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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한국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1. 한국의 신학계의 현황
1) 서구신학의 위치와 한국의신학의 자리

기독교 이후 시대, 세속화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혁명의 신학 등은 서구에서 시작한 신학적 연쇄폭발적인 현상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은 산발적인 기현상이 아니라 서구 기독교사에 배태한 필연적 현상이다.

신학이 모든 학문을 시녀로 삼고 군림한 오랜 역사는 사실상 반 이상이 타의적인 것에 의한 결과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서구 정치권력 이 구축한 종적 계층사회의 구성에 있어서 기독교가 맨 꼭대기에 추대 됨으로써 기독교 신학은 자동적으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하고 지배자 위주의 사회형성에 뒷받침하는 이론을 제공하는 학문이 됐다. 그렇게 해 오는 동안 그것을 있게 한 주인을 까맣게 잊고 오히려 그 주인을 종으로 변장시켜 부려 먹었으며, 그 주인이 섬기라고 하던 이 세계상의 인간들을 오히려 발 아래 굽어보며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신학은 신(神)도 성(聖)도 이 고충의 맨 꼭대기에 끌고 올라가서 독점하므로 그 아래의 세계는 신 없는 속된 세계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낡은 종(從)의 계층세계는 무너졌다. 그러므로 종(從)의 계층적 분계선도 횡(橫)의 분계선도 철폐된 세계사적 평면 위에 분계선도 없는 한 울타리에서 죽느냐 죽이느냐, 아니면 공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분야라는 것이 피차 인정됐을 때는 분야간의 상충 또는 제휴가 있다고 해도 부분적인 것이었고 각 분야는 독자적인 상아탑 속에서 그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제 또는 실용성을 분리하고 지적 추구와 생(生)의 충동을 분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계선이 무너짐으로 이른바 독자적 영역이란 인정되지 않게 됐다. 여기 오늘의 학문세계의 혼란의 이유가 있는데 특히 형이상학적 자기 영역을 과시하던 신학, 철학 등에 있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오늘의 신학계의 파동은 그 높은 자리에서 추락됨으로써 백기를 들고 공존의 길을 호소하는 신호다. 그것은 기득권의 양도와 이 세계에 대한 인정의 선언이다. 그것은 신(神), 성(聖)의 독점권의 포기를 뜻한다. 이와 더불어 이 세속의 자율성과 그 성숙성을 인정하는 선언이 이른바 세속화 신학운동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하는 일을 포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신이 죽었다면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독점한 줄 알았던 신의 죽음의 선언이지 신 자체에 대한 선언일 수는 없었다. 신없이 사는 세계를 세속이라고 한 데 대해서 세속화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에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단정했던 신학의 주장을 철폐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속화신학은 신은 바로 이 역사의 지평,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생동하는 현실 속에, 구조화된 교회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지고 이기고 만들어 팔고 사고하는 이 기복의 세계 복판에 있으며, 예배나 설교가 있는 일정한 구별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전 생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디아스포라 교회, 미씨오 데이 등의 주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들은 결코 기독교 전체의 소리도 아니요, 또 그 반응도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데 그치고 말았다. 까닭은 이미 신학의 왕국은 무너져서 명령계통이 혼란됐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은 50년대 이후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학파라는 것이 성립됐으며, 신학계에 총수와도 같은 거성이 있을 수 있어서 그들의 소리에 많은 수가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신학을 기준으로 삼았는 데, 현금에는 그러한 학파도 성립되지 않으며, 그 누구의 신학에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정착지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학의 혼란기다.

그러나 오늘의 '추락'된 신학이 선 자리는 처형의 장소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신학은 본래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신학은 본래부터 왕좌에 앉는 영광의 학문도 아니며, 지배자의 이론도 아니며, 지배자를 위한 것도 아니며, 교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수난자의 것이요 눌린 자의 것이며, 섬기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 선 자리가 바로 예수가 내려온 자리(인카네션)요, 그가 수난하신 자리요(십자가), 또 오실 자리(파루시)다. 그가 와서 수난하고 다시 올 그 자리는 성전 뜰 안도, 구별된 그룹의 집합 장소도, "책"을 풀이하는 특권을 점유한 일군의 기거처도, 그렇다고 궁전도 아니다. 그 자리는 갈릴리요, 죄인들이 웅거하는 '세속' 복판이며 노동의 현장이었다. 그에게는 종적으로 인정된 성소가 따로 없었고 횡적으로 인정된 분계선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무리(oklos)가 선 자리였다. 그러므로 무너지는 것은 그래야만 할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상처가 있을 망정 오늘의 신학의 진통은 제자리에 돌아오는 과정의 파동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피선교국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신이 그 역사 속에 정좌한 일도 없으며, 그 신학이 학문의 왕위에 오른 일도 없으며, 한국 문화권 안에 깊이 침투된 일도 없다. 한국에 기독교가 상륙한 때는 서구사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와 비교하면 콘스탄틴 이전의 그것이었다. 그것은 상위충의 승인을 얻고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부터 수난자의 모습으로 들어섰다. 그것이 선 자리는 글자 그대로 '무리'의 현장이었다. 당시는 이미 국가의 기틀이 흔들려 관권을 배경으로 한 전통은 모두 흔들렸고 살아 있었다면 민중의 종교, 민중의 신념과 그 삶뿐이었다. 불교, 유교 등을 위시해서 전통적인 문화가 있었으나 그것은 민중의 것으로 연명 된 것들 뿐이었다. 그것이 성장한 것은 일제의 박해기였다. 그 40년 간 기독교가, 신학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서구적 '특권'적인 신학의 측면에서 하는 소리다. 그것은 생존문제의 전선밖에 없었기에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밀착돼 있었다. 그러므로 인정받은 특권적인 영역에서 사변적 신학을 음미할 새도 없었으며, 또 그런 것이 먹혀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물론 그들이 받은 교리의 배후에는 신학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실제로 지배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1)한철하 교수는 한국의 장로교회는 칼빈신학을 거의 모르며 주관적 경험 중심의 신앙과 도덕주의 중심의 신앙생활이라고 한다("한국교회의 신학적 자립", 『기독교사상』, 1965. 6). 그것은 인정된 자기 세계를 갖고 있지 못했기에 분계선 없는 한 울타리에 모든 잡다한 것과 공존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동안 불교, 유교, 샤마니즘, 풍수설, 귀신을 섬기며 점괘 등에 물이 들고 또 이용되면서 자라오게 됐다.2)정대위 박사의 "한국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혼합", 『사상계』 1960.3; "한국 근대화와 기독교", 『思想』 4.6집 참조.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권력이나 그외의 어떤 밖의 것에서 공인된 위치에 정좌한 일이 없었기에 그 위치로 보아 추락할 데도 없으며, 신의 독점을 공인받은 일도 없으며, 공인된 성역도 없었다. 그것은 연륜으로 보나 수로 보나 여전히 한 종교단체에 불과하며 그의 자리는 '무리'의 자리요, 그의 힘이라면 역시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계가 신의 죽음의 신학, 세속화신학을 들고 나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한국에서 세속화신학을 내세우는 데 다음의 두 가지 현상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이 상기한 서구의 '영광의 학문'의 자리에 자기를 동일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세계적 지평에서 보는 연대적 의식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영역에서 보면 이해될 수 없다. 한국의 역사나 문화권에서 신학이 밖으로부터 공인된 특권적 분계선은 없었기에 일방적으로 상정한 점유권의 분계선을 철폐한다고 선언해도 그것은 기독교 밖의 세계에서 납득될 수 없으며 어떤 반응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따라서 한국에서 세속화신학은 결국 한국의 기독교 내부를 향한 것이 된다. 그것은 한국 교회 안에 흐르는, 서구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보수적 전통성에 대한 도전이 될 따름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연륜으로나 질량으로 보아서 아직도 기독교로서의 자기확립이 필요한 과정에 있다. 그런데 서구적인 세속화 주장을 그대로 직수입하면 그것은 완전 해체의 위협으로 받아지는 것이다. 어떤 저항은 확고한 전통이 있을 때 그것이 도약대가 되어 앞으로 비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 토착화를 못했다는 것은 개탄하면서 너무 토착화된 데서 서구에서 온 비복음화의 고민의 소리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착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살리는 신학적 전통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기독교사 100년 미만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재검토하며, 한국의 기독교의 자기발견과 수립을 위한 노력과 함께 세계와의 관계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같은 노력은 '토착화'신학으로 표방되고 있다.

이 '토착화'를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이 존중되어야 한다. 첫째는 한국의 지난 백년의 유산이 철저하게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 백년이 없는 것처럼 이제부터 토착화하려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지금까지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계 신학의 동향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성서에 대한 재발견과 그것에서의 새로운 거점을 계속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우리 기독교의 강점은 성서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 교계 분열의 불씨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성서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는 노력은 토착화의 근본이기도 하다. 셋째는, 서구 신학과의 부단한 대화다. 토착화는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우리의 신학을 수립한다는 것은 바로 세계의 기독교와 하나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 대화를 포기하면 그것은 민족주의에 복음을 내맡기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한국의 신학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부분적으로나마 개관하고 그 과제를 생각해보자.

2) 보수계신학

한철하 교수는 한국의 신학계를 총괄적으로 진단하는 논문을 썼는데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 『기독교연감』 1970, 44-72면. 그중에 그의 보수계 신학에 대한 평가는 바로 그가 보수계 신학자이기 때문에 중요한 뜻이 있다. 그는 한국 보수주의 신학을 "신앙의 진리를 탐구 해명하려는 노력"4)그는 이 노력을 자유주의신학의 일로 본다.에 대해서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것"이 근본동기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보수라는 소극성을 띠었나 하는 데 대해서 "새로운 탐구의 결과 생겨나는 각종 형태의 신학들에 대한 반동"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그는 한국의 보수계를 '자기보수'와 '보수적 적응'이라는 두 경향으로 나누고 전자로 김의환, 박아론 교수의 입장을 소개하는데 그 내용은 (1)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절대 수호하는 것과,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것과 완전 일치시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해서 '보수적 적응'으로는 이종성, 조종남 두 교수의 입장을 소개하는데, 결론은 "오늘의 우리의 처지에서 복음이 어떻게 복음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적극적 제시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李교수)고 하며 조교수에 대해서는 "극히 전통적 사고의 범주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교수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이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전통에서 한국 현실에로'라는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자기보수'에 대해서 '보수적 적응'의 자세에서 그러한 특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 적응의 자세는 되어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러면 무엇을 보수하자는 것인가? 한 교수는 '자기보수'적 경향에서는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보수적 적응'의 신학자로는 조교수의 웨슬레의 성화론을 이교수의 '삼위일체론'을 내세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한 교수가 '전통에서 한국 현실에로'를 '성경에서 한국 현실에로'와 구분하고 보수진영의 신학적 동향을 전자에 넣고 있는데 '자기보수'에서는 성경의 형식적 권위 고수를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리를 성서 해석의 결과라고 한다면 전통은 성서해석사의 어느 기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칼빈주의요, 웨슬레의 성화론이 된다. 그러면 전통은 교리적 전통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통이란 교파적 전통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한 교수는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는 그들의 교리의 근원인 웨슬레나 칼빈을 신학적으로 모르고 있고 "주관적 경험중심의 신앙이요 도덕주의 중심의 신앙생활"이라고 한다.5)"한국교회의 신학적 자립", 『기상』, 1965.6. 그렇다면 그 교파적 신학이 토착화되지 못하는 데서 그 신학 자체에 '한국 현실에로' 향하는 데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문제로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을 (1) 근본주의적, (2) 복음주의적, (3) 실용적이라고 한다.6)『기상』, 1970.7. 위의 셋 중에 둘은 전통 자체이기보다는 서구의 신학적 상황에서 자기보수를 위한 '반동적' 슬로건이며 마지막 것이 '적응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의 보수계 신학의 전통은 '보수적 적응'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진단에 의하면 이것이 처음에는 '신앙적 내용'이었으나 1930년대부터 '태도상'의 보수주의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 현금의 보수계의 자기반성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 한 교수는 한국신학의 과제로서 전통적 신학체계와 현대신학이 종합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7)동상 그 종합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보수계는 현대 이른바 보수계에 속하지 않은 신학의 흐름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보이며 대화에 있어서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점에서는 이종성, 한철하 두 교수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도 언제나 '전통'의 입장에서 아폴로게틱한 자세를 견지하며, 현대신학이 그것에 배치되지 않는 한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적응적 자세에 있어서 보수라는 자세에게서 빠지기 쉬운 고식성(姑息性)에서의 탈출과 자기수정의 솔직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저들의 성령에 대한 새삼스러운 강조요, 다음은 성서관이다.

이교수는 부단히 성서의 문자주의해석을 경계하면서 결론으로 "성서이해에 있어서 너무 무모하게 문자에 맹종하지 말고 그 문자에 활력을 제공해 준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8)"한국교회의 성서이해", 『기상』, 1970.7.라고 하는가 하면, 한 교수는 "한국 교회의 신학적 자립"을 위해서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에 따르는 자유로운 창조적 신학활동이 중요함을 역설한다.9)동상. 이것은 정통적 신앙고백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 보수신학계라는 정황에서 이같이 강조하는 것은 '자기보수'에서 벗어나려는 적응의 자세라고 본다. 한 교수의 '자유로운 창조적 신학활동'이란 말은 비록 성령의 역사에 따른다는 단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표현이다. 그 자유한 창조적 신학활동이란 전통보수와 어떻게 관련이 될까? 그가 자유탐구와 자기보존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동시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을 병행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를 탐구 해명하려는 노력'과 '신앙의 동일성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일단 분리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 이 둘이 분리 되는가? 아무리 정통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새롭게 해석되지 않으면 하나의 도큐멘트에 불과하다. 그것은 해석되어야 자기 것으로 전승될 수 있다. 그 해석의 노력이 또한 신앙의 진리탐구다. 반면에 신앙의 진리탐구는 바로 자기동일성의 추구의 노력이다.

이교수가 성서의 "문자에 맹종하지 말고 문자에 활력을 제공해 준 성령에 의존하라"는 것은 이른바 알레고리적 해석, 한국에서 지배적인 영해를 뜻하는가? 아니면 문자 배후의 신학을 추구하라는 것인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보수계의 성서학자들의 성서이해에 자기수정의 운동이 뚜렷히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박창환, 변조은 두 교수의 논문을 들 수 있다.10)박창환, "성경무오설에 관하여", 『교회와 신학』 3집, 장로회신학대학; 변조은, "한국교회의 성서해석사", 동상 5집. 박교수는 한국의 전통적 성서관인 축자영감설에 대해서 "한국 교회의 성경연구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 중에 제일 근본적인 것은 성경에 대한 이러한 태도에 있다"고 지적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신조 1조를 풀이하여 "신구약 성경이 글자 하나하나까지 정확 무오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신앙과 본분에 대해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성서는 인간의 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역사성이 갖는 제한성'으로서 그 기자들의 당시의 지식과 세계관의 제한성과 오류를 전제해야 한다고 했다. 변조은 씨는 분명하게 축자영감설적 해석으로는 성경에서 "실존주의적인 차원을 찾아낼 수 없다"11)필자는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뜻으로 실존주의적이라는 말을 쓴다.고 말하고 "필연적으로 성서비평학을 써야" 할 것을 선언하는데 그것은 자료설과 편집설을 인정하는 것임을 밝힌다.12)동상 100면에 김재준 박사의 주장 가운데 2에 동의한다고 한다. 이것은 재래의 보수계의 성서관의 의식적인 변화를 뜻한다. 한걸음 나가서 변조은 씨는 "성서가 위에 있습니까? 교리가 위에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그런데 한국 교회사를 보면 어떤 때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에나 17세기 말의 어떤 설에 성경의 증명보다 더 이상의 권위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함으로 그 과오를 지적하고 있다.

이상은 이미 신앙의 진리탐구와 자기동일성의 노력이 유리된 것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보수신학계에서도 성서학의 급진적 발전의 길이 열렸으며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의 자세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수립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뜻은 아니다.

보수계의 신학의 평가는 한 교수의 '한국의 현실에로'라는 관점에서 다 평가될 수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역점을 둔 지향성에서 얼마나 충실했으며 진전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보수계신학이 다 하지 못한 과제가 드러난다. 그런 사실의 구체적인 예로서 예수교장로교 학계에서 구한다면 칼빈신학을 기준으로 하면서 과연 얼마나 칼빈신학을 이 땅에 소개했으며 그 연구가 진전 됐느냐 하는 것이다. 칼빈신학이 전혀 교회에 토착화 못된 것은 바로 보수신학계의 책임이며 과제일 것이다. 칼빈신학으로 백년 가까이 교회를 이끌어 오면서 칼빈전집은 물론 그의 주저인 『기독교강요』 전역도 우리말로 옮겨지지 못했으며, 성서관을 자기동일성의 기점으로 하면서 칼빈의 방대한 성서주석도 옮겨놓고 있지 않다. 그런 마당에 칼빈신학이 우리 교회에 침투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3) 성서학과 신학일반

한국 교회는 성서수호를 그 생명처럼 내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학이 가장 뒤늦게 발달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것은 성서관의 싸움 때문이었다. 성서의 축자영감설은 '독경(讀經)'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존엄성을 철저히 강조해 온 우리 교계의 전통은 성서학을 촉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성서학은 이 축자영감설적 성서관을 조심히 뚫으면서 서서히 성숙해 갔으며, 비록 늦게 출발했고 문제가 가장 많았으나 일부 보수계를 제외한 거의 전원이 공동의 바탕 위에서 공동의 업적을 남겼다. 80주년 기념 성서주석의 공동집필, 신구약 성서개론, 신약성서신학 등의 공동집필 등은 어느 분야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한국의 성서학은 이제 첫발을 내디딘 단계이며 그 앞에 많은 문제들이 있다.

한교수는 '성경에서 현실에로'라는 관점에서 세 신약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는 데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진단의 결론은 모두 '성서의 자기동일성 견지' 또는 성서의 '자기보수'적이라고 했으며, 그의 비판으로 '한국의 현실에로'의 길을 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역사주의적 방법론'을 견지한다고 했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보수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정작 보수계의 성서학자는 한 사람도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전통에서 한국 현실에로'의 관점에서 보수계의 주장을 말함에 있어서 저들의 성서관을 주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이상의 그의 서술의 형태에서 한국의 성서학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첫째는 성서학에서 아직도 문제되는 것은 방법론이다. 위에서 보수계에서 이미 한국 교회의 전통적 성서관에 분명한 수정을 선언한 사실을 보았으나 이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것은 절대로 신학계에서도 보편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의 일반풍토는 형식적 성서 권위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풍토는 방법론에 의한 해석과정의 제시를 회피하고 결론만을 나타내는 풍조를 조장하는 형편이다.

성서학에서 보수와 자유주의의 분계선은 '성경의 자기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해석의 방법론에서 결정되는 것이 한국 교계의 기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비판학의 적용여하로 갈린다. 가령 『기독교사상』같은 호에 실린 김정준, 김규당 두 교수의 논문13)김정준, "한국교회와 성서이해문제"; 김규당, "정통신앙과 성서관", 『기상』 1967.2.은 바로 성서관의 대립을 뚜렷이 나타내는데, 그것은 '성서의 자기동일성' 문제가 아니라 방법론에서 오는 차다. 한 쪽은 형식적 권위를 무시하면 그 내용도 무시된다는 입장을 대변했고, 다른 한 쪽은 그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형식하의 권위에서 자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이같은 성서해석 방법의 격차를 곧 성서의 권위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처럼 보아 버리는 풍토는 성서학의 발달을 저해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성서학이 교회에서 이해될 만큼 파고 들지 못한 증거이며, 그만큼 성서학의 불철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는 한 교수가 본 관점에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성서학은 그 해석에서 실용성에 대한 요청에 중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교수는 '성경에서 한국 현실에로'라는 전제에서 한국 현실에 상륙하지 못했다고 하나 이같은 문제설정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성서학이 역사비판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성서의 말씀을 담은 낡은 세계관의 틀에서 해방시킴으로 지금 여기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는 말씀(Anrede)으로 하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물론 '한국'이라는 특수성까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Anrede의 성격을 밝힘으로써 그것을 보고 듣는 자와 마주 서게 한다. 그런 경우 듣는 자는 미국이나 인도라는 현실에서 사는 자에게서와 같이 한국 사람은 한국의 현실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실에로'는 성서해석 자체의 과제가 아니라 바로 듣는 자의 역사의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의식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서학을 직접 한국 현실에로 연결시키려는 것은 성서학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반면에 성서학의 대상은 성서 자체다. 성서학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느냐를 규명할 것을 그 본연의 과제로 한다. 그런데 그 연구에 있어서 실용성을 안중에 두는 것은 성서 자체의 뜻을 구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성서해석자는 백지가 아니다. 그러나 성서해석에서 백지여야 한다는 자세를 이미 지니고 있는 요청적인 것에 주도권을 주려는 자세는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성서로 해석하게 하라', '성서는 그 자체로 말하게 하라'는 종교개혁 당시의 성서해석의 정초는 오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학은 성서 자체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본연의 사명으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은 성서학 밖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성서학은 조직신학이나 실천신학과의 분계선을 분명히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그러나 반면에 한국의 성서학은 '전통에서 현실에로'와 같은 범주에서 '성서에서 현실에로'에 해석은 시도하나 '현실에서 성서에로'의 시도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남의(서구) 눈이나 물음으로 성서에 향하는 데 대해서 내 눈, 나의 물음을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은 대답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성서해석에서 문제제기는 서구적인 것을 내 것처럼 하기 때문에 결론도 같아진다. 서구의 문제의식은 서구의 실존의 장에서 형성되었다. 우리의 선 자리는 우리의 전통문화다. 그것은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서구와 다른 선 자리에서 성서에 물을 때 다른 해답을 얻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 전통적 신학과 물음을 안고 성서를 본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기대했던 그대로 되어 버린다. 성서연구는 이미 얻은 결론을 재확인하는 데 있지 않고 새로운 것에(못 발견한 것)의 추구에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이해에서 떠나야 할 것이다. 그때 참 현실, 즉 나의 물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한국 성서학이 수용태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신학일반이란 토착화신학과 같은 의미의 경향성을 지니지 않은 신학을 말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신학적 편력은 가까운 일본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수십년 동안 바르트신학이 왕좌를 차지해 옴으로 하나의 학파적 현상을 이룩했었다. 그전에는 이른바 자유주의신학이 편만했었다. 이것은 독일계 신학의 직접적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는 보편화될 만큼 깊히 뿌리 박았던 신학의 역사가 없고, 보수신학 외에는 어떤 것도 공인된 기준이 될 만한 것이 없다. 이것은 미국의 영향을 직접 받은 탓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것을 재빨리 포착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신학을 집요하게 충실히 추구하는 신학자들은 있다. 바르트의 신학에 일생 동안 꾸준히 집념하고 소개한 이들로 전경연, 박봉랑, 지동식, 박순경, 윤성범 등의 교수들이 있다. 저들의 노력은 『바르트 연구』라는 공동 논문집을 낼 수 있었으며, 그외 많은 높은 수준의 논문이 발표했다. 불트만의 신학에 집념하는 이들로 허혁, 변선환 교수를 위시해서 신약학자로 김용옥, 문상희, 이상호 교수들과 그리고 지금은 종교학으로 전향한 유동식 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바르트와 불트만 신학은 학파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신학계에 뚜렷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외에 틸리히 신학을 우리의 것으로 한 공적으로 서남동, 김하태 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셋은 우리 신학계를 형성하는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최근의 신학을 재빨리 소개하여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선봉에 서남동 교수가 섰다. 그중에 본회퍼, 몰트만 등은 지금도 영향을 끼치는 신학이다. 최근에 박봉랑 교수의 몰트만 연구의 방대한 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저들의 저서가 우리말로 옮겨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실제로 한국 교회의 신학적 사고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일본과의 비교에서 관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위의 신학들이 한국에 별 영향을 못 주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설교 경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비록 그것에 대한 저서가 많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4년 이상 가르친 제자들의 설교에 아무런 영향력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교수의 불철저가 아니며 그런 신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저들의 저서가 우리말로 옮겨지지 않는 것은 한국 신학계의 태만 일까? 아니면 독자가 없기 때문인가? 독자가 없는 것이 이유라면 그것은 한국 신학계의 책임일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실에서 허혁, 전경연 두 교수가 사재(私財)를 털어 불트만과 바르트의 저작을 옮겨 내는 부단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14)허혁 편, 『성서와 신학』, 총서; 전경연, 『복음총서』.

4) 토착화를 위한 신학

60년대의 토착화를 위한 신학적 열성은 그 결과에 대한 견외(見外)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과제였다. 그런데 토착화신학운동과 세속화신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15)한철하, 동상 55면 서구에서와 같이 특권적 영역을 구축하여 오랫동안 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의 영화에 도취한 사회에서는 세속화운동이 되며, 아직 공인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피선교국'에서는 뿌리를 박기 위한 터전을 찾아야하는 일이 앞서야 하기 때문에 토착화가 될 뿐이다. 이 역사적 지면에 설 자리를 구하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것을 운동으로 볼 때 하나는 하향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상향운동이다. 그런데 역사적 지평의 폭을 어떻게 넓히느냐에 따라서 세속화신학도 되고 토착화신학도 된다. 가령 서남동 교수처럼 세계의 기독교와 세계의 역사적 방향에 관심하면 세속화신학이 되며 김용옥 교수의 논문16)"아시아 속에 한국신학", 『기상』, 1971.9.에서처럼 아시아라는 판도에서 문제할 때나 한국이라는 지역을 안중에 두었을 경우에는 토착화신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피차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그 지평의 설정에 따라서 다양한 결론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또 같은 분계선 안에서도 그 사회를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토착화의 주장이 달라질 수 있다. 즉 그 땅에 사는 사람, 사상, 종교 또는 사회 구조 등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에 따라 토착화론의 액센트가 다를 수밖에 없다.

토착화를 한국의 전통적 사상의 개념을 잘 발굴해서 구체적인 시도를 감행한 것은 윤성범 교수의 '성(誠)의 신학'이다.17)그의 '한국사상과 기독교'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다.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적 신학'이라는 표제로 한 권의 책을 당당히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시도에 이미 많은 비판이 지적된 것 외에 중요한 약점을 지적한다면 이 성(誠)이라는 개념이 한국의 정신사상 현금에 이르기까지 얼마 만한 비중을 차지하며 우리 문화형성에서 생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밝히지 않은 점이다. 말하자면 그 개념이 한국사상으로 토착화했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서 종교라는 토양에 관심하는 이 중에 유동식18)그의 '한국종교와 기독교'는 이미 많이 논의되었다., 문상희 교수의 공이 크다. 유교수는 동양의 종교에서 한국의 고유한 종교에로 좁혀 들어가 붙잡은 것이 샤머니즘이다. 이에 대해서 문교수는 오늘의 신흥종교에서 한국인의 심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토양에 복음을 어떻게 연결시키려는지 아직 미지수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보고 그것에서 복음의 위치를 묻는 이들로 홍현설, 현영학, 박봉배, 정하은 교수 등이 있는데 이 분야에서는 현역 교수들 외에 사회전선에 선 강원용, 김관석, 박형규 목사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교회 안에만 눈을 향한 한국신학에 밖으로 향할 눈을 뜨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경향은 한국의 사회구조라는 특수성보다는 근대화라는 세계적 추세의 일환으로서의 사회현상에 더 관심함으로써 토착적인 문제의식을 주는 데 약했다.

그런데 이상의 토착화신학운동의 제반 노력에서 다음 몇 가지의 문제가 분명하게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무엇이 텍스트며 컨텍스트냐하는 문제다 어느 것이 씨며 토양이냐? 가령 한국 사람 또는 한국을 살리는 것이 복음이라고 할 때 한국 또는 한국인이 씨며 그것은 복음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난다는 말이 된다. 이에 반해서 한국이나 한국 사람은 복음을 위해 있다고 할 때 복음은 씨가 된다.

둘째, 씨와 토양과의 관계다. 씨는 밖에서 토양에 심어지는가? 아니면 그 토양 자체가 이미 그 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가령 복음(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하는)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경우에 기독교의 복음은 이미 우리 토양에 그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복음은 전혀 이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토양 자체에서는 그같은 흔적도 거부하게 될 것이다.

셋째,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조화, 상옹할 때에 비로소 인간을 살리는 것이 되는가? 아니며 둘의 이질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갈등 속에 역사는 진전되느냐 하는 문제다. 한국의 토착화신학운동은 대부분 이상으로 하는 사회상과 복음의 조화를 꾀하는 경향인 데 반하여 바르트신학 바탕에 선 박봉랑, 박순경, 전경연 교수 등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복음의 이질성(계시성)을 주장하는 입장에 선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토착화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와 함께 복음이 토착화함으로써 일원화되어 버리는 데서 오는 상실성의 문제도 있다.

2. 한국의 신학의 과제

유동식 교수는 한국의 신학을 연대적으로 다음과 같이 성격화한다. 1960년대까지는 서구신학을 흡수하는 '자기수양'의 기간, 1962년에 와서 혁명과의 관련에서 현실에 눈을 뜨고 1963년에 평신도 문제, 산업선교 문제, 토착화 문제 등에 관심하고 1965년부터 타종교에 대한 반성, 1967년에 한국신학형성의 모색과 평화 문제, 정치참여 문제에 관심하고, 1968-69년에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문제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로 『기독교사상』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우연은 아니고 세계신학계 또는 우리 사회의 기상도와 관련이 있는 편력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1970년대를 전망하면서 앞으로의 과제는 공산주의, 재래종교, 그리고 기술문명과의 관계에서 그 과제를 찾아야 할 것을 제의한다.19)"70년대 한국신학의 과제", 『기상』, 1969. 11. 그런데 70년대의 과제 속에는 1960년대의 편력과정의 관심사들이 대체로 포함되고 있으나 그런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혁명, 평화, 정치참여 문제 등을 공산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파악하고 산업사회 문제를 기술문명의 문제로 확대하고, 한국신학의 형성을 타종교와의 관계로 압축할 것을 제의한 셈이다. 대체로 한국의 신학계가 필연적으로 당면한 과제들을 집약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를 위해서 부단히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본질 구명이다.20)유교수는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감신학보」, 1962, 14호)에서 이것을 첫 과제로 했다. 그런데 비록 당면한 과제들이기는 하나 그것들을 어떤 관점에서 대결하느냐에서 신학적 작업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맑시즘,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그 과제를 찾으며 그것을 위한 일관된 과제는 복음의 본질 구명(究明)이라고 본다.

 

복음의 본질 구명: 성서의 내용을 한마디로 나타낸 것이 "복음"이다. 한국에서는 복음주의, 순복음을 전통적이라는 말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종교개혁 이래로 복음을 율법과의 대치관계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둘의 구분조차 불투명하다. 한국 교회에서 복음주의를 표방할 때 이해된 내용이나 그것을 내세울 때의 의식은 복음과 정반(正反)된다.

복음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성서학의 임무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위해서는 신학 전체가 동원돼야 한다. 복음은 주체개념이 아니라 상관개념이다. '기쁜 소식'이라고 할 때 벌써 듣는 자의 구체적 상황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체적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가령 바울이 복음을 율법과의 대치관계에서 풀이할 때는 유대인을 안중에 둔 것이지만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양심을 또는 '세상의 구성 요소'를 율법에 대치했다. 복음을 구원의 소식이라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구원이란 XX에서 XX에로라는 것이 전제되고 있는 한 그것이 기쁨이라고 하면 역시 오늘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복음의 내용이 그리스도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성서학에서 구명되겠으나 현존의 그리스도를 밝히는 것은 성서학으로만은 불가능하다. 까닭은 그것은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바로 이 사건을 가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구명은 남의 규정을 전수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무시간적 해답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문화사적 과제: 우리는 이른바 근대화에서 빚어지는 개별적인 문제와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 사상이나 종교를 개별적으로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논의해 왔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계문명을 신학적으로 그 의미를 뒷받침하거나 아니면 그것에서 빚어지는 문제에 대한 신학의 무관심을 책하든가 아니면 오늘의 기계문명을 비관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은 그 책임을 그리스도교에 돌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이에 대해서 복음의 토착화의 시도는 한국의 어떤 종교나 사상적 개념 따위를 그 자체의 근원에서 찾아내므로 복음과의 접촉점을 구함으로써 전체적 토착화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일단 전통적인 것이 됐으면 그것은 문화화했음을 뜻한다. 문화란 여러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그 안에 수용한 것은 모두 유기적인 관련 속에 응결시킨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토착화되지 못했다는 것은 한 문화와 유기적 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말이며 토착화라는 것은 바로 문화라는 장르 속에 들어가서 유기적인 자리를 차지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복음을 토착화한다는 것은 문화라는 차원에서 문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만일 복음을 씨라고 한다면 그것이 떨어지는 토양은 유교도 불교도 샤마니즘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유기화한 문화다. 반면에 유교나 불교와 같이 그것의 발상지가 한국 밖이라고 해도 일단 한국이라는 문화권에 들어와서 전통을 이루고 영향을 끼치고 있으면 이미 한국 문화라는 유기체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통적인 것의 어느 하나를 고찰할 때에도 그것이 우리 문화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식별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문화는 다음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그것은 언제나 변한다. 그것이 만일 기존의 구성요소 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서 변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요소가 밖으로부터 들어올 때도 변한다. 둘째는, 한 문화에는 가치관이 있어 형성되는데 그것은 단일적이 아니라 다원적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서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여러 가치의 서열은 그 문화첨단에 무엇이 서 있느냐에서 변동되며 따라서 한 문화의 첨단에 무엇이 서 있느냐에 따라서 그 문화의 성격은 달라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복음의 토착화를 씨와 토양으로 비교하는 데 문제가 있다. 까닭은 문화는 불변의 것이라는 전제와 그 문화는 씨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되 씨의 문화에 대한 역할은 전혀 고려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라인홀트 니버의 입장에 선 박봉배 교수의 변혁주의 이론에서 이 관계를 누룩과 가루로 비유한 것은21)"한국기독교의 토착화", 『기상』 1971. 1; "한국학과 기독교", 『기상』, 1971.2. 신학의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신학은 한국의 문화창조라는 과제를 뜻한다. 우리는 이같은 작업에 있어서 이른바 그리스도교 문화화된 서구 사회에서 오히려 복음성의 상실에 놀라서 문화와 그리스도의 본질을 엄격히 구별하는 나머지 그것에서의 이탈을 외친 바르트의 경고22)전경연, "그리스도교 문화는 토착화할 수 있는가?", 『기독교사상강좌』 3. 전교수는 그런 입장을 대변했는데 그 제목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왜 '기독교문화가 토착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를 우리의 경우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까닭은 우리는 그들의 위치에 있지도 않을 뿐더러 서구의 전철을 밟아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창조를 신학의 과제로 해야 한다는 것은 서구화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며 그렇다고 우리의 전통을 보다 빛내게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과제다.

 

맑시즘과의 대결: 기독교가 그 역사에 있어서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로부터 철저한 도전을 받은 것은 맑시즘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문화 사회에서 형성됐다는 데 문제가 제기될 뿐 아니라 그 패턴이 히브리적이요 그리스도교와 유사하다는 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을 점유하여 훈련되고 있는 사상적 배경이다. 그러므로 서구 그리스도교는 벌써 오래 전부터 비상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라는 연대적 관계에서 뿐 아니라 우리 국토의 반을 차지한 채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일치시키는 단순성밖에 아무런 준비가 없은 채 '대화 있는 대결'이라는 현실에 접어 들었다.23)『기독교사상』에 맑시즘이 1회(65, 10)뿐이고 남북대화 선언 후 교회와 한국통일로 한 번 공산주의를 취급한 것(70, 12) 뿐인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와의 관계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처지와 서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서구의 공산세계는 모두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에 뿌리박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쇠뇌는 불가능함으로 그리스도교는 엄존한다. 그러나 일천한 역사와 다수의 이북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월남했거나 숙청됨으로 그리스도교의 흔적도 없어졌다.

맑시즘은 서구의 그리스도교 영역에서 발생해서 그 영역에서 공산주의로 구체화된 데 대해 이북의 공산주의는 전혀 다른 풍토에서 아무런 저항세력 없이 독주할 수 있었으므로 그 기질이 다르다.

서구에서는 양진영의 그리스도교를 통한 계속적인 교류가 있었으므로 그 진상이 일찍부터 알려졌으나 이북의 현실은 우리에게 완전 차단된 채 30년이 흘렀다. 서구의 양진영은 세계대전 후 전쟁이 없었으나 우리는 처참한 전쟁을 겪었다. 그러므로 서구 진영의 맑시즘 내지 공산주의와의 대화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맑시즘에 대한 우리의 과제는 선교적 관심과 민족적 관심에 일치 되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며 그런 의미에서 남한에서 그리스도교도 만큼 그것에 대한 관심의 도가 높은 계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결이든 대화이든 상대방의 사상을 알아야 가능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맑시즘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복음이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공산주의 토양에도 뿌려질 수 있다는 신념을 일관돼야 할 것이며, 그 속에서도 누룩과 같은 변혁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는 신학이 맡은 과제다.

(『신학사상』, 창간호,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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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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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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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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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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