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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1. 질문의 잘못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를 해명해 달라는 주최측의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여기 모인 청년들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 교계에서 이런 이분법적 논쟁(?)을 계속하는 현장에 새 판결자가 되려는 의도에서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 제기에는 인간 존재성에 대한 몰이해가 원인이 되어 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개인을 사회와 구별하여 비역사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이원적으로 묘사한 것을 자명적인 것처럼 전제한 잘못이다.

사회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세상을 나오자 자동적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된다. 그런 뜻에서 만도 인간은 '더불어의 존재'(Mitmensch)다. 여러분이 여기 이렇게 많이 모여왔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사회의 존재임을 역설한다. 까닭은 여러분은 사회적 공동의 관심사 때문에 여기 모인 것이다. 이것에 이의를 가진 이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과 육이라는 이분법적 표현을 본체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중에는 한 사람도 없으리라고 본다. 분명히 여러분의 육체는 내 눈에 보이는데, 여러분 중에 영이라는 것을 집에 연금하고 온 사람이 있다고 가상할 수도 없다. 난 통전의 존재로서의 여러분을 상대하고 여러분도 그런 존재로 여기 모여 무엇인가 찾고 있다. 그러니 '영혼 구원' 따위의 고대 존재양식에 의한 표현에 매여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까닭은 그렇게 분리시킬 때에는 이미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실체가 있다고 해도 우리와 상관 없으며, 우리는 단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는 구원을 문제하면 족하다.

인류가 역사에 나타난 이래로 종족, 부족 또는 민족 등 집단적 삶 이 영위됐고 이 집단에서는 개인은 나면서 그 일원으로서만 존재하며 집단은 절대적으로 우선했으며, 개인의 운명은 이 집단에 의해서 존재 좌우됐다. 그러므로 집단을 떠난 개인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래로 인격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가 구체화됐다. 그것 자체는 중요한 강조점이며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체제가 고식화되어 개인의 존엄성을 한없이 유린한 데 대한 자발적인 저항으로 내세워진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중세기의 전체주의적 교권(敎權)에서 해방됨과 더불어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가 출생했는데, 계몽주의의 신을 전제로하지 않은 인격의 자존성 강조와 신에의 절대의존을 전제하는 개인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과정의 반동으로 하나의 과정적 주장이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과정적 주장에 정좌하고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면 그 대답은 언제나 그릇된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신약의 구원론을 보기 전에 구약의 성경을 보자. 그러나 신약 성경을 밝히기에 필요한 몇 가지 기본적인 것에 언급할 정도다.

2. 구약의 구원론

구약에는 엄밀히 말해서 개인은 없고 종족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스라엘 종족(민족)사가 출애굽에서 시작했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전 종족의 역사이지 개인의 역사는 아니며, 출애굽이 구원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물론 민족적 구원이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다.

혹은 모세나 그 위로 소급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그리고 아래로 예언자 등의 개인적 운명을 서술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개인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개인이 아니다. 그에게는 이제 있어야 할 이스라엘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길이 제시되어 있고 그는 그것을 앞당겨 보여준 상징적 발자취다. 미디안의 모세도 결코 홀로가 아니었음은 그의 소명의 내용이 뚜렷하게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종족적 탈출과 지향에 자신을 내맡기는 계기로 서술되어 있다. 미디안에서 홀로 있을 때 누미노제적 경험 속에서 바로 그런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 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적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에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내어라(출 3장).

(1) 모세는 개인의 구원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종족의 구원을 촉구하는 명령을 받았다.

(2) 그런데 그 소명은 모세의 마음에 문제되고 있는 그 전체를 위한 행동의 결심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모세 개인과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문제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문제이다.

(3) 그의 사명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것은 '선교사'로 들어가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전체가 갇혀 있는 상황에서 구출하는 일이었다. 즉 '억압받으며 울부짖는' 그들을 '에집트인의 손아귀에서 빼내'는 일! 이것은 바로 사회적 해방을 의미한다.

모세가 이민족의 손아귀에서 수난하는 자기 민족을 구출하는 투쟁은 일제하의 신음하던 우리에게 당위적 귀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민족적 해방과 선교 목적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적어도 햇빛 아래서는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탈출해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 민족을 모아 민족국가를 창건한 것이다윗 왕조였는데(주전 천 년경), 불과 74년만에 북국 이스라엘, 남국 유다로 분열됐다(주전 926년).

그런데 그 분열도 불의가 원인이지만 남북조의 운명도 부정부패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북국 이스라엘은 당시의 신흥세력인 앗시리아의 침공의 위협을 눈 앞에 보면서도 왕실을 위시해서 상류층은 극도의 사치와 향락에 몰두했다. 그렇기 위해서 하류층을 착취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는 물질제일주의로 어느 정도 물질적 성과는 거두었으나 바로 그것은 속알을 팔아버린 대가였다. 이에 아모스라는 무명의 예언자가 홀연히 나타나 외친다.

궁궐에는 권력으로 남을 등쳐 먹는 자들 뿐이다.
그러므로 나 야훼가 선언한다.
적은 사방에서 이 땅에 몰아쳐와 축성들을 허물고
궁궐을 약탈하리라.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을 벌하고 말리라.
죄 없는 사람을 빚 돈에 종으로 팔아 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 넘긴 죄 때문이다.
너희는 힘 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낸다.

이상에서 주목할 것은 신의 진노가 개인의 논리적 죄가 아니라 사회악이며 그 죄는 왕, 집권층만이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죄는 그 민족 전체를 같은 운명에 몰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모스의 이 설득에 귀기울이지 않은 북조는 망했다. 남은 남조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부패상 앞에 예레미야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은 결과 바벨론에 의해 진멸됐다.

예언자란 예외없이 이렇게 그 민족 전체의 운명을 문제로하고 호소와 절규로 싸웠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을 정교분리, 개인, 사회구원의 어느 하나라고 규정하거나 또 그러한 저들의 행태가 잘못됐다고 단정할 사람이 있는가? 저들의 행태에서 '개인구원'이라는 개념을 따로 끄집어 낼 수 있는가? 없다. 이것이 구약 전체의 성격이다.

3. 신약의 구원론

그런데 신약시대는 경우가 달라졌다. 신약에서 가장 빨리 씌어진 데살로니가전서가 50년에 씌어졌는데, 바울의 편지는 그후 60년경까지에 씌어진 것이고, 비록 속국의 위치에서나마 자치권과 자기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던 상태에서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초토화되고 최후 저항의 교두보가 무너짐으로써 민족국가로서 종말이 된 66-70년 유대전쟁 후에 씌어진 것이 복음서들이다.

그리스도교를 교리화한 바울은 이방에 이주한 유대인이며,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졌던 것을 보아 이미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면, 구약 시대의 배경과는 전혀 다른 삶의 조건에 놓여 있었다. 이 전환의 상황을 한국의 근대사에서 그 유형을 찾는다면(기독교의 입장에서) 31운동의 전과 후의 변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 저항은 민족적 저항의 총궐기였고, 그리스도교도 이에 전적으로 참여했는데, 일제의 총칼에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은 후 많은 투사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고 국내에서는 계몽사업가로 전환했거나 아니면 은둔적인 생활양식을 미덕으로 알고 있게 됐는데, 그리스도교는 민족적 희망을 잃음과 동시에 비역사화에로 둔갑해서 피안의 종교로 탈바꿈했고, 그것은 종교적 개인주의였다. 그러므로 처자나 이웃이야 어찌됐든 이제 망할 이 세상에서 자기 개인의 구원을 위해 탈출하는 것을 권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성서 다음으로 존중시된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비록 탈민족적 역사과정에 섰으나 결코 개인구원이라는 종교적 이기주의에 빠진 일은 없다.

 

(1) 바울: 바울은 구원론을 이론화한 첫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서 우선 걸리는 것이 영과 육이라는 개념들이다. 한두 가지 예를 보자.

그것은 그가 육신으로는 파멸을 당하고 영으로는 주의 말에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전 5:5).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이런 말들은 '영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거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기 전에 이런 표현의 배후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것은 구약의 정통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상황의 산물이다. 초대교회가 헬레니즘 문화권, 그중에 영지주의라는 신비사상이 대유행하는 현장에 침투해 들어가면서 그리스도교를 변론하기 위해서 그들의 용어를 빌린 것이다.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누고 영혼불멸설을 내세우는 것은 동서에 다 있는데, 그것은 죽음의 한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 그 허탈감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자연스러운 사변의 결과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이러한 이원적 우주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바울은 이러한 언어(세계관)를 이용하여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또 삶을 설명했다. 그러나 정확히 검토 분석하면 그는 그런 개념을 이용하면서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려고 했다. 전체를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육', '영' 하는 것은 '육신에 따라', '영에 따라' 또는 '육안에' '영 안에'라는 표현, 또는 그런 뜻으로 사용하므로 본래 인간 본질론인 개념들을 존재양식의 두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Bultmann, 『신약신학』 206 이하 참조). 그는 육이란 말을 보이는 물적인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는 반면, 영이란 말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말하므로 '영적으로' 또는 '육적으로'라고 할 때 그 삶의 목표의 향방을 나타낸다. 가령 창기와 합하면 그와 한 몸이 되는 데 대해서 '주'와 사귀면 그와 한 영이 된다(고전 6:16)고 하거나,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면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로마 8:9)라고 하는 경우, 영과 육은 어떤 실체로 말함이 아니라 삶의 향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그의 인간학적 다른 개념을 분석하면 뚜렷하다. 그중에 소마(Soma) 개념이 대표적이다. 소마를 우리는 '몸'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소마는 결코 육이냐 영이냐하는 이원적 물음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내 몸(Soma)을 쳐서 복종케 함은"(고전 9:27), 또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빌 1:20), 또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롬 12:1)고 할 때, 그것은 '나'라는 인격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구령(救靈)이라는 주장을 바울에게서 그 정당성을 구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문제는 바울에게 개인구원이라는 개념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사회적 관심이 있었느냐의 질문과 직결된다. 바울에게서 이른바 종교적 교리의 형태를 갖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복음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수의 경우와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바울을 그 시대상에 눈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몰입한 신비주의로 그려 버리면 그것은 새로 만들어낸 바울이다.

우선 로마서 1장 18절-3장 8절까지의 그의 유명한 사회비판을 보면 족하다. 그의 용어는 결코 세련되고 이른바 경건한 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가 폭로한 죄상은 이른바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워해야 할 그런 것이다. 더욱이 그 비판의 대상은 로마의 상류계층의 생활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는 그의 율법과의 투쟁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초점은 율법과의 대결이다.

'율법'이란 유대교의 그것에 국한한다고 보면 잘못이다.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모든 것의 대명사가 율법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에 대해서 죽고 그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조문의 낡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롬 7:6).

우리는 율법이라는 번역상의 용어로 그것을 종교계율에 국한시키는 착각에서 해방돼야 할 것이다. 아니다. 인간을 구속하는 온갖 체제법을 다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과의 싸움은 바로 자유인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새로운 방식이란 바로 자유한 새 질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방과 자유'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갈 5:1),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자유를 위해 소집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갈 5:13).

이런 것은 모두 사회적 관심과 개념이다. 셋째는 그의 역사관에서 보는 공동체 의식의 철저성이다. 로마서 9-11장은 이른바 그의 구원 사관이라고 한다. 그는 현재를 목적을 향한 역사의 한 과정으로 본다. 그는 자신을 비유대인을 위해 파견된 사도로 자처했다. 그러나 현재 이방인이 대다수이고 유대인이 새 공동체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과도적 현상이고, 결국은 이방인, 그리고 유대인까지 포함한 전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확신을 피력한다. 이 마당에 개인이니 사회니 하며 구분한 구원론의 자리가 있는가? 더욱이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우주적 구원을 확신하는 그에게서(롬 8:18 이하).

여러분은 제발 이 이상 터무니없는 이분법의 사슬에 자신을 비끌어 매고 아까운 정력을 소모하지 말았으면 한다. 더욱이 그런 일로 바울을 등에 업는 것은 무모하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으면 비록 단편적이나마 나타난 바울의 풍운아적 생애를 생각해 보라.

사도행전의 서술에 따르면 그의 최후는 예수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예루살렘에 그의 생명을 노리는 위험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돌입하여 죽음 직전에 로마 군대의 손에 넘어 간다. 로마 군대는 그들 총독에게 이첩했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되풀이 되는데도 총독이 바뀌는 2년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바울 자신의 요청으로 로마로 카이저의 재판을 받으려 호송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유는 예수에게서처럼 불투명하게 서술됐다. 그러나 그가 개인 구령운동에만(오늘 날 그런 주장을 대표하는 자들처럼) 머물렀다면 무슨 이유로 그러한 최후를 겪어야 했을까? 왜 그더러 "당신은 44명의 폭도를 끌고 애굽으로 간 그 수령이요"라는 질문이 나올까? 사도행전의 서술을 액면대로 받을 수 없다면 바울 자신의 자기 진술을 보는 것도 족하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빠진 사람같이 말합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더 심한 고역을 했으며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그는 그의 수난사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는데 동족에게 외국인에게 박해받은 것 외에 여러 번 감옥에 갇혔다는 것과 더불어 세 번 태장으로 맞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권에 의한 박해다. 개인의 구령을 전했는데 로마 정부가 그랬을까? 로마는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아니다. 바울이 사회적 관심이 없었다면 또 그의 구원관이 역사적이 아니었다면 그의 길이 그렇게 험난했을 까닭이 없다. 그는 구원을 자유, 해방 등과 유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거취는 결국 반로마의 정치적 소요를 유발하는 위험 인물로 체포된 것이 틀림없다. 끝으로 우리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반성하자. 사회구원을 말하는 데 한사코 그것을 부정하려는 입장에 선 사람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사회 구원이라고 개인이 제외 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결국 신변보호와 그런 삶을 영위하는 자기 정당화를 위하는 이상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다. 사회 구원이라면 사회구조와 체제의 부조리, 불의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집권층과의 충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처음부터 그런 위험선에 접근하지 말자는 배려가 아니겠는가.

(『현존』, 197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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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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