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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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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나는 여러분의 요청에 따라 기독교란 간단히 말하면 무엇인가하는 것을 설명할 의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독교란 이런 것이라고 내가 바로 밝힐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란 계시의 종교인 까닭에 그것을 몰라야 아는 것이고, 설명 못해야 하는 것이 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하나는 나의 체험이나 지식적인 수련이 나는 모르겠다는 그 모름을 바로 알고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딘 칼질이라도 할 의욕이 생긴 것은 첫째로 우리 나라 교계가 주류를 잃고 별별 소리와 현상이 속출하는 데 참을 수 없는 심정으로 하여간 겨누어 보겠다는 것이요, 다음은 나에게 이 혼란중에서 갈피를 잡아 주류에 합류하고 싶어서하는 여러분의 고귀한 소원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또 일면 나는 이렇게 정리하는 것을 계기로 이것을 밟고 앞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예감도 가지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기독교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문제할려면 먼저 기독교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문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의 대상도 이해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 까닭은 기독교는 사람이 더듬어 올라가서 알아낸 결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실이 인간의 역사 속에 부딪쳐짐으로써 있어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교라고 할 때에 곧 사람의 양심이나 종교성의 각성이라고 생각하고, 그 종교의 대상을 생각할 때에는 종교성의 동경 저 끝에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더듬어 찾아 상승하는 것이 종교행위라고 합니다. 그러한 대상은 결국 갈망의 신(Das Begehrte)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란 그런 것과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의 사실은 사람 속에 뚫고 들어오므로 양심이니 종교성에 호소하여 그 공명(共鳴)을 청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을 전혀 부정하고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 전혀 딴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6장에서 말하는 압도하는 하나님(Das Bezwingende)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오직 거기는 전적인 복종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한사코 실증을 구하는 제자에게 보지 않고 믿음이 복이 있다(요한 20:29)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11 :1)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를 철학의 범주와도 도덕의 범주와도 준별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적인 탐구는 역시 자기 지성에의 신앙이고 도덕적인 추구는 자기 양심에의 신앙입니다. 그것은 결국 둘 다 인간 종교입니다.

루터는 신앙이란 어떤 교리에의 지적 동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하나님께 전인격적인 순응이라고 말했습니다. 헤르만(W. Hermann) 신앙은 계시에의 인격적인 신뢰, 복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은 내적인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혀 밖에서부터, 즉 객관적인 사건에 의해서 시작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이 객관적 사건에의 무조건적 순응인 것입니다. 칼 홀(K. Holl)이 칼빈의 종교를 설명해서 "종교는 우선 사실의 승인이요, 존재하는 실재에의 복종이다"라고 말한 대로 신앙은 이미 있는 사실에의 복종입니다.

신앙을 문제할 때는 벌써 그 안에 사건이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있는 사실이 Entweder Oder(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현실입니다.

가톨릭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개인의 내적 경험 또는 감정의 상승 속에서 찾기 때문에 신앙을 이같은 신비적내적 과정에서 성립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적으로 깊어지려고 할 때 그 신비적인 경험에의 몰입수단으로 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강의 사실에서 찾는 것이지 상승적인 데서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이! 그것이다름아닌 기독교의 중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신앙의 대상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2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은 곧 기독교의 본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기독교는 없습니다. 혹은 신비적인 비약에 의해서나 사변적인 상승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재간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God in Christ)이지 그리스도를 통한(through Christ) 하나님도 그리스도를 제거한(without Christ) 하나님도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요한 14:6). 예수는 하나님의(of) 계시이지 하나님으로부터(from)의 계시가 아닙니다. 워필드(Warfield)는 "예수는 기독교 자체다. 그는 그 중심에서 있다. 그의 이름, 그의 인격과 그의 역사 없이 기독교는 없다. 한마디로 하면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그가 바로 그 길이다"라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진실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of Christ) 그리스도에 의해서(by Christ) 그리스도에게로(to Christ) 향하는 데 그 본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기독교가 속출했습니다. 워필드는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ainity without Christ)에서 그 진상을 아래와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는 다음 네 가지 사조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랫싱(Lessing)에서 발단한 소위 예수의 역사성 거절에서 보는 이성 편중의 사상입니다. 저들은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보고 기독교를 고대사회의 우발적인 응결물로 보아 참 종교란 일개인의 존재나 사건 위에 근거할 것이 아니고 이성적인 영구한 진리 위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트뢸취(E.Troeltsch)에서 보는 바 같은 역사편중의 사상입니다. 저들은 기독교도 한 상상적 종교로 현문화의 단계에서는 최상이나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들은 역사 속에 예수도 삼켜버린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셋째는 실용주의적인 각도에서 보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예수는 종교의 모범 스승으로 영감을 이르킨 자로서 초기 기독교인에게 "퍽 큰 역할을 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스승은 제자들이 다 소화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는 소위 경건한 신앙주의자들입니다. 저들은 결국 역사적인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마침내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신비주의로 쉽사리 돌입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이비한 기독교의 원인을 그는 말해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속죄의 고유한 교리를 버려졌을 때 움트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짓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나 그 입장은 역시 그리스도의 인격성과 기독교 원리를 구별하려고 한 슈트라우스(D. Straus)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체를 제거하고 기독교 원리는 따로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화려한 교리와 면밀한 이론과 조직으로 꾸미더라도 주(主)는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적 전당도 문화의 금자탑도 그리스도의 집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헤치고 분석해서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꾸미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도 주(主)는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신앙자의 가슴에만 머물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신앙 안에만 머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사람 편에서 하는 말이고 진리 자체에서 보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알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이란 히랍어 pneuma로서 바람이란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정기라는 기(氣)와 상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것은 막연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일으키는 역사입니다. 사도시대에 성령의 역사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역사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계시는 사도시대의 신앙의 요람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신앙에 담긴 계시 그것은 다름아닌 신약성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떠나서 기독교를 운위하는 것은,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요. 아니 기독교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종교도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는 아닙니다. 또는 산기도를 드려 예수에게서도 못 보던 산을 옮길 만한 기적을 나타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 역시 기독교는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고경(古經)들에서 놀랄 만큼 훌륭한 진리와 이론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것에는 성경과 공통된 요소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통된다 해서 결국 기독교와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생각은 사무가적인 정리입니다. 그 공통된 점이란 어디까지나 말이고 표현일 것입니다. 만저 보고 같아 보이니 같이 취급하다가는 야곱의 손목을 잡고 에서의 축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경험이란 역시 그렇습니다. 개인이나 종파에 있어서 종교경험은 성경의 성도들의 그것과 유사한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나 나나 같다는 견해는 아직 "인격"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마술사들의 착오입니다.

기독교의 본의는 오직 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기독교는 이미 성경 자체에서 완성된 것이라고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받는 이들은 성서면 그만이라는 결론에서 그 이상 추구의 손은 멈추고, 멈출 뿐 아니라 추구는 곧 반역이라고 생각하여 오직 그 파수(把守)에 전력하는 것만을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은 하나의 타부가 됩니다. 그때 벌써 그것은 하나의 골동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앙으로 받은 계시라는 말은 사도들이 다 이해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배듯이 뱃다는 말입니다. 수태했다는 말은 다 알아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아오리까하는 것이 오히려 밴자의 실상입니다. 또 수태한 것은 어떤 고체와 같은 무생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나서 자라되 그 가능성은 밴자에게도 가리워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의 요람에 임한 계시란 역시 그렇습니다. 탄생과 더불어 가능성은 그 안에 구유했으되 그 실현이라는 것은 진전과정을 밟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들은 다 알아 버렸다든가 기독교가 그들의 이해로 완성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오직 일회적으로 계시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인간적인 제한 때문에 가리워진 계시를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성한 의무요 권리입니다.

이 말은 그들 밖에서 그 본의를 찾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서 만이 찾되 그들에 의해서 가리워진 계시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 안에서만이 그를 찾을 것이나 성서 역시 사람의 제약된 머리와 문자와 환경을 거친 것이니 그런 제약에 의해서 가리워진 계시 자체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진 온갖 추구를 주저없이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도 고고학도 풍토학도 비교종교도 문헌학도 심리학도 다 좋은 도구입니다. 저들이할 일은 본의적인 것을 만들어 내거나 가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에서 비본질적인 것을 가려낸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상실해 버리면 남는 것은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태양 같은 절대한 본의 자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의 자체의 분석과 그 이해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문제는 이 본의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가 나에게 주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제자에게 주로서 나타난 그대로 우리에게 있어서도 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에서 부정을 거듭 함으로 와지는 긍정 같은 것이 아닙니다. 노자에 있어서 무(無)나 공자에 있어서의 천(天) 같은 것은 내 앞에 놓여졌다고 해도 나는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역시 나에게 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4

사도들에게 계시된 예수는 어떤 도리도 영웅도 천인(天人)도 또 그들이 기다리던 바 다니엘서적인 유대적 메시아도 아니었습니다. 나아가서는 현금,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 중 일위니 신인(God man)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 이전에 주님(Kyrios)이었습니다. 주님이란 어떤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사용하던 용어에 적응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것은 그들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살아도 죽어도 그를 위해"라는 대명사입니다. 왜냐고 묻기 전에, 무엇 때문이냐고 묻기 전에 주로서 압도당한 것입니다. 그리워하던 그분도 당위나 요청의 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뒤집어 엎음으로써의 주님입니다. 만족이니 가치니의 자기의 척도는 다 없어지고 그가 곧 가치의 표준으로서 주로 와진 것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계시의 현실이 이랬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래야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과제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생동하는 주님을 내 현실에서 살리는 것이 곧 그 본의를 아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찾아 헤맨 흔적이 교리사입니다. 그동안 이러한 주님의 파악을 위해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포사이스(Forsyth)는 그것을 소치누스파(Socinian), 아리우스파(Arian), 아타나시우스파(Athanasian)로 나누고 있습니다. 소치누스파는 그리스도를 인간으로서 최고봉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그칩니다. 그가 아버지와 일치하고 아버지와의 일체임을 말한 데 대해서는 윤리적인 일치, 자기의지를 극복하여 아버지의 의지에의 일치(Congruity)이고 그것은 동위(Condignity)는 아니라고 결론내림으로 윤리적으로 최고의 길을 걸은 최고의 예언자로서의 주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 도덕력(moral power)과 그 염원(desire)이 곧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 이상인 일지 몰라도 신약성서의 본의로서의 예수는 아닙니다. 이런 견해는 생활의 원리를 찾고 어떤 합리적인 위안을 찾는 무리에게 도움이 됐을지 모르나 이런 작은 곤란을 제거해 주는 대신 예언자 이상으로 오를 길은 영영 봉쇄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이라고 믿던 초대 신자들과 질적 구분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예언자의 반열에 두는 한 그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한 우리와의 차이는 양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는 교회와 더불어 성령이 '머무르는 대상'은 될지언정 성령을 베푸는 주격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나에게 수학이나 물리 선생과 같은 선생일 수는 있어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안 됩니다.

아리우스파는 이보다 한 걸음 앞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의 직능이나 그 방법에서만 아니고 그 인격 주체에서 초세성(Supramundane nature) 인정합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보다 인격의 특수한 결백성을 주목하고 예수 자체도 이것을 자각하여 그는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을 마주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을 향하고 있다고 보아 제2 하나님(Secondary God)이라고 이름했습니다. 이 이름은 그는 하나님과 동일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간적 피조물(intermediary creation)이란 뜻으로 인간성으로도 신성(deity)으로도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무죄하여 인간의 심판자요. 속죄자요. 또한 왕자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기능(function)은 하나님으로부터 의탁받은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철회될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전권대사라는 말입니다. 이 주장은 확실히 교회 안에 우세해진 것입니다. 만일에 이것이 교회신조로 결정된다면 그리스도는 진리의 궁극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속죄자로서 왕자로서 고유한 역할을 했다고 해도 그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 앞에서 사라져 버려야 할 존재입니다. 그런한 그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서 초대교회의 예배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시비를 아타나시우스에서 보기로 합시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동류성설(homoiusion)이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되려는 무렵 청년의 몸으로 나타나서 "우리는 다 죄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런데 주는 그의 속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구하였다"라고 첫 말을 삼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성의 해석의 열쇠가 십자가의 사실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죄인을 그가 구속한다는 것은 어떤 주의를 위한 소크라테스적 죽음이거나 한갓 순애사(殉愛死)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거쳐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단독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인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용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에서는 속량이 필요합니다. 피조물의 속량은 피조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직 창조자에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참 구원이란 회복에 그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조나 보충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반신적(half God)인 존재가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역사이고 그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존재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도들이 형이상학적 결론에 의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적인 관념은 그리스도의 가현설까지 내게 했고, 또 잘못 돌아지면 신비주의적 몰아경에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에만 사로잡히고 그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존재요, 그의 행위는 역사적인 행위요, 그의 구속은 구속은 역사 안에서의 구속인 것을 잊어버린 데서 오는 잘못입니다.

5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공기를 흔들고 제자들의 고막을 울렸습니다. 그의 발자국이 갈릴리 바다 모래 위를 자국 내면서 갔습니다. 그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던 야곱의 우물은 오늘날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의 흘린 피가 우리 사는 이 지구 위에 뚝뚝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성경이 많은 교단 신학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역사적인 사실을 둘러싸고 된 일입니다. 아무리 초월한 것이 좋다고 해도 이 역사성을 몰각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불교도가 정(靜)하여 무념지경을 더듬어 그 조용 안에 걷든 자기 속에서 석가를 찾듯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동하여 "나를 따르라 나를 보라, 나를 믿으라" 이렇게 강력한 요구를 하면서 내게 육박하는 그리스도에게 소스라쳐 깨고 눈을 비벼야 합니다. 오! 그의 숨소리, 그의 발자취, 그의 목소리, 그의 말씀, 그의 손길, 그의 사랑 그것에 부딪치고도 우리가 관념적일 수 있을까? 그 역사적인 그의 숨결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기독교를 운위할 자격이 있을까? 석가의 말이, 공자의 말이 결국 그의 말과 같다고 누구 말하든가? 말에 매였지 인격에는 못 부딪쳐 본 백치의 말이거나 주판알 굴리는 소리지!

그리스도의 인간미, 그것은 이천년 간 끝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예술을 자아 냈고 그가 보인 비전은 많은 이상아(理想兒)들을 도취케 하여 역사의 모습을 바꾸게 하고, 그의 숨소리 역사 안에 숨어 들어 모든 침체물을 쓸어냈습니다. 초월적인 게 없다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래도 이것으로 족하지 않으냐하는 것이 스트라우스나 르낭의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자취가 내 눈물을 자아내고 내 가슴의 꿈을 피게 한다고 그것에 잡히면 실상은 자기를 안고 도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족히 이해할 수 있고 공명되는 것은 아름다워도 자기와 같은 수준에 있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름답고 공명되는 것에 잡히지 말고 그것을 헤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에 부딪쳐야 합니다. 즉 인간 예수에게 가리워진 숨은 것에 마주서야 합니다. 그것은 틸리히가 말하는 무제약적(Unconditional)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러한 예수 즉 무한과 유한, 절대와 상대가 아무런 모순 없이 그 안에서 종합 통일된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도 일찍이 볼 수 없던 일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분명히 양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다 모순 없이 계시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의에 의해 제한받고, 의 역시 사랑 앞에 구부러져야 했습니다. 자비가 많지만 아주 관철되지는 못하고 의로움이 강하지만 일직선을 긋지 못하고 거기는 철회가 있습니다.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라'하신 하나님은 뒤이어 '질투의 하나님이다'라고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있어서 어떻게 이 둘이 그 안에서 제약받음 없이 완전한 원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직 놀램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완전한 원을 그려 마지막 사형받는 강도까지도 용서했으며, 의(義) 또한 원을 그어 그리스도의 위대한 고백 직후의 제자를 사탄아 물러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으로 이 최후선을 앞두고 또 하나의 암초가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계시에 도취한 나머지 이 천년 전의 그 놀라운 사건에만 마음 향하고 거기에 의미를 두는 나머지 현림(現臨)하는 계시성을 몰각해 버리는 일입니다. 헤르만(W. Hermann) 자유신학자들과 그의 스승인 리츨(Ritschl) 간의 신앙의 견해의 차이를 자유파의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그리스도인 안에 간직된 종교성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란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생명과 구별하는 힘, 즉 하나님의 계시에의 무조건적인 복종인 것을 모른다. 신앙은 사람을 구한다는 것과 신앙은 계시의 권위에의 복종이라는 두 명제 중 그들은 전자만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리출은 양자를 주장했다고 판단한 그는 모순스럽게도 주관주의에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신앙의 생명근거(Lebensgrund)를 과거의 역사적인 예수에게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의 생명근거가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결핍을 경험하는 자의 내적 생명을 소생시키는 가치로서인 것입니다. 그러는 한 사는 것은 역시 나입니다. 그에게서 살려주신 그에게 대한 감사는 있으나 현재 산 것은 내가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현실은 아니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의 내적생명만을 찾고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신 그는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추억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부활하여서 지금 나에게 임재하는 주님인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가에서 군중을 압도하던 그 지평선 상에서 만날 수 있던 그분은 오늘은 지평선을 넘어서 우리와 수직적인 관계로 지금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더욱이나 바울에 있어서 그러했습니다. 그는 지상의 예수보다는 지금 부활하여 임재하는 그 그리스도에게 집중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나는 지금까지 나를 길러온 신앙을 말씀드린 셈입니다. 나는 이제 이것을 밟고 어떤 경지로 전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역사를 꿰뚫고 흐른 주류이고 앞으로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이 주류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주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흐르면서 모든 더러운 것은 씻어가며 그 주변에 풀이 나게 하고 꽃이 피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면서 흐르는 것입니다. 정지하면 죽습니다.

사도라는 천지(天池)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은 영원이라는 바다로 향해서 쉬지 않고 흐르고 흘러야 사는 것입니다.

(『야성』, 195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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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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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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