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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과 혁명
고린도전서 15장 12-28절에 대한 단상
1

부활신앙은 혁명 신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에 그처럼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들에게 피를 강요한 것은 바로 부활신앙이다. 부활신앙을 빼고 기독교가 세계로 뻗쳐나간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기독교의 출발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데서 출발했다. 예수 자신도 그때의 사회적인 비중에서 보아서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성서만 보면 출발부터 자주적인 듯하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온 유대 사회의 관심의 초점인 듯한 인상을 주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부활신앙의 눈에서 본 고백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무대는 유대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인의 눈에서 볼 때 쌍놈들이 웅거하는 저 변두리인 갈릴리였고, 그의 주변에 돌던 사람들이나 그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란 한갓 어부 따위의 노동자에 불과했다. 그가 활동하는 동안 그때의 점령세력인 로마 정권과의 어떤 접촉도 또 관심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가 종당에는 로마에 의해 처형되었으나 왜 처형받아야 했는지 그 죄명조차도 애매하다. 그 처형의 사건도 성서의 기록대로 하면 굉장한 파문을 던진 듯이 서술됐으나 성서 외의 어떤 문서에도 전달되어 있지 않으며, 로마의 역사기록에도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 제자들은 그를 따르는 동안 이렇다할 특색이 있는 무리들로 보이지 않는다. 이렇다할 투지도 보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특출한 지혜의 인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종당에는 그 스승을 다 버리고 해산해 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본래의 꼴을 드러낸 것인지 모른다. 그렇던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의 스승의 사후에 그같은 투지로써 유대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이론으로써 박해를 받게 되고 마침내 유대의 경계를 넘어서 로마의 판도을 그대로 타고 가는 곳마다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면서 로마의 심장에까지 진출했을까? 이것은 역시 그들의 부활신앙이 가능케 한 일이다. 저들의 부활신앙이 저들의 인간혁명을 가능케했으며, 그들의 부활신앙은 죽음마저도 저지할 수 없는 혁명의 불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바울과 같은 이가 이들의 신앙에 굴복하고만 것은 일반 사회학적인 고찰이나 심리학적인 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만대의 탁월한 지성인이면서도 백절불굴의 투사였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그에 비해서 하잘것없는 적은 무리의 신앙에 굴복해서 그때까지 싸운 자기의 과거를 그의 말대로 배설물처럼 버리는 자기혁명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바로 부활신앙에 의한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의 부활신앙의 극치를 나타낸다. 그중에서 12절 아래를 읽으면 그의 부활신앙은 바로 혁명신앙이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너무나 자명적인 것으로 믿는다. 그는 짧은 구절 안에서(12-16절) 같은 신념을 계속 반복한다.

12절: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는데…(왜) 죽은 자의 부활을 없다고 하느냐?

13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15절: (동상)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반복하는 신념은 "인간은 반드시 부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부활했기 때문에"라는 논리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자명적인 사실로 전제하고 인간의 부활의 확실성을 말한다. 그 적대자는 마치 그리스도는 부활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은 부활할 수 없다는 주장을 가진 듯이 그 논리를 전개한다.

그리스도교회는 예수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회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교회의 탄생의 날은 바로 이 부활을 경험한 그날이다. 저들은 이 사실의 확신과 더불어 죽음과도 같은 패북의 상태에서 부활했다. 괴테는 그의 『파우스트』에서 "저들은 주님의 부활을 축하했는데 그것은 저들 자신이 부활했기 때문이다"(Sie feieren die Auferstehung des Herrn, denn sie sind selbst auferstanden)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순서를 바꾼 말이다. 저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시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어떤 지역이나 그 시조의 무덤 따위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생이나 교훈마저도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저들의 외침은 단순했다. 그것은 저들이 그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저들의 증언에 굴복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그 증언을 듣고 맹종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도들이나 그의 추종자가 경험한 것처럼 그도 직접 그것을 경험한 목격자의 반열에 자기를 세운다. 그의 이 체험은 그의 생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 경험이 그리스도의 이론성(異論性)에 반기를 들고 박해의 선두에 섰던 그의 발걸음을 돌이켜 앞으로 가게 한 것이다. 이 신앙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며 동시에 그것에서 인류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이러한 바울의 확신을 현대의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 이 신앙은 어떤 사변도 허락하지 않은 확신이다. 우리는 이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일 없다면 그것을 외면하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바울은 그러나 과거 회고적인 그리스도 부활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인간의 미래의 부활을 본다. 우리는 부활한다. 이 신앙은 그의 존재 근거다. 따라서 그의 존재 근거는 과거에 둔 것이 아니다. 아니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산다. 이 미래적 부활이 없이는 현재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사실을 약간씩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 한다.

14절: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설교는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7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8절: (만일 그리스도가 살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삶 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그는 비슷한 확신을 이처럼 반복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제아무리 웅장한 사업을 전개해도, 어떤 장엄한 신학적인 전개를 한다고 해도 제아무리 거대한 교회와 조직과 예배의식을 갖추었어도 부활신앙이 분명치 않으면 다 허무한 것이라고 한다. 부활신앙은 존재적 무(無) 앞에 그대로 굴복해서 허무주의에 침몰되는 인간이 그 무를 박차고 재기하게 하는 거점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왜 악전고투해야 하느냐? 왜 의로워야 하느냐? 왜 선해야 하느냐? 무(죽음) 앞에 선 인간들의 이러한 물음에 무엇으로 대답할 것인가? 카테고리칼한 명령? 인간의 존엄성 때문에? 나라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아니면 돈을 위해서? 그런 것은 다 도살장으로 유도하는 짐승에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콩 알을 뿌려주는 속임수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그런 말은 효력이 없다. 그런 것이 모두 의미가 있으려면 부활신앙이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바울은 부활신앙이 없는 한, 재래적인 순진한 속담인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가 결과적으로 언제나 귀착점일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 한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내일의 삶을 전제한 삶으로 볼 수 없다. 그 모습은 정말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의 삶이다. 한마디로 부활신앙 없는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다. 내일을 전제하지 않는 권력, 내일을 계산하지 않는 종교들이다. 그러기에 지금 당장의 효과와 향유에만 몰두한다. 그런 것이 부정, 폭력, 횡포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형수의 삶의 모습이지 출옥을 전제한 삶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그 바탕에 깔린 허무주의의 발로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4

그러나 바울의 부활신앙은 죽음의 세계에서 나 홀로 탈출하리라는 자기중심주의의 발로가 아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인류 전체의 미래를 약속한 것이다. 그것은 어느 개인, 어느 특정한 그룹의 미래가 아니다. 아니! 그는 모든 사람이 살게 되는 미래의 약속을 보았다. 바울은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거점을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 준 현실이며, 인류의 미래를 약속하는 첫 보장(열매)인 것이다.

바울은 인간, 그 역사, 아니 온 우주가 허무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직시했다. 모든 피조물은 허무(Nihil)에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저들은 이 허무에서의 탈출을 궁극적인 희망으로 하고 있다. 이 일은 인간혁명(하나님의 아들 됨)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피조물들이 '신음'하면서 갈구하는 것은 참 인간의 출현이다(롬 8, 19 이하). 이러한 자주적인 염원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부활, 그를 따르는 자의 부활, 그리고 온 인류의 부활, 마침내는 이 땅 위의 모든 악의 세력이 영원히 축출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히 지배됨으로써 허무는 영원히 소멸되는 순서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부활신앙은 꺼지지 않는 세계혁명의 불길임을 본다. 이 세계의 모든 악한 세력이 굴복하여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꿀 때까지 이 불길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바로 부활신앙이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 날!' 이것이 이 역사의 종국이며 그날까지 불의와의 싸움의 불길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5

그러나 부활에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이다. 즉 죽음이 그 부활에 선행한다. 부활은 지금의 것의 연장은 물론 아니며, 또는 그 어느 일부만이 제거되고 도로 살아나는 지양(Aufheben)도 아니다. 아니! 철저히 죽음 뒤의 사건이다. 예수는 철저히 죽은 것이다. 이 죽음과 부활은 유리된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동시적인 같은 사건의 양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십자가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죽음! 이것은 지금의 것과 미래의 것 사이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한다. 그 미래는 지금의 것의 어떤 가능성의 실현이 아니다. 아니! 부활의 사건은 여기서 저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현재가 미래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재를 삼켜 버리는 그런 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미래 또는 이 역사의 미래란 이 인간 또는 역사가 지니고 있는가능성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부활신앙은 비관주의를 낙관주의로 바꾼 것이 아니다. 그의 부활신앙은 지금의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믿는다. 이 말은 결국 지금, 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부활신앙은 결코 육의 부활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살과 피로된 존재로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50절).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빈 무덤'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소위 영혼불멸설 따위도 모른다. 아니! 철저한 죽음! 그것만이 부활을 가능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부활에 참여하며 "날마다 죽으면서 산다"고 한다.

여기에 악조건, 패배, 죽음까지도 가로막을 수 없는 혁명의 불길의 힘이 깃들고 있다. 부활신앙 없이 혁명을 말하지 말라. 사필귀정이라는 것을 "죽음"이라는 전제 없이 의지하지 말라. 그들은 어느 단계에 가서는 반드시 꺼져 버리리라. 참 혁명은 지금의 것은 악(惡)만이 아니라 의(義)마저도 마침내 죽는다는 전제 없이는 좌절하고 만다. 현실은 사필귀정이란 말을 조소한다. 의나 선은 반드시 이긴다라는 말을 비웃는다. 왜? 그것은 의나 선은 불의와 악 앞에 사정없이 꺼꾸러지기 때문에… 그럴 때 이러한 사실을 주체적으로 믿는 사람은 동시에 꺼꾸러지리라. 저들이 꺼꾸러지지 않으려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 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꼼짝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니! 의도 선도 죽으면서도 혁명의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현존』, 197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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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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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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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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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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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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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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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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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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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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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분단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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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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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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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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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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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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