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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막 10:1-12; 마 19:1-12
1. 머리말

이 본문은 이혼을 해도 좋으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인데 안식일 논쟁과 부정(不淨) 논쟁과 더불어 모세의 율법과 정면으로 충돌된 항목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가 이혼을 어떻게 생각했나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대체 결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야 할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 뜻을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받아 들였나 하는 것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견해에서 어떻게 달라졌나 하는 것이다.

2. 본문 분석

마태는 마가의 1-9절을 따르고 있다. 스트리터(Streeter)는 마태는 전혀 다른 전승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지금은 부정되어 있으며 쉬니 빈드(Schniewind) 같은 이는 마태의 것이 원형이라고 보나 역시 마가의 기록이 원형이라 함이 오늘에 와서는 정론이 돼 있다(K.L. Schmidt. Bultmann). 그러나 마태는 마가에서 불투명한 점을 밝혀서 그 당시의 '삶의 자리'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마가에서 바리새인들이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는 그 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문제점이 불투명하다. 이에 대해서 마태는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라는 말을 삽입했다. 그럼으로써 당시의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밝혔다.

율법에서는 이혼이 용허되어 있다. 신명기 24장 1절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두 파로 갈라져서 의견을 달리했다. 즉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말한 수치스러운 일을 어떻게 그 한계를 긋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샴마이(Schammai)파 같은 경건파에서는 그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한 것'에 국한한 데 대해서 힐렐(Hillel), 또는 아키바(Akiba) 등의 자유파에서는 그 구절을 남자 중심으로 마음대로 확대해서 헛된 말하는 경우, 거짓 맹세하는 경우, 훔치는 경우, 아이를 못낳는 경우, 심지어는 음식을 태우는 경우(힐렐), 나가서는 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될 때(아키바)에도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도 남편이 그 아내의 존재를 '기뻐하지 않게'되기 때문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은 그 때 유대인에게 문제였고 또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 자체는 마태의 것이 원형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Klostermann). 그러나 딴 각도에서 보면 마가의 질문이 타당하다. 이것은 뒤에서 반영될 것이다.

마가에 의하면 이 질문에 대해서 모세의 법을 묻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질문의 원인이 신명기 24장에 있음을 밝힌다. 이에 대해서 마태는 모세의 법을 뒤로 미루고 있다. 아마 그것은 처음 질문의 내용이 벌써 신명기 24장의 해석 문제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 전에 예수의 대답을 실리고 그것에 대한 반증으로서 모세법을 말했을 것이다. 그 질문이 바로 모세의 법의 해석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부터 재해석하는 마가의 순서가 마태에 비해서 더 타당하다.

모세의 법에 대해서 인용한 것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마가와 마태는 약간씩 다르다. 마가에는 '창조 때부터'라는 표현으로 창세기의 기록을 지적한 데 대해서 마태는 "사람을 지으신 이가…말씀하시기를"이라고 고치었다. 이것은 마태가 새로운 결혼율을 확립하기 위한 전제로서 그 계율의 권위를 하나님께 직접 결부시킨 것이다(Wellhausen). 거기에 비하면 마가의 것은 새로운 계율을 위한 권위로서는 퍽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는 결론은 같다.

마가의 기록은 9절로서 일단 끝나는데 마태는 위에서 본 대로 대체로 8절까지 마가를 따르고 그 아래는 마가의 기록과 전혀 다른 자료를 쓰고 있다. 마가에서는 그 장면이 바뀌어서 제자들과의 문답형으로 됐는데 마태에는 그러한 장면의 구분이 없다. 예수가 공적으로 말한 다음 제자들과의 문답형식이 마가에 자주 나오는데(4:10; 34; 7:17; 9:28; 10:23; 13:3 등)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향한 교회의 소산으로서(S.E. Johnson)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규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 마태에서는 전혀 딴 문제가 뒤따른다. 이혼이 허락돼 있지 않다는 말에 "이와 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근본 문제가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제기된다. 즉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가 또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의 문답이다. 이것은 마태에만 있는 기록인데 10절은 위에서 말한 예수의 결혼에 관한 교훈에 대한 반응으로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에 10절이 9절까지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라면 "이혼도 마음대로 못할 바에는 차라리 결혼 안하는 게 좋지요" 하는 뜻이 된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이 10절은 원래 9절과 결부된 것이 아니고 다른 대화에 뒤따른 것인데 그 대화가 빠져 버렸으리라고 보는 이도 있다(T.W. Manson). 결혼 안 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견해는 바울에서 보는 데(고전 7:8 이하) 이것은 종말 사상에서 온 것이다. 만일 10절이 다른 대화에 붙었던 것이라는 상상이 맞는다면 그 대화는 바울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하여간 마태의 10절 이하는 독립된 자료다. 그러면 이제 마가복음 9장 1-9절에 준해서 결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해 보자.

3. 결혼과 이혼

예수는 이혼을 반대했다. 이혼하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마태에는 하나의 예외율이 있다. 그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한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9:9; 5:32). 이러한 입장은 유대교의 샴마이파의 견해와 꼭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마가에나 누가에는(16:18) 그러한 예외 항목이 없다. 그런데 마태의 예외율은 마태의 '삶의 자리'에 의해서 첨부된 교회를 다스리기 위한 결혼율이라고 보는 것이 오늘의 학자들의 정론이다(T.W. Manson, H. Braun, Klostermann). 그러한 예외율은 다음에 왜 이혼해서는 안 되는가의 설명과 전혀 맞지 않다.

이혼을 금하는 이유로서 예수는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결부시켜서 설명한다. 그런데 1장 27절이나 2장 24절을 독립시켜 보면 반드시 일부일처제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H. Braun, Klostermann).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거리낌없이 일부다처제가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두 구절을 결부시키고 나가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서 비로소 일부일처제의 길을 터 놓았다. 두 몸을 한 몸 되게 하나님이 짝을 지어 주었으니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면 마태의 예외율은 고려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혼을 반대한 이유는 예수의 결혼관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결혼을 사람이 생물학적 원칙이나 또는 어떤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하는 그런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두 남녀가 결합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혼은 사람의 하나의 삶의 방편이 아니다. 하나님이 준 질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결혼의 의미다. 우리말로 짝지어 주었다고 번역된 'συνέϕευξεν'이란 단어다. 이 말의 뜻은 함께 멍에를 멘다는 뜻이다(yoked together). 이것은 밭을 갈기 위해 소 둘을 한 멍에에 비끄러맸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부부란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과업을 위해서 결합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두 남녀에 한 멍에를 지운 것은 과업이 있어서 지운 것이다. 이 과업이 있는 한 사람이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써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혼하지 말라는 금령은 하나의 새로운 율법인가? 이러한 질문은 이혼을 금한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밝혀짐과 동시에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가 밝아질 것이다.

4.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명령

기독교는 이혼율에 있어 마태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혼은 죄라고 단정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혼을 법으로써 금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말을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세계사에서 부부생활의 정화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예수의 이 명령을 하나의 율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피해도 컸다. 이혼을 절대로 못하게 법으로 정해진 나라는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나라들이다. 그런데 법으로써 이혼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성적인 문란이 커가고 있다. 이혼을 할 수 없으니까 형식상으로는 결혼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여인과 동거생활하는 사람들이 한 없이 많다. 그래도 저들은 이 계율을 파괴 안 한 것이 된다. 정말 예수는 모세의 법에 대해 새로운 법을 주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모세의 법에 대한 예수의 해석이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데 대해서 예수는 모세의 법을 시비하지 않고 그 책임을 그 법이 형성될 때의 역사적인 상황 즉 사람들의 상태에 책임을 돌린다. 즉 모세가 그런 법을 준 것은 너희 마음의 완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완악한 마음이란 신명기 10장 16절 또는 에스겔 36장 36절에 나오는 말로 육적이며 사랑이 결핍된 마음을 의미한다. 즉 너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런 법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혼하면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은 이혼을 장려하는 뜻이 아니고 저들의 문란한 성생활과 여자들을 남자들의 횡포에서 최소한으로 저지하자는 데 동기가 있다. 유대법으로는 일부다처가 가능하다. 한 남자는 재력이 허락하는 한 여러 여자를 아내로 할 수 있다. 그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비끄러매고 내용상으로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들과 산다. 그러면서도 만일 아내와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발견되면 음행한 여인으로서 돌로 쳐 죽일 권리를 갖고 있었다.

자기는 사랑하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버리고 있으면서도 법으로 구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은 "네가 사랑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해방시켜서 최소한 그 여인에게 자유를 주라"는 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모세 법의 해석은 다음의 중대한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예수의 이러한 해석은 율법의 외적인 형식에 권위를 두는 유대 문자주의적 해석을 지양하고 있으며 그 율법이 형성될 때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들추어냄으로써 그 법의 권위를 상대화하고 있으며(이 해석법은 현금의 성서 역사비평학적 해석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율법의 보편적인 적용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유대교에서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모세와 그 율법의 절대적 권위를 극도로 제한 또는 파괴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세의 법은 영원불변하는 철칙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절된 잠정적인 것 즉 일정한 시효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유대교의 해석의 전통과 상반되는 것은 율법을 성서 안의 다른 부분을 인용해서 거부하는 예수의 해석이다. 이러한 예수의 해석의 태도는 자주 있다. 마태복음 5장 33-35절에서 레위기의 법을 이사야 66장 1절 또 시편 47편 3절로 거부하고 있으며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신명기 18장 13절 또는 레위기 19장 18절 등으로 거부하며 안식일 논쟁, 부정 논쟁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랍비의 전통에서나 또 다른 종말적 종파에서 불가능한 것이다(H. Braun). 더욱이 우리가 지금의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구체적인 율법을 창세기의 비율법적인 설화와 맞세워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싸운 것은 바로 율법주의였다. 저들은 율법 뒤에 숨은 본래의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율법의 일점일획을 고수한다는 원칙에서 그 마음들이 완악해져서 소위 죄인들을 고소하고 심판했으며 예수는 이 고소를 당하고 심판을 당하는 그 죄인들의 편에 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혼을 반대한 것이 새로운 율법인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는 또 새로운 모세 이상 아무것도 아니게 되며 그의 가르침의 복음성은 없고 모세보다도 더 엄격한 율법을 준 이가 될 것이다.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법에 대해서 이혼을 금한 것은 새로운 결혼율(Halcha)일 수 없다. 예수가 이혼을 반대한 것은 바로 모세가 저들에게 이흔을 허락한 동기와 같이(예수의 해석대로) 저들의 완악한 마음에 대한 심판이다. 완악한 마음이란 사랑이 결핍된 저들의 마음이다. 예수가 어떤 것을 금한 것 뒤에는 적극적인 요구가 있으며 그것을 이해해야 바로 그의 뜻을 바로 이해한다는 루터의 말은 중요하다. 예수에게 문제되는 것은 행위에 앞선 동기가 문제다. 살인보다 앞서서 미워하는 것이 문제며 간음에 앞서서 상대방을 정욕의 대상으로 탐내는 것이 문제다. 이 말의 궁극적인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다. 미워하는 일이 살인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된다면 이혼을 하고 안하고 문제보다는 사랑이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하지 말라"는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해야 비로소 예수의 뜻을 안다.

쉴라터(A. Schlatter)는 예수의 이혼에 대한 이러한 강경한 태도에서 그 당시의 여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인격으로 대하라는 적극적인 뜻을 보고 있다. 이러한 뜻은 마가복음 9장 10-11절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면 간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행한 연고'라는 것만 빼면 마태복음 5장 32절도 꼭같은 내용이다. 남자의 성적 관계가 여자의 편에 의해서 단죄되는 것은 유대교 안에서는 없는 일이고(H. Braun) 그 당시의 희랍-로마의 법에 있을 따름이다. 간음에 대해서는 여자에게만 적용됐던 것이 남자에게도 적용됨으로써 확실히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권리와 대우를 받도록 된 것이다.

5.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

이제 남은 문제는 마태의 10-12절이다. 그것은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10절은 9절에 결부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그것은 종말적인 의식과 더불어 생긴 독신주의의 반영이다. 또 10절의 질문과 11-12절과도 맞지 않는다. 10절은 결혼 무용론을 말한 데 대해서 11-12절은 성적인 금욕주의를 말하고 있다. 물론 성적 금욕주의는 결혼을 거부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많은 의문을 주는 것이어서 구구한 해석이 많다(Bauer, in Heinrich Festschrift, 234ff). 여기 성에 대한 금욕주의는 세 가지 층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나면서부터 성적인 불구자, 다음은 어떤 다른 목적으로 성적인 거세를 한 자(환관의 경우와 같이), 그리고 천국을 위해서 거세하는 경우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의 두 가지 상반된 조류 틈에 있었다. 유대교에서는 남자의 결혼은 의무적인 계명으로 돼 있다(Strack Bilalerbeck I, 805f).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정으로 독신으로 지내야 하던 랍비 벤 아짜이(Ben Azzai)는 그의 약점을 사과하고 있다. 그런데 대해서 그 당시의 종말적 종파들은 그들의 회원의 결혼을 금했다(H. Braun). 이러한 두 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브라운은 후기 유대교와 종말 종파들과 예수의 결혼에 대한 태도를 비교 연구한 결과 성의 순결을 강조한 것은 종말 종파들과 예수에게 공통된 바이며 또 결혼을 의무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도 유대교에 대해서 종말 종파들과 통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두 사이에 크게 다른 점은 종말 종파들은 자기파에 속하는 자들에게는 일률적으로 결혼을 거부하게 하며 그것을 고행주의의 일환으로 생각한 데 대해서 예수는 그러한 결단은 어디까지나 명분인 각 개인에 따라서 결정해야 할 것이고 일반화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태복음 19장 12절은 확실히 천국을 위해서 결혼을 포기할 수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라"고 하여 각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은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할 수 있으면 자기처럼 독신으로 지내기를 바라는 반면에 그것을 일반화하지 않고 자기 분수대로 결정할 것을 말하고 있으며 반면에 결혼한 자들은 갈라지지 말 것을 권하기도 하며, 부부생활은 되도록 분방하지 말 것을 권하는가 하면, 음행과는 상관없이 신앙 문제로서 갈라지기를 원하면 이혼해도 좋다고도 한다. 그의 결론도 마태 12절의 예수의 말과 같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행하라"고 한다(고전 7장).

6. 결론

이상의 고찰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예수는 결혼 또는 이혼에 관해서 한 율법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결혼 또는 이혼 자체가 아니고 요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 자기의 선 자리에서 참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혼했느냐? 그러면 하나님이 한 멍에를 메워 준 것으로 알고 서로 한 몸 같이 사랑할 것이며 갈라지면 안 될 것이다. 이미 사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법이 이혼을 허락하느냐로 태도를 결정하여 자기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이미 사랑하라는 뜻을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큰 것(하나님의 나라)을 위해서 결혼 않고 살려느냐? 그것도 제게 주어진 것이니 법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물을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충실할 것이다.

예수는 결혼에 관한 새 법을 주려는 이가 아니었다. 오직 사랑하기를 요구한 이였다.

(『기독교사상』, 196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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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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