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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설교(2)

복음서의 비유들은 일정한 경향을 가진 것들이 있다. 그중에 겨자 씨의 비유(막 4:30-32; 마 13:31-32; 눅 13:18-19), 뿌린 씨의 비유(막 4:26-29), 누룩의 비유(마 13:33; 눅 13:20)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다. 그러면 이런 비유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우선 마가의 자료로 세 복음에 다 있는 겨자씨의 비유를 분석하고 그 전체를 관련시켜 보자.

겨자씨의 비유(막 4:30-32; 마 13:31-32; 눅 13:18-19)

우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어떤 것인지를 이 비유에서 찾아서 설명하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심에서 해석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수밖에 없다. 가령 씨라든지 또는 새가 깃들일 수 있는 나무 따위를 그 나라의 본질로 파악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풀이해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안식할 수 있는 무한한 곳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나라의 초대의 설교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나라의 크기를 설명하려고 했다면 아무리 자라야 3미터밖에 자랄 수 없는 겨자나무에 비기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 안식처라는 뜻을 이것으로 나타내는 것도 전혀 적당하지 않다.

설령 어떤 방법으로든지 적당히 그 나라의 실상을 설명한다고 해도 이 비유의 한 측면만 해석하고 그외의 것은 묵살한 것이 된다. 가령 본 비유에서 이 씨가 특별히 작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땅에 뿌려질 때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지만'이라고 한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제거된다.

피안적인 구원에 대한 동경과 환상에 젖는 경향이 비교적 강한 한국의 교인들 앞에 선 설교자는 그들이 욕구에 적응해서 어떻게든 그 나라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싶은 충동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본 비유에서는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찾아 볼수없다.

그런데 비단 이 비유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복음서에 하나님 나라 자체를 묘사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나라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면 생명(막 9:46) 또는 식탁을 함께 함(마 8:11; 막 14:25) 정도다. 하나님의 나라 비유라고 한 것도 모두 그 나라에의 초대거나 그 앞에 선 인간상 아니면 그 나라의 도래의 확실성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그 나라를 그려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가장 작은 것이 어떤 초목보다 더 크게 자랐다는 것을 강조한 점이다. 즉 작은 것과 크게 된 것을 대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무엇을 말하자는 것인가? 두 가지 다른 점에 강조점을 둘 수 있다. 하나는 작던 것이 그처럼 크게 자랐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구석에서 미미하게 시작되나 그것은 점점 자라서 마침내 큰 것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천국은 이 역사 안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사회 윤리에 관심하는 이들, 가령 미국의 '사회복음'(social gospel) 따위는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이 땅 위에서 사회정의를 세우고 복지사회를 이룩해 나가는 것을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단계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설교자가 이런 것을 강조할 때 청중의 반응은 곧 둘로 갈릴 것이다. 즉 이 세상이 점점 잘되어 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더욱 힘을 얻고 긍정할 것이며 세상이 오히려 타락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큰 중요한 근본 문제가 있다. 첫째 이러한 설교는 듣는 자의 객관적 판단력에 호소하는 것이지 그의 신앙적 결단에 호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는 실증론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증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이라면 설교보다는 차라리 과학적 증명, 사회학적 분석이나 구체적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설교란 그런 것일까? 둘째 큰 문제는 복음서에는 그 나라의 실증을 보여 달라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러한 요구를 책망한 곳이 여러 곳 있다는 사실이다(막 8:11 이하; 마 12:38 이하). 그리고 그 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 이하)고 한다. 복음서에는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눅 17:20 이하). 과거에 이 역사 안에 일어나는 징후를 관찰하여 그날을 측정하여 많은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린 예가 얼마든지 있는가 하면 또 역사의 어느 시기나 어떤 세력을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시켜서 결국 독재에로 휘몰게 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하여간 설교자는 이 비유에서 발전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확신시키려면 이러한 문제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가장 작은 것이 큰 것이 됐다는 이 대조에서 그 본뜻을 찾을 수도 있다. 즉 자랐다는 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의로운 사실 자체다. 즉 뜻밖의 일처럼 사람의 예상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본뜻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기적적으로 도래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만일 이렇게 본문을 파악한다면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나라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 비록 이 세상은 암흑 속에 있고 부조리와 모순으로 차 있어도 그런 것에 구해받지 않고 그 나라는 돌연히 도래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세계의 현실이 영원한 아성처럼 보여도 그것에 굴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깨어 있어 그 나라에 의한 희망 속에서 이 세계의 악과 싸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나라는 숨어서 자라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숨어 있는 한 그것의 출현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돌연한 사건인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본문의 뜻인가? 이 비유 자체만을 볼 때 두 가지 주장에서 하나만을 선택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이제 이 비유와 같은 성격을 가진 다른 비유들을 보자.

뿌린 씨의 비유(막 4:26-29)

우리 성서번역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쳤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씨가 싹이 나고 자란다', '처음에는 싹이 돋고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올 찬 낟알이 맺힌다' 등 자라나는 순서를 자세히 서술한다. 이점에서 보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발전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반면에 농부는 씨를 심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하는 동안에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땅이 열매를 맺게 하는 데(28절)로 번역된 원문은 땅이 '자율적으로'(automatic)라는 말이 첨가돼 있다. 이것은 농부가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다는 것과 그 씨가 그렇게 자라는 것을 대조시킴으로써 자라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그 성장의 경탄스러움에 액센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놀라운 사건으로 도래한다는 데 이 비유의 본뜻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설교는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와 상관없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에 그 나라가 네 손 여하에 달린 것이라면 그것은 은총의 나라일 것도 없고 한계를 느끼는 인간에는 절망밖에 남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아니고 네 힘은 하잘 것 없지만 너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정말 복음의 설교일 수 있을 것이다.

누룩의 비유(마 13:33; 눅 13:20)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하고 여인이 가져다가 가두어서 말 속에 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를 부풀게 했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도 누룩에 많은 가루를 모두 부풀게 했다는 것만 보면 그 나라는 발전한다는 데 본뜻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을 뿌린 씨의 비유와 관련시켜 볼 때 이 누룩을 가두어 넣은 이 여인의 능력과 그 누룩의 능력을 대조시킨 것으로 보면 또다시 그 나라가 점점 자라서 팽창해진다는 데 액센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경탄스러운 사건으로 온다는 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인과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성격을 가진다. 설교에는 이 근본적 성격 이 언제나 뚜렷해야 한다. 그러한 그 나라가 역사 안에서 자라고 있다든지 아니면 돌연히 초자연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의 구별은 그리 중요치 않다. 요는 그것은 인간의 제한, 게으름, 불행, 절망 등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부정도 악한 세력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데 있어서 그 청중의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이 달라져야하는 것이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청중에 따라서 이 비유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바로 이 청중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가령 예수가 이런 비유를 말씀했을 때 그것은 듣는 자에게 어떻게 해석됐을까? 마가와 마태에 의하면 그 대상은 이스라엘 군중이다. 이 군중은 나라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고 새로운 세계(하나님의 나라)가 오리라는 약속을 알고 있지만 이미 지쳐 있었을 것이다. 메시아 운동에 의해서 무참하게 피만 흘린 사실이 아직 기억에 새롭다. 유대교는 벌써 지도층의 독점물처럼 됐고 이들은 종교적 멍에에서 시달려 왔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율법에서 볼 때 아무런 구원의 보장이 없다. 어디로 보나 그 나라가 올 만한 여건이 형성돼 있지 않다. 그런데 만일 저들에게 그 나라의 도래는 그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해석됐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까닭은 당시의 율법학자들도 그러한 약속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자신이 없는 데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전체가 체념 속에서 생기를 잃고 있다. 만일 위의 상상이 맞는다면, 저들에게 그 말씀이 복음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어떠한 처지야 어떻든, '당신들이 비록 전능하고 죄 속에 있다고 해도 그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상황이나 생활에 저해받지 않고 그 뜻을 관철할 것입니다'로 이해될 때일 것이다.

그런데 그후의 그리스도인들이(초대)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해석했을까? 저들은 예수를 통해서 그 나라가 곧 도래할 것으로 믿었으나 예수는 죽음으로 그생을 끝냈다. 저들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저들은 다시 그 나라가 곧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오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받아 고향을 등져야 했다. 수 십년이 지나도 그날은 오지 않는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들은 예수의 사건을 통해서 이미 그 나라는 시작됐다. 그 씨는 심어졌다. 누룩은 가루 속에 넣어졌다. 그것은 겨자씨만큼 작은 일이었다. 아직도 어떤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날이 반드시 온다. 그것은 예수의 사건이 입증한다. 이러한 결론에서 저들은 다시 용기를 얻고 복음을 전하는 전선에서 분투할 새로운 자세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경우에 저들은 그것이 단순한 그 나라 도래의 약속만이 아니라, 이미 그 나라가 태동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이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상은 실의에 빠져있다. 정치적으로는 국제정세로 보나 국내정세로 보거나 절대로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현재는 경제 공항 속에 있다. 이들에게 그 나라가 자라가고 있다고 할까? 만일 저들이 어디 좀 보여달라고 한다면 무엇으로 대답할까? 교회를 말할까? 그러나 교회의 형편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저들에게 그말이 납득이 될까? 만일 저들에게 그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못 보내 준다면 저들은 어디서 그것을 찾을까? 저들은 쉽게 메시아 왕국을 구체적으로 약속하는 신흥종교에로 달릴 가능성만 크게 해 주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이들에게 알려야 할 중요한 것은 그 나라는 어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도래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할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즉 그 나라와 어떤 종단, 어떤 장소, 특정의 시기와의 동일화의 경향을 막아 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라고 할 것인가? 먼저 저들을 그 체념 상태에서 건져 주는 일이다. 상황에서 절망하고 정의대로 사는데 자신을 잃은 저들에게, 그래서 자기를 폐해 버린 저들에게 그 주저앉은 상태에서 탈출해 나와 미래를 향해 개방된 자세와 확신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저들이 침체 상태를 분석해 주어야 할 것이다. 저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나 또 저들이 무서워하는 것들이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폭로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다시 자신을 찾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의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 하는 데로 방향을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선의, 공포, 체념 등에서 해방시켜서, 지금 여기서 그들의하는 일에 정진하게 하는 일이다.

자기하는 일에 정진하도록 하라고 했다. 어떻게? 가령 씨를 뿌리는 농부, 또는 부엌에서 일만 계속하는 주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데 지친 사람들, 저들은 그 일을 계속하면서 어떤 희망을 걸지 않고 그저 마지못해한다. 내가하는 일의 결과는 뻔하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일을 하면서도 기쁨은 없다. 그러한 그들에게 더 많이, 더 부지런히 하라는 채찍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주는 일이다. 그것은 씨를 뿌리고 그것에 해당한 수확을 걷을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고, 당신은 그저 심었을 뿐이나 당신이 아닌 대지가 그것을 당신도 모르게 자라게 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제한된 일 속에서 큰 일을 하고 있으며 당신의 삶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당신의 것인 듯 하면서 이미 당신의 힘 밖에 있는 처지에 있으나 그것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당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구원에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강단을 안중에 둘 때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씨를 심는다, 누룩을 둔다를 심전(心田) 또는 심분(心粉)에 뿌려졌다고 해석하는 일이다. 이것은 불교 영향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개인의 구원만 강조하게 될 뿐 아니라, 자신에 실망한 저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기 쉽다. 그 나라는 사람의 마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이 역사에 도래한다. 밭, 가루, 서말은 절대 개인의 마음일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전체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구원'이라는 데 너무 집착해서 오히려 자기에게서 떠나지 못하므로 다시 율법주의자로 떨어지고 있는 저들을 전체의 구원에 눈을 돌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문제에 매여 전전긍긍 하는 상태에서 전체의 대열에 참여한 감격을 안겨 주어야 할 것이다. 씨를 심은 농부가 이것이 자라나야 내가 먹고 살 것인데 하는 생각에 잡혀 있는 한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환희를 느낄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이해관계에서 풀려 나와서 '생명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환희를 알게 된다. 그럴 때 그는 수수방관하고 있게 되지 않는다. 그는 그 씨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를 제거하고 해를 가리워 주고 물을 주고 할 것이다. 물론 자기 구복을 위해서도 그런 일을 한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해도 일의 보람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우리 교회의 청중은 너무 이기적인 신앙에 매여 있기에 그 나라에 참여한다는 환희를 모른다. 그러므로 당신이하는 일은 비록 작은 일이나 그것은 실은 그 나라를 오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러한 각성은 그로 하여금 생활 전체를 전체 속에 결부시키게할 것이다. 이럴 때 그는 이웃, 동리, 그리고 크게는 국가,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참 구원은 내가 구원을 받겠다는 집념에서까지 해방될 때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 구원보다 그 나라의 도래에 참여한다는 기쁨을 가질 수 있을 때다. 다음에 비판받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설교가 듣는 자들을 재래의 '전도'라는 형태에 몰아 넣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제가하고 있는 일은 할 수 없이하는 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씨를 심고 그것이 경의스럽게 자라나고 있는 사실에 감격하고 그것을 가꾸는 농부처럼,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격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세계와 선교』 197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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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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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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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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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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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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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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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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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부 통일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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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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