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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1. 머리말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주로 미국의 선교를 거쳐서 입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향 아래서 정착한 탓으로 저들의 신학에 의존하여 성장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신교만 해도 이미 100주년을 기념하고도 여러 해를 보낸 이 마당에 자주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통해 받은 구미신학의 유산을 재검토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또 그런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1960년대 토착화 신학운동이 활발하게 논의된 것은 이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큰 안목에서 보면 그것은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자주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기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한 범세계적 테마에 참여한 것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특수상황에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신학이 민중현실을 체감함으로 발생한 민중신학운동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자기 문제를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구미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 내지 저항의 양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적 과제를 정립하기 위해서 출발한 신학운동이 아니라 민중의 현실참여에 주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구미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한 것은 아니다.

이 글에 있어서도 구미신학의 유산을 총체적으로 검토할 수는 없고 우리 현실문제로서 구미신학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신학을 크게 성서학과 교리학으로 구분한다면 교리가 단연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 교회는 성서를 존중하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은 성서의 내용보다 교리에 의해서 인정한 성서의 외적인 권위를 수용한다는 의미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성서 자체보다는 교리에 담긴 구미신학과 그리고 교의학을 넘어선 신학의 유산을 그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2.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정통성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거기에서 정식화되었다. 이른바 종교개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점이다. 이것은 중세 신학에 대한 반동기로서 한두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다시 태어나는 몸부림이며, 우리가 이름을 아는 인물들은 바로 이 시대가 창출해 낸 상징에 불과하다. 원래 이 운동은 루터나 칼빈을 훨씬 소급해서 여러 곳에서 민중들이 봉기하듯 일어났으나 여기서는 루터와 칼빈을 신학사적으로 제한하되, 우리에게 미친 주제들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서해석권의 주체 문제이다. 중세기의 교권이란 그 중심에 성서의 해석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서의 해석권만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성서 자체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가 평신도들이 접근할 수 없는 성서를 독일의 평민들의 언어로 번역함으로 교권의 성서 독점권을 박탈했다. 그보다 전에도 이미 성서를 민중언어로 번역한 선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성서를 평신도들에게 돌림과 함께 성서 해석권마저 평신도들에게 돌렸다. 중세시대에는 교회(교권)만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자명적으로 받아들인 데 대하여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케 하라는 말로써 일면 교권에서 성서해석권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만인에게 돌렸다. 중세시대까지 지배하던 알레고리적 해석(한국에서는 영적 해석방법이라 함)방법을 거부하고, 성서 자체가 글로 된 것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서와 성서를 읽는 사람 사이에 어떤 매개물도 배제한다.

루터는 성서는 신의 말씀이라고 거듭 반복했는데, 그것은 문자영감설에까지 도달한 문자주의가 아니고 성서 안에 신의 뜻이 계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러한 그의 성서이해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내세운 이른바 정통주의에 있어서 성서의 '형식원리'와 '내용원리'로 나누어 받아들여졌다. 형식원리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내용원리란 성서 안에 있는 주제들을 의미하는데, 루터 이해에 있어서는 그것을 바로 의인론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루터는 이 의인론이야말로 사도적 복음이라 하며, 이 사도적 복음은 사도들이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성서 이전에 있었다고 하며, 성서와 독자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배제한다는 입장에서 다시 제동을 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놀랍게도 다음에 논의될 현대 성서신학과 맥을 같이 하는 시각으로 재론해야 될 내용이다.

둘째, 그는 만인사제설을 강조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법왕을 필두로 하는 사제계급에 대한 정면적 도전으로서 성서와 독자 사이에 교권을 배제하려는 그의 의도와 일치하는 결론이다. 이 주장은 한국에서 그렇게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칼빈도 이것을 받아서 목사도 목사이기 전에 평신도라는 주장을 함으로 교회 안에서, 특히 예배에 있어서 어떤 신분적 차별 같은 것을 배제했다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별히 장로교에 있어서 교회제도의 민주화에 기반이 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다.

셋째, 루터의 저 유명한 두 나라 설이다. 구체적으로 정치권력과 교역자의 기능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기 이래로 교권이 강화되어 많은 교회의 감독이나 주교들이 지방장관이나 관리직을 겸하므로 생기는 부정을 막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적인 데 국한되지 않고 신학적으로 이원론의 문을 열어 놓았다. 교회 영역과 정권이 할 일을 구분하기 위해서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영역이란 그가 구체적으로 지적했든 말았든 간에 자연법이 적용되는 영역이고, 영적인 영역이란 인간의 내면 세계를 이끌어 가는 신의 계시의 영역이다. 이것은 그의 후에 기독교의 교리의 이중구조성으로 유도하므로 자연법이 지배하는 하부구조와 계시가 지배하는 상부구조로 받아짐으로 내부적인 큰 갈등을 가져오는 문을 열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른바 성직자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관리직의 겸임을 막으려는 의도가 뒤집혀서 프로테스탄트 형성에 가담한 배후세력인 봉건주들의 영역에 속한 주민들의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감독의 자리를 내맡겨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종교개혁운동은 그 전거로서 1530년에 신앙고백서(invariata)를 채 택했는데, 1540년에 그것을 개정하여 새로운 것으로 아우구스트부르크 신앙고백서가 다시 채택된 것을 계기로 개혁세력에 분화의 위험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는 신앙태도 결정의 최고 자리에 앉은 봉건주들이 그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기묘한 위치에 몰리게 되었다. 신학과 전혀 상관없는 권력자들이 신학 문제를 결정하는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대립과 토론의 현상이 40년을 끌어 오다가 1580년에 비로소 화합신조서가 이루어짐으로 그것이 마침내 정통주의의 신학적 집약서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 바로 '세속'의 주권자들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이에 부언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몇몇 강력한 봉건주들의 권력적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청년 루터가 처음에 지양했던 순수한 동기는 봉건주들의 영향 아래서 큰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그 자신이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나 루터와 유사한 시대적 요청에서 오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 그의 성서관에 있어서 교권에서 해방해야겠다는 점에 있어서 루터와 궤를 같이 한다. 그도 루터처럼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을 배격한다. 그는 성서의 문자가 충분히 하느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기에 하느님이 그것을 이용해서 그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한 것이라는 대전제를 가졌기에 만인에게 돌리는 데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성서의 외적 권위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강조함으로, 이른바 축자영감설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까지 몰고 가게 된 책임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칼빈은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규정하는 교과서요, 법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를 '신의 자녀들의 특수학교'라고 보았다. 이와 더불어 성서의 절대권위는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증거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루터처럼 형식원리를 영과 연결시키고 루터처럼 내용원리를 지적하지 않음으로써 일면 축자영감설의 길을 열었고, 또 한편 율법주의로 경직화될 문을 열어 놓았다. 루터는 성서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을 증거하는 책이라고 본 데 대해서 칼빈은 영의 내적 증거가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성서는 신의 말씀이라는 외적 권위를 증거한다고 본 것이다. 이로써 성서가 법왕의 자리에 앉게 된 셈이다.

그러나 칼빈이 '내용원리'가 성서 해석의 열쇠로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섭리론을 들 수 있다. 이 섭리론은 나아가서 예정론으로 발전되는데, 그것은 한 운명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신론(理神論)에 저항하면서 신이 세상을 창조한 행위가 마치 기계공이 저절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 그것에서 손을 떼듯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자체가 스스로 돌아가게 하고 후퇴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관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현대에서 주장되는 'Missio Dei' 신학으로 나갈 터전이 될 수도 있고, 반면에 인간의 현실참여의 문을 아주 닫아버리는 구실이 될 위험성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칼빈의 성서관이나 그의 대표적인 역사관인 섭리론이 바로 그 시대적인 소산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한국의 보수계가 안고 있는 것 같은 오류에 빠지게 한다.

칼빈시대는 바로 혁명시대이다. 바로 이런 현장에서 칼빈은 보이지 않으나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그 의지를 보이게 한 가시적인 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고 모든 것에 개입하며 시대가 불투명하게 보이나 신은 모든 것을 예정한 대로 착착 진행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성서라는 가시적인 것이 우리 갈 길을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교서라는 주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를 이해함에 있어서 루터의 두 나라설과는 달리 그가 제네바의 행정책임자직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 책임자로 안전의 보장을 그의 치리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 두 사람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인 죄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 다 지나칠 정도로 바울 일변도로 원죄론에까지 소급하면서 인간의 죄를 강조했다. 그런데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론을 철저화하는 데 변증법적인 역할을 했으며, 또 한편 인간을 다스려야 한다는 근거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그의 두 나라 설에서 권력통치의 길을 터주어야 했고, 칼빈 자신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통치자로서의 근거를 제공해 준 것이다.

3.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많은 종교개혁의 조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칼빈에게 집중하고 그들을 극대화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정통성 수립을 위한 인위적인 작업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기독교 교리의 싸움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선택하고 어거스틴을 거쳐 루터, 칼빈을 이은 작업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정통주의란 종교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릴리전(Religion)을 종교(宗敎)라고 번역한 것은 일본인들이지만 그 '종'(宗)자가 바로 씨족의 '종가'를 의미하듯 주류권에 대한 싸움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종파든지 파생될 때에는 그 자신이 정통성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엄연히 갈라져 있는데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는 싸움에서 양적으로 서방교회가 이긴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부단히 가톨릭과의 종주권 싸움을 해야 했고, 또 한편 이미 문예부흥운동이 세계적 흐름으로 확산되므로 신교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재빨리 정통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은 자기 동일성을 찾으려는 불가피한 임전태세였던 것이다.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운동 중에 특히 루터를 중심하여 그 신학적 입장을 조화하고 강화하는 일이었다. 저들은 그 두 운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 내지 교리를 그들 개인의 것이거나 그 시대에 국한되는 것으로부터 공유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는 주관적으로 변동되지 않고 프로테스탄트의 공유물로 한다는 의미에서 객관적 정식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그 노력은 급속히 진행되어 1530년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세계에 선포했는데 그것이 인바리아타(invariata)이다. 그런데 그 고백서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1540년에 개정된 신앙고백서를 냈다. 그것이 「아우구스트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Variata)이다.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교의 교리의 골격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기초자는 종교개혁사에서 약간 이차적인 인물로 처리해 버리는 멜랑히톤이 작성한 것으로 루터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정통주의 수립에서 이 두 문건을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루터를 옹호라는 계열과 멜랑히톤 계열편과의 싸움이었다. 첫 고백서는 루터나 칼빈보다는 르네상스 영향을 수용하고 있는 멜랑히톤적인 신조가 더 강하게 부각된 데 대해서, 둘째 것은 바로 루터적인 신학에 중점을 두어 개편한 것이므로 루터파는 후자의 정통성을 고집했던 것이다. 이런 싸움이 약 40년 간 내연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1580년에 일치신조(Konkordien-formel)를 이름으로써 완전 통일된 공동고백서로 수용했는데, 이 고백서에는 칼빈의 신학도 많이 수용됐다. 이것이 바로 정통주의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공인됨으로 종교개혁의 선구적 역할을 한 후쓰, 쯔빙글리, 멜랑히톤 등의 공적과 신학 사상은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서서히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멀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의 틀을 잡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리스의 철학과 르네상스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는 시대 정신인 휴머니즘을 신학화하는 데 멜랑히톤이 사용했던 입장을 묵인하는 자세로서 수용했다. 루터는 저 유명한 보름스(Worms)의 제국 의회에서 행한 대선언에서 "성서나 또는 이성이 반박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성서만이 아니라 희랍에 근원을 두고 철학에서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성을 나란히 내세웠다는 점이다. 정통주의는 철학의 지원을 중세교회에서 아퀴나스에 대한 것처럼 성서와 대등한 관계로 공개적 수용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나 어느 한 때도 철학의 지원 없이 자기 표현을 할 수 없다.

보수주의자를 완성한 사람은 게하르트(J. Gerhard, 1582-1637)이다. 그는 정통주의 신학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인데, 계시와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으로서 이성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존중했다. 그러므로 그는 대신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그는 이성을 자연법과 일치시켰다. 이성, 즉 자연법은 자연법의 시각에서 신을 설명하는 것을 자연신학이라고 한다면 순수한 계시만을 바탕으로 전승된 교리를 다루는 것을 계시신학이라고 하고, 자연신학은 하부구조로 삼고 계시신학은 상부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엄격하게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결합되지 않고는 신학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 서구 신학의 생리다. 그것은 신의 문제를 이성에 바탕을 둔 희랍적 개념인 '학'(學)의 틀에 담았기 때문이다. 희랍적 학은 'theory'로 일관되어야 한다. 서구의 '사이언스'(Wissenschaft)는 동양의 학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서양의 학은 머리로써만 하는데 동양의 학은 몸 전체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접목에서 생기는 모순에서 보수주의는 자주 독단과 이신론을 넘나들었다.

그런데 이 정통주의가 자체 내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보수주의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절정을 이룬 가톨릭 스콜라 신학이라면 보수주의는 프로테스탄트의 스콜라주의를 형성했는데, 그것은 칼빈이 성서를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교본 또는 학교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교는 가르치는 데 치중함으로 삶과 유리된 지적인 전승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의 주류로서 형성된 것이 이른바 경건주의(Pietism)이다. 주목할 것은 이 경건주의의 태반은 평신도였다는 사실이다. 성서 자체에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형태적으로 구분한다면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보고 그의 가르침을 전수받는 제자적인 것과 또 하나는 그의 삶을 닮는 길이 제시되어 있는데, 정통주의가 전자라면 경건주의는 후자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삶을 뺀 교리전승에 반발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이미타치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에 치중한 것이다. 경건주의는 신학 전체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신학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보다 오히려 제약하고 차단하는 역기능을 비판하면서 이론보다 실천에서 그리스도의 뜻의 체현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론의 싸움이기보다 행동으로 옮겨져서 정통주의에서 칼빈의 섭리론이 예정론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죄론이 결정론적인 위상을 갖춤으로 인간의 철저한 타락을 강조한 것과 맞물려 이방세계, 즉 이방사람들은 구원의 범위에서 제외시킴으로 선교의 의미를 배제한 데 대해서, 경건주의 운동은 그런 신학론에 의해서 막힌 담을 헐고 성서와 직접 마주함으로 초대교회에서 세계선교에 대한 정열을 이어받아 전도운동에 관문을 열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세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과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짐으로 세상을 정화할 책임을 인식했으며, 부정적인 면으로서는 타락한 세상을 제동한다는 의미와 그것에 오염되지 않으려는 인식이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기 위해 금욕주의적인 생활 패턴을 실현해 나간 점이다. 이 경건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는 블룸하르트(J. Blumhardt) 부자, 그리고 친첸도르프(Zinzendorf)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불룸하트는 사회정의에 민감하여 실천적인 생활을 강조한 결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태동시켰으며,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데 앞서 중생을 강조한 경건주의가 낳은 전형적인 부흥사였다. 감리교를 창설한 영국의 웨슬리(J. Wesley)도 계보상 경건주의자에 속한다. 교리와 지적인 전승보다는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체험이 일차적인 것이라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이 운동을 반신학적이라고 경원했으나 경건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정통의 담지자임을 자부했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운동(Puritanism)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것이다.

1차대전을 통해서 신학에 있어서 절정에 이르렀던 낙관주의(하르낙이 그 대표)가 사정없이 좌절되었을 때 신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젊은 신학자들 중의 일군이 지금까지의 신학 전반에 대해서 제동을 걸고 새 방향을 모색할 때, 공통적으로 그 비중을 새롭게 인식한 대상은 블룸하르트와 키에르케고르였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은 '반신학적'경향이다. 그리고 재래의 보수주의에 반하여 기독교 교리의 전수보다는 '그리스도의 닮음'에 정열을 쏟은 것이다. 저들을 재발견하고 처음에는 위기신학 또는 변증적 신학 등의 이름으로 불려 오다가 신정통주의로 낙착되는데 바르트(K. Barth)를 위시하여 브룬너(E. Brunner), 트루나이젠(Thurneizen), 고가르텐(Gogarten), 불트만(Bultmann) 등이 그들이었으며, 틸리히(Tillich)나 니버(Niebuhr) 등도 이 영역 안에서 숨쉰 사람들이다. 바로 이 사람들이 한국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신학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과객(過客)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었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제한된 지면의 압박을 받아 그 맥락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단속적인 서술밖에 할 수 없었는데, 구미신학에서 일관된 성격을 집약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첫째, 신앙의 대상을 구상화(具象化)했다는 점이다. 신, 그리스도, 성령에 이르기까지 페르조나(persona)로 파악한 것이 그것이다. 이 구상화의 철저화는 유일신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삼위와 유일신의 사상의 마찰을 극복하기 위해서 4세기 이래로 철학에서 삼위일체론을 도입했다. 정통주의가 그 노력의 태반을 신론과 그리스도론에 집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로써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의 절대화를 변증한 것이다. 신앙의 대상을 구상화하지 않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허용하는 것에서마저 인색했고, 무신론 아니면 범신론, 물활론, 혼합주의, 나아가서 우상숭배 등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체질화되고 말았다.

둘째, 신앙의 대상의 구상화, 나아가서는 절대화가 희랍철학의 지원을 받음으로 주객도식이 신학하는 방법으로 정식화되게 되었다. 믿음의 대상은 믿는 자, 당하는 자와 관찰자, 수혜자와 시혜자, 창조자와 피조물 등등, 이렇게 두 관계를 격리시킴으로 하나는 주가 되고 하는 객이 되어 절대 은혜, 절대 복종, 절대 신앙을 정당화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셋째, 주객도식의 정착이다. 정통주의는 그 자체의 체제를 옹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역사를 말하고 사회를 말해도 그것은 주변적인 관심의 정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도 교리 내의 예수상이지 갈릴리 예수의 현장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이야 어떻게 되었든 자기 자체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게토화를 철저히 하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은 반면에 기계적인 경향이 표출되는 현장에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기존체제 옹호론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혁명적인 요소는 거부했으며, 결과적으로 역사의 예수를 멀리함으로 예수 없는 그리스도교(Christianity without Jesus)를 형성한 것도 그에게서 드러난 혁명적 요소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서구에서 이어온 이러한 유산들이 미국의 상황에 의해 변질된 청교도 전통과 근본주의 형태를 띤 것이 직수입되었다. 근본주의는 그 목적은 정통주의의 연장이나 성격은 시대적 반동성을 다분히 안고 있다. 다윈이즘이나 자연과학의 발달, 그리고 나아가서는 산업사회 발달이 일으킨 새로운 물결 속에서 자기를 수호하기 위해서 설득력이 없는 도그마 강요와 맹목적인 광신성을 다분히 안고 있다.

신앙의 대상의 인격화는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평신도들에게 유용한 설명의 도구일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고백의 내용과는 달리 신의 영역을 축소하는 결과를 드러냈다. 신의 인격화라는 말 자체가 자기 모순을 초래한 것처럼 신을 구상화함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람처럼 우주에 충만한 신이 아니고, 장소와 시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로 축소시켰다. 성전에 갇힌 신처럼 교회 또는 설교를 듣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신으로 위축되었다. 성과 속으로 구별하고 속이나 다른 종교를 표방한 영역에서는 무능한 신이 되었다. 그것은 성서적 신은 아니다. 성서의 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아니, 기독교라는 고백 영역과 비기독교 세계에 제한받을 수 없다. 불교나 다른 종교 영역에서는 무능한 신이면 참 신이 아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관계적 현실이다. 사람의 세계에 있어서 그가 '절대 타자'라면 '인카네이션' 사상이나 '임마누엘' 사상과 정면 충돌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론과도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느님은 사람을 객체로 삼은 것이 아니라 역사 창조의 동반자로 삼는다. 신의 주권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하므로 신을 고립시키고 인간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고는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언제든지 한 쪽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인간, 역사와 자연이 총체적으로 순환한다는 동양적인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막아 버렸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마저도 개인주의가 공동체성을 깨뜨릴 정도로 극단화되게 했다. 그러므로 나와 너(l and thou)의 관계가 곧 나와 그것(it)의 관계로 전락하는 비극 앞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비록 그 근원은 가족제도에서 왔으나 나와 너를 넘어선 '우리'라는 한국적 인식에 접근할 수 없게 되므로 공동체의 길이 막혔다.

정통주의의 자기 절대화는 결과적으로 체제주의에 안주함으로 기존체제의 보호자라는 본의 아닌 자리에 상륙했고, 그 결과는 그 선교 활동이 바로 식민지 시대 패권주의를 등에 업은 세계 정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본의 아닌 누명을 쓰는 결과에까지 이르렀다. 식민지 세력이 피식민세계의 주권을 완전 짓밟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정통주의의 성격상 피선교지역의 문화를 위시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규정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에 모든 혁명적인 요소를 거부하는 결과로 그리스도교의 원천인 역사의 예수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한계를 드러냈다.

이상의 한계는 본래의 그리스도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며, 이 한계를 넘을 때만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 소재는 동양의 사상에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

(『기독교사상』, 199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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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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