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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1. 일반적 순교자 이해

'국어대사전'(이희승 편)에 보면 순교를 "모든 억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다음의 세 가지가 전제돼 있다. (1) 순교는 종교적 신앙의 행위요, (2) 억압과 박해라는 상황이 전제됐고, (3) 순교는 바로 목숨을 바치는 일, 즉 죽음과 결부돼 있다.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순교자는 신앙하는 바를 어떠한 강요에도 양보하거나 굽히지 않고 마침내 그것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은 자들을 뜻한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까닭은 세계의 여러 종교들 중에서 그 창시자의 순교적 죽음 위에 그 터전을 찾는 것은 기독교밖에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바울을 위시한 대부분의 초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박해의 손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순교자란 바로 목숨을 바친 자로서 최고의 숭앙의 대상이 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도 가톨릭이나 신교 할 것 없이 순교자의 피로 출발된 것을 큰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굳센 믿음의 촉진을 위해서 거침 없이 '순교자의 정신으로' 또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라'라는 말을 써 왔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댈 만큼 백절불굴의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신앙의 내용이야 어떻게 됐든지간에 그만큼 그 종교가 살아 있는 증거이며 동시에 그만큼 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교자'의 길은 다음 몇 가지의 조건이 전제된다. 첫째는 어떤 국가적 권력이 한 종교를 양성적으로 근절할 것을 선언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는 국가권력과 한 종교 사이의 투쟁적인 관계에서 한 종교집단과 그 신조를 수호하는 결과로 순교하게 된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 한국의 대원군 시대의 박해 등이 그러한 경우다. 둘째는 한 종교가 뚜렷한 신조 위에 세워진 공동체로 규정돼야 한다. 이 경우에 그 신도들은 이 공동의 신조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 한 종교 안에서도 그 종교단체에 의해서 순교당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 공동체의 신조에 이탈된 개개인이 그 신념을 끝끝내 철회하지 않으므로 이론자로 처형되는 경우다. 이같은 순교자는 그 당시에는 물론 죄인으로 몰려 죽는 것이고 그 후에 그의 신념이 인정되어 일반화됐을 때 순교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종교 자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생사권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한 권력 단체가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순교란 언제나 권력체와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사회구조에 있어서는 재래적인 의미의 '순교'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그 이유의 하나는 정치권력체의 체질이 달라졌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어느 종교든지 획일적인 신조를 모든 신도에게 강요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정치권력 체제가 달라졌다는 것은 어떤 반종교적 독재국가라고 해도 어떤 특정의 신앙을 이유로 박해하려고 하지 않고 음성적으로, 그리고 다른 구실로 박해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가령 비록 반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공산국가일지라도 어떤 종교적 신앙을 정면에 내세워 박해하지 않고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다거나 어떤 딴 구실로 정죄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의 권력체제는 순교자를 내려고 하지 않고 교묘한 교란작전으로 종교단체나 또는 신앙의 내용을 무력하게 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획일적인 신조를 내세우기 어렵게 됐다는 것은 어떤 행위가 강요당했을 때 그것을 '우상' 또는 반신앙적이라는 최후의 선언을 할 수 있는 중앙집권체적인 해석의 주체가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내의 신교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신앙의 대상이나 신조에 대한 개인들의 자체적 해석의 권리를 최대한으로 넓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제 때 한국 교회가 이른바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을 적에도 각기 해석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통일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는데 오늘의 현상은 그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공동체성이 해이해졌다.

그러면 순교정신이란 이미 낡은 유물인가? 그러나 그것을 뺀 종교는 이어 신앙의 대상에서 사변의 자료로 돼 버린 것이다. 그러한 그 종교는 힘을 잃어버린다. 오늘에 와서는 모든 가치관이 급속도로 다변 또는 다원화되므로 이른바 신념형(信念型)이라는 것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며 이른바 지식층은 회의를 그 특권처럼 내세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스스로 무력화된 계층으로 전락돼 가고 있다. 이같은 시대성에 젖은 종교인들도 순교정신은 이미 나와 상관 없는 듯이 손을 씻고 지식층의 대열에 끼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이것은 그 종교정신의 무력화의 과정이다.

그렇게 된 데는 이미 지적한 대로 오늘의 권력체가 '순교'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또 종교가 그 신조의 해석권을 개인들에게 이양한 데서 됐다고 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순교'라는 개념에 대한 고식적인 사고에 있다.

순교자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적 영웅'을 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에 와서 '순교'는 불가능하다고 체념하는 것은 그것을 영웅적 종교행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영웅적 행위란 바로 '신념에서 죽는다'라는 말과 직결된다. 이것은 바로 죽는 길만이 '순교'의 길이라는 뜻이다. 정말 순교는 '영웅적 죽음'을 필수적인 것으로 하는가?

2. 성서에서 본 '순교자' 개념

신약성서에는 신앙을 위한 '순사'(殉死)를 뜻하는 순교라는 개념이 따로 없고 '증거'(martus)라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일반적인 뜻은 '증인'을 뜻한다. 그러므로 죽음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끝내 증거했을 때 순교자인 것이다. 따라서 순교자는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조건이 아니다.

증인(순교자)이라는 것은 법적 개념으로서 재판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증거하느냐에 따라서 증인의 성격이 달라진다.

 

사실의 입증: 증거 중에는 직접 보고 듣거나 알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있다. 가령 예수를 심문하는 산헤드린 모임에서 대제사장이 "이 이상 무슨 증거(martus)가 필요한가"(막 14:63=마 26:65)라고 한 것이라든지 사도행전에 스데반 순교의 서술에서 거짓 '증인'(6:13; 7:58) 등이 그것인데, 이것은 신명기에 나타난 재판규례에 의한 것이다(17:16-17). 초기 교회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투스'를 채용한 예가 마태복음 18장 16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의 증인은 그 사실 자체의 목격자라는 뜻으로서 중립적이며 그 일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다(거짓 증거도 그 일 자체에 대한 흥미에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적 동기 따위를 문제로 하지 않고 나타난 것에만 국한한다.

 

고백적 증거: 외적인 현상의 내적 동기 또는 진상을 인정하는 것을 '증거' 또는 '증언'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바울은 종종 하나님을 자기의 증인(martura)이라고 부른다(고후 1:23; 롬 1:9; 빌 1:8). 이것은 하나의 고백적인 표현이다. 이같은 증거는 언제나 고백과 결부돼 있다. 가령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딤전 6:12)라는 것이 그것을 밝혀 준다.

 

선교적 행위로서의 증거: 이것은 어떤 역사적 사실의 목격자로서 그 사실 그대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증거하는 것으로서 고백적인 것이다. 그러나 고백(homologeia)과 구별 되는 것은 고백은 개인의 내적 신념에 그칠 수 있는데 대해서 증거는 대외적으로 이 신념하는 바를 선포하는 것이다. 가령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눅 24:48)라고 했을 때 그것은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지식으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는 명령이다. 신약은 이같은 증인됨을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강조하는데 그 초점은 예수의 삶의 의미(행 1:22; 10:39),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의 증인됨을 말한다(행 1:8; 2:32; 3:15; 5:31-32; 10:4; 10:42; 13:31).

그런데 때로는 이 신조적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증거하는 증언도 있다. 이 점은 누가복음의 특징이지만 공관서가 이같은 증거의 책들이다.

 

수난자로서의 증인 : 마가복음은 예수의 수난사에 그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수난 자체가 하나님을 증언하는 행위로 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수난사는 그의 죽음(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죽음 자체도 수난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해했다. 그같은 구체적인 표현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벧전 5:1)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증인은 이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증인 자신이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증인이 된다는 생각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바울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그는 마침내 고난의 기쁨을 역설한다(롬 5:3; 8:17 등). 위에서 지적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벧전 5:1)이라는 것도 그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하는 증거자임을 뜻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고행지의(苦行之義)에서 보는 것처럼 '수난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일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한 고난이요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인 것이다(골 1:24).

 

순사(殖死)로서하는 증인 : 이것은 죽음으로써 그의 신앙을 증거한 경우로서 우리가 보통 '순교자'라고 하는 개념과 부합되는 경우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대로 그것 역시 증거 또는 증인이라는 단어 '마르투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계시록은 예수 자신을 '증인'(ho martus)이라고 부르는데(1:5; 3:14) 그것은 순사자로서의 증인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곧 이어서 '죽음으로부터'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공관서(특히 마가)는 예수를 수난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한 순교자로 서술했다. 그의 십자가의 의미가 인식되고 강조됨에 따라서 증거, 증인이란 바로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런 뜻에서 마태복음 10장 38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면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을 택할 것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를 따르는 자는 증인으로서 순사의 각오를 촉구한 말이다(마 16:24 참조).

그러나 정말 죽음의 순교의 각오를 촉진한 것은 비교적 후기 문서에서 볼 수 있는데 베드로전서와 계시록이 그것들이다. "여러분은 바로 그런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으시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시지 않고…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2 :21-24). 이상은 베드로서를 쓴 교회의 상황을 다 드러내고 있다. 교회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있다. 로마를 '바빌론'이라는 암호로 표시한 것은(5:13) 그 정황을 잘 드러낸다. 저자는 절대로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한이나 사기한 따위"로 누명 쓰지 말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4:15-17)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순사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찬양한 순교자의 자세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

계시록은 한걸음 나가서 바빌론(로마)의 여인이 '성도의 피', '순교자의 피'에 굶주려 있다고 한다(17:6). "'안디바가' 사탄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날"(2:13)이란 말은 이미 순교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이같은 마당에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라"(2:10)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순사적 증인이 되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순교자' 자체를 그 죽음 때문에 특별한 위치에 앉히는 것을 볼 수 없다. 히브리서에도 박해의 흔적이 농후하다.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을 얻어 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한 채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11:36 이하)고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어 다녔습니다"라고 하는데 순사당한 자나 도피한 자를 구별해서 어느 하나를 높이고 다른 하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이상 전체의 특성을 말한다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죽은 자를 '순교자'라고 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으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한 자를 '순교자'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사도행전에 첫 순교자인 스데반은 "당신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렸다"(행 22:20)라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여기의 증인이란 바로 순교자란 뜻인데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죽은 자로서 특수한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유일한 예외다.

3. 순교자 숭배 사상

'순교자'를 '증거자'로서 보다 순사자라는 사실에 비중을 두고 죽음을 '증거자'의 완성의 단계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그나티우스 이후의 일이다. 그는 예수의 수난(죽음)의 길을 따르는 것을 신도의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이같은 죽음에 마르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증거자'를 '순교자'(마르투스)라는 뜻으로 대치한 것은 2세기 후반부터다. 특히 소아시아가 그같은 용법의 발상지인데 그것은 폴리캅의 순교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2세기 마지막에는 순교자의 재판 기록, 그의 최후를 묘사한 문서를 예배 때에 신도 앞에서 낭독하기에 이르렀다. 폴리캅, 유스티누스, 칼프스, 파필루스, 아가토니케의 수난의 기록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같은 순교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마침내 '증거자'라는 의미보다는 순사 자체를 존중하게 했다. 그러므로 이 '순교자'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자진해서 죽음의 기회를 찾는 풍조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것은 종교적 영웅 숭배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 '순교'정신에는 그 나름대로의 내용상의 동기가 있었다. 이 순교사상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순교자'로 해석한 데 근거를 둔다. 그리스도를 증인(마르투스)이라고 한 성서의 표현을 그 십자가의 죽음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면 그는 '순교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그의 길을 걷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었다. 이같은 해석에는 마태복음 10장 17-16절, 24절 이하 등이 큰 역할을 하게 됐으며 수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이라고 기뻐했다는 사도행전(5 :41)의 기록같은 것이 그 뒷받침이 됐다.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무저항적인 자세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은 '피와 살'로 싸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다소곳이 죽음에 임할 뿐 아니라 고통을 조용히 받았거나 나가서는 웃으면서 죽어갔다. 저들이 이같이 순교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사가 크게 역할했다. 그의 무저항적인 침묵 등이 그들의 사표가 된 것이다. 그들은 이 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길일 뿐만 아니라 그의 고난의 계승자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들은 이 수난의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임과 동시에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미래에의 보장이다. 이같은 확신의 근거는 로마서 5장 3절 등 바울의 글이나 베드로서 같은 것이 뒷받침했던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할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그런 주장에는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의 세례'를 주체적으로 받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들에는 순사 직전에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저들은 이같은 순교의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순교자로 알려진 스데반에 관한 사도행전의 기록이 큰 역할을 했다. 이상에서 보면 이 순교사상에서 '증거' 또는 '선교'라는 동기는 점점 희미해지고 종교 영웅주의 아니면 종교적 이기주의에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저들은 증거를 위해서 죽음까지 불사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순교자가 되려고 했다. 이것은 신약적 순교 정신의 타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벌써 3세기 초부터 순교자 숭배의 풍조는 그들의 유물, 그들의 무덤, 뼈 등을 보존 숭상하게 했으며 마침내는 저들의 시체나 유물들이 교회 내부에 침투하는 결과를 가져 왔을 뿐 아니라 저들에게 '하나님과 신도' 사이에서 화해자 또는 대변자의 분깃까지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역마저 침해하는 결과를 빚었다.

4. 오늘에 있어서 순교정신

순교란 억압과 박해를 전제하며 확고한 신조가 있고 그것을 해석 지시하는 중앙집권적 조직이 있는 종교일 때,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순교'가 가능하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순교'를 순사라는 것에 국한하거나 그것을 유일한 순교자의 관문처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거'라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따라서 순교정신은 그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이같은 순교 정신이 오늘에 와서 어떻게 적용될까?

오늘 우리 앞에는 카이저를 신으로 예배하거나 고백하라는 것도 없으며 또 일본 '기리시당'들에게 십자가형을 놓고 그것을 밟으라고 강요하던 그런 권력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박해시대에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의 박해의 양상은 달라졌다. 만일 그리스도교도가 그들의 믿는 바를 그대로 관철하고 오늘의 사회를 향해서 그 소신을 증거한다면 박해가 없을까? 기독교는 우상과의 싸움에서 많이 순교했다. 오늘에는 그때처럼 드러난 것으로 고백을 요구하는 우상은 없다. 그러나 성서의 정신으로 이 사회의 밑바닥을 뚫으면 오늘의 우상은 새로운 양상으로 도사리고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이 우상의 베일을 벗기고 그것을 타파할 전투를 벌이면 예나 다름없는 순교를 강요받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에는 획일적인 교리나 신조가 있어서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오늘에는 기독교의 진리가 죽은 것이 아니다. 우상이 그 구체성을 감추고 이 사회나 역사에서 변장한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도 구체적 신조에서 인간의 삶, 사회, 또는 역사 속에 새로운 모습으로 편만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도피를 하지 않는 한 무엇을 오늘에 증거해야 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증거는 교조적일 수는 없다. 그대신 이 역사적 현실에서 정말 몸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순교자는 '전투'에서의 희생자라면 오늘은 '전쟁'에서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전투는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이지만 전쟁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전에는 순교자라고 하면 순사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순교자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희생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박해의 양상이 달라지고 진리의 양상이 달라졌듯이 순교의 양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순교자란 절대로 재래의 틀 안에서 규정할 수는 없게 됐다.

그런데 옛날의 순교자와 비교하여 오늘의 순교자를 성격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본회퍼나 마틴 루터 킹들을 오늘 순교자라고 한다면 옛 순교자들은 성속의 영역을 구별하고 자기의 영역을 수호하려다가 순교한 데 대해서 오늘의 순교자는 일정한 성역의 진을 치지 않고 산진(散陳) 속에 뛰어 들어 싸우다 순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순교자는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낡은 척도로써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 본회퍼는 정치범으로 죽었고 킹은 흑인 해방운동가로서 죽었다. 이것은 가이사 숭배를 거부하거나 십자가형 밟는 것을 거부했거나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순교한 것과는 벌써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죽는 자만이 순교자는 아니다. 비록 신앙을 위해 죽은 자만이 순교자라고 해도 오늘 죽이는 방법은 옛날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순교자를 가려낼 수 없다. 기능사회에서 그 기능을 박탈하는 것도 죽음이요 정신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그 생존권을 뺏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순교자는 정치범으로, 반역자로, 경우에 따라서는 사기꾼이나 강도의 누명을 쓰고 죽을 수도 있을 것이며 생리적인 생명은 지속하면서도 사실상 죽은 순교자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의 사회가 다양한 순교자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오늘에 순교자가 많다는 말은 아니다. 순교자가 많고 적은 것은 죽음을 불사할 만큼 분명한 증거의 대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이냐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서 가능한 순교자의 길은 예수 자신의 길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예수는 분명히 정치점으로 순교했다. 그러나 그것은 누명의 순교다. 그의 순교는 당대의 종교관념의 세계에서 볼 때 결코 순교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가르침이나 활동의 영역은 당대에서 볼 때 결코 종교적이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신조를 내세웠거나 어떤 성역의 진을 치지 않았으며 그저 민중과 더불어 살며 눌린 자의 편에 섰을 뿐이다. 그의 사형의 죄목과 그의 증거와는 관련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류를 위한 유일의 '순교자'로 발견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위대성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 새 기원의 막이 올리워진 것이다.

(『기독교사상』, 197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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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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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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