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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설교(1)
1. 머리말

신약성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이른바 역사서로서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고, 그리고 편지들이다. 각 편지들은 한 사람이 직접 쓴 것들이기 때문에 그 사상에 일관성이 있다. 비록 그 안에는 저자의 말이 아니고 전승된 단편들도 섞여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저자에 의해서 일관성 있게 배열 풀이됐으므로 그 뜻하는 바는 뚜렷하다. 그러나 복음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까닭은 우선 복음서는 예수 자신이 쓴 것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씌어졌으며, 둘째 그 기록된 것은 직접 구술된 바를 필기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그 원형을 찾기란 힘들다. 셋째 그런데 그것이 전해질 때는 어느 민족 설화처럼 자연스럽게 유포된 것이 아니라 처음 교회에 의해서 많이 해석되어 일정한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본래 뜻과 교회에 의해서 해석된 바를 가려내기란 힘들다. 넷째 이와 관련된 것으로 그 전승도 꼭 한 계통을 통해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계통을 통해서 전해졌기 때문에 같은 내용인 것은 틀림없으나 서로 차이가 있으므로 어느 것을 선택할지 힘이 든다. 가령 네 복음서를 보면 평행의 내용인 것은 분명하나 그 내용도 다른 것이 있으며 또 그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다른 관련 속에 수록됐다. 그러므로 언제나 네 복음서를 비교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발견한 나머지 한때는 복음서에 대한 극도의 회의에 빠진 일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비유들이다. 이 비유들은 비교적 그 원형이 보존돼 있다. 까닭은 그것은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승될 때 어느 부분을 탈락시키거나 변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에 대한 해석이 각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르나 대개의 경우, 다른 연관 속에 이용했거나 아니면 앞 또는 뒷 부분에 어떤 것을 첨가했거나 또는 약간 변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내기는 비교적 쉽다. 그러므로 비유가 다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역사의 예수 문제의 와중 속에서 심하게는 그의 참 뜻이나 모습에 큰 회의를 제기했을 때도 이 비유만은 거의 의심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녔다고 했으며 또한 그것은 예수의 참 뜻을 재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뜻을 옳게 해석하면 예수의 참 뜻을 전하는 데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먼저 예수의 비유들을 몇 가지 골라서 설교의 자료로 삼기로 한다.

2. 비유의 성격

우선 비유를 풀이하기 전에 비유에 대한 예비 지식으로 그 성격과 구조성을 소개해 본다.

1) 비유의 유형

우리말로 비유라고 통틀어 부르고 있지만 유형적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상언(像言, Bildwort) : 이것은 민속적으로 전해 내려 오는 격언과 같은 것이다. 가령 성서에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앞선 자가 뒤서고 뒤선 자가 앞선다. 또는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지 못한다 등이 그런 것이다. 상언의 특징은 삶의 지혜가 내포되어 있는데 많은 삶의 경험에서 온 유산이라고 할 것이다. 격언 중에는 이중적인 것이 있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마 10:24).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 없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 없다(마 7:9-10)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상어를 단순히 삶의 지혜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서 다른 사실을 밝히는 것이며 이것이 그 중심이다. 그렇게 직결 해서 상어를 이용한 예로써 지금 예를 든 마태복음 7장 9-10절 뒤를 이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의 뒤를 이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다"(막 2:17) 등이 그것이다.

 

(2) 은유(Metapher): 이것은 상언처럼 그 자체에 지혜가 포함된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 중에 특별한 점으로서 다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심볼)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왕이라고 한 것(이 경우에 특수한 점은 그 전권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결혼잔치로 비유 한 것(이 경우에는 기쁨이라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소금(마 5:13),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빛(마 5:14), 좁은 문은 하나님 나라의 길로, 큰 문은 멸망의 길(마 7:13-14) 또는 띠를 긴장, 등불을 준비의 상징으로 쓰는 것(눅 12:35) 등이 그 예다.

 

(3) 비유(Gleichnis):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고 반복될 수 있는 상태나 과정을 빌어서 "이와 같이"라는 접속구를 붙여서 다른 뜻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누록의 비유를 빌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한 것(마 13:13), 또는 백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지作눅 15:4-7)의 얘기에 이어 "이와 같이"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 등이 그것이다(그외에 눅 17:7-10; 막 4:26-29; 눅 11:5 등). 그런데 비유증거는 상언에서 발전된 것도 있다.

 

(4) 특례(Parabel): 이것은 어떤 얘기를 "이와 같이"를 연결시켜 어떤 뜻을 설명한다는 데서는 비유와 같다. 그러나 다른 점은 비유는 일상성적인 예인데 대해서 파라불은 이례적인 얘기다. 가령 포도원 주인의 예(마 20:1-15), 밀밭의 잡초에 대한 주인의 관용(마 13:24- 30), 두 아들의 얘기(마 21:28-31), 두 빚진 자를 탕감한 주인 얘기(눅 7:4 이하)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 특례들은 일상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얘기다. 바로 그렇기에 듣는 자가 감동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5) 예화(Beispilerzäklung): 이것은 파라불과 비슷하나 사실과는 상통하는 이례적 얘기인데 대해서 예화는 한 시범이 될 수 있는 경우를 이용한다. 가령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눅 10:29 이하), 어리석은 부자(눅 1:16 이하), 부자와 나사로의 예(눅 16:19-31),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9-14) 따위가 그 예다.

 

(6) 유추(Allegorie) : 유추는 어떤 것을 상징으로 다른 뜻을 설명하는데 쓰인다는 데서는 은유와 같다. 그러나 온유는 말하려는 것의 대명사로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데 대해서 유추는 어디까지나 암시적인 것으로서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적대자나 전혀 상관없는 자에게는 쓰여지지 않는다. 가령 그리스도를 신랑, 결혼을 앞둔 처녀를 기다리는 교회로, 올 그 나라를 결혼식으로 상징한 것이 그 예다.

2) 비유의 구성

대체로 비유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서두, (2) 핵심, (3) 끝말이 그것이다.

서두는 어떤 얘기에서처럼 한 장면 또는 상황의 서술로 시작된다. 가령 "두 사람이 성전에 갔다"(눅 8, 10) 또는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등이 그 예디(눅 15:15; 12:16; 17:7; 14:28 등 참조). 또 질문 형식으로 된 것도 있다. 가령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마 18 :21) 또는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막 4:30)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비교의 양식으로 된 것도 있다. 가령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 자는"(마 13:24) 또는 하나님 나라는 … 한 사람과 같다(마 18:23; 22:2)가 그 예다.

핵심은 그 비유된 말하려는 내용과의 초점이 맞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비유는 바로 이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사용됐기 때문에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령 잃은 양의 비유를 예로 들어보자. 잃은 양의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찾는다는 것일까? 이것은 앞 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서두에는 잃었다는 것이 있다. 끝말은 "이와 같이… 기뻐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잃은 것을 찾았다. 그 사이에 부각된 것은 기쁨이다. 사실상 이 비유의 초점은 기쁨에 있다. "찾으면 … 기뻐하며 … 나와 함께 기뻐하시오" 등이 그 핵심으로 되어 있다. 이 핵심을 찾는 것은 비유해석의 생명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수적인 것에 매여 본뜻을 놓쳐 버리게 된다. 만일 여기서 찾는다는 것이 중심이라면 그것에 대해서 더 많은 묘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이렇게 찾았다는 서술은 전혀 없이 그저 그를 찾은 기쁨에로 집중한다.

끝말: 끝말은 "이와 같이"라는 짧은 사용구로 된 것(눅 15:7, 10) 또는 판단을 요구하는 물음(마 21:31) 또는 그 요점을 요약하는 구절(마 20:16)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듣는 자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끝말이 없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은 그 얘기 자체에 이미 끝말이 반영되었을 경우다.

이 정도로 기초적인 설명을 끝내고 이제 구체적인 비유들을 들어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잃었던 아들의 비유(눅 15:11 이하)
1

이 비유의 핵심은 어디 있는가? 이것은 모든 비유 중에 가장 길고 비교적 상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핵심을 얼른 찾기 힘들다. 이 비유는 여러 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를 버리고 독립하려는 아들, 떠나서 방탕하여 많은 고생을 한 일, 후회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아들, 기다리는 아버지, 그를 환영하는 아버지, 그것을 질투하는 그의 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강조점들을 일일이 집중적으로 관심하면 여러 개의 설교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부모를 반역한 죄로 고생하게 되는 데 초점을 두어서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반역한 데 있다는 것으로 일관할 수도 있고, 또는 자식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 초점을 두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할 수도 있다. 또는 그 형에게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질투를 테마로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러한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을 산발적으로 뜯어내면 전체 속에 담긴 뜻을 깨뜨려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그 핵심을 찾고 본 다음에 그것에서 그 부분적인 것을 보아야 비록 한 면을 강조해도 산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서두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을 수 있느냐"는 그 결론을 대신한다. 여기서 이 비유의 주인공이 누군지가 분명해졌다. 즉 그 어떤 사람, 즉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는 그 돌아온 아들에 대한 것이 중심 테마가 아니라 바로 그 아버지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 또는 "돌아온 아들"이라고 한 것은 본 비유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우리말 새번역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라고 표제를 붙쳤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아버지를 부각했기에 좀 나은 표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랑의 아버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아버지에게서 어느 점이 핵심인가? 재산을 나누어 준 아버지인가? 돌아온 아들에게 달려가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맏아들을 꾸짖는 아버지인가?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가 어떻게 클로즈업 됐나? 그것은 바로 기쁨이다. 즉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는 아버지다. 이 비유에는 "이 날을 즐기자"(23절b)와 또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을 수 있느냐? 등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두 번 나온다. 따라서 이 비유를 요약하면 잃었던 아들을 맞아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가 된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이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 비유와 그 위에 있는 두 비유(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돈의 비유)와 비교하면 확실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1)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어떤 목자가 백 마리 양이 있었다.
어떤 여인이 열 닢 은돈을 가졌다.
(2)
한 아들이 떠나 버렸다.
한 양을 잃어버렸다.
한 은돈을 잃어버렸다.
(3)
아들이 돌아왔다.
잃은 양을 찾았다.
잃은 은돈을 찾았다.
(4)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이 날을 즐기자고 한다.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하여 주시오.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서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

 

이상에서 보면 (4)가 거의 꼭 같은 것은 볼 수 있다. 그리고 (2)와 (3)에 있어서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아들의 처지나 심정을 그렸는데 잃은 양의 비유나 잃은 온돈의 비유는 그저 찾았다고만 되어 있다. 까닭은 양이나 돈의 입장은 말할 수 없는데 대해서 아들은 인간이니까 그의 입장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들의 심정이나 처지를 그린 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의미가 없고 오직 나의 아버지의 사랑 또는 그의 기쁨을 더 강조하기 위한 서술법에 지나지 않는다.

끝으로 이 비유에서 특이한 것은 맏아들의 등장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비유에 두 초점이 있다고 하는 이도 있고 또는 이것은 첨가된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것도 오직 아버지의 기쁨을 재천명 하기 위한 서술법에 불과한, 즉 이 맏아들 자체의 심정이 중요하지 않고 그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더 두드러지게 한 것 뿐이다.

그러면 이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초점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 설교의 과제일 것이다.

2

루터는 성서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현실을 발견, 구분하는 것을 그 해석의 열쇠로 봤다. 이것은 분명이 편리한 개념 구분이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서 불평하는 맏아들은 율법의 현실을 대표한다.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이 아버지를 섬긴 아들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는데 아버지 재산을 창녀와의 향락을 위해 탕진한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 불평이다. 이것은 인과율적인 율법의 현실을 대표한 것이다. 격지은 자는 벌을, 선을 행한 자에겐 상을, 이것이 바로 율법의 현실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이 비유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어떤 수난을 당하는지를 묘사한다. 그는 돼지를 부러워할 정도로 비참해진다. 그러나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그의 "업보"다. 그러니 아무런 연민의 정도 허락되지 않는다. 율법의 현실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용서라는 것이 없다. 물론 갈라진 사이가 다시 화해하는 길은 있다. 그것은 범죄한 자가 자기의 잘못을 어떤 형식으로 보상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 이 아버지의 태도는 대조적이다. 이 비유는 그 아버지의 분노 같은 것은 조금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아들에게 어떤 조건을 내세우거나 또는 서약을 시키는 따위도 없다. 그저 무조건 돌아온 그를 얼싸 안고 그에게 아들의 권리를 그대로 되돌려 주고(의복, 반지, 신) 그리고 그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베푼다. 그의 행위는 법이니, 정의니, 교육이니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는 그런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의 철저한 관철이다. 그것은 그 불평하는 맏아들과의 대화에서 잘 부각된다. 율법적인 시비를 따지는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단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의 기쁨은 철저한 은총을 드러낸다. 이 은총에는 아무런 교환 조건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철저성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복음의 성격이다.

이 본문에 의한 설교자는 이 이른바 복음성을 뚜렷하게 밝혀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 비유로 죄를 규탄하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그 본뜻에 역행하는 결과가 된다. 이 비유에는 과거를 묻고, 그것을 청산하라는 데 그 본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너를 무조건 사랑한다는 것이 주제다. 그러므로 죄를 청산하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면 그 아버지에의 길을 가로막는 결과가 된다. 아니, 이 비유는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를 무조건 받아들였다(현재 완료)가 전제된 다음의 길을 문제로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설교는 못 된다. 설교는 추상적인 진리를 추상적인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인간에게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비유의 청중이 누군가를 살펴야 한다. 복음서마다 같은 내용의 비유라고 해도 그 청중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그 본뜻은 다르지 않지만 이 비유를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즉 현실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가 달라진다.

가령 마태복음에는 이 비유는 없으나 이것과 상통하는 잃은 양의 비유가 있다(마 18:10-14). 이것을 누가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볼 수 있다. 마태는 "너희가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그리고 끝말에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길을 잃는 것을 원치 않는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 한 말인가? 이것은 교회원들에게 한 말로 되어 있다. 즉 교회 안에서 비록 적은 자라도 업수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다르다.

누가는 서두로서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있다하는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끝말로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여기의 청중은 누군가, 그것은 바로 죄인을 무조건 용납하는 것을 불평한 율법의 자리에 선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의 비유의 청중은 누군가? 그것은 바로 그 맏아들이 대표한다. 그의 불평은 잃은 양의 비유의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꼭 같다. 따라서 이 비유는 법만 내세우므로 약한 자를 소외하는 교만한 무리들에게 향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만이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할 수 없는 자들이다. 저들은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를 못 가지고 의무와 권리라는 법적 관계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들이다. 그것은 형제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리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불행한 자를 "측은히" 여기며 그와 더불어 슬퍼하고 또한 기뻐하는 마음을 가로막는 일체의 요소들, 즉 사랑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배제해야 한다는 명령이 반영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구체화될 수 있는 실마리다.

설교자는 그러한 자리에서 오늘의 맏아들, 오늘의 바리새인 사랑을 가로막고 형제와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 내에도 있을 수 있고, 교회 밖에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사회제도나 풍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여간 현재에 있어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 주변에서부터 세계 전체의 조류에까지 확대시켜서 밝혀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설교는 사회비판도 될 수 있고, 교회비판도 될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이른바 비판을 위한 사회비판가의 그것이 아니다. 설교는 부정에서 머물 수 없고, 그것은 언제나 긍정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그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설교자는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막는 온갖 요소들을 제거하는 길닦기의 역할로서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비판 속에서 해방의 기쁨이 전달되어야 한다. 즉 이 비판에서 바로 그런 것들에 의해서 소외되고 구속되어 있는 인간들이 자기 콤플렉스에서, 사회의 압박에서 해방이 된 기쁨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세계와 선교』 197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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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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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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