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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1.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프로테스탄트란 '별명'은 그리스도교의 향방을 결정한 표어와도 같다. 그 성격은 저항정신이다. 이 저항의 대상에 대해서 혼미해질 때 그리스도교 자체가 혼미해진다. 저항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자신이다. 이 점이 분명해지고 그 일에 과감할 때 교회는 살기도 하고 또한 죽기도 한다.

1)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한계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을 뺄 수 없다. 아니 근대적 의미에서 그가 바로 이 향방을 재정립한 선구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개혁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보고 넘어가야 옳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부르크(Wittenburg) 교회 문에 95개조의 고백적 고발문을 내건 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때 그는 30대 초반의 무명의 승이었다. 그의 저항의 직접적 계기는 겨우 23세에 마그데부르그(Magdeburg)의 감독으로 임명된 알브레히트(Albrecht)가 마인츠(Mainz)의 감독직까지 겸하기 위해서 교황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서 그의 지배권 내에 면책증을 판매하는 권한을 얻어 그중 반은 상납하고 반은 자기가 착복한 부패상에 기인한다.

이것은 알브레히트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권력 구조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감독은 동시에 그 지역의 권력의 장이 된다. 교황의 삼층폭(三層幅)이 상징하듯 교회는 모든 권력의 총체이기를 고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지향하는 목표를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딴 데로 옮겨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프로테스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자기와 꼭같은 숙명체로 생각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의 프로테스트의 골자는 대충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교는 결코 권력체로서 치자일 수 없고 언제나 섬기는 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권력체화된 히에라르키(Hierarchie) 체제에 저항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사랑의 공동체다. 그러므로 그 안에 하느님(그리스도)과의 관계에서 계급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고백하면서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중개계급으로서의 사제계층을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구체적으로 만인사제론과 성서 해석의 독점권 부정론으로 표명되었다.

이상은, 당시의 교회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차스러운 교리망으로 얽어매던 것을 회고하면, 천백 번 옳은 저항이다. 그뿐 아니라 성서적인 입장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프로테스트다. 예수가 언제 특수 계급에게 그런 독점권을 주었던가. 오히려 그는, 신도 경전도 독점하고 민중에게 무조건 추종을 요구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죄인으로 규정, 소외시켜 버린 예루살렘의 패거리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저들이 백안시 한 갈릴리 민중에게 직접 와서 그들과 더불어 산 것이 아니었던가. 그의 언어는 바로 이 민중의 언어, 그의 거처는 바로 저 민중의 삶의 현장이 아니었던가.

이런 점에서 당시의 무수한 미신적 사크라멘트적 교리를 타개함으로써 그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킨 것, 그리고 무엇보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연구에서 찾은 복음성의 핵심인 의인론을 정점에 재수립함으로써 지식과 지위를 가진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서 형성되고, 그런 계층만이 알 수 있는 복잡한 교리적인 구원론(그것은 모든 것을 구속하는 밧줄 이상이 아니었다)에 대해서 문맹도 쉽게 알고 행할 수 있는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구원론을 내세운 것은 그 자체로 볼 때 너무도 민중적이며, 그가 사제계층만이 독점하기 위해 라틴어로만 된 성서를 단신 민중의 언어로 옮겨서 성서를 민중에게 돌림으로써 교권자들이 허구적 독점권에 프로테스트한 것, 그리고 또한 나는 자유인 이어서 아무의 종도 아니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에도 빚지지 않는다"라는 바울의 주장을 전체에 적용함으로써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유가 궁극적인 복음의 실체임을 드러낸 것 등은 모두 민중적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바로 파악한 것으로서 크게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고 부작용이 따랐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교분리를 너무 기계적으로 주장하여 마침내 '두 나라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권력과 야합함으로써 부패하는 교회 내부의 사정에만 부심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 결과는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방임주의, 나아가서는 그리스도 공동체들의 무책임한 체질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두 나라설은 정권이 다스리는 영역을 교회의 아날로기라고 하고 세계질서는 간접적으로 신의 종의 역할을 한다고 하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집단을 이끌어나가려니까 권력(칼)을 행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교회와 구별된 자율적 권한을 신학적으로 인정하여 마침내 폭력도 정당화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했다.

그는 '세상 나라'는 육체와 재물만을 다스린다고 하고 나서, 교회는 영 또는 영적인 영역에만 관여해야 한다는 결론을 초래케 했는데, 그런 이분법의 모호성도 문제지만 이로써 그는 권력정치의 횡포성과 권력욕에 대한 무식을 폭로했으며, 이른바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실상은 거대한 유산인 기구적 기독교라는 재산권에 대한 지배권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것일 따름이었다. 이렇게 정교 두 영역을 나눠버리면 그가 비록 사랑 등을 아무리 강조해도 영적으로만 해석하면 결국 허구한 말만이 될 뿐 실제 수난당하는 자를 위한 행동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사랑도 행동으로 나타나면 사회정치적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그가 학대받는 농민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행동화된—비록 불상사도 있었으나—토마스 뮌처(T. Münzer)를 그토록 앙숙처럼 대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루터는 종교개혁만 생각했지 그것이 사회개혁과 병행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2) 제2의 종교개혁

영국의 산업혁명 이래로 세계는 완전히 변모되었다. 그것은 단적으로 자본과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어 인간은 소외 또는 추방당하는 일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시대였다. 실업자군이 거리를 헤매고, 자본가의 횡포는 극에 달했으되 이미 자본과 결탁된 '세상 나라'는 그 자본가들의 협조자의 위치에 있음이 당연했고, 그리스도교는 두 나라설의 '충실한' 한 수호자로서 이런 사태에서도 아랑곳 없이 옛 잠을 계속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전환기에서 생기는 모순이 폭동에로 휘몰리는 일이 없도록 공장 안에서 착취당하고 거리에 쫓겨나서 분노의 화신이 되어가는 소외군들을 무마하는, 이른바 카리타스(Caritas, 자선)운동으로 의식무의식으로 자본주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것으로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때처럼 그리스도교가 정의에 눈뜬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역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맑스주의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맑스가 그리스도교 비판을 그의 비약적 논조의 발판으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판국이 극에 이른 19세기 말경부터 여기저기서 '두 나라설'의 온상에서 오랜 잠에 취한 그리스도인들의 잠을 깨어 '제2의 종교 개혁'을 시도하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즉 영국에서는 모리스(Maurice), 킹슬리(C. Kingsley), 커들로(Cudlow) 등이 사회와 교회 사이에 뛰어 넘을 수 없는 담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를 했고, 미국에서는 라우센부쉬(Rauschenbusch)의 의도를 중심으로 개인구원이라는 기묘한 종교와 이기주의의 도피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끌어 내는 것으로 이른바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란 것을 제창,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룩하는 데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고, 독일에서는 블룸하르트(Blumhardt) 부자(父子)가 부흥사적 대중집회를 시작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선교의 무대가 결코 교회만일 수 없고 이 세상 전체라는 것을 주장했다는 면에서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신학적 정초는 '예수는 세상 모든 세력을 정복한 승리자'라는 것이었고, 이런 전제 아래서 정치경제 체제 안의 모든 악에 대해서도 으례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로 단순히 내적이거나 피안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다. 부활의 예수는 피안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회 안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현상에서 그의 승리를 보고 거기 참여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스스로 게토화된 교회의 문을 열고 그들을 밖으로 내모는 전선의 지휘자와 같은 독려의 역할을 했다.

한편 스위스에서는 쿠터(Kutter), 라가츠(Ragaz) 등이 주동이 되어 자본주의적 사회체제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종교라는 탈을 씌워 인위적 성역에 가두어둠으로써 결국 사회는 무신 세계화되고 맘몬이 판을 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보고 비판함으로써 역시 교회의 '하느님의 독점화'로 야기된 모순을 공격했다. 쿠터는 "당신의 의무"(Sie müssen)라는 글에서 "맘모니즘에 근거한 제한없는 탐욕을 원리로 하고 거짓을 근본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고 진단하고, 결론으로 "하느님은 종교가 아니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르트(K. Barth)는 그리스도교와 종교성을 준엄하게 대립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젊은 시대에 받은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한 본회퍼

독일 나치스의 횡포는 그리스도교회에 큰 영향을 끼쳐서, 제 할 일을 못하게 한 루터의 '두 나라설'이 근본적으로 시련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종교개혁의 다음 단계를 열 수밖에 없게 했다. 여기서 여러 가지 과정과 정황을 서술할 의사도 시간도 없다. 나는 본회퍼(Bonhoeffer)에 주목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의 사상을 소개하려는 의사는 없고 그를 거점으로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제시하는 데 그치려고 한다.

위에서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이 동반할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우선해야 하는가, 아니면 동시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공식적 대답은 불가능할 것이다. 본회퍼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적어도 행동면에서는 사회개혁에 먼저 손을 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운명이 그의 본뜻과 직결된 것인지는 아직 논자간에 논의가 있으나, 하여간 그는 나치스 정권을 그대로 두는 한 무엇이든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기에 저항행동 대열에 뛰어든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투옥되었는데, 그의 투옥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케 하고 거기서 신학적 고민과 해답을 찾게 했다. 그것을 나는 그의 짧은 말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vor Gott ohne Gott)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이 말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의 구체적인 만남의 경험과 그리고 그의 신학적 명제에 대한 배경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가문으로나 가정 분위기, 또는 성장과정에서 볼 때 상류 사회에 속한다. 2차대전 이전의 서구의 대학 세계란 특수 계층의 집단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누구보다 빨리 박사가 되고 대학교원 시험에 합격되었다. 그는 전통적 신학훈련을 한 상아탑 안의 서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 간수들은 물론 많은 죄수, 그 중에 많은 잡범들과 피부를 맞대는 접촉의 기회를 가졌던 것은 그의 생에서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경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과의 접촉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강단(대학)신학이 얼마나 상아탑의 독백이며, 사치한 사변의 유희적 요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등록된 그리스도인들인 이 죄수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언어와 논리의 싸움이었다는 말이다. 저들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등록하여 법으로 규정된 헌금을 매달 내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삶에 신은 전혀 언급도 되지 않으며 계산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 점에서는 그가 살고 있는 그 시대, 그를 투옥시킨 권력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학적(교리적)으로 보면 저들은 몽땅 지옥감이며 그가 사는 세계, 그 역사는 신부재의 현실이다. 여기서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하거나 아니면 이 세계를 통틀어 소돔과 고모라처럼 저주해야 한다. 그 어느 것을 선택하기에 앞서서 그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은 저 살인범, 절도 등 잡범들이 그가 그들을 알기 전에 상상했던 것처럼 질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사실, 아니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경건한 자세와 용어만 골라 쓰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저속하다고 볼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들나름의 성실성과 존엄성, 그리고 남을 위하는 인간애가 있다는 사실이다.

본회퍼는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한 것이다. 그 민중! 예수가 싸고돌고 또 예수가 좋아 밤낮으로 좇아다니던 그 갈릴리의 민중과 동일한 그 민중을! 예수가 저들을 무조건 받아들였는데 누가 저들을 정죄할 것인가? 있다면 교리요, 교권이지 본회퍼는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역시 신학자다. 신학자는 전통성에서 전수받은 것을 전승할 의무도 있지만 그것을 언제나 해석할 의무도 있다. 크게 보면 신학적 근거를 찾아야 행동할 수 있는 점을 진 것이다.

신학자로서의 그에게 신 없이 사는 이 민중도 하느님의 백성이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했다. 여기서 그에게 크게 확대 해석된 것이 이른바 바울에게 근원을 두고 루터에게서 종교 개혁의 무기로 되었던 의인론(Rechtfertigungs Lehre)이었다. 즉 '하느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죄인이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범인 그대로를 그 대상의 의식상태야 어떻든,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하느님은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들도 하느님 품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이다. 그런 뜻에서 그들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 있는 존재 들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결국 의인론의 세속화다. 그러나 이것은 딴 면에서 말하면 세속 세계와 교회, 즉 세속의 담을 돌 하나 돌 위에 덧놓이지 않게 다 허물어뜨린 것이며, 동시에 무신적 인간, 무신 세계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로써 인간적인 한계, 교리적 심판의 기준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물론 이런 사상은 그의 옥중에서의 메모에 담긴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현재까지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개혁의 수문을 연 것으로, 그것은 지금도 여러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차안트(Zahnt)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순교자들 중에는 세계를 교회에로 불러들인 사람이 많았는데, 본회는 교회를 세계에로 불러낸 순교자가 된 셈이다. 그는 교회시대는 지났다고 봤다. 이 이상 신의 이름을 우리의 돼먹지 않은 지식을 보관하는 구멍가게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금 할 일이 있다면 신학이니 교회니 하는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하는 재고품들을 깡그리 없애버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느님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공간)를 위해 '비우는 일'(Kenosis)을 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까지 그는 말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예수에게 돌아가는 것을 생활로 보여주었는데, 예수를 배운다는 것을 그는 둘로 요약했다. 하나는 '더불어 산다'이며, 또 하나는 '더불어 수난당한다'이다. '더불어 사는 길'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길이다. 그는 그것을 예수가 사람이 된 인카네이션 사건으로 구체화된 것과 결부시켰으며, '더불어 고난당한다'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감옥 속의 무신론자들과 더불어 살다가, 더불어 수난당해 교수형의 이슬로 사라졌다.

2. 한국 그리스도교의 개혁

이제껏 종교개혁의 몇 가지 예들을 고찰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어느 시점에 서 있는지 고찰할 단계에 왔다. 위의 예들은 비록 서구에서 된 일이나 우리도 그것에 속한 공동체의 역사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으로 그런 것들을 귀감으로 해서 우리를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려고 한다.

첫째, 한국의 신교는 루터처럼 정교분리를 주창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정권을 장악해서 부패할 만큼 강대한 세력이 된 일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그런 위험성은 없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를 주장한다면 자기개혁의 프로그램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간섭을 안 받겠다는 저항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정교분리의 주장이 일제 시에 집요하게 주장되더니 현금에도 계속된다. 집권자의 이같은 주장의 뱃속은 뻔하다. 그러나 그것에 놀아나는 그리스도교 내의 일부층은 무슨 착란증의 발로인지 알 길이 없다.

교회 내의 계급성 부정도 필요없다. 더욱이 우리는 네비우스적 방법에 의해서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날부터 지도자가 될 의무를 갖는 전통과 그리고 처음부터 성서를 직접 읽고 해석할 권리를 지니고 있으니, 비록 이른바 교권주의의 망령의 소리를 가끔 듣는다고 해도 문제할 게 없다. 처음부터 그러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덕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만을 오늘에 이동하여 이원적 설법 위에서 사회에 대한 자기의 책임회피를 정당화하는 일은 제발 그만두자. 만일 교회가 권력과 야합해서 어떤 이득을 노렸거나 결탁이 되어 있다면 정교분리를 끝내 황금률처럼 부르짖으려는 자는 자기개혁의 슬로건으로 그것을 내걸 수 있다.

둘째, 우리 자신의 개혁에 시급한 것은 스스로 만든 달팽이 껍질 같은 게토화된 자기방어의 갑옷을 벗어 버리는 일이다. 우리는 누가 시작했는지 몰라도 교회라는 공동체를 노아의 방주와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을 그리스도인의 귀감으로 삼는 전통이 생겼다. 이 둘은 다 같이 이제 곧 망할 세상이니 나만이라도 빨리 도피해서 구원받자는 데서 공통된다. 이런 태도가 한말(韓末) 그리고 의거 이후의 힘 없는 식민지 민족으로서는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 태도에는 이기주의와 비겁성도 간과할 수 없으나 또한 비타협의 저항정신도 그 동기의 일부였을 수 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것은 비겁한 자의 자기방어의 방패가 되고, 비겁한 자들이 그 안에 안주하기 시작하므로 민족의 수난과 유리된 군살 같은 것이 되며, 31의거와 같은 의거가 민족사에 잊을 수 없는 일익을 담당했는데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사와 관계없이 이질적인 종파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체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패쇄적이 됨으로써 한국 안에 있으면서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민족적 현실 문제에 오불관언의 자세를 취한 긴 세월이 남겨준 인상이다.

교회란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타를 위해 존재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반성을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한 민족 공동체 안에서 나는 누구고 너는 누구냐! 이 민족의 문제가 바로 나 또는 우리 일이 아니라면 민족사에서 소외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한국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살려면 이 민족사에 참여하려는 그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종교개혁운동과 같은 것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운동에서 가장 원초적이면서 핵심적인 것은 역사를 선교사적 차원에서 보는 눈을 돌려 민족사적 차원에서 보는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확대해나가느냐라는 관심에서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이 민족사적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관심으로 나가는 일이다. 더욱이 이 민족의 현실이 급박하고, 그 안의 모순율에 의한 부조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아래 신음하는 눌린 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자신을 내바칠 수 있는 가벼운 옷차림과 동원태세가 필요하며, 언제든지 자기가 타고 가는 말에서 내려 지금 강도 만나 수탈당하고 구타당해 반 죽어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사라미아인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이것은 위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한국 그리스도교는 민중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민중의 소원에 호응하여 그들과 더불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본래의 모습이었는데 한국 교회는 점점 스스로의 위치를 부정하고 탈민중, 나가서 민중에게 등을 돌리는 과정 속에서 기형화되어 가고 있다.

한국 교회사적 측면에서 볼 때 교회로 찾아든 사람들은 한말부터 눌리고 버림받은 계층, 즉 민중이 주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백낙준은 그의 교회사에서 "한국에 있어서 전형적 교회는 시골 교회이고 전형적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농부다"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에 반해서 서구 계몽사상에 물든 이광수는 한국 교회의 성원들의 지적 수준이 낮은 비판했으며, 안창호는 교회에 모여 통성기도하는 민중을 보고 "저 어리석은 국민을 어떻게 깨우치랴"고 개탄했다고 하는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류계층의 공동체였다는 사실에는 같은 견해다. 이 현상은 초대교회의 현상과 흡사하다. 바울은 초대교회의 구성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세력있는 사람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고전 1:26).

이러한 민중의 공동체에 대해서 어느 만큼 긍지를 가졌으며, 어떤 의식이 있었는가?

1893년 선교사협의회의 선교정책 10개조는 주목할 만한데, 그중에 우선 노동자계급을 상대하여 전도하고 후에 상류계급에로, 먼저 남자들보다 부녀자에게로, 그리고 도시보다 지방에서부터라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선교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본 계층의 구분으로 선교전략으로 잘 정해진 것이다. 백낙준도 위의 지적 뒤에 "이 교회가 미래에 있어서 강할 것인가 또는 약할 것인가 하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겸손한 농촌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달관 이 있다. 하여간 평생 사람 대접 못 받고 가난과 박해에 신음하던 민중이 교회에 몰려들어 불과 20년 만인 1905년에 25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때까지는 완전히 기구적으로나 권위상으로 선교사들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러면 이 민중들은 무비판적으로 저들에게 복종하고 배웠나? 31의거에 바로 이 민중이 총출동해서 생명을 내대며 독립운동 전선에 총동원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정치)과는 완전히 상반된 폭발적 사건이었다는 것은 교회사가들이 입을 모아 증거하는 바다. 그때의 많은 자료 중 선교사들이 총독 사이토에게 보낸 글 한 구절만 인용한다. "기독교가 반란 선동의 소굴이라고 지정된 감을 주는 것은 선교사로서 선교상 다대한 이해관계가 있다…. 우리는 교회 역원 및 교사에게 권세에 복종함을 가르치고 교회는 정치운동에 간여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이 민중을 이렇게 뭉치게 했으며 궐기하게 했나? 31독립선언문이? 33인이? 천만에! 우리는 이러한 가벼운 판단으로 민중이 지닌 예민성과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니 저들에게는, 역사의 방향을 느끼는 안테나가 있다.

총칼 밑에 31의거가 좌절된 후 한국 교회는 이 민중에게 다시 이 민중을 위해서 결합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트는 데 뒷받침하지 못하고, 오히려 심령부흥운동이라는 형태로 인간을 이원화하고 현실을 도피하고 이기적 타계주의로 휘몰고 감으로써 사자의 이(?)를 뽑는 역할을 했다. 이같은 비역사화의 과정과 종교적, 개인적 이기주의만 조장 한 결과는 그 후에 곧 노출되었다.

1925년은 민족사적으로나 교회사상 중요한 해다. 그 해에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라는 우상이 세워졌고, 같은 해에 조선공산당이 조직 되었다. 처음 것은 이 민족의 혼을 말살할 우상이요, 둘째 것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구체적 도전자인 동시에 그들의 잠을 깨우는 경종이었다. 이 때 민중공동체로서 깨어 민중을 결속하고 또 민중의 편에서 민족적 위기에 선봉 설 각오를 했더라면 신사의 전국확대, 동방요배, 마침내 우리말 금지, 우리 성(姓) 약탈 등을 사전에 정지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위기의식도 없었고 제 구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통에 교회 내의 민중이 4분의 1로 격감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민족적 지도 위치에 있던 이동휘, 여운형 같은 인물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사회주의 진영에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그중 한 면에 불과하다. 더욱이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미 1935년 숭실전문학교장 맥큔과 숭의여학교장 스눅이 신사 앞에 절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추방되었는데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만 하다가, 마침내 1938년 평양에서 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총대 5인에 한 사람 꼴의 비밀경찰이 배석한 속에서 어용 제안자의 동의 제청만 있을 뿐 가(可)를 물을 때 '예' 하는 소리 한마디 들리지 않고 부(否)는 묻지도 않은 채, 신사참배에 참여할 것을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아니 그후 한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회원은 무얼했나? 민중은 무얼했나? 교회사가들은 그 후의 '영웅적' 투쟁으로 숫자 등을 나열하나 민중은 교회 내외를 막론하고 분노하지 않았으며, 비록 주기철 목사를 위시한 여러 교역자들이 항거하여 투옥되었으나 그 뒤를 따르는 자가 얼마나 되었나?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고 교회가 폐문된 1938년 이후 해방까지 제직회 한 번 모이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그때 교회가 얼마나 비공동체적이었으며 민중과 얼마나 유리되었는지를 알 만한 일이 아닌가?

한국 교회를,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민중을 비역사화시키고 종교적 이기주의자들로 만들어버린 데에 저들의 연대적 책임의식이 없었다고 한다면 잘못된 진단일까?

그 후에도 몇 차례 기회는 있었다. 해방 직후, 625의 폐허 위에 새 출발해야 할 때, 이승만 정권의 만행 등의 과정에서 민중이 이 교회 문을 두드리며 무엇인가 기대했으나, 교회는 자기개혁은 고사하고 낡은 철갑옷을 더욱 죄어매고만 있었다. 그래서 민중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낡은 시대 유물로 간주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419혁명이 터진 것이다. 누가 저 어린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아 저 많은 생명을 앗아가게 했느냐! 한국 그리스도교는 "우리가"라고 과감하고 솔직하게 자백할 수 있는가! 난 그런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고(개인으로는 혹시했지만), 오히려 그런 비판이 나온다면 흥분해 돌을 들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최근에 와서 그리스도교의 사명이 '민중과 더불어'라는 데 있다는 것을 예수를 통하여 배운 이들이, 민족사적 차원에서 그리스도 고백적 행동을 하는 것도 그렇게 백안시하는 눈초리로 본다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민중의 새 발견! 그것에 대한 신학적 재파악이 우리 앞날을 결정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민중적 체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7-28).

이것은 단적으로 이제부터의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현재까지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이라는 선언이 아닌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무리가 갈릴리의 예수의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여기 우리는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한 본회퍼와 더불어 '교회 내'의 민중이 아니라, 단순히 민중들에게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의 존재라는 세례를 줌으로써 저들이 그대는 하느님의 아들과 딸(인간 존엄성의 최고의 표현)임을 저들과 더불어 사는 것으로 입증하면서, 점점 또 다시 자기확대, 자기 성(城)을 구축하는 데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또 한 번의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인 자기개혁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 글은 1977년 5월 향린교회에서 행한 강연 「한국기독교의 위치와 과제」와
1977년 11월 한국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강연 「오늘의 종교개혁」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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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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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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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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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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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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