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연구하는 것은 성서가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파악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설교하는 것은 성서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성서의 본뜻을 파악, 전달하는 일이 가능한가?
성서는 문자와 언어와 문법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따라서 누구나 글을 알면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를 이해하는 데 큰 장벽이 있다. 그것은 언어가 시간적으로나 문화권적으로 볼 때 우리와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도 이천 년의 거리가 있으며, 또 그것이 형성된 문화권은 특유한 성격을 이루었던 고대 셈족의 것이며 신약은 그것이 헬레니즘 문화권에 들어가서 많은 영향을 받으므로 그 문화라 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성서의 원문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언어는 그 시대, 그 지역의 세계관에 의해서 형성된다. 따라서 그 시대, 그 지역의 세계관을 모르고는 그 언어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서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이 형성될 때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성서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성서학자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그러한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성서가 해석되었으며 또한 그 시대의 언어를 이 시대 사람의 말로 바꾸고 있으며 또 각 나라말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원문 자체를 모른다고 해도 번역된 성서를 통해서 그 핵심은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본뜻에 접근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 주변을 맴돌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를 읽을 때 그것에 대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전이해 때문이다.
전이해란 무엇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의 것이 있다. 하나는 그 언어의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요, 다른 하나는 성서 전체의 내용에 대한 이해다. 가령 성서에 '알레데이아'란 말이 있다. 이것을 우리말로 '진리'라고 번역한다. 성서를 읽는 사람은 '진리'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이해가 없으면 '알레데이아'란 뜻을 알 길이 없다. 성서의 알레데이아와 진리가 바로 일치됐는지는 별 문제이나 진리라는 전이해 때문에 성서에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은 흥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이해 없이는 성서에 전혀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의 경우는 진리라는 말의 뜻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란 이런 것이다'라는 내용상의 전이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성서에서 진리란 이런 것이다 하는 전이해가 성서를 직접 읽기 전에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도그마적인 전제다. 여기에 말하려고 하는 것은 특히 후자의 경우에 치중해서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이미 교회생활에 젖은 사람들은 성서를 몸소 탐구하기 전에 교리적인 도그마에 젖어 있다. 비록 교회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도 성서에 관심하려고 할 때는 이미 어디서 들었든지 성서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하는 예비지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예비지식이 바로 전이해다. 그런데 이러한 전이해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만일 그런 전이해가 없으면 성서에 대한 흥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이해는 성서의 현실을 못보게 하고 그 내용과 읽는 자의 이해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전이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러한 전이해를 갖고 성서를 읽어가다가 그 내용이 다른 것을 발견하고 실망해 버린다.
(2) 이러한 전이해를 안경처럼 쓰고 읽음으로써 그 성서에서 이 전이해에 맞는 것만 골라내거나 또는 그 전체를 그렇게만 보아버린다.
(3) 이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발견한 후 자기의 전이해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그 전이해가 파괴되므로 성서와 나와의 매개물인 전이해는 제거되고 성서의 내용과 직접 마주서게 된다.
이상에서 어느 것이 정말 성서를 바로 읽은 것인가? 다른 말로, 어느 것이 정말 성서의 내용 자체에 접한 것인가? 물론 셋째의 경우다. 첫째 경우는 성서 자체의 내용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이해가 옳은지 아닌지를 측정하려는 의욕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전이해—이것은 자기의 소원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를 관철할 수 없을 때 성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둘째 경우도 첫째 자세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성서의 내용과 자기의 전이해의 차이점을 발견한 것이고, 하나는 둘의 일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전이해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데서는 꼭 같다. 물론 전이해와 성서의 내용의 일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후자는 그런 점에서 보면 다행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에게 성서는 새 것을 전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해답을 갖고 있기에 성서에서 새로운 해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그가 성서를 대해도 실은 성서의 내용과 만나지 못하고 자기의 전이해를 그 속에서 발견할 따름이다. 더욱이 우리가 성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문제는 크다. 성서에서 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을 들을 때까지는 내게는 미지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알아 버린 결론에 머물면 성서는 아무리 읽어도 산 말씀, 즉 지금 여기 있는 내게 하는 말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동양의 효자의 제사와 비교할 만도 하다. 부모가 죽은 다음에 젯상에 그 부모가 좋아하던 음식을 되풀이해서 갖다 바친다. 살아 계실 때 이런 것을 좋아하셨는데 하는 심정이다. 그런데 만일 그 부모가 살아 있다면 식성도 달라질 것이며 따라서 그 요구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지라 무얼 원하는지 물으려고 하지 않고 생존시에 이런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고정화해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는 산 존재에게 대하듯 하면서 실상은 일방적인 전제를 계속 관철함으로써 죽은 자를 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셋째 경우는 성서를 대할 때 거기서 대답을 들으려는 자세다. 비록 그가 성서를 읽기 전에 그것에 대한 전이해가 있으므로 성서를 읽을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서를 읽을 계기가 된 것 뿐이고 읽을 때에는 성서의 내용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따라서 성서가 무얼 말하려는지에 대해서 모든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성서와 그 사이의 매개물인 전이해는 제거되고 직접 마주서게 된다. 이것은 우선 들으려는 자세다. 들음으로써 그 내용 앞에 나를 세운다. 이것을 위의 예에 적용한다면 죽은 부모가 아니라 산 부모 앞에서 그가 지금 무엇을 원하느냐를 물으려는 자세와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출발은 나의 전이해가 주도권을 취했으나 일단 성서를 읽음으로써 그 내용이 주도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성서의 내용이 주도권을 갖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성서를 읽게 되는 것은 흥미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 흥미 속에서는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간에 어떤 물음이 있다. 알고 싶다는 것은 물음이 있는 증거다. 그런데 이 물음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일 수 있다. 가령, 삶에 대한 물음이 성서에 접근하게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삶이 무엇인지 통 알 수 없기 때문에 성서에서 그것을 알아 보려고 성서를 읽는다. 어떤 이는 '삶은 이런 것이다'라는 대답을 가지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서를 읽는다. 또 어떤 이는 '삶이 이런 것이라고 하는데?'라는 반신반의를 갖고 성서를 읽는다. 그런데 이상의 물음은 삶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하고 싶은 즉 무엇이냐(What)를 묻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그 물음은 자기의 삶을 일단 객관화하고 그것을 정의하려는 관념적인 물음이 된다. 이에 대해서 삶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How)라는 절박성에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삶이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곧 '어떻게 할까'와 밀착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변적인 물음, 삶에 대한(about) 물음이 아니라 삶의(of) 물음이다. 물론 이러한 물음에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전이해가 작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이해가 자기 삶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묻는 것이며 그렇게 물을 때 그 전이해는 후퇴되고 전체적으로 내 실존과 성서가 대결하게 된다. 이러한 물음 앞에 성서는 그 이상 일반 진리거나 어떤 통칙(通則) 같은 것이 아니고, 내게 직접 주는 말(Anrede)이 된다. 이렇게 묻게 될 때는 성서의 내용과 나 사이의 완충 지대는 없고 그것에 삶의 주도권을 주든가, 아니면 그것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설교자나 듣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고 믿으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설교는 종종 하나님의(of) 말씀이 안 되고 하나님에 관한(about) 말이 되고 만다. 왜?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성서를 실존적으로 묻지 않고 설교 준비를 했을 때, 따라서 그 설교가 듣는 자의 실존적 물음에의 대답이 되지 않고 그들의 전이해의 주변을 돌았을 경우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이 성서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1) 성서를 어떤 교리적인 테마를 풀이할 목적으로 읽는다. 그럼으로써 성서를 기성의 교리를 위한 시녀로 전락시킨다. (2) 교회의 치리를 머리에 두고 그것이 어떻게 처리돼야 할 것인지를 이미 결정하고 그것에 맞는 성서구절을 찾거나 또 그러한 자기 결정에 맞게 아전인수한다. (3) 어떤 제목을 정하고 그 제목에 맞는 성서의 구절들을 찾거나 또는 그렇게 해석한다. (4) 이상의 어떤 전제에 덧붙여 작용하는 것은 교사(敎師)의식이다. 교사 의식은 성서를 읽을 때 자기 실존과의 대결을 거치지 않고 곧 이미 알 수 있는 대답을 위한 자료로서 성서를 찾거나 또는 설교의 테크닉에 치중하게 함으로써 성서를 중심하는 듯 하면서 실은 성서의 내용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는다.
성서를 소중히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성서에서 새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경향은 설교를 듣는 자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가령 설교를 들은 후 은혜를 받았다고 감격할 경우 대부분이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해답이 재확인됐거나 자기의 염원하던 바가 뒷받침 됐을 경우다. 이런 경우, 그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자기의 전이해 또는 소원을 더 뚜렷이 들은 것이다. 즉 그는 자기의 전이해를 설교에 반사해서 다시 그리로 되돌아옴으로써 새로운 말씀에 주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끝끝내 자기 관철을 하는 것이다.
참 설교는 성서의 현실과 듣는 자의 실존을 직접 마주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현실이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 하는 말씀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를 듣는 자의 자명화(自明化)인 지식, 관념화된 안주처가 그 뿌리까지 파헤쳐질 때 가능하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한 사람이 '성서는 복된 말씀이다'라는 전이해를 갖고 설교를 듣는다. 그에게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 꼭 예수의 말씀대로만 하시오'라고 설교한다. 이 설교는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다 줄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이다. 그런데 그의 복에 대한 이해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전에는 무당을 섬겼다가 지금 교회로 왔다. 그러므로 적어도 외적으로 큰 전향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복에 대한 그의 이해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무당도 기독교도 아니다. 오직 복이다. 그는 복받기 위해서 무당을 섬기다가, 이제 기독교로 온 것은 그 복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가난하다. 그러므로 복이란 바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설교는 그에게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됩니다'로 들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에게 이 설교는 아무런 새 것도 갖다 주지 못했다.
그런데 설교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본문으로 설교를 하게 된다. 이 말씀만 되풀이 하면 어떻게 될까? 그에게는 '부자가 될 것이다'를 첨부해서 받아 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천국이 저희 것이오'다. 이것도 해석하지 않으면 천국이란 바로 부와 관련된 것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될 터이니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그 본문의 뜻이 바로 전달될 때는 우선 그 복에 대한 이해가 흔들릴 것이다. 그는 '부하면 복되다'라는 사실을 자명적인 공리처럼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존적인 물음에서 떠나 있다. 그에게 '부한 것이 복이 아니다'라고 하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복이라는 그의 자명적인 이해가 뿌리째 파헤쳐져야 한다. 그에게 이 본문이 제대로 설교됐을 때는 가난하기 때문에 부의 노예가 되어버린 자신이 폭로될 수밖에 없으며 그와 동시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복이란 뜻이 전적으로 뒤집어질 것이다. 이때 그는 정말 성서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가 성서의 현실에 직면한 것은 그의 욕구가 성취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욕구, 그의 물음, 그의 추구의 내용이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어떻게 하랍니까'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본 강론에서 성서 본문의 해석을 설교 구성과 관련시켜서 구체적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는 본론에서 취급하기로하고 설교를 위한 성서 연구에 대한 요건들을 말해 보려고 한다.
첫째, 설교학에서 말하는 소위 '제목설교'와 '주석설교'라는 구분이 옳은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마치 '제목설교'는 주석이 필요 없다는 인상을 짙게 하며 주석설교는 성서강해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아무리 제목이 정해져 있어도 그것에 해당하는 어떤 본문을 택한 이상 그것에서 주제가 발견돼야 하며 성서 자체를 직접 취급하는 경우에도 그 안에서 한 주제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제목을 먼저 정하고 설교 준비를 하거나 본문을 정하고 제목을 찾거나 간에 성서를 대할 때에 어떤 결론에로 유도할 것을 미리 정한 데서 떠나 본문에서 밝혀지는 결론 그대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기본적인 자세의 확립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자명적인 이러한 자세가 제목을 정했을 때 흔들려 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원칙적으로 소위 제목 설교를 찬성하지 않는다. 비록 제목을 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서를 향한 하나의 물음이어야 하며 만일 그 제목이하고 싶은 말의 결론이라며 그는 출발부터 성서에서 무엇을 기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사평론이나 수필 같은 얘기로 시종하고 어느 한 부분에 성서 본문을 첨부해 버리는 따위의 설교는 연설아지 설교는 아니다. 설교자는 본문에서 문제를 찾고 대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와 대답을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로 확대시켜야 비로소 성서 주도권을 주는 설교가 된다.
둘째, 본문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언어들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앞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문에 익숙해야 할 것은 말할나위 없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되도록 여러 가지 번역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주석을 읽기 전에 아무 전제 없이 본문을 되풀이해서 읽고 생각할 것을 권한다. 본문을 놓고 어디에 중심이 있으며 어디가 불투명하며 어느 말, 어느 논리가 현대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지를 검토하고 난 다음에 주석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해된 내용을 오늘의 상황의 틀에 넣으면 거기에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럴 때 지금의 말로서 오늘에 사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어떤 본문이 정해졌을 때 그 본문과의 평행구들과 또 그것과 내용적으로 상반되는 듯한 본문들을 가능한 대로 살펴서 대조하면 그 본문의 뜻의 이해에 있어서 편견을 최소한 방지할 수 있으며 동시에 본문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한 복음서의 경우에는 다른 복음서의 병행절을 꼭 함께 참조함으로써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밝힐 것이며 같은 테마가 상반되는 듯한 것—가령 율법의 이해 같은 것—을 찾아서 둘의 긴장 속에서 정한 본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성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말씀들이며, 또 구체적인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따라서 설교에서 여기저기의 다양한 말씀들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삼가야 할 것이다. 비록 피차의 모순이 드러나더라도 정해진 본문 자체에 충실해서 그 뜻을 그대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의 제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디까지나 정해진 본문에 주도권을 주라는 뜻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다음부터 성서 해석사를 소개하고 성서 본문들을 골라서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세계와 선교』 197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