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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서의 구원론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2)

신약성서의 공관서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주권적 민족으로서의 바탕을 빼았긴 70년 이후에 씌어졌다. 이때의 역사적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된 집단으로 볼 수 없게 한다. 이와 동시에 그레꼬-로마라는 범세계성을 지닌 현실 속에 소수민족으로서 산재하게 되었으므로 세계 안의 한 민족공동체로서 그 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 돌입했다. 그러므로 단순히 역사적 상황에서 보아도 집단으로서의 권익 문제보다 개개인의 인권 문제가 점차 구체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시체(?)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나온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예수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요,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중추도 이스라엘 민족 안의 적은 무리들이었다. 저들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일찍 두 갈래로 갈렸다. 유다 본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정통 안에서의 그리스도교를 주장했고, 이방의 유대인들은 범세계성을 지닌 그리스도교를 주장했다. 후자는 탈민족적 방향이다. 결국 후자가 관철되어 그리스도교는 세계 안의 공동체가 됐지만 성서 자체서는 이 두 요소가 섞여 있다. 이런 정황에서 공관서는 구원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주어진 제목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

1. 용어상의 특징

'구원'이란 말과, 그리고 이원론에 용어인 영(pneuna)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볼 필요가 있다. 그것으로 우선 '구령'이란 말이 적당한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우리말로 구원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soteria다. 그 말의 동사는 sozo이다. 그런데 공관서에서 이 말의 사용은 결코 종교적인 데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령 제자들이 파도를 만났을 때, 우리를 '구해'달라고 한 말(마태 8:25),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예수에게 한 말,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남은 구하고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비난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쓴다.

이상에서 보면 구원이란 뜻의 비중은 육체에 대한 영혼의 구원이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인상을 준다. 적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말을 영, 육을 구분하여 어느 한 쪽을 살리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것은 결코 '영생' 또는 '천당에 간다'는 따위의 종교적 개념과는 상관 없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단언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병을 낫게 하는 일에 바로 이 단어를 거의 전용하다시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관서에는 이 말이 16회 쯤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적 구원이라고 할 때는 죽음 다음의 삶 또는 종말과 관련되어 쓰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볼 수 있는 곳은 두 곳이다. 마가복음 8장 35절과 누가 복음 10장 26절이 그것이다.

공관서에서 "악에서 구하소서"(주기도) 또는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눅 4:18), "원수에서 구원을" 하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소테리아가 아니고 aphesis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것은 총체로서의 인간, 그리고 '무엇에서의'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 구원을 의미한다.

공관서에서 우리말로 '영'이라고 번역된 것은 대부분 원래 '영'이라고 번역되어야 할 pneuma가 아니라 psyche라는 단어다. 그것은 실은 영이 아니다. 삶(Life)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0장 28절에는 푸쉬케를 영혼으로 옮겼는가 하면, 마태복음 16장 20절에는 목숨이라고 옮겼다.

이와는 달리 '프뉴마'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개념화된 '영'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있지 않고, 마음 또는 정신 등으로 옮겨진 것이 많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일정하게 옮기지 못하고 '속 생각'(막 2:8) 또는 단순히 '마음'이라고 번역했다(막 8:12; 14:38). 까닭은 '프뉴마'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영원불멸의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 대해서 안, 현상에 대해서 참 모습 등의 뜻으로 사용한 것일 따름이다. 가령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막 14:38)고 할 때 '마음'으로 번역된 것은 프뉴마인데, '영은 원이지만' 하고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 간단한 몇 가지 예로서 공관서에는 이원론적 구원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령'과 '구원'을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프뉴마를 육체와 대립시킨 곳이 꼭 한 곳이 있다, 눅 8:55).

이상에서 본대로 공관서의 구원이란 총체로서의 인간 구원을 말하는 것이지, 그 어느 부분을 뜻하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이른바 재래에 구분하던 종교라는 틀에 국한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을 알았다.

2. 구원과 새 세계

위에서는 구원의 개인성과 사회성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선포의 중심인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장 15절 예수의 설교의 요약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예수의 선포의 초점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새 세계는 도래(Das Commende)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그 세계는 우선 내재적이 아니라, 도래(미래적)이다. 현재는 사탄이 지배하는 현실이다. Q자료인 누가복음 11장 20절에, 사탄이 패배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묵시문학파의 에온 사상과 상통하는 것으로 질적으로 다른 두 차원의 역사적 현실, 즉 사탄 지배하는 때와 하나님이 주관하는 때로 역사를 구분하는 것이다. 공관서에는 예수의 행위 중에 사탄(귀신)을 추방한 사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을 병든 상태에서 구출한다는 뜻이기에 앞서 사탄과의 투쟁이라는 종말적 행위인 것이다. 즉 그는 새 역사의 창을 열기 위한 투쟁의 전선에 섰음을 행동으로 상징한 것이다. 이 예수의 선교현장은 사탄이 지배하는 때이나 하나님의 주권이 임박한 틈바구니였던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적 현재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역사의식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재에서 구원에의 길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나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글로, 말로 서술했기에 중복될 것을 알지만 그 성격을 재요약함으로써 우리의 물음의 대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3.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

대전제: 그 나라는 도래(parusia)하는 현실이지 우리가 가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래라면 바로 이 역사의 한복판이 그 장이란 말이다. 그 나라가 임박했다는 말인 engiken은 손에 닿을 듯이 임박했다는 뜻으로 본인은 즐겨 '태동했다'는 말을 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또는 모일 때마다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를 반복하면서 성서에 전혀 근거없는 공간 개념인 천당이라는 불교용어를 도입해서 구원과 천당가는 것을 일치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비역사화하고 무력화하게 하는 큰 요인이 됐다.

이런 대전제 밑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한 몇 가지 본문에 주목하기로 하자.

(1) 만찬의 비유(누가 14:15-24)

어떤 사람이 만찬을 베풀고 '기득권자'들에게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됐으니 어서 오시오"라고 초대했다(다드 C.H. Dodd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시오"와 같은 뜻으로 본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모두 거부했다. 그들은 소유한 것들 때문에 이 초청에 대해서 폐쇄적이었다. 이에 이 주인은 어서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 맹인, 절뚝발이 등을 데려 오라고 한다. 여기에 열거한 사람들은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아 천민, 나가서는 저주 받은 계층이다. 그런 무리들이 이 초대에 응했다.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저들에게 구원 받았다는 말이다.

(2) 들의 설교(누가 6:20 이하)

누가의 들의 설교는 마태의 그것보다 원형에 가깝다. 그런데 축복의 대상으로 가난한 자, 지금 굶주린 자, 지금 슬피 우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저들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저들의 상황을 좀더 구체화해서, 미움받고, 배척당하고, 욕먹고, 누명을 쓴 자라고 한다. 말하자면 무력하고 글자 그대로 가난해서 자기 권익도 지킬 수 없는 버림을 당한 계층이다. 그런데 저들에게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인 새로운 가치성을 인정하는 따위의 말은 암시조차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 사회적 계층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의 특성을 지적한다면 오직 개방성이라는 것밖에 없다.

(3) 예수의 선언(누가 4:18 이하)

누가복음에 그가 세계에 온 목적의 선언으로 이사야서를 낭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해방을, 그리고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 열거한 자들도 버림받은 사회계층의 총칭이며 은혜의 해란 바로 포로, 노예, 채무자 등 가난하고 눌린 자들을 해방하는 해로서 궁극적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4) 주기도문(누가에 의한)

누가에 의한 주기도문의 소원은 여섯 가지로 되어 있다. 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기, ② 나라가 임할 것, ③ 일용한 양식을 줄 것, ④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고, ⑤ 시험에 들지 말도록, ⑥ 악에서 구하도록 해 달다는 것이다

이 기도의 대전제는 ①과 ②다. 그런데 이 기도는 어떤 계층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 일생을 보장받고 있으면서도 '보다 더'라는 슬로건 밑에 발악하는 부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필요할까? 인간 사이에서 죄를 누가 짓나? 약자가 강자에게? 아니면 강자가 약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대답은 자명하다. 성서는 구약에서부터 거의 일관해서 후자들의 죄를 고발한다. 유혹은 누가 받나? 유혹이란 자체가 벌써 바로 살아보려는 의지가 있는 자에게 의식될 수 있는 일면과, 그 대상은 어떤 의미로나 못 가진 약자라는 사실이다. 악에서 구해 달라는 것은 물론 약자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기도도 가난하고 눌린 자만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기도다.

이외에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 등도 이런 계열에 속하는 말이며 예수의 행동은 이런 분위기로 성격화되어 있다.

이상의 몇 가지 구체적인 예들에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위의 예에서 등장된 가난한 자, 불구자, 병자, 포로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눌리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 대해서 그러한 처지 자체를 말할 뿐 단 한마디도 저들의 윤리성이나 종교성 따위를 부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할 바다. 가령 가난을 종교적 덕목으로 삼는 종교가 많다. 청빈이란 표현이 벌써 그 가난의 가치를 서술한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런 뜻이 없다. 가령 남에게 자기소유를 다 주어버리므로 가난했다거나 폭행당하는 약자를 구출하다가 불구자가 됐다거나,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 갔다든지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운다든지, 따위의 단서가 붙으면 쉽게 새로운 논리기준으로 의해 될 터이나 그런 단서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난하고 억눌려 산다는 사실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사회계층의 실상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무조건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 또는 구원을 약속했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적 구원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구원의 조건으로 적어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 세례를 받았다,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는다 따위 정도는 불가결이라는 상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최후심판의 비유에서 보는 대로 그러한 것은 심판의 기준으로서 전혀 반영이 없고, 단지 사회적으로 억눌리고 가난하고 수난당하는 자들과 자기를 일치시킨 것을 상기시킬 뿐이다. 이런 것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면 기독교의 교리에 매달려 그것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보장으로 알고 열심으로 믿는 교회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미 마태복음을 쓸 무렵에는 이런 문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 때는 이미 교회라는 것이 교리적 근거를 갖고 자리했기 때문에 어떤 질서가 필요했고, 밖에와의 관계에서 보면 상당히 발달이 된 희랍적 윤리세계에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고, 더욱이 기고만장한 로마제국의 눈에 위험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느 것이든지 마태에는 단서들이 붙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가령 누가의 들의 설교와 마태의 산상설교(같은 자료)를 비교하면 이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마태에는 '가난한 자'에 '마음에 있어서'를, '주리고 목마론 자'에 '의에'를 첨부함으로 벌써 내면화시켰다. 이것은 비사회적 윤리화의 첫 발디딤이다. 그것에 덧붙여 누가에는 없는 온유한 자, 자비한 자, 믿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등 윤리적 덕목들을 첨가했다. 또 만찬 초대의 비유에서도 무조건 초대 뒷 끝에 예복입지 않은 자를 추방하라는 모순에 찬 첨가구가 있다. 이런 것들은 위에서 든 가능성 중 그 어느 경우에 해당하든지간에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쓴 흔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4. 사회혁명과 구원

그러면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보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선언한 공산주의와 유사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차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짜낸 설계도다. 이에 대해서 공관서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란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단순히 그 다음의 말 '나라'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쉽다(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청년들에게서도). 사실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적이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성격에 주목하자. 초월이란 말도 현대인에게 생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들의 통전적 실재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시비는 끝없이 꼬리를 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안 믿는 결과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아무리 모든 것을 동원해도 한계적 존재이며, 따라서 부분밖에 접촉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기 손이 미치는 범위에서 어떤 절대적 결론을 견지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이른바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데올로기를 아무리 배격해도 자기를 초극할 어떤 외점(Punkt ausserhalb)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외점이란 계속 정착하여 편협화되는 인간을 고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것을 전제로하지 않을 때, 어떤 새 질서를 만들든지 그것은 집권자에 의해 경직화되는 길밖에 없다. 까닭은 그들 자신이 바로 절대의 자리에 앉게 되니까!

맑시즘의 치명상이 여기 있다. 그는 신을 제거함으로 일차원적 세계를 만들어 버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절대권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나? 결국 권력을 위한 피비린내나는 각축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까닭은 거기 중재자가 없으니까! 거기 자기 고발의 가능성이 없으니까! 여기서 이 문제는 더 전개할 자리는 못된다. 단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인데, 유토피아는 인간의 설계도로서, 그것을 실현 수호하기 위해 점점 경직화될 필연성을 안고 있는데 반해서, 하나님의 나라란 끝까지 미지의 것이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자기고발을 계속하게 하여 탈-향(脫向)하게 하는 개방적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내세운 사회주의는 기존체제를 절대화하고 인간을 그것을 위한 도구로 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을 위해 혁명했으며 새 체계를 세웠는데, 결과는 사람이 그 체계를 위해 있게 되므로 노예화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그의 안식일법 논쟁에서 뚜렷이 드러났듯이 어떤 체제도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체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신적 권위를 가진 질서일지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을 직접 연결시켰기 때문이요, 그 사이 어떤 구조적 체제를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이냐 전체냐의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 주저없이 사고낸 개인을 선택하는 예수의 입장의 근거가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아흔아홉 마리 양을 대조시킨 비유나 이른바 죄인들 편에 선 그의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전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따위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결국 인간이해에서 공산주의는 사회부조리를 물질적 측면에서 보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와 유토피아를 결부시키는 것이 벌써 인간이해의 피상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예수는 비록 억압받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이 미래의 주인공임을 선언해도, 저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 볼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행복, 또는 바른 세계란 하나님과 이웃이 바른 관계에 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5. 선교란?

선교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다. 구원이란 타락을 전제한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그 타락이 사유재산 제도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진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선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은 바로 이웃과의 관계가 깨진 것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은 이웃과의 관계의 화목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구조화되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등장하여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등에 업은 법률이나 도덕이라도 용인하지 않은 이가 바로 예수다. 선교활동도 그 목적은 인간 구원에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에 있으나,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구조악인 것을 발견했을 때, 부조리한 체제나 사회에 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사회 참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궁극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과제는 상대적인 것, 지나갈 것, 인간이 만든 체제 따위를 절대시하고 그것에 보장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새 세계가 그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그에게 방향전환을 말로, 행동으로 촉구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 운동이다.

이같은 전제에서 선교의 전략이 있을 것이다. 그 전략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책임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단서를 병행시킨 뜻일 것이다.

(『현존』, 197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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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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