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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보수

지금까지 예수의 말씀에서 우선 비유들 몇 가지를 골라서 그 본문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이제는 예수의 말씀(로기온)들을 취급할 차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어떻게 전승됐는지와 그것이 복음서들에 있어서 어떤 관련에서 편집됐는지를 먼저 살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지면상 그런 것은 독자들 자신에게 맡기기로 하고 본론에서는 표제에 관계되는 예수의 말씀을 취급하려고 한다.

다음에 취급하려는 말씀들은 율법과 정면 충돌을 일으킨 것들로서 그 안에는 폭발물과도 같은 위험성이 내포됐다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동시에 새로운 역사의 싹이 나은 터전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에까지 해석을 확대하느냐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선언(막 3:1-5)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 자체만 읽으면 그 묻는 것과 대답은 극히 간단하고 자명적이다. 물론 선을 행하며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다. 우리가 만일 이 말씀을 누구에게 했는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 말씀에서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의 설교로 시종할 것이며 내용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 선이냐하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선이 무엇이냐라는 설명은 없고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평행시켰기 때문에 선이 무엇이냐는 추상적인 물음에 맴돌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특수한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이 말씀을 담은 틀에서 누구에게 하신 말인가가 드러나므로 이 질문은 아주 특수한 성격을 드러낸다. 이 말씀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를 놓고 송사하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송사자들은 바로 유대교다. 그 장소는 회당(Synagog)이며 때는 안식일이다. 누가는 예수를 송사할 구실을 찾는 자들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유대교의 율법의 수호자로서 바로 유대교의 율법의 엄격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씨를 일으킬 매개체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이다. 이것은 벌써 안식일 문제의 엄격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안식일법은 율법 중에서 가장 엄한 것으로 세밀한 규정이 있는데 그중에 병치료에 대한 조항도 있다. 안식일에 병치료도 금한다. 단 그날에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에만은 예외로했다. 그러니 한편 손마른 자를 치료한다면 그것은 안식일법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러한 청중을 향해 물으신 예수의 질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질문은 벌써 대답을 내포한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면 예수가 들으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대답은 천 만 번 옳지만 안식일법에 꼭 걸리도록 돼 있다. 예수는 이 사람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유대인(서기관, 바리새인)이라면 그렇게 질문했으리라, 그것이 바로 법적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질문은 법적 질문 대신 '윤리적' 질문을 함으로써 안식일의 뜻을 법조합에서 해제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마침내 안식일 자체마저 상대화해 버렸다. 까닭은 이 질문은 안식일에만 해당시킬 수 없고 월화수… 모든 요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선이나 사람 살리는 일은 특정한 날에만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거룩한 날'이라는 것은 따로 없게 됐다. 그러나 반면에 이 질문은 안식일만에 국한시켰던 '선한 것'을 풀어 놓아 일상생활 전역에로 확대시켰다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 말씀은 안식일법에서 볼 때는 혁명적이나, '선은 언제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보수는 철저하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주셨다라는 사고의 툴 안에서 볼 때 당연한 말씀 같다. 그런데 이것도 혁명적인 말씀이다. 그 말씀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내포한 격렬한 것인가는 마태나 누가에서 이 말씀이 삭제된 것에서도 곧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도 그 상황과 관련시켜서 그 청중이 누구인가를 상기할 때 그 말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 청중은 바리새인을 대표로 하는 유대교도이다. 저들은 예수의 제자가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안식일법에 저촉되기에 항의를 한 것이다. 안식일에 추수는 절대로 허락되어 있지 않다. 저들은 안식일을 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내심(內心)이나 구체적 삶의 상황은 아랑곳 없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고는 인간을 완전히 노예화하고 인간은 안식일법을 위해 존재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기에 저들은 인간을 사랑할 마음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인간을 돕는다고 해도 율법의 항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에 끝까지 인간 자체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라는 틀에서 보면 '사람은 안식일법을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전에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라는 측면은 완전히 잊어 버리다시피 한 것이 율법주의자들이다.

이런 사항에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폭탄선언이다. 이렇게 되면 율법은 상대화 내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또다시 정통적인 여호와의 뜻에 대한 보수적 신앙의 관철이다.

정결론(막 17:15-16)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도 그 자체로는 너무나 당연하며 다른 어떤 종교도 바로 자기들의 경건의 말씀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육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보는 한 이 말씀은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유심론적 설교, 또는 양심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도 율법(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무서운 비수를 품은 말씀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한 말씀이었다. 그러기에 마태에는 '밖에서'와 '안에서'를 국한시켜서 '입에서' '입으로'라고 변형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청중은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표로 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다. 저들은 음식 먹을 때의 손씻는 규례를 안 지킨 것을 송사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위생법이 아니라 정결법의 한 부분이다. 정결법은 바로 제의적(Cult) 율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제의법에 의하면 인간의 외적 정결행위가 바로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밖에서 사람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할 수 없다는 말씀을 구약 정결 법에 적용시키면 그런 것은 이 이상 의미 없다는 폭탄 선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에 있어서 불가능의 요소에 대한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까닭은 제사적인 요소가 상대화 또는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참된 제의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그것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심과 유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제물을 드리는 그런 제사를 요구한 것이 된다. 이점에는 이 말씀은 또다시 철저한 보수적인 입장에서 드러낸 것이다.

결혼론(막 10:1-12)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한마디로 하면 이혼 불가능이다. 이 말씀은 오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보수적이나 당시에서 볼 때는 또 하나의 혁명적인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시대를 역행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혁명적이 될 수도 있고 보수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것은 그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 말씀의 청중은 유대 전통사회에 사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모세가 이혼하면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율법을 이혼의 권리가 있다고 해석함으로 이혼에 있어서 여인의 문제는 전혀 문제로하지 않게 된 것이다. 율법이 허락하는 한 모든 것은 자유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거슬러 올라가서 본래 하나님의 뜻을 천명 함으로써 율법을 상대화홰 버린 것이다. 이것은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만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은 율법이라도 무효하다는 폭탄선언도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론에 이르러서 율법에서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한 동기는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한 탓'이라고 해명하므로 그 책임을 법률에서 인간에게 돌림으로 이혼을 하려는 인간의 바탕을 심판하고 있다. 이 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은 이혼할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꼭 이혼 해야 한다면 여자에게 자유를 주라는 말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혼하겠다는 생각이 이미 결정되고 그 합법화를 법률에 구하는 인간성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것이다. 요는 대인관계의 의무를 율법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오는 비인간적 도피성에 대한 봉쇄가 바로 이 말씀의 초점이다. 그런데 만일 또다시 이 말씀을 율법화해서 '이혼은 안 하면 된다'로 낙착지어 버리면 다시 이 말씀의 본뜻을 역행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이상의 예들에서 우리는 혁신적인 면과 보수적인 면을 보았다. 그러면 이같은 말씀들을 본문으로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물론 본문 해석에서 이미 그 방향이 제시된 것이지만 좀더 구체화하면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같은 말씀들은 누구에게 한 것인가를 밝힘으로 오늘의 누구에게 한 말씀인지를 살펴야 한다. 본문들은 유대교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게 한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바리새파도 서기관도 없다. 그러면 누가 오늘의 그런 부류의 사람인가? 우리는 쉽게 교리를 따지고 법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리나 법질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바리새파나 서기관들의 노력이 없었던들그 율법이 존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율법주의다. 그것은 그 율법자체를 화석화시켜서 인간의 삶 전반을 판단하는 도구로 삼고 있는 점이다. 율법적 조문으로 역사적 존재의 삶을 다 포괄할 수 없는데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율법주의자다. 이것은 일반법의 질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법에는 이른바 관습법이라는 것이 그 원초적 형태다. 그것은 성문화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더 깊이 인간을 포괄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문법으로 되어 합법화하는 순간 그 포괄성을 상실했다는 데도 법만능주의가 되어 사정을 모르는 비수로 변해 버린다. 그러므로 인간,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이 법이 오히려 인간과 그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같은 일이 교회 안과 밖에서 횡행한다. 가령 안식일법은 이른바 주일에 대한 시비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주일을 안식일법에 견주어 절대화하는 경우가 그렇다. '주일은 성일로 지켜야 한다'는 전제에서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은 자에게 그의 사정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를 규탄하는 경우 그 사람은 바로 바리새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이혼법에 상응한 것으로 가령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마태의 말씀을 '간음했으면 이혼할 권리가 있다'라고 해석하는 자는 모세법을 빙자해서 이혼을 마음대로 하는 유대교도와 다를 바 없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이거나 어떤 말씀을 곧 자기의 권리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특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고나 이같은 심판자들이 오늘 어디, 어떤 경우에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 말씀은 바로 그같은 준엄한 판단 밑에 눌려 자학하고 저 열감에 젖어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이 시대의 가치관에 의해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누가 그를 비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율법적인 사고에서 자기를 학대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설교할 때 설교자는 반드시 율법주의자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까닭은 그는 바로 일반이 단정하고 평가해 버린 그 기준을 제거함으로써 눌린 사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낡은 관념, 통상념에 대한 저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저항을 위한 저항이 되면 그는 또다시 바리새적 과오에 빠지게 될 것이다. 까닭은 그는 신념에 매여 그 눈 앞에 인간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그것 자체에 대한 비판에서가 아니라 그것에 눌려 있는 참 마음 사랑, 참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한 염원에서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이상 교회도, 주일도, 제도도 다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은 다 '인간을 위해 있다'라는 사실을 철저히 밝혀야 할 것이다.

이상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부정과 긍정의 관계다. 이 관계를 혁신과 보수라는 말로 표현했다. 설교는 반듯이 긍정에도 착륙해야 한다. 긍정은 영원한 것이다. 설교는 언제나 있어야 할 그리고 밝혀야 할 것에 착륙해야 한다는 뜻에서 보수적이어야 한다. 부정은 지나야 할 것, 없어져야 할 것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혁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의 긍정을 위한 것이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법에서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부정적인 것이 앞선다. 서술의 양으로 볼 때 그 부분이 훨씬 많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위해라는 짧은 말씀이 부정적인 면을 압도하고 나타난 바로 복음이다. 이처럼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이혼을 금했다는 부정적인데 머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에 대한 축복, 나가서는 여인들의 인권을 위한 적극적인 음성을 들려줘야 할 것이다.

(『세계와 선교』 197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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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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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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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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