을 약간 변경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장 30절에는 "…될 자가 많으리라"라고 한 데 대해서 16절에는 "…되리라"라고 예외없는 단언으로 해 버렸다. 위의 것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만일에 거기서 앞선 자는 뒤선다라고 하면 베드로는 반드시 뒤서게 된다는 결론이 된다. "…많으리라"고 하면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된다. 그런데 16절이 단언적으로 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마태가 이 비유를 들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말한 대로 그렇게 되면 앞선 제자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구일까? 그것은 틀림없이 유대교인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는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대열에서 처음 되었던 자들인 것을 인정하나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앞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반(反)예레미아스). 그럼 이 비유를 들을 대상이 유대인이라고 한 마태의 이해가 맞았는가?

5. 이 비유를 들을 자(결론)

이 비유를 말한 예수는 본래 누구에게 한 것인가를 물어보자.

이 비유의 초점은 14-15절에 밝혀졌는데 그것은 처음 온 사람의 반항이 계기가 됐다. 그러면 그 주인의 처사에 반항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을 여기 구구하게 입증 안 해도 명백하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가 저들이 저주의 대상으로 단정한 소위 죄인들과 사귈 뿐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 나라에 더 앞선 듯이 변호하는 데 대해서 분개하여 항의를 했다. 그런데 항의에 대해서 나온 말들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든가 잃은 양, 잃은 돈, 잃었던 자식의 비유 등이며 심하게는 죄인과 세리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말도 나왔다. 무엇보다도 저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공로 의식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닫힌 마음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악한 눈'을 가지게 했다. 어찌 죄인과 공동 취급을 받게 될 수 있느냐? 저들의 원망이다. 이들의 태도는 탕자의 비유의 맏아들과 바로 이 비유의 처음 온 자와 같은 것이다. 그들의 항의에 대해서 이 주인은 저들의 공로사상을 전복할 뿐 아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하나님의 미래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향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 뜻에서 마태의 해석은 옳다. 그러나 비유 전체와 16절은 부자연한 연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비유를 16절과 분리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사상』, 196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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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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