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 잘못을 범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에서 이 문제의 일단면을 보았다. 그러나 그 뒤의 많은 비유들을 분석하지 않고 넘어왔기에 그 전모를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여기서는 비유가 아닌 예수의 말씀 몇 가지를 골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가장 관심해야 할 것들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오나?
그 나라가 언제 오는가? 이것은 누가에 있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이다(17:20). 그 나라가 언제 올 것인가? 이런 질문의 대답을 예수에게서 찾는다면, 다음과 같이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들이 있다.
나라가 임하소서(누가 11:2)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마가 1:15)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누가 11:20, 10:18 참조).
처음 것은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이것을 위의 질문과 관련시키면 그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고 이제 올 것, 즉 그 장래성을 말할 뿐이고 구체적으로 언제(쯤) 올 것이라는 암시가 없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를 아직 그 나라가 오지 않은 것임을 나타낸 데 있어서는 같다. 그러나 그것은 빨리 올 것이라고 했다. 우리 말로 '가까웠다'고 번역한 단어 engiken은 독특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학자간에 번역이 구구하다. 어떤 이는 "왔다"(has come)는 현재 완료동사로 번역하며, 어떤 이는 "태동한다"(wirksam)는 뜻으로 번역함으로써 "온다", "왔다"의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시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즉 이제는 준비할 여유도 없다. 문 앞에 다가 섰다는 뜻으로 본다. 하여간, 그 나라는 막연한 장래의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서 그 긴급 성을 나타내나, 분명한 것은 이미 그 나라가 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씀은 그 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사탄이 번개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고 한 말씀과 관련시키면 그 나라는 이미 왔다는 것이 된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만일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설교할 때 그 나라의 시간성의 어느 하나를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하면 수습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설교에서 그 나라가 어떤 것이냐를 서술하는 것도 허락되어 있지 않음을 보았는데(비유분석에서) 그와 동시에 그 나라의 시간성에 관해서 소홀하게 단정하는 것도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나라의 도래는 아직 요원하다고 하면 그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기 쉽고 그 나라가 곧 임박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결국 어느 해, 몇 날 몇 시에 그 나라가 온다는 등의 맹랑한 계산까지 함으로 듣는 자로 모든 일손을 놓게 하고 흰 옷을 입고 하늘만 쳐다 보게 한 경우와 같은 데까지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며, 그 나라는 이미 도달했다고 하면 이른바 내재한 그 나라를 이 땅위의 어떤 기존 질서의 어느 것에서 찾고 그것과 일치 마침내 절대화하는 위험에 빠뜨리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본문들을 갖고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위의 세 가지 예들을 시간적으로 이해할려면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이상의 말씀들이 그 나라의 시간성을 가르치려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셋은 모두 그 나라를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명령이 내포돼 있다. 이제 이 세 가지 본문들이 어떤 관련 속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나라가 임하소서"는 기도다. 이것은 그 나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처럼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기도는 사람의 삶의 기본적인 자세와 직결돼 있다. 이 기도문은 그 나라가 오도록 내 삶을 그 나라를 향해서 개방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뜻은 그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문은 이 다음의 것과 연결 속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나라가 임하소서"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 구체화됐다고 할 때 다음의 사실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나라"의 원뜻은 왕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쉽게 성서를 쓴 당시의 국가체제를 안중에 두게 된다. 그때의 왕국의 주인은 왕이다. 왕은 곧 국가며 동시에 법이요 권력이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주권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어원적 풀이에서 어떤 정치체제를 머리에 두고 그 나라를 묘사해서는 안 된다. 정치체제에는 계급으로 된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 중에는 그 나라를 그릴 때 윗 자리, 아랫 자리 등의 묘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이같은 묘사는 그 다음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그 나라가 임하라는 것은 바로(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인간 세계에 이루지라는 것이다. 그 뜻이 실현되는 인간 세계 즉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지배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주권"(Herrschaft)이라고 번역한 것은 적중한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사회를 정치적 기존 체제라는 틀 속에 넣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벌써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주권을 기존의 어떤 질서의 보장으로 추락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는 절대로 완전히 새로운 현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의 인간세계가 영구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같은 기도를 가르친 예수는 벌써 오늘의 세계 속에서 고통하는 인간을 전제함과 동시에 기존 세계의 무상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늘의 세계를 진단하며 그것이 인간을 어떻게 노예화하고 있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기존의 세계를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전제하고 그것에 사로잡혀서 그것에서 울고 웃는 인간들의 무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뜻을 말하는 현대 신학의 용어로서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산다고 한다.
(3)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정말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면 단순히 정좌해서 마음만을 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참 기도란 스스로 원하는 바를 위해 자기의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의 힘의 한계를 실감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기도는 자기 한계에 절망하는 직전의 궁극적 행위다. 그러므로 기도와 삶을 유리시키는 잘못을 충분히 알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임박했다)는 말씀에는 "회개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두 말씀은 유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은 사람의 영역에 속한 일이 아닌 데 대해서 회개 하라는 것은 그 앞에 선 인간의 일이다. 이 말씀으로 설교자는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알릴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런 의미에서 은총이다. 이것은 현재에 감금 된 인간에게 주는 희망이요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그 나라 도래의 확실성을 말하며 인간에게 절망은 없다는 선언이며 약속이기도 하다. 이것은 막연하게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해는 아직 뜨지 않았으나 훤하게 밝아 오는 여명임을 알리는 말씀이다.
(2) 이 같은 여명 앞에서 회개하라고 한다. 그런데 회개라는 뜻을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회개하라"는 말씀만 독립시킨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길밖에 없게 된다. 윤리란 이미 있는 어떤 가치관 위에서 그것에서 탈선된 상태를 돌이키거나 정화하라는 뜻이 된다. 가령 도적질한 사람에게 "회개하시오" 하는 경우에도 적질한 그 행위를 청산하고 "본래적"인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된다(우리는 회개를 이같은 의미로 얼마나 많이 설교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는 경우에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새 상황 앞에 선 가장 옳은 길은 그 상황에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질서에 자기를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이것이 윤리다), 새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기를 바꿔 가지는 것이다. 가령 평상시에 가정생활의 의무를 충실히하는 것이 윤리생활의 모범이라고 하자. 만일 그렇지 못한 자에게 단순히 회개하라고 하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제 임무를 다 하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전쟁이 나거나 국가의 위기가 닥쳐 왔을 때 회개하라고 하면 벌써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며 그런 경우에는 일상생활의 윤리적인 모범이 오히려 죄악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임박한 그 나라 앞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세계, 그 가치관에 매여서 그것에 적응하는 데 여념이 없던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것에서 탈출하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이 본문을 밝히기 위해서는 만찬회의 비유(눅 14:16-23)가 가장 적절하다. 처음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샀기 때문에' 또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 초대를 거절했다. 저들은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윤리적 평면에서 볼 때 저들은 나무랠 수 없다. 그러나 저들은 기존적인 것에 매여서 이 초대(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자기를 차단했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 나라를 차단해 버렸다. 이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 '불구자들', '행인들', '절뚝발이들'은 무조건 그 초대에 응했다. 저들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평가할수 없다.
그러나 저들은 바로 스스로 가진 것, 계획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초대에 대해서 쉽게 자기를 개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새 세계에 용납될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 '준비가 다 됐으니 오시오'라는 초대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말씀과 같다. 그런데 그것에 응하지 않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바로 회개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뜻은 '너를 개방해라',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라는 말씀이 된다(여기서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회개하라'는 명령을 그 조건처럼 생각하며 그 나라의 무조건적인 복음성을 흐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은 누가복음 10장 17-20절 가운데 배열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1장 20절과 관련시켜 볼 때 그 나라의 도래의 확실성을 말씀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당시에는 이 세계는 악마가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악마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악마란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세력이다. 그러면 이것은 이 세대에 대한 규정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은 파견됐던 제자들이 '기쁨'에 넘쳐 돌아와서 귀신들까지도 복종하더라는 보고에 대한 대답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저들의 보고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이 된다. 즉 귀신이 복종한다는 것은 바로 이 새 나라의 도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악마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낡은 세대는 이제 종식의 단계에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다음의 말씀을 위한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짓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하리라." 이것을 위의 말씀과 연결시키면 전쟁은 끝나고 전투만 남았다는 뜻이 된다. 전투는 '계속된다'는 것은 아직도 치루어야 할 어려움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어려움 속에서 체념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청중을 향한 말씀이다. 이런 자들에게 이미 악마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말고 너희의 전투를 계속하라는 명령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성서의 특징은 '이다' 속에 언제나 "여야 한다"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즉 인디카티브는 임퍼라티브를 내포한다. "이다"가 전제되지 않는 "여야 한다"는 쉽게 율법적인 명령에 그치게 되고 "여야 한다"를 뺀 "이다"만은 인간을 관념의 세계에 가두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는 이 "이다"와 "여야 한다"의 긴장 관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참 도래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속수대망(束手待望)하게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다음 말씀을 보자.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보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0-21).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라는 질문의 대답으로서는 색 다르다. 질문은 시간적인 것인데 대답은 공간적이다. 그런데 이 대답으로 된 말씀을 보면 그 나라에 대한 한 묻는 자의 관념이 드러나 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온다는 것이다. 딴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객관화한다 함은 그 나라에 대한 중립적 입장이다. 그것은 그 나라를 기존의 것, 자연이거나 어떤 정치체제처럼 보고 실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것은 후기 유대교의 그 나라에 대한 관념이다. 가령 그 나라의 도래와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을 직결시키거나 묵시문학파의 표상처럼 그 나라가 올 때 하늘의 별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강물이 피가 되고, 지진이 나는 등 이 우주의 이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 같은 그 나라에 대한 관념은 어쩔 수 없이 '언제', '어떻게'가 결부돼 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바로 묵시문학파적 표상을 타고 등장한 이른바 '거짓 예언자' 들의 유혹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묵시문학파적인 하나님 나라 표상을 안중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라가 천지이변적 과정에서 도래하리라는 기대는 초대 그리스도교회에도 계승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중대한 선언이 된다.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나라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허락될 수 없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한다. 이 말씀의 뜻은 아직도 그 해석이 정착되지 못한 미지에 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종합할 때 설교자는 다음의 과제 앞에 서게 된다.
(1) 우선 지금까지 듣는 자들의 머리 속에 있는 그 나라에 대한 관념 또는 전이해들의 그릇됨을 분명하게 폭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말세론'이 성행하고 있는 한국 교회 안에서 더욱 중대한 문제가 된다. 통속적 신앙인 정감록적 표상 또 통속 불교 등에 편승된 극락세계와 같은 표상에 젖어 있는 한국의 청중들에게 그 나라가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해명해 주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작업이다.
(2) 그러나 이같은 부정 다음에 긍정적인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은 또다시 '보이는 것'으로 표상할 수 없는 한 그것이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하게 강조될 것은 관조적(볼 수 있게)인 태도로 그 나라를 찾거나 기다리는 자세에 대해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이 가지는 의미다. 가운데라고 번역한 entos란 단어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나 뚜렷한 것은 그것은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어떤 형태로나 우리의 삶이 그것에 참여되고 있는 어떤 것을 뜻함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도 "우리 가운데"라는 말의 뜻을 밝혀 그 나라 자체를 표상할 어떤 근거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허락되어 있지 않다. 이 본문 역시 비록 모호한 '이다'를 통해서 오늘을 사는 자에게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자로서의 중대한 삶의 변화와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일 것이다.
(『세계와 선교』 197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