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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혁명
요한복음 3장 1-12절을 중심으로
1. 어제와 오늘

본문(요한 3:1-12)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먼저 반성할 것이 있다. 우리는 "성서는 이미 1천년의 낡은 세계관 속에 있다. 그러나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또 예수의 말씀도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옳은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반성할 점은, 이러한 주장에 따라 지금의 모든 것을 자명적인 것으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와 오늘의 거리는 이전의 것을 수정 또는 삭제해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자세가 문제이다. 오히려 그때를 기준으로 볼 때 오늘의 우리가 잘못 변질된 것이라고 반성해야 할 것은 없다는 말인가?

오늘의 본문은 2천년 전에 씌어진,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두 인물 사이의 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당시 유대교와 새로운 가치를 들고 일어난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이다. 그것은 그 대화의 인물이 단수로 시작했다가 복수로 변하는 데서 볼 수 있다. 이것을 오늘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질적으로 다른 세대 사이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2. 다시 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그것은 체면 때문일 수도 있고 정말 진지한 대화를 위한 것은 그 안에 어떤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어떤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증좌일 수도 있다.

그의 직접적인 질문은 없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에서 보면 어떻게 하면 이제 새 세계, 새 나라(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70여 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일원이다. 비록 로마의 식민지로서 그 권한이 제한되었으나 종교나 자기들의 전통 수호에 대한 처결권을 장악한 세도가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국회의원 격이다. 그는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바리새파는 독립전쟁 때 로마의 지원 아래 승리한 후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 돌아와 권력과 종교를 한 손에 잡은 마카비아 일가 시대에 생겨난 일종의 평신도 종교운동 단체로서 정치나 무력투쟁보다는 그 민족을 그들의 전통의 결정인 율법으로 무장시키는 데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워 마침내 그들의 업적이 인정되어 집권세력과 손을 잡고 국민의 지도를 담당한 일당으로, 예수 당시에는 이미 6천 명의 회원을 가진 특권층이었다. 니고데모가 이 일당의 일원임은 그가 종교적 지도자의 한 사람임을 말한다.

특히 "너는 '이스라엘 스승'이라"고 한 데서 관사를 붙인 것으로 그는 저명한 종교 지도자임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기존 질서에서 튼튼한 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새 것이 온다는 것을 두려워할 위치에 있다. 특히 바리새파는 현실주의를 표방했고 현질서를 공고히 하기에 주력함으로써 종말 사상 따위는 사실상 배격하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의 대답은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너 따위는 희망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것은 오늘의 젊은 세대가 늙은 세대는 다 죽어 버리는 길밖에 없다는 말만큼이나 모욕적일 수 있다.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은 그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 까닭은, 그것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불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그의 반응은 항의로도 푸념으로도 들을 수 있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하여간 이것은 충격을 받은 자의 반문이다. 그것은 가능하다. 합리 적이다. 자명적이라고 단정한 것 외의 어떤 것에서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 것을 삶의 신조로 한 자의 충격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거듭", "다시" 등으로 번역된 "아노텐"은 적어도 둘 내지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는 "다시", "두 번째", 둘째는 "처음부터", "완전히", "근본적으로", 셋째는 둘째의 뜻과 관련하여 "위에서" 즉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처음의 뜻으로만 받은 것은 고의적인 저의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답변한다. 이것이 만일 세례 요한이 물로 준 세례와 증언대로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는 것(1:32-33)을 뜻하는 것이라면, 물로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전혀 새 것으로 새 생명을 받지 않고는 새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예수의 말씀은 엄격하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이 말은 어떤 점차적인 개선의 길이 아니고 철저한 삶의 혁명을 뜻한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철저한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만 미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영으로 난다는 것이 바로 다시 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과정이나 미래의 청사진을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벌써 새 것, 순수 새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증거이다. 새 존재가 되는 길을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라고 설명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단적으로 말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건은 일어난다! 이것은 이른바 기존 질서나 가치관, 더욱이 합리적 논리 실증주의자에게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른바 신비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지금 일어나는 사실이다. 그런 뜻에서 "땅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종교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땅, 기존 질서에 집착해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하늘의 차원에 발을 디딘 것으로 착각하는 위인이다. 그러므로 "네가 이스라엘의 (그)선생이면서 이런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한다.

이것으로 이 대화는 끝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명료하다. 그것은 인간 혁명 없이, 즉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 새 세대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니고데모의 "지금의 것들을 그대로 안고"라는 대전제 때문에 이 대화는 중단된 것이다.

3. 오늘의 니고데모

이제 이 니고데모의 입장을 오늘의 우리에게 옮겨 보자. 니고데모는 세례 요한의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설교를 들었을 수 있으며 또 예수의 설교의 소문도 들었을 수 있다. 그는 예수를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슨 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러기에 무슨 대책이 필요해서 그에게 왔다.

우리는 그런 예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오늘의 역사적 변화에서 어떤 새로운, 전혀 새로운 전환기에 서 있음을 예감하지 않는가? 오늘의 젊은이들의 동향, 이 문명의 체제를 그대로 이끌고 갈 수 없는 한계점, 지금까지의 가치관의 급격한 붕괴, 하여간 어떤 형태로나 급전환하는 순간에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급격히 변화되는 시대를 낡은 나를 그대로 지니고 맞이하겠다는 것은 초스피드의 궤도에 낡은 차를 그대로 내맡겨서 그대로 와해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결과와 같은 것임을 예감하지 않는가? 과학이 이대로 계속 발달해도 지금의 인간의 정신은 물론, 생리적으로도 변혁되지 못하면 오는 시대에 적응되지 못하고 낙오될 것이라고 해 왔는데, 지금의 변화의 징조는 지금의 과학의 발달의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급격한 전환의 시대가 임박했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니고데모와 같은 고민이 있다. 그것은 급변하는 역사의 동향에 놀라면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마음에는 달갑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풍조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가령 요새 청년문화라는 "해괴"한 것이 계속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진행되어 가고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까지의 가치관, 그것에 따르는 윤리관, 인생관 따위는 도저히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과 접촉하기도 하며 그런 것을 서술한 글 따위를 읽으면서 되도록 고집스러운 낡은 인간이 안 되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이 머리를 기르니 기성인들도 머리를 기른다. 저들의 "성의 혁명"을 따라서 자기의 윤리관도 수정한다. 그러면서 "젊은이"와 "젊음"을 구분하면서, 비록 젊어도 늙은이가 있는 반면에 늙은 젊은이도 있다고 풀이함으로써 그 세대에 참여하려고 한다. 고양이 눈알처럼 부지런히 읽어서 사상적으로 낡은 곳에서 탈피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성속의 구별이 뚜렷해서 이미 규정된 교리와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사정 없이 처단하려던 용기는 후퇴하고 교회 개혁, 흩어진 교회, 하나님의 선교, 정치신학… 마침내 "바보제" 등 계속 몰려드는 신학 사조를 되도록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일군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마음을 더 가다듬고 이 때가 바로 말세라고 하면서 어떻게든지 지금까지와는 같지 않은 자기 개선이 없이는 새 시대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느낌 이 혹은 보수로 혹은 급진적 개혁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은 이른바 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카테고리 안에서 비장한 결심을 자기 나름대로 한다.

그러나 아무리 내적으로 노력하고 수양을 거듭해도, 그리고 비장한 결심을 해도, "안"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 엄연한 규제권을 행사하는 사회 풍조, 조직, 제도 속에 휘몰리게 되고, 그럴 때 자기 꼴은 물에 뜬 낙엽만큼이나 힘 없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 혁명을 해야 한다. 이것을 성서는 회개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윤리나 도덕의 범주 안에서의 잘못을 시정한다는 따위의 뜻은 아니다. 아니, 그것은 근본적인 삶의 방향 전환이다. 예수는 회개라는 말이 무력해진 것 때문이었는지 그 말을 쓰지 않고 그 대신 "다시 나야 한다"고 했다. 회개이든 다시 난다고 하든, 인간 혁명 없이 아무리 제도를 뜯어고치고 생활 양식을 달리하려고 해도 그것이 되지도 않거니와 그것은 아무런 지속성이 없다. 외적인 여건, 경제적 측면에서 본 사회 환경이 인간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확실히 그 시대상의 일면만 본 흥분에서 온 결론이다. 3세대에 육박하는 소련혁명 뒤의 오늘날 소련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관찰자들의 진단은 그의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 혁명이라는 소리를 다시 높여야 하게 되었다. 그보다 더 무지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만이 새 세계에의 길이라고 본 그의 견해이다. 그가 간과한 것은, 어떤 제도를 만들고 집권하는 순간 집권욕이 인간을 변질시킨다는 사실이다. 모든 제도나 조직의 변혁보다 인간 혁명이 앞서야 한다. 그것을 가리켜 거듭 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 외적 상황이야 어떻든 그런 것을 외면하고 수양이니 기도, 명상만으로 인간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리스도교는 옳았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제는 정부나 다른 것에 맡겨 버리고 안으로 숨어서 방주를 탄 노아의 식구처럼 장구한 세월을 보낸 서구 그리스도교는 정말 새로운 존재를 형성했는가? 그것은 수도원 같은 특수 지대를 형성하고 성역을 설정할 때에는가능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온 세계를 수도원화한다는 명목 아래 그 제도를 철폐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는 남에게 맡겨 버렸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그때부터 무력한 집단이 되었다.

사회 혁명에 앞서 있어야 할 것은 인간 혁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홀로 종교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내적 결단을 해도 이 사회 조직 속에 휘말려들면 그 결단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발견하게 되는 데에 오늘의 니고데모의 고민이 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생활은 이원화되었다. 교회 내에서와 사회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구분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다. 그런데 바로 이처럼 어쩔 수 없게 하는, 바로 새로운 존재되기를 결심한 그를 부패케 하는 구조적 사회를 왜 개혁 또는 변혁하려는 입장에 서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현재"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얻은 것, 얻은 자리, 이런 것을 절대로 고수하려고 함으로써 그것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존재가 되려면 "현재"라는 기존 질서에서 소외된다. 그와 더불어 나의 온갖 기득권은 박탈당한다. 이 같은 기로에서 결국 다시 나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주저앉는 것이 오늘의 니고데모이다.

정말 나의 양심에서 오늘 이 사회의 부정 부패를 증오하는가? 그러면서도 기득권의 수호나 확대를 위해서 "불가피한 악"이라는 변명에서 자위한다. 정말 가난한 자를 돕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을 새로운 존재라고 하는가? 그러면서도 자기의 생활 양식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고 이 시대를 모방 경쟁하면서 팽창일로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무슨 여유로 형제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모든 현상은 결국 "현재"의 가치에서 자기의 삶의 보장을 찾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혁명, 새 존재는 물론 될 수 없거니와 오히려 "현재"는 변해서는 안 된다는 패쇄성에서 낡은 나를 고수하고 있다.

4. 새로운 세계는 온다

참 새로운 존재는 "현재"에서 해방될 때에만 가능하다. 현재에서의 해방이란 도달하는 새 세계에 그 삶의 닻줄을 던진 자에게만 가능하다. 새로운 현재란 새로운 세계에로 이동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거듭 나는 일이다.

새로운 세계는 오고 있다. 새 세계에서의 이동은 차안에서 피안에로의 이동이 아니라, 바로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은 이것을 이 세계 안에 살면서도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삶이라고 한다. 이 세계 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의 긴장된 그 한복판에 그리스도인이 서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새로운 존재의 수난이 있다. 그러므로 수난 없이 새로운 존재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함이 아니옵고 오직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건져주시기를 원하는 것이옵니다"(17:15)고 했다. 여기에 새로운 존재의 수난의 이유와 과제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역사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악과 싸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존재란 어떤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바로 악과 더불어 싸움으로써 얻어지는 존재 양식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존재는 자명적으로 기존적이고, 그리고 무엇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이 싸움이 바로 사회의 부정, 불의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사회의 부정과 불의와 싸움으로써 새 세계가 온다는 필연적인 약속은 없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유토피아를 위한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마치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불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닿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네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 말에서 보는 대로 그 나라는 분명히 이 역사에 오고 있다. 그러므로 "합리적", "실제적"인 것만이 참이라는 말에 세뇌되어 "현재"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는 자는 그 나라의 도래를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존재는 이 역사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197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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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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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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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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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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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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