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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1. 전제

선교 백년을 앞둔 한국 교회를 지배한 예수 이해는 성서에서 온 것이기 전에 선교사들에 의해 전수된 교리문답서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물론 교리서도 성서를 바탕으로 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교리서는 언제나 그 당시의 정황과 따라서 교육적 목적이 중요한 동기로 되어 있다. 이 경우 정황이란 다분히 '전도적' 측면에서 본 종교심리적 정황이다.

한국에 전수된 교리는 성서주의를 극단화하여 축자영감설을 고수해왔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만큼 성서읽기에 열심인 예도 드물었으며, 동시에 그 만큼 맹목적인 예는 드물 것이다. 맹목적이라는 것은 성서를 읽지만 내용상으로는 그 안에 교리문답서의 골자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며, 나아가서 동양적 독경의 전통에 젖은 탓에 그저 백독암송하는 것에서 맴돌았는데 그 열심에서 다분히 주문(呪文)에 대한 태도를 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예수이해란 성서를 그렇게 열심히 읽으면서도 교리가 제시한 한 부분에만 고정되었을 뿐 어떤 방법론도 적용하지 못했다. 여기서 새삼 놀랄 만한 사실을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를 믿는다'가 그 신앙의 골자인데도 예수의 '역사'의 유일한 자료인 공관복음서의 예수에 거의 색맹처럼 되었고, 바울의 서간에 비친 '그리스도' 상에 사로잡혔으되 문자주의적 이해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큰 주류에 역류하는 소수는 계속해 있었다. 저들은 교리의 베일을 벗기고 직접 역사의 예수에게 접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 시대적 사조에 충격을 받고 그것에 부동하여 공관서 안에서 단편적인 장면이나 문구를 찾아서 슬로건적으로 내세워 자기들의 입장을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성서 자체에서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극히 최근에 시작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예수이해를 운위하려면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밖에 없다. 하나는 교리중심의 예수이해요 다른 하나는 탈교리적 예수이해이다. 전자는 수로나 영향력으로나 교회의 절대다수를 장악한 주류를 이루고 있고, 후자는 수로나 영향력으로 교회의 주변에서 소수의 지식층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자는 보수를 생명으로 했기에 특히 시대적 구분이나 변천과정이 별로 없으므로 일괄해서 논할 수 있는데 대해서 후자는 시대적 상황에 예민했기에 변화과정이 뚜렷하므로 역사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본론에서는 이 두 입장을 구별해서 그 유형과 경향성만 개관하려는 것이다.(자세한 논증은 이제 「신학사상」에 발표될 논문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2. 초월적 예수(상)(보수계)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보수계가 사수하는 교두보로는 성서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전승된 교리가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교리상의 그리스도론을 그의 질(質)의 면에서 신-인(神-人)이라고 하고 기능의 면에서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왕(王)이라고 하는데, 예수상을 그림에 있어서 강조점의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 그 틀 안에서 맴돈다. 그러나 신-인적 존재로서의 예수와 같은 형이상학적 틀은 철저히 고수하는데, 그의 기능의 면에서도 역사적 실재로서 역사의 한복판에서 불의와 싸운 예언자적 기능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고 오히려 예지, 예정론과 같은 데 흥미를 느끼므로 사람으로서의 예언자이기보다 신격적 존재로서의 예언자상이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제사직도 역사상에서 무엇을 위해서 살다가 수난당한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역시 신적 존재로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초자연적 존재로서 그 기능 역시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예수가 왜 십자가에 매달려야만 했는지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나 그 의미를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왕으로서의 예수에는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그것의 본래의 동기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심리가 작용했음에 틀림이 없는데 그런 것은 감추어졌고 추상적으로 이 '세계의 지배자' 또는 심판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영광과 승이 그리고 초능력의 심볼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상은 보수계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지남』지1)이하 『신지』라 함.에 일관되어 있다. 이 잡지는 처음 약 십년은 완전히 선교사들의 독무대로 되어 있는데 예수이해와 관련된 논문을 가장 많이 쓴 이가 라부엘이다. 제2호에 그러한 그의 첫 글이 "삼위일체에 관한 예수의 교훈"(1918)이란 것인데, 비교적 세심하게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표상으로서 시공의 제 약, 지식의 제약, 그리고 생리적 제약과 감정의 노출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제목이 삼위일체이듯이 그러한 틀 안에서 결론은, 그는 인자(人子)가 아니라 신자(神子)라는 것을 강조하여 신-인적 존재성 증명에 귀착한다. 그는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여러 편의 글을 썼는데2)"예수의 최후만찬", 1920(3); "예수의 피착(被捉)과 심판", 1921(4); "무죄하신 예수", 1922(2). 그의 죽음의 제사장적 기능과 그리고 그의 무죄성을 변호함으로써 신-인적 존재성을 고수하는 데 초점을 모으고 있다. 가령 그가 시험받은 사실에 대해서 "연이나 예수는 하나님도 되시고 완전한 인(人)도 되심으로 시험을 많이 당했다"는 뒷받침 없는 결론에 귀착되는 것이 그러한 틀 속에 있다는 대표적 예다. 그가 편역한 「사복음연구」에서 각 복음서의 예수상을 규정하여 마태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마가는 종으로서의, 누가는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요한은 신자(神子)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냈다고 하므로 여전히 위에서 말한 교리적 틀에 머문다.3)마가의 종으로서의 인자도 제사장적 기능에 강조점을 둔다. 그 중에 마태의 '팔복'을 "왕의 칙령이다. 그 왕국의 원칙과 법칙을 공포하고 그 선민의 성격을 기록" 운운하는 데서 왕으로서의 예수상을 전형적으로 대변하는데, 이것과 상반되는 듯한 것은 "피등(유대인)은 생각하기를 메시아는 다만 정치구주(政治救主)가 되어 피등을 압제하는 자에게 보수(報讐)를 하고 또한 대유대왕국을 건설할 자인 줄로만 생각하였는고로 예수와 사도들이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신령한 이치만 역설할 시에 유대인 등은 감정을 내고 비방하였나니라"4)"예수의 살으신 세계", 1924(3-5)(3).고 한 내용이다. 이것은 적어도 팔복에 대한 규정과는 상충되는 것으로서 다음에 지적하듯이 당시의 정치적 배려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을 둔화시킨 흔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라부엘의 입장은 당시의 선교사들의 주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아서 별 차질이 없는데 그런 '선구자'들의 뒤를 이은 한국의 보수계 신학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그것은 한두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이는 현존하는 박형룡의 입장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으로 첫 신학논문을 쓴 남궁혁의 "예수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1937. 3)을 지나쳐버릴 수 없다. 그의 제목 자체가 당시의 유럽 신학의 논쟁점이 예수냐 바울이냐라는 데 있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는 바울의 입장에서 여러 각도로 그 동일성을 지적하는데, 거기서 그리스도론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예수는 삼위일체의 신으로서 '신의 화신인 성자'다. 그런 입장에서 하르낙의 주장을 "복음서는 예수보다 하나님의 무대다"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반박하면서 예수의 '인성'과 '신성론'에 언급하여 공관서에는 '인성편'이 더 강조되고, 요한복음에는 '신성편'이 더 강조됐다고 전제하고 "예수는 완전한 지식과 주권과, 계시로서 스스로를 보통 인간이 아니요, 천지의 주재이신 성부와 일체"이며 그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여호와의 우편에 계신 주, 구름을 타고 임하실 인자 등 여러 교리적 표현으로 일관하는데 복음서에서 그 증거로 요한복음만 들고 공관서에서는 예수의 직접 발언이 아닌 고백적인 간접 자료만 내세운다. 그런데 두 가지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인성'을 말하나 나사렛 예수와는 상관 없는 교리상의 배려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선재적 존재, 역사상의 존재, 부활 후의 예수와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인간된 예수에 주목하는 데 철저히 인색하다. 둘째는 예수의 '주권' 그리고 "천지의 주재이신 성부와 일치되는 이" 그리고 심판주일 것을 전제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인 신국관에 언급하여 "신국은 정치적 또는 제도적 단체가 아니며 … 도덕적 의미를 중시하신 것처럼 보인다"고 하고 이른바 '도덕적 의미'에 집중하는데, 이것은 그의 기본입장과는 상치되는 곡절이 있는 결론이다. 우리는 여기서 라부엘의 결론에서 본 것 같은 추측 이상 다른 것을 말할 수 없다.

박형룡의 여러 글 중에 "신약의 그리스도는 사실이다"5)『신지』, 1935(5-6).는 변호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는 하나 그의 예수이해를 총괄했다고 하겠다. 그는 당시에 여러 형태의 자유한 예수이해 등을 총괄적으로 거부하면서 '전통적' 예수이해를 수호한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 사도행전 그리고 복음서를 동원하는데 복음서에서 그는 (1) 시공을 초월하는 능력자, (2) 죄를 사하는 초죄악(超罪惡), (3) 율법의 주(主), (4) 영원한 천국의 왕, (5) 구원자, (6) 신자(神子)로서 자칭한 이 등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주목되는 것은 예수의 이른바 인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것은 그가 변론하려는 대상이 바로 인간 예수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sarks)이 됐다고 하며 바울이 예수가 육으로는 여자에서 나고 율법 아래 났으며 또 약하여 십자가에 처형됐다고 뚜렷하게 지적한 것(고후 13:4)은 몰랐거나 묵살했다. '그리스도의 죽음'6)『신지』, 1934(5).에 대해서 "이러한 거룩하신 이가 죄있어서 죽었다거나 이렇게 능력이 계신 이가 권능이 없어서 죽었다거나하는 견해는 …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그의 수난은 '신의 경륜'이며 "권능이 충만한 신인(神人) 즉 신자(神子)께서 죽음으로 그 임(任)에 당(當)하신 것"이라고 함으로 신의 자기변신 드라마의 과정의 한 토막이 그의 수난으로 되고 말았다. 전통적 그리스도관에 대해서 한철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는 그의 낮아지신 지위와 높아지신 지위의 양지위(兩地位)에서 행하시는 세 가지 직분을 통해서 온다. 낮아지신 지위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은혜의 복음, 높아지신 지위에서 계시하시는 그의 모든 은혜의 계시 … 낮아지신 지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보이신 모든 권능, 높아지신 지위에서 땅의 모든 권세…"7)"복음의 세속적 해석", 『기상』, 1967. 10. 등으로 서술하는데 이것은 무대만 바뀌었지 인간 예수와 선재적 존재 사이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입장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한 세대가 다르며 30여 년 후의 예수론에 아무 차이가 없는 것과 꼭 같은 현상이다.

주목할 것은 1918년에 창간한 후 일제 말엽에 폐간되었다가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잡지로서의 『신학지남』에서 그리스도론이 변함이 없음과 동시에 그 동안의 많은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상이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31봉기, 1925년 조선신사건립과 동시에 공산당 창당에 의한 기독교에 대한 맹렬한 공격, 그리고 35년경부터 신사참배 강요, 마침내 38년 장로회총회에서 강제로 '신사참배' 결정을 하기까지 하게 됐는데, 그런 문제에 대한 신학적 저항이나 해명은 고사하고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음은 바로 그들이 수호하는 시공을 초월한 예수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입장은 역사의 예수에 관심이 없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만이 대상이라는 신학적 입장도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역사적 존재로서 새로운 해석은 불가피한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를 비역사화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도 자동적으로 비역사화되므로 그는 피안의 신앙의 대상이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현실과 아귀다툼하는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순히 도피처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상은 모순스럽게도 삶의 현장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한다. 그를 권능의 존재, 세계 주재의 신과의 동일체, 왕으로서 받아들이면 역사에 개입하는 존재이겠으나 그의 능력이나 주재성이 역사 현실에 와서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강조되는 것은 개인들에게 도덕적, 율법적 지상명령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8)라부엘, 남궁혁, 박형룡 등의 동상 논문 참조. 이들은 현존의 그리스도를 도덕의 스승 또는 명령자로 취급하고 있다.

3. 인간 예수

인간 예수라고 하는 경우 현대 성서학에서 말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구별된 나사렛 예수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유형에 속한 몇 가지 갈래에서 공통된 것은 역사비판학적인 입장에서 정통적 도그마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그 범주 안에 그대로 있으면서 예수를 '따름', '배움' 또는 더불어 삶의 대상으로 하려는 노력에 의해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지평에 끌어내려진 예수이해다. 그러나 이 범주에 속한 예수이해를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비역사화한 예수이해와 다른 하나는 역사화한 예수이해다.

1) 비역사적 예수이해

비역사화한 예수이해로서 이상인으로서의 예수상과 수난자로서의 예수이해를 들 수 있다.

 

이상인 예수: 예수를 이상적 인간으로, 대담하며 상당한 논리적 전개로 일관한 글은 선교사 하리운의 "예수 그리스도"9)『신학세계』, 1920(2-3).라는 논문인데 이것은 한국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변론한 최초의 논문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인자'를 에스겔의 전통을 받아10)다니엘서와 구별된다. '진실한 사람'이라고 이해하며 "그런고로 인자란 뜻은 탁월한 인물이오, 진실한 사람이오, 모본을 완전히 실현하야 인류를 지어내신 조물주의 심중에 가지셨던 지상적 인류의 상당한 대표자"라고 해석함으로써 '이상인 예수'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즉 인간이 지향할 종극적 모델이 바로 예수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초월성'을 부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 Christi)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도로서 처녀탄생설화를 아담 창세설화의 유비로 해석하며, 누가복음 2장 40절의 표현을 들어 인간발육의 정상의 과정을 거쳐 자라났으며, 시험받은 기사에 대해 "그 진정한 인류적 성질을 가지신 것이 가장 명백히 드러났습니다"라고 하여 전술한 박형룡의 논술과 대조를 이루며, 신적인 것은 진행적이란 전제 밑에 예수의 '거룩함' 마저 진행적이라고 함으로써 그가 순수 인간임을 증거하려고 하며, 그의 교훈 또는 기적행위 그리고 수난에의 각오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있는가능성의 실현으로 보고 있다. 하리운처럼 논리적 전개는 못했으나 보수계에 속하면서도 이 유형에 속한 글로 채필근의 "인간 이상의 합치점에 서신 예수"11)『신지』 1933(6).를 들 수 있다. 그 제목이 명시하듯이 예수는 '진선미의 이상', '진선미의 완전한 이상'이라고 함으로 예수와 인간과의 질적 단절을 배제하고 "자유, 평등, 동포주의의 모든 이상은 예수의 애(愛)에서 비로소 완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함으로 예수는 인간이 이상으로 하는 사회구현의 이상이기도 하다. 그보다도 예수를 총괄적으로 이상적 인간으로 서술한 것은 정경옥의 『그는 이렇게 살았다』12)1938 초판, 1953 재판.라는 소책자이다. 그는 예수의 시험받음과 관련히여 "예수께서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해결지으셨는가. 첫째는 이성의 판단이 있고, 둘째는 인류의 경험이 있다. 예수는 명석한 이성과 고원한 선견을 가지시고 전통으로 받은 인습을 조금도 주저하는 태도 없이 단호한 비판을 내리고 당신의 주견을 세웠다"고 하고 또 산상설교를 언급하는 데서 "예수께서는 인생(生)을 멀리 내려다 보셨다. 그가 산에 오르실 때마다 생의 새로운 '비전'을 보셨던 것이다" 또는 "예수의 이상주의가 현실만 보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고원한 몽상같이 생각된 것이다" 등에서 그는 너무도 인간적이되 어디까지나 이상에 사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의 겟세마네의 고뇌, 십자가의 죽음 등에서 어떤 구속사적 해석도 배제하고13)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4)", 『기상』, 1968.4. 참 인간으로서의 투쟁으로 묘사하는 데서 그의 입장은 관철되고 있으며 계속 제자에게 그를 닮을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권고한다. 그런데 그의 특징은 위의 두 사람의 경우와 같이 그의 행위보다도 그의 인격에 치중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를 본받을 인간의 과제도 어떤 역사적 과제가 아니라 본래적 인간, 이상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예수를 비역사화했다는 것이다.14)이상호의 "예수의 윤리와 오늘" 『신학논단』, 1974. 12)도 이 계열에 속한다고 본다. 가령 안식일론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 대한 해석 참조. 뒤의 두 사람은 하리운보다도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무관심했다. 저들은 자유주의신학의 물결을 호흡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상은 교회 주변을 도는 지식인들의 예수이해에 많이 작용하는 것이다.

위와는 다른 입장과 관점에 있으면서도 비역사적 예수이해라는 점에서 공통된 것은 이용도를 대표로 하는 예수이해일 것이다.

이용도는 현대교회를 비판하여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를 구하고 있다고 하면서 "예수는 고(苦)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다."15)병종호 편, 『이용도 목사의 일기』, 102. "오-주여!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주님은 너무나 천한 주님이시었나이다. 너무나 무력한 주님이시었고 너무나 비근(卑近)한 주님이시었나이다."16)동상, 161. 이와 같은 표현들이 그의 편지, 일기, 설교 등에 연속되는데 이러한 예수상에 따라서 그는 고, 비, 빈, 천을 그의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았다.17)민경배, "한국교회에서 이해한 예수상", 『제3일』, 1972. 즉 그는 수난자 예수를 따라서 고행자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왜 수난을 당해야 했느냐는 역사적, 사회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고 단지 고난 자체만을 '미화' 하므로 고행의 신비주의로 몰입되어 갔다.18)동상 4, 81, 102, 117 등에 거듭 강조. 결국 그는 고행주의로써 수난의 예수와 현대적으로 합일되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역사 현실에서의 도피 행동으로 낙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예수의 역사적 이해

예수를 수난의 종으로 본 것은 성서의 한 전통이다. 그런데 예수의 수난 자체를 신비화함으로 비역사화하지 않고 그 까닭을 역사적으로 물으면 그를 본받는 길은 신비계에의 몰입이 아니라 행동주의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이용도와 비슷한 시기에 조용기는 "예수에서의 재출발"19)『청년』, YMCA간, 1928. 7., 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역사적 문제를 열거한 후 "오늘 예수가 여기 있다면?" 하는 자문에 대해 "예수는 필연코 모든 약자, 빈자, 병자, 피압박자를 위하여 낙루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밟으셨으리라. 교회에 칩거하시지 아니하시고 가두에 진출하여서 희생적 정신으로 의로운 '고난의 업'의 형상을 취하였으리라"고 하므로 수난의 종으로서의 예수이해와 그를 본받을 것을 말하되 고행주의 아닌 행동을 제창하고 있다.

 

혁명가 예수: 바로 이 무렵이 소련의 공산혁명의 여파로 사회주의 바람이 세차게 불 때다. 그러나 장로교의 『신학지남』지는 끝까지 이에 침묵하고 감리교의 『신학세계』는 심심치 않게 그에 관심을 표명할 정도였는데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가톨릭청년』과 YMCA의 『청년』지였다. 『가톨릭청년』지는 무게 있는 논문으로 반론을 전개하고 있는 데 대해 『청년』지는 그 잡지 성격에 연유한 탓인지 비교적 가벼운 글이나 계속 이에 반대하는 문제를 취급하되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겠다는 자세다. 그 중에 예수이해와 관련된 글들만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20)유경상, "사회주의자 예수", 1923; 이대위, "사회혁명의 예수", 1928; 이광수, "그리스도의 혁명사상", 이상 『청년』의 글 외에 송창근,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의 기여", 『신생명』, 1924; 허리영, "개혁자 예수", 『신학세계』.

그 중 처음 이문제를 다룬 유경상은 그 글에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을 의식하고 그에 대한 비판 없이 "레닌 그 사람도 필연 예수의 주의를 표준삼지 않으면 자기의 숭고하다고 하는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전제하고 예수야말로 혁명을 위해 왔다는 논조다. 여기 대해서 송창근은 "예수는 평민이며 요셉과 같은 노동자이고 … 남의 집 마굿간밖에 나실 곳이 없었으며 …" 등으로 그가 무산자의 친구임을 역설하고, 이대위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그리스도론의 차이를 지적하고 "예수를 '사회개량가', '혁신가', '혁명가'로서 유물론자의 그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할망정 그러한 사상과 행동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고 입장을 전제하고, 대체로 사회주의 주장에 따라 예수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크리스천인지도 불투명한 이광수마저 이런 유형의 글을 쓴 것을 보면 YMCA가 당시에 이른바 지식층의 동향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역사현실에 민감했음을 말하는데 그런 현상은 교파성과의 거리와 함수관계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역사의식에서 싹이 튼 예수이해는 곧 일제의 탄압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역사의 예수: 위에서 고난 또는 개혁 등의 차원에서 예수를 이해했으나 그것은 실은 해석자의 역사의식의 발로인데 그런 의미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성을 철저히 의식 강조하고 예수를 역사와의 관계에서 파악하려고 한 이는 김재준이다. 그러한 역사의식은 예수이해에도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다. 그의 무수한 논문 중21)"종교와 역사", 1952(전집 I);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 1958(전집 II);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 1959(전집 II); "역사참여의 신학", 1971(전집 II) 등등.에서 예수는 "인간 역사 안에 들어와 역사적 인간이 된 로고스이다"22)"종교와 역사", 동상.라는 전제에서 그 실제로서 "병자, 타락자, 폭군, 직업화한 종교가, 무정한 부자, 범죄자를 '현실 그대로' 공의와 사랑으로 '대속'하려 하였다. 하늘의 질서를 이 역사 안에 수립하려는 것이 그의 천국운동이다. 그는 종국에 이 '역사'를 부등켜 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23)"역사참여의 신학", 동상.는 표현에서 예수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극치를 나타낸다.

그가 말하는 역사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 세속세계다"라고 함으로 세속인 예수의 길을 열어 놓았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심판자로 오시지 않고 봉사자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수난의 종'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걸었다…"24)"혁신과 통합의 출발점", 동상 II.고 하고 imitatio Christi를 역설함으로써 그의 수난의 의미를 분명히 하였고 결국 해방의 신학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세속인 예수: 1960년 중간부터 세속화신학이 활발히 논의됐는데 거기에서 예수이해가 또 다른 색채를 띠게 되었다.25)서남동, "복음전달과 그 세속적 해석", 『기상』, 1965; 유동식, "한국교회가 지니 비종교화의 과제", 『기상』, 1965; 홍현설, "예수의 수육과 세속성", 『기상』, 1967; 유동식, "복음의 세속성", 『기상』, 1967; 이계준,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 자신의 세속이다", 『기상』, 1967.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는 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현장(세속세계)에서만 만날 수 있으며, 둘째 그 예수는 너(남 또는 이웃)를 위한 존재라는 점이다. 이것은 본회퍼의 예수이해와 같다. 유동식은 남을 위한 존재로서 "타자인 이 세상의 자유와 구원을 위하여 살고 죽었다"고 하면서 "한국의 교회 존재양식도 그래야 할 것이다"고 함으로써 imitatio Christi에 귀착한다.

홍현설은 세속세계를 좀더 구체화하여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굶주린 인간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현대 도시의 빈민굴에서 '이것은 내 몸이니 … 이것은 내 피니'하시며 그의 찢기운 분신들인 인간들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하고, 수난당한 자와 동참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찬 배송자가 아니다"고 한다.

이계준은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 자신의 세속이다'라는 유보 없는 예수의 세속성을 말하고 그 구체적인 행위로써 "종의 형상을 입고 이웃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한 인간 예수"라고 한다.

이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결같이 세속세계라고 할 때 수난당하는 눌린 자, 가난한 자 등과 직결시키는 것이며, 또한 예수의 세속성도 바로 그런 자와 더불어하는 수난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구원자 예수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재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해방자 예수: 구원이라고 할 때 이분법적 사고로써 영의 구원, 이 세상에서의 도피 등의 뜻이 결정적 역할을 한 풍토에서 역사의식이 뚜렷해지고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전인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사회적 상황과 유리시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구원이란 말대신 해방이란 말이 대치된 것은 당연 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악이라고 하는 것도 역사-사회적 측면에서 재이해되는 수밖에 없는데, 70년대로부터 그러한 측면에서 본 예수이해가 다원적으로 전개되었다.26)김재준, "그리스도와 인간해방", 1970(전집 II); 문동환, "해방신학과 기독교 교육", 『세계와 선교』 10회 연재; 박형규, "구원과 해방", 『 기상』, 1973; "소외대중과 교회의 선교", 『기상』, 1973; 안병무, "악에서의 구원", 『기상』, 1974; "그리스도와 국가권력"(사목) 1974; "오늘의 구원의 정체", 『기상』, 1975; 문상희, "예수와 젤롯당", 『기상』, 1974.

김재준은 예수의 공생애의 사업으로 병고침, 실존적 허무에서의 해방, 악마적 세력의 축출, 율법의 조문, 도덕적 규율에서의 해방, 새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 도래 선포로써 탈출의 길을 열고 죽음에서의 해방 등을 약속하는 등을 열거하여 해방이란 바로 전인적 구원을 뜻한다고 보고 그런 이가 예수라고 본 것이다. 문동환은 화해자라는 예수에 대한 교리를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 낙착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그와 대조하여 해방자야말로 예수라고 강조한다. 해방의 목적은 '참된 생'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방이 맑시즘의 그것과의 차이는 어떤 계급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진 자, 못가진 자 전체의 해방을 말한다는 것이다—물론 두 계급의 해방될 조건은 다르지만.

박형규는 예수의 생애에서 공생애의 출발로서 세례 요한 운동에 가담하고 시험받은 것 등을 제일차 해방이라고 보고, 그 다음의 그의 설교나 행동의 초점이 된 하나님 나라 운동인데 그것은 새로운 공동체 형성으로서 제이차 해방을 위하는 것으로 본다.

이 같은 해방이라는 범주 안에서 예수와 인권, 예수와 법질서, 권력과의 관계 그리고 마침내 정치경제적 구조악에서 해방의 총칭이 사탄추방과 직결된 것이라는 예수이해가 진행되었다.

 

민중의 친구 예수: 해방이란 일차적으로 눌린 자, 가난한 자 등 수난자를 대상으로 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친구 예수'라고 하는 것은 해방자 예수와 같은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난자라고 할 때 상황적이며 개별적 개념이 될 수 있는데 대해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구조상에 있어서 소외되어 비인간적 대우를 받은 계층을 총칭한 것이다. 성서에서 '죄인의 친구 예수'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 그런데 그 죄인이란 규정이 기존 가치관에서 내린 정의인데 대해 민중의 친구라고 하는 경우 예수의 현실과 같은 뜻으로 가치관에서 구별 되지 않고 단순히 '버림받은 계층'이기 때문에 그들의 편이 된 예수 이해로서 공관서에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

서남동을 위시하여 여러 편의 글이 나왔는데27)서남동, "예수교회사한국교회", 『기상』, 1975; 안병무, "민족민중교회", 『기상』, 1975; 한완상 "서민 예수", 『창작과 비평』; 김경재, "민중의 신학과 한국기독교의 미래", 『기상』, 1976;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기상』, 1976. 3; 전병호, "민중과 예수와 권력", 『기상』, 1976. 12. 서남동은 예수가 세례 받고 시험받은 데서 억압당하는 민중과의 동일성을 확인한 다음 그 일성인 누가복음 4장 18절을 해방의 선포라고 해석하고 "경제적 빈곤, 사회적문화적 편견, 사실이 은폐된 어두움 속에 사는 무리,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작업이다"고 하여 소외자와 민중을 동의어로 쓰고 있다.

한 걸음 나가서 예수는 민중의 우선권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주기도문은 부자가 드릴 자격이 없다고 단정하는데 까닭은 그 기도가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26)안병무, "오늘의 구원의 정체", 동상. 예수가 민중의 편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당시의 체제에서 보아 죄인 또는 버림받은 소외자로 취급된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인간(하나님의 자녀)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바로 그들의 친구로서의 예수의 선언이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역사의 예수의 행동의 핵심에 접근한 것이며 또 현존의 그리스도로서 이해하고 오늘의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데 하나의 관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4. 총결론

이상에서 손이 닿는 범위의 자료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예수이해를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대부분이 일관한 방법론에 의해 연구된 성서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기존 교리를 고수하거나 아니면 시대적 요청에 의한 희망적 이해도 많기 때문에 이해가 상(像)이 되고 만 것이다. 하여간 이상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을 보았는데 보수 계의 예수상은 변하지 않은 데 비해서 역사적 예수이해는 계속 역사 현실과 더불어 그 이해의 진폭과 깊이가 달라져 왔다. 여기서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가름할 의사는 없고 단지 큰 두 가지 경향에서 본 여러 형태의 예수이해에서 어느 것이 성서의 그것에 가장 접근했느냐 하는 것과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느 예수의 이해가 바른 길을 걷게할 것인가하는 물음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해석의 방법론 과정을 묻지 않고 그 결론만에 의한 판정을 한다면 보수계의 초월적 예수이해에 나타난 상은 그리스도이지 역사에 실재한 예수는 아니기 때문에 그는 따르거나 배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배의 대상이다. 그러한 초월적 그리스도 이해가 절대로 일정하지는 않지만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상의 일부분임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바울이나 요한 등에서 그렇다. 그런데 요한은 비록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의 전기를 쓴 것이 아니지만 부활한 예수가 바로 제자들의 역사적 현존에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로고스가 사르크스(고기덩이)가 되었는데 바로 그 사르크스에 은혜와 영광이 충만했다고 하는 것은 세속 안의 그리스도에 대한 대선언이다. 그가 지금 바고 그 세속 속에서 수난당하면서 끝장을 내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바울도 역사의 예수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믿은 그리스도는 초월된 피안에 있지 않고 그의 선교와 수난의 현장에 동행하는 현존의 그리스도다. 바울은 세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행동을 명하는 이로 imitatio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존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다가 마침내 많은 수난 끝에 민중을 소요한 죄로 투옥되고 로마에 압송되어 순교당했다. 만일 한국의 보수계의 예수이해가 요한이나 바울에게 접근된 것이라면 왜 그렇게 다른 모양으로 다른 길을 걸을까?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 예수라면 우리의 인식 영역인 지상의 예수의 간 길에 결코 무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예수 추구의 노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비록 단편적으로 알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길은 수난의 연속이었고 결국 로마에 의해서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해에 의해서건 근거가 있어서건 별 문제다. 분명한 것은 로마와 유대 지배층에 거슬리고 위험한 인물로 보여서 처형된 것이다. 그런데 그를 초월적 존재로 교리화한 자들의 길은 왜 그렇게도 예수의 길과 달라질까? 그리스도가 단순히 영적 존재로서 인간의 영만을 대상으로 하는 구원자라면 충돌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역사적으로 예수를 이해하려는 계보는 역사의 예수와 역사적 이해와를 혼동하고 있어 부분적인 것의 핵심을 찾는 경우가 있으나 총괄적인 이해가 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사렛 예수의 참 모습이나 뜻을 추구하는 역사의 예수 연구를 등한히 할 수 없으며 적어도 그러한 성서학적 노력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29)윤인구, "역사적 예수", 『처년미단』, 1928; 문상회, "역사의 예수문제", 『신학논단』 2집, 1954; 전경연, "역사적 예수의 해석학적 문제", 『신학연구』, 1960; 김용옥, "최근 역사적 예수연구의 동향", 『기상』, 1964; 허혁, "예수 그리스도", 『기상』, 1968; 안병무,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신학전망』, 1971. 그러므로 일단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 신학자들처럼 어떤 방법의 적용에 실패하니까 역사의 예수 추구는 불가능하다고 체념하거나 아니면 방법론의 주변에서 맴도는 데서만 어떤 결말이 와지리라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의 예수 추구의 노력과 예수를 따르겠다는 정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이 역사의 현장에서 남을 위한 삶에 엄숙한 한, 어떤 방법론에 의한 한계선에서 정지하고 이른바 학문적 유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앞에서 남과 더불어' 하는 것이 역사의 예수의 실재적 조건임이 확실하다면 오늘에 사는 우리와 공통분모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한 그는 알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 그러한 공약점에서 나의 현장에 충실하다 보면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철칙은 없을 것이다.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기능으로 예수를 설명하는 것은 비록 성서에서 추려낸 개념이라고 해도 오늘의 현실에서는 맞지도 않거니와 이해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군왕으로서 군림한다는 것은 민중을 그 앞에서 도망하게할 따름일 것이다.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그를 그토록 민중에게서 격리시켜야만하는가? 협박의 대상으로 말이다.

(『기독교사상』, 197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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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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