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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기가 막힌 세상
우리 시대의 사상적, 정신적 상황

오늘 "기가 막힌 세상"이란 주제로 선생님과 대담을 나누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주제는 크게 보면 이중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기가 막힌 세상이라는 시세 말로 표현되는 우리 시대의 상황을 진지하게 점검하면서 기가 통하는 세상을 향한 전망을 세위 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가 막힌다든지 기가 통한다든지 하는 것이 과언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양의 기 시상을 음미해 보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선생님께는 "민중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민중신학과 동양사상의 대화를 강조하고, 특히 기 사상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생님의 새로운 사상 전개는 필경 민중신학의 내적 논리가 우리 시대의 문제와 맞물려 심화확대되어 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는, 이제는 이에 관한 선생님의 생각을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가 막힌 세상에 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저는 먼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새롭게 조성되는 정신적 상황을 선생님께서 어떻게 보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들 가운데 한 가지는 소련이나 동구라파의 변혁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사회주의나 맑스주의가 신뢰성을 크게 상실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나 맑스주의의 신뢰성 상실 위기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시민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약하기는 하지만, 환경 문제나 시민적 대안의 제시를 중심으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사회주의의 실패와 맑스주의적 대안의 용도폐기가 손쉽게 선언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변형된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화가 끝없이 요구되는 우리 사회의 한 현상이겠습니다만, 깊이 들여다 보면,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공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백을 채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명 운동이라든지 신과학운동 혹은 동양 고전사상으로의 회귀가 유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종의 유기체주의의 등장이라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사상적, 정신적 환경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대담자 강원돈 박사는 한국신학대학 및 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독일 보쿰의 루르대학교 개신교 신학부에서 경제윤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모든 사회병리 현상들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습니다. 이 와중 속에서 젊은 생명들이 스스로를 불태우는 분신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민중의 봉기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일어나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은, 시야를 넓혀서 본다고 하면, 세계적 차원의 회오리 바람이 한국 사회의 현장에서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좁게 보면,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불안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단 국내적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고 세계적 차원의 방향상실과 관련이 있는 것이죠. 이를 예민하게 느끼는 학생들이 지금까지 단선적으로 믿어 온 것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회의주의나 절망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말하자면, 청년 학생들의 분신행위는 대안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일종의 니힐리즘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지요. 저같은 나이 먹어 현실감각이 둔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겠다는 것을 포기해야 할 사람마저도 당혹해지는 세상, '아니다'와 '그렇다'를 분별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생각을 제약하는 상태, 황사사태나 짙은 안개 때문에 앞뒤가 꽉 막혀 안 보이듯이 자기반성도 하기 어렵고 전망을 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바로 지금의 실정인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나 맑스주의에 대해 말해 보면, 제가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현장이 자본주의의 찌꺼기로 가득 차 있고, 구라파 유학중 자본주의 현장에서 살면서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계속 보아 온 저로서는 조건반사적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이것은 저의 정서나 감정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직 어린 나이였던 20년대에 공산주의 바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제가 1922년생이고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으니까 국민학교 들어갈 나이에 만주에서는 이 바람이 크게 불어닥쳤죠. 그 때는 잘 몰랐고 이제 와서 반성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들이 합세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어요. 물론 국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일제의 학교교육에 철저히 세뇌되어 있었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민족주의에 눈떴어요. 그 당시 교회 분위기는 사회주의를 완전히 의미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민족주의만큼은 암암리에, 그리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담할 정도로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직 어릴 때 저는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성을 경험하였어요.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지요. 해방 직후 만주에서 체포령을 피해 쫓겨와서 해방군이라는 소련군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쓴 맛을 보았어요. 강간과 절도 등등을 말이지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감정적으로 반공적일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오랫동안 철의 장막 뒤에서 종교적 경건성에 비길 만큼 이기성과 싸우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투지를 보여온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뭔가 다른 것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고 기대를 했어요.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장막이 걷히면서 현실로서 존재하는 사회주의는 적어도 제가 환상을 가졌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기대했던 만큼 안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인권 차원에서 잔인성을 동반한다는 것을 감안하면서도, 기본적인 새 사회의 틀이 갖추어지고 정신적인 혁명이 이룩되었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소련을 보거나 동구를 보거나 중국을 보거나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지불한 희생의 대가가 이것뿐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유토피아적 사유는 늘 독재를 낳는다는 생각으로 묵인하려고 한 것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하도 문란하고 창조적인 것을 가로막아서 젊은이들도 맥이 빠져 소시민화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수십년간, 심지어 80여 년 동안 사회주의 사회에서 길러진 사람들이 놀랍게도 개방된 사회의 인간과 질적으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큰 실망을 느낄 정도입니다. 정말 이 정도밖에는 안 되는가? 아마 이북과 쿠바를 제외하면 자신의 정체마저 상실하고만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재형성한다는 것이 상당한 한계가 있고 또 힘들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내용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내놓았을 때, 그것은 한 개인이 한 것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서 눌리고 수난당하던 사람들이 염원했던 것을 얼른 받아서 자기의 아이디어처럼 내놓았을 것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있었어요. 그 후 그 내부를 들여다 보니까 고르바쵸프였건 그 누구였건 간에 닫혀 있었던 것을 열지 않고는 안 될 상황에 몰려 있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소련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힘에 의해 조금 풀리니까 민족분규 등 아래로부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우리 나라에서도 지난 80년대에는 억압 속에서도 사회과학이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다른 사회에서는 벌써 경험한지 오래 되었지만! 사회과학의 그물에 걸려 들지 않는 것은 허상이라고 단정지을 정도였는 데, 그러한 신념을 가졌던 젊은이들이 오늘날 맥이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사상적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기적인 고민을 우리 역사의 전환기적 고민과 더불어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런 젊은이들의 고민에 진지하게 참여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권옹호라는 차원에서 보든지, 반공에만 몰두하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든지, 조금 더 나아가서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든지, 정략적으로 자살이 좋으냐 나쁘냐를 평가하지, 그들이 세계사적 진통을 짊어지고 고뇌하고 있다는 시각에서 젊은이들의 몸부림을 보지 않아요.

각도를 조금 달리 해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상황과 관련된 질문을 한 가지 더 드리겠습니다. 최근의 독일 자료들을 보나까 그곳에서는 탈세계적인 흐름(esoterische Strömungen)이 나타나고 있더군요. 가치관의 혼란이랄까, 삶을 떠받치는 이념적 기반의 붕괴랄까 하는 것이 반영된 현상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생명사상이 확산되고 신과학운동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그 배후에 어떤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움직임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두 가지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민중적이거나 민중지향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변형된 반공주의를 결과적으로 강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맑스의 사회분석에는 여전히 합리적 핵심이 있고, '실천' 개념과 '관계' 개념은 구체적 인간을 파악하는 열쇠로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데, 이를 완전히 이야기할 경우에도 추상적 인간밖에는 얻은 것이 없게 되죠.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향상실과 회의 그리고 허무주의가 발흥하는 시대
―기가 막힌 시대

앞서서도 말했듯이, 우리 시대가 혼란과 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살아 있는 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위기는, 말 그대로, 끝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단 역사 안에 있었던 것, 그리고 어느 정도 역사 안에서 타당한 진실성을 가졌던 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맡겨졌던 역할분담을 완전히 잃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사회과학적 관심이나 맑스주의에 대한 도취가 아주 없어진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거예요.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지양된다(Aufheben)고나 할까요? 그러나 다시 거기로 곧바로 돌아가지는 못할 겁니다. 기독교가 한때 굉장한 역동력을 갖고 있었으나 어느 단계에 가서 정착되어 민중을 잃어버리고 활력을 잃고 틀거리만 남아 버렸듯이, 맑스주의도 지금 그런 모습인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가 남긴 풍요한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계승되어 역사에 공헌할 것입니다. 맑스주의는 한때의 흘러간 유행이 아니라 필연적인 어떤 것을 대변한다고 보아요. 그러나 맑스주의 일변도로 그렸던 유토피아는 꿈이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내한했던 오트(Heinrich Ott)와 여러 시간 대화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은근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는데, 거꾸로 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고 말았어요. 그만큼 서구에는 대안이 없는 거예요. 독일 통합 이후 동독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복지사회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막상 보니까 그것에 대해 좌절을 느끼게 되었고, 서독의 청년 학생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으나 막상 열어 보니까 환멸을 느끼게 되었단 말이지요. 이러한 좌절과 환멸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지금 독일에는 비판과 회의로 가득 찬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겁니다. 독일 통합만 하더라도, 서독이 동독을 돈 주고 샀고, 고르바쵸프도 동독을 돈 받고 포기했다, 팔아버렸다는 언어를 사용하더군요. 지금은 경제의 요구가 이데올로기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것 같습니다. 최근의 중동사태를 보더라도, 미봉책 이상 어디로 끌고 나아가려고 하는지 미래에 대한 구상이나 방향설정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희망을 주는 것이 없어 보여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기가 막힌 것이지요. 바로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버리며 저항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정부를 겨냥한 것이지만, 저는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가 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히는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이들이 자해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지요.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오늘의 상황이 쉽게 니힐리즘에 빠지게 하고, 성서가 말하는 종말론과는 다른 허무주의가 나타나게 하지요. 꼴 보기 싫으니까, 아니면 여기에는 구원이 없으니까 어디론가 도망쳐야 하겠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서양에서도 서구적인 유산 갖고는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어딘지 저 멀리 다른 희망이 있으려니 하고 동경을 한단 말이지요. 이와 같은 지평에서 동양적인 것에서 무엇인가 구해보겠다는 발상이 싹트는 것이겠죠.

선생님의 말씀이 광범위하면서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기가 막힌 세상에까지 이르렀는데,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무엇이 기가 막혀 보이십니까?

일단 신문을 들고 보면, 기가 막히지 않아요? 뭔가 통하는 것이 있어야지! 나열된 기사들을 보면, 도무지 상호연관이 안 돼요.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 경제질서의 파행성이나 권력남용, 나아가서는 이기주의가 판을 쳐서 내일과 모레가 내다 보이지 않는다구요. 폐수 방류만 생각해 보세요. 이기주의에 빠져서 집단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단 말이예요. 폐수를 방류하면, 결국 자기도 죽는 것인데 내일 일은 생각 안 해요. 지금 당장 눈 앞의 것만 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늘과 내일이 벌써 단절되어 있고 어제와 오늘이 단절되어 있는 셈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 개인과 우리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 단절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단절되어 있는데 정치계나 운동권마저도 자꾸 단절되어 가는 것이 큰 문제지요. 쭉쭉 풀려 나가고 쭉쭉 해결되어야 할 문제도 기가 통하지 않으니까 될 일도 안 되고, 되더라도 실기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습니다만, 그들의 의견은 절대 전달되지 않지요. 상호단절되어 있어요. 계급적으로도 단절되어 있지만, 세대별 연령별로도 깊은 단절이 있어요. 가정과 같이 조그마한 단위조차도 이기주의에 의해 점점 단절되어 가고 있습니다. 종교계나 교육계도 그런 것을 넘어서야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거든요. 꼭 같은 소리를 내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기합이 되지를 않아요. 기합이 되면 에너지가 생기게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기가 막힌다는 말이 숨이 막혀 숨을 내쉬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기막히게 잘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상상을 초월할 만큼 포지티브한 것이 갑자기 도래해도 기가 막힌다는 말을 하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기가 막힌다"는 말을 쓰는 것은 전 자의 의미에서예요. 숨이 막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기를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죠.

최근의 노동통제나 공안통치를 보면, 인권유린도 인권유린이지만 우리 사회의 소통이 벽에 부딪힌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위기를 민중의 희생 위에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격심하고 이들의 진출을 봉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각 성원이 제 몫을 찾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상황은 정의롭지 못하고 따라서 억압 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지도 못하겠지요.

기 사상에 대한 관심은 민중신학의 내적 논리와 어떤 관련이 있나?

이제 말머리를 돌려서 조금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최근 선생님께서는 "민중신학-회고와 전망"(한국신학연구소 제13기 월요신학서당 첫 번째 강좌)이라는 공개강연에서 민중신학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민중신학과 동양사상의 대화를 강조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민중신학의 내적인 논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민중신학 작업을 회고하다 보니까 민중신학이 그 동안 탈서구 신학화하는 소극적인 작업을 해 온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첫째, 모든 것을 위에서 아래로 보는 입장에서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는 것, 둘째, 주객도식적 사고를 극복함으로써 주종적 사고를 거부하고 '더불어'를 강조한다는 것, 셋째, 위와 관련된 것이지만, 인디비디움(individium)으로서의 인격주의, 영웅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집단성을 재확인하는 것, 넷째, 인간을 추상화하는 도구인 보편주의에 대해 편파주의를 확인하는 것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다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인데, 그 동안 민중신학은 각기 다른 각도와 연관에서 서구 신학의 유산을 배제한 것입니다. 그 유산들은 서구 신학을 포함한 서구적 사고의 틀거리요 기둥들이었는데, 민중신학은 그런 것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어떤 신학적 스케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발견하고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민중은 집단입니다. 민중운동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들이 배제됩니다. 그런데 민중을 이해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들이 바로 위에서 말한 사고틀입니다. 그 중에 인디비디움으로서의 인격주의는 민중신학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 동안 민중을 정의하라는 주문을 계속 받았지만, 저는 그것을 끝끝내 거부해 왔습니다. 그 주요 이유는 민중을 정의하면, 살아 있는 민중을 상화(像化)하여 박제화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얼른 파악되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쉽게 상을 만듭니다. 상(象)은 본래 코끼리의 상형인데, 그것에서 모양, 생김새, 법칙, 본보기 등의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그것에 사람 인자를 더하여 상(像)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모양, 형상, 본뜸, 규범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준이 된 거지요. 페르조나(persona)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라틴어 페르조나는 애초에는 없었고 중세기에 들어와 희랍어 우시아(ousia)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어원적으로는 '가면'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때그때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는 것으로서 본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또 페르조나(persona)는 per("자기"), se("홀로"), una("오직 하나")의 합성어인데, 이것은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서 다른 어떤 것과는 관계도 차단하는 자기완결적인 것(Selbst an sich)을 뜻합니다. 그것을 '인격'으로 번역한 것은 일본 사람들이 편의상 한 것이지, 페르조나에 해당하는 한자 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서구 신학은 페르조나 개념을 신학하는 데 마구 끌고 들어오지요. 신도, 그리스도도, 나아가서는 성령을 놓고도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상(像)입니다. 서구 신학은 그것을 대전제로 깔아 놓고 다른 모든 것을 비판합니다. 동양에는 종교가 없다고 보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불교나 노장의 도교는 물론, 유교도 종교로 승인하지 않아요. 불교나 도교에는 분명히 상화(像化)된 신이 없어요. 오히려 그 자리에 무(無), 공(空), 허(虛) 등을 놓지요. 그래서 서구 신학은 불교나 도교를 무신론이라 하고 따라서 신심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그 반대지요. 저는 믿는다고 하는 것보다는 무, 공, 허처럼 아무런 책임적 다짐도 하지 않고도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고 비무장화하되 그것을 무의식 상태에까지 관철하여 몰아(沒我)하는 것이 정말 조건 없는 내어맡김이 아닌가, 그것이 진정한 신뢰, 철저한 신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교에도 불상이 있어요. 그것은 중생(衆生)의 한계 때문에 마련된 것이지 불교의 본 정신은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비판하는 뜻에서 불교를 상교(像敎)라고 해요.

이제 우리의 문제로 되돌아 오면, 기독교에서는 성령마저도 상화, 곧 인격화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대화도 불가능해지고, 천, 지, 인, 자연, 역사, 인간 사이 등 모든 관계를 이어 주어야 할 성령이 거꾸로 차단의 장벽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저는 일찍부터 영을 기(氣)로 바꾸어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금은 기가 모든 것을 상통하게 하는 열쇠라고 보고 있습니다.

기란 무엇인가?

기(氣) 자는 상형문자로 본래 바람을 뜻합니다. 아주 오래된 문자에는 그 안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얼마 후에 그 안에 불 화(火) 자가 들어갔어요. 그 때는 힘의 원천을 불로 보았던가 봐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쌀 미(米) 자가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풀이 모든 것의 원천이라는 뜻이 반영된 셈이지요. 그 다음에 물 수(水) 자가 들어가거나 획으로 붙은 문자 형태가 발전되는데 물의 힘이 의식된 증거겠죠. 한국에서 기라는 말은 한자말이기 이전에 완전히 우리말로 되어 있어요. 기가 막히다는 말은 상식화되어 있죠. 기색이 좋지 않다. 이 말도 완전히 우리말이지요. 기승을 부린다, 기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기염을 토하다, 기운이 뻗친다, 기가 죽었다, 기를 편다, 기차다, 기체, 기질, 기가 허하다 하는 말도 한문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우리말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들은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육체구조와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 한방에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라는 것은 생명, 삶과 직결되지요. 삶과 기와 몸은 동의어예요. 신기하다는 말을 하는데, 여기 쓰이는 기 자는 기이할 기(奇) 자가 될 수도 있고 기운 기(氣) 자가 될 수도 있어요.

장자는 기가 모이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故曰, 逐天下一氣身)고 보았습니다. 이 말대로 기는 그대로 남고, 죽고 사는 것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 뿐입니다. 흩어지고 모인다는 것 뿐이지 기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어요. 천기(天氣)니 지기(地氣)니 인기(人氣)니 하는 것이 그런 것이죠. 이런 표현은 물론 한문도식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기가 우주를 관통하는 힘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이러한 사상이 발전해서 풍수설에까지 적용됩니다.

앞에서 잠깐 짚고 넘어 갔지만, 서구적인 사고, 서구적인 신학의 틀거리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주객도식입니다. 그것을 빼면 서구 신학은 완전히 무너져요. 서구 신학은 아무리 애써도 이 도식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이 주객도식으로부터 해방하려고 해도 서구 신학에는 그것을 위한 뿌리가 없어요. 2-30년 전에 서구 신학자들이 저에게 어떻게 주객도식을 극복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저는 기를 근거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원래 주객도식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서구적인 사고를 끌어들이다 보니까 우리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서구적인 사고로부터 떠나기만 하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기를 생각해 보면, 기는 이원론으로 나눌 수 없는, 우주를 관통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을 신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겠죠.

이능화 씨에 따르면, 기를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은 장자라고 합니다. 기는 노장사상에서 주창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우리의 선(仙)사상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 노장사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지만, 중요한 것은 노장사상이 왜 대두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아직 학적으로 분명한 것을 몰랐으면서도 저는 오래 전부터 그것이 공자를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인 체제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아 왔어요. 그런 전제가 없다면 노장사상처럼 급진적인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 같이 보이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더군요. 유교적인 체제주의에 의해 윤리가 강하게 대두되고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인위적인 도식이 삶을 숨 막힐 정도로 통제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공했는가 하면 그렇지 못했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기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어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가 주창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있기 이전의 기, 제도화되기 이전의 것에 대한 성찰은 제도화가 이루어지면 질수록 교류를 가로 막고 모든 관계를 순탄하지 못하게 한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지요. 노장이 기를 주창한 것은 인위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요, 그것을 없애자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기를 막는 것이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고 자연히 투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소통하는 것, 숨을 쉬는 것, 힘을 뻗는 것이고 그것이 본래적인 것인데, 인위적인 것이 그것을 막았다, 그것도 폭력으로 막았다, 그러니 정치, 윤리, 도덕 등, 인위적인 것에 저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노장사상에서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경』에 멀리 북구의 환상적인 나라에 관한 한마디가 남아 있지만, 막연하기 그지 없어요. 아마 유토피아를 제시하시 않는 것은 인위적인 것에 하도 물렸기 때문일거예요.

동양의 기 사상에 대한 관심이 민중신학의 내적 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삶과 기와 몸이 본래 통전적으로 파악되고 있었다는 대목은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통전적인 파악은 사고의 미분화 상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인가를 정조준해서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글쎄요. 큰 범주에서 말하자면, 노장사상은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다 보니 극단으로까지 나아가서 사고에서마저 인위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했어요. 노장이 말하는 기는 모든 것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것이니 "태초에 기가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장사상에서는 그런 기를 전제하고 그것이 어떤 장애에 가로 막히게 되는가를 살피는 방식으로 사고가 전개되었다고 봐요.

요즈음 저는 함석헌 선생의 평화론을 상고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노장사상에서 따온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씨알은 원래 평화적이라는 사상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다윈주의의 적자생존론을 굉장히 비판하면서 그것은 약육강식을 인간 사회에서 자명한 것으로 여겨 침략전쟁까지 합리화하고 말았다고 해요. 함석헌 선생은 인간은 원래 평화적이고 씨알은 협조적이고 조화를 좋아하는 것인데, 약육강식의 면만을 강조해서 오늘의 현실을 가져 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간단히 줄여 말하자딴 씨알을 씨알 그대로 내버려 두면 평화가 저절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함석헌 선생은 일차적으로 국가주의를 일관해서 반대하게 되지요. 정치, 군사, 국가, 국경 등등, 이런 것은 모두 인위적인 것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을 부각시켜야 하나? 함석헌 선생은 맨사람이라든지, 본래사람이라든지, 때묻지 않은 사람이라든지 하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어요. 또 하나 재미 있는 발상은 유영모 선생에게서 볼 수 있어요. 그는 영을 '숨님'이라고 부릅니다. 기는 '숨', 숨쉰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산다'는 의미거든요.

기의 담지자요 기의 원천인 민중

저의 견해로 되돌아 와서 말한다면, 저는 기를 민중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민중은 개인이 아닙니다. 집단이지요. 물론 집단이라는 말도 꼭 맞지는 않고 총체라는 말도 맞지 않고, 아직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는데, 아무튼 인디비디움과 상반되는 것만은 분명해요. 저는 기를 민중과 직결시켜서 민중의 원래 본모습을 기의 담지자, 기의 원천으로 보려고 하지요.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본래적인 것 … 그런데 기가 막히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순수한 기를 담지하고 있는 민중을 정치적으로 억누르고 가로막는 일이지요. 민중이 세상을 제대로 통솔하게 하자는 것은, 결국 다른 말로 하면, 기가 통하는 세상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민중을 규정하지 않고 규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만, 기의 관점에서 민중을 본다고 하면, 민중의 기를 꺽지 말고 그것을 민중에게 돌려주라, 거기서 출발하자고 말하게 됩니다. 기를 가로 막는 것, 그것은 현실적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예요. 지금까지 그래도 가장 기를 살리고 있는 것은 민중입니다. 그들에게는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폭발할 수도 있고 봉기할 수도 있고 자기초월을 할 수도 있고 옳다고 여기는 것에 뛰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그런 겁니다. 그래서 민중과 기를 서로 연결시키게 되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것을 가로 막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원수다—이런 말을 하게 되겠지요.

기가 본래 저항의 언어라는 것은 주목되는 측면입니다. 체제화된 것을 무너뜨리는 폭발력을 기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민중을 기의 담지자, 기의 원천이라고 하셨는데—아까 함석헌 선생의 씨알이나 맨 사람과 같은 말이 나와서 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저는 어쩐지 그런 맡을 들으면 너무 정신화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민중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면, 민중을 개념적으로 규정하자는 요구를 떠나서라도 좀더 분명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만…민중은 '관계들' 속에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관계들을 체현하고 있고 그런 만큼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중이 체현하고 있는 관계들이 억압적이고 착취적이고 소외적이라고 하면, 민중의 삶도 바로 그런 관계들이 총화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민중의 삶에서 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보다 구조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맨사람이나 씨알에 대한 그러한 비판은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말들은 저항의 언어이지 정의가 아니란 말이죠. 달리 말하면, 맨사람이라는 말은 왜 너희들이 인위적으로 세뇌시키고 강제로 몰아부치느냐 하는 저항의 언어입니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죠. 함석헌 선생도 평화를 논하면서 "내버려 두라"고 강조하지만, 그래서 되도록 싸우지 않고 되도록 권력지향적인 운동과 구별하려고 하지만, 자꾸 민중 봉기나 민중 혁명을 이야기하고 또 그 쪽으로 간단 말이죠. 그것도 정태적인 존재가 아닌 동태적인!

제가 질문을 드리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꾸 지꿎은 말을 하게 됩니다만, 아까 선생님께서는 우주 전체를 관통하며 움직이는 기("태초에 기가 있었다")를 강조하셨고, 그 기의 담지자가 민중이라고 하셨거든요. 저는 지금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민중과 기의 관계가 단순히 "기의 담지자"라는 수사법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것인지 다시 묻고 싶은데요.

성서의 입장과 차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기라는 말은 어의적으로 히브리어의 루아하(ruach)와 신약으로 프뉴마(pneuma)와 같은 말입니다. 그야말로 숨, 바람이지요. 그런데 성서에는 전제가 있어요. 신이 흙으로 빚고 거기에 숨을 불어 넣어 주었더니 생명이 생겼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에제키엘 37장을 보면, 마른 뼈 위에 루아하가 스치고 지나갔다(저는 이 표현에서 누구의 루아하인지 주격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벌떡벌떡 일어났다고 묘사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루아하와 물질이 결합되어 생명이 생겼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아까 잠깐 말했지만, 노장사상에서는 기가 모이면 살아난다고 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죠. 그렇지만 기는 죽는 법이 없어요. 기는 그대로 있는데, 하나는 모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 지는 양상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억눌리고 짤린다 해도 도로 살아나는 힘을 갖고 있어요. 그걸 일러 민중이라 하는 거죠.

옛부터 농자는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제 생각으로는 늘 흙을 만지고 하늘과 직접 연결되어 사는 농부들에게서 기가 통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본 것 같아요. 동양적인 사고는 언제나 물질로부터 출발합니다! 바람 속에 불을 넣든, 쌀이나 물을 넣든, 질료와 연결시키면서 기는 여러 형태의 힘을 취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를 원천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에 여러 가지 질료를 넣으면 에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한 거란 말이죠.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이 질료에 숨을 불어 넣듯이 … 이런 식으로 사고가 발전하면서 기는 신의 자리와 별로 다르지 않게 되었어요.

아까 신기하다는 말에 대해 '기'는 기이할 기(奇) 자도 되고 기운 기(氣) 자도 된다고 했는데, 신기(神氣)라는 말은 신과 바람이 결합된 묘한 말이지요. 신바람이라고나 할까? 이것도 물질로부터 출발하는 동양적 사고에서나 가능한 발상입니다. 또 신통하다는 말과 기통하다는 말도 같은 말이에요. 시세 말로 '기똥차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기통이에요. 기통한 사람을 일러 옛부터 신선이라고 했죠. 신선은 한국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데, 저로서는 고증을 할 수 없지만, 한 문으로 풀이하면, 신은 위에서 내려오고(示) 아래에서 바치는(申)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소통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은 페르조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죠. 신과 나—그것은 위격(페르조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관계'를 말합니다. 선(仙)은 사람인 변에 뫼산(山) 자거든요. 산사람이죠. 물론 천선(天仙)이라는 것도 있고 지선(地仙), 인선(人仙), 심지어 수선(水仙)이라는 것도 있어요. 상당히 물질적인 표현이죠. 아무튼 신선이라는 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통(氣通)한 사람, 신통(神通)한 사람, 위 아래로 잘 소통하는 사람, 숨을 잘 쉬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예요. 숨을 잘 쉬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신선사상은 너무 많이 먹어 숨막히게 해서는 안 된다든지, 단전으로 호흡하는 법을 가르치는 등 생리학에까지 연결되었어요. 숨을 윤활하게 하고 잘 통하게 해주는 단전은 입, 목구멍, 성기, 소화기, 똥집, 똥구멍 등이 다 연관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서 출발하자는 것이죠. 여기에 힘을 주어 여기서부터 호흡이 이루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속의 구별이 없어요. 단전을 통해 호흡하여 기를 통하게 한다는 것이니까요. 기는 결코 먹는 것과 싸는 것, 입과 항문과 성기와 유리되지 않아요. 머리는 먹는 것과 싸는 것 사이에서 작용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머리는 조정을 하지만 주체는 아니에요. 오히려 먹고 싸는 것이 주체이고 머리는 그것을 보조하는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저는 동양의 자연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죠.

기는 유기물만이 아니라 무기물에도 다 통합니다. 한국에서는 중국보다 훨씬 더 많은 것, 아니, 모든 것에 신(神)을 붙여요. 돌에도 신을 붙이고 산, 강, 나무, 부엌, 측간, 대문을 위시해서 아주 조그마한 것에도 신을 붙이고, 심지어 생식기에도 신을 갖다 붙이거든요. 그런 만큼 고식화되고 박제화된 유신론은 완전히 거부되죠. 그게 왜 가능한가? 기는 편재한다는 사상이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돌도 숨을 쉰 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기가 통솔하게 되어 있고, 기는 생명의 근원, 살게 하는 근원아니까요.

우리가 민중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민중은 새삼스럽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세력이 아니라, 원래 있는 건데, 이제까지 우리가 이해한 기를 놓고 보면, 기를 가장 잘 담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민중이예요. 민중이 왜 기를 가장 잘 담지하고 있나? 그것은 민중이 물질과 가장 직결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연과 가장 밀착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죠. 민중은 노동을 통해 살림을 꾸려 가는데 그 과정에서 물질과 자연에 직결된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아요? 인위적인 원래적인 기를 더 담지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이제까지 우리들이 당연시했던 가치관이 다 문제가 됩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윤리적이 되고 사회에 더 잘 적응하면 좋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위적인 것에 더 많이 물들고 인위적으로 자기를 바꾸게 되지요. 그것이 유가에서 말하는 '군자상'(君子像)이죠. 우리가 지금 민중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하는 것은 소위 유가의 '군자상'과 대항하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민중에 의해서만'이라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있어요. 그것은 가장 억눌려 살기 때문에 기가 다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인위적인 것에 가장 물들지 않은 민중, 따라서 기가 잘 통하는 민중이 지성인이라고나 할까,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기를 끝끝내 더 잘 담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를 꺾으려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민중의 편에 서서 지원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서구적 사고의 잣대로는 파악할 수 없는 기

말씀 가운데 작연주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것을 서양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범재신론이낙 범신론 혹은 물활론과 구별해 주시겠습나까?

우리는 지금까지 서구인들이나 서구 신학자들이 규정해 온 개념에 너무 얽매여서 자기의 사상을 제대로 펴 보지 못했어요. 그 사람들이 무조건 범신론이다, 물활론이다, 혼합주의다하고 규정하기만 하면 그 근방에도 못 갔거든요. 알버트 슈바이쳐 같은 사람도 이런 잣대 때문에 이단으로 몰렸을 정도니까요. 그들은 동양사상은 다 범신론으로 보고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것이 있기만 하면 나쁜 의미의 혼합주의로 몰아부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조그만 돌에서 시작하여 큰 것에 이르기까지 신의 이름을 붙이는데, 그러면 그것이 다신 종교냐? 저는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아요! 신이 어디든지 편재하고 있다, 특히 삶의 구체적 현장에 있다는 신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신이라는 언어는 상대화되고 마는데, 여기에 고민이 있었을 거예요. 언어의 한계라고나 할까? 언어로는 잘 정리가 안 되는 거죠. 재미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은 심지어 집을 한 채 놓고도 부엌신, 측간신, 주춧돌신, 대문신 등등을 따로 모시고 있죠. 거기에는 소홀히 여기는 것을 존중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또 집을 무생물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집을 지키는 구렁이가 있다고 보는 것도 흥미 있는 발상입니다.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구렁이가 화를 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가 허공의 무방비 상태나 비보호 상태에 버려져 있지 않고 시공을 넘어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려는 노력이라고 봐요. 그래서 이런 신, 저런 신을 갖다 붙인 거죠. 그런 걸 감싸서 크게 한 덩어리로 본 것이 역시 기라는 것입니다. 기라는 말을 쓰면, 범신론이니 물활론이니 하는 말을 쓸 이유가 없어요. 기는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니까요.

결국 범신론이나 범재신론, 물활론 등 서양 사람들의 개념으로는 기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씀이근요.

물론이지요.

루아하, 프뉴마, 기—기는 생명과 운동에 직결되어 있다!

이제 말머리를 돌려서 선생님의 기 이해를 전제하면서 성서의 루아하, 프뉴마 개념을 조금 더 살펴보면 어떨까요? 주객도식이나 인디비디움과 결합된 인격주의를 무너뜨리는 것과 기 사상의 전개가 민중신학의 내적 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할 듯합니다.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큰 줄거리를 말하자면,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지는 루아하는 두말할 나위 없이 기와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구약에는 의인관이라고 할까 신인동형론이라고 할까 아무튼 안드로포모르피즘(Anthropomorphism)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그대로 인격주의와 연결할 수는 없을 거에요. 사람의 모양을 빌려 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고 그 당시의 언어능력 때문이기도 했을 거예요. 구약성서는 사실 그런데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지요. 유일신론도 구약의 원래 모습은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지 않아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 때, 흙 없이 막바로 창조하지 않고 흙에다 숨을 불어 넣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기가 들어와서, 장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질료에 기가 모여서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죠. 그리고 사람의 참 모습은 자연을 정복하여서 생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기가 들어와서, 장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질료에 기가 모여서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죠. 그리고 사람의 참 모습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합류해서 세계를 개척하는 데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바르트가 말하듯이 절대타자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 상통하는 관계입니다. 루아하는 바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숨과 하느님의 숨을 구별 없이 표현하지요.

에제키엘 37장의 루아하는 죽은 것을 살려서 바람이 불 듯 운동을 일으키고 있어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죠. 한마디로 기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기의 작용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서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애썼습니다. 프뉴마라는 용어를 썼어도 헬레니즘 사상과는 무관하지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보도를 보면, 바람이 불고 불 같은 것은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고 하거든요. 그게 프뉴마입니다. 거기에는 인디비디움과 결합된 인격주의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김창락 교수에게 프뉴마가 페르조나와 연결되는 경우를 물었더니 한 곳을 제외하고는 없는 듯하다고 해요. 어쨌든 신약이 프뉴마를 말할 때 프뉴마의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프뉴마, 사람의 프뉴마 등 가지각색의 프뉴마가 얼마든지 있단 말이죠. 소유격으로 된 프뉴마토스 하기우(pneumatos hagiou)와 같은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성령으로 새길 이유가 없어요. 형용사 하기온(hagion)은 구별된다는 뜻으로 새겨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프뉴마의 작용과 저기서 일어나는 프뉴마의 작용이 구별된다는 의미로 말이지요. '성령님'이라는 흔한 표현은 프뉴마를 인격주의의 포로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 오지요. 바람이 불 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막힌 것을 뚫고 통하게 하는 프뉴마에 '님' 자를 갖다 붙여서 시공의 제한을 두면, 프뉴마는 다른 곳에서는 꼼짝을 못하고 교회에서나 힘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거든요!

아무튼 프뉴마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움직여 예수를 죽인 현장, 아직도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장 한복판에 들어가 민중운동의 중심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막혔던 관계를 통하게 한단 말이지요.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는 언어가 서로 통했다는 말로 바로 기의 작용이라는 말이지요. 요한복음에 보혜사(parakleitos)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것은 빌려온 언어고요. 거기에 품격을 주면 비성서적으로 되고 말아요. 본래 의도는 그게 아니죠. 교회가 숨막힐 정도로 제도화되면 될수록 프뉴마가 필요하지 않아 요? 프뉴마는 자유와 해방의 기운, 숨, 힘이 아닙니까? 거기에 품격을 주면 처음부터 주눅이 들고 말죠. 그래서 저는 오순절 사건이 프뉴마, 기를 민중운동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요.

본래 페르조나와 무관했던 프뉴마가 인격주의의 포로가 된 것은 교권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가 탄생하여 제도화되면, 교권이 성립되기 마련이죠. 이 교권의 언어가 갖는 특징은 배타성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권의 일차적 이해관계는 교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교권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죠. 프뉴마도 제도화의 틀 안에 가두어 두어야 하고요. 프뉴마와 인격주의의 기이한 결합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날까요?

그렇죠. 두말할 필요 없죠.

선생님의 기 이해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를 생명과 직결시켜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과 연결시켜 파악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기 이해가 범재신론이나 범신론, 물활론과 구별된다는 것을 본명히 했고, 서구 신학의 인격주의와 대결관계에 있다는 것도 분명히 천명한 셈입니다. 제 생각에는 기를 민중신학과의 관련에서 성찰하는 일은 어느 만큼 진행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민중의 삶을 숨 막힐 정도로 억누르는 기가 막힌 세상을 넘어서 가는 길이 무엇인지, 기가 통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전망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요.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한두 마디 더 보충할 것이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생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네페쉬(nepesh)가 본래 목구멍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목의 숨, 목숨이죠.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먹는 구멍이기도 하거든요. 요한복음에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요. 예수는 "나는 생명이다"고 말하는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건 "나는 기다" 하는 말과 구분되지 않아요. 또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나무의 '생명'에 해당하는 하임에서 왔다고 해요. 아담이 흙과 연결된 이름이라면 하와는 생명과 직결된 이름이죠. 여자는 생명을 잉태한다는 점에서 생명을 구체적으로 자궁과 연결시킨 셈이지요. 이렇듯이 성서의 생명 이해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을 전혀 구별하지 않아요. 지혜 문학에도 영으로 번역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호흡과 전혀 구별되는 것이 아니지요.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에제키엘 37장을 살피면서 제가 주목한 것은 루아하가 집단적 봉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었어요. 그것은 기로 번역하면 아주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면 결국 기는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으로 되지요. 기는 잠재능력이라는 뉘앙스도 있지만 어떤 형태로나 이합집산하면서 여러 형태의 힘으로 발현한단 말이지요. 존재양식도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순절 사건, 갈릴래아 민중의 봉기 예수의 처형인 예루살렘 정착 같은 것입니다.

기가 통하는 세상에 대한 전망

전망을 자꾸 이야기하라는데 … 노장사상에서는 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물은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지요. 이것이 물의 방향입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비록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것은 누구도 막지 못해요. 골짜기 곡(谷)자는 바로 그것을 형용하지요. 곡은 아래인데 생명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하지요. 여자의 생식기도 곡과 연결돼요. 물은 흘러 흘러 아래로 내려 갑니다. 기도 그 성질은 마찬가지예요. 그것을 막으면 막히지만 돌아서 가더라도 제 갈 길을 가고 말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막은 쪽은 반드시 피해를 보게 되어 있어요. 민중도 같아요.

역사는 민중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방해를 받아도 세월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그런 의미에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민중이 가는 길을 두고 한 말 같 아요. 민중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제 갈 길을 가고야 맙니다. 방향이 뚜렷하게 주어져 있어요!

대안을 제시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꾸 걸리는 게 있어요. 적어도 성서까지를 포함해서 동양적인 사고는 왜 자꾸 새삼스럽게 방향설정을 하려고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단 말이지요. 이미 물은 흐르고 있고 아래를 향해 가고 있는데! 우리가 싸우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밖에 없어요. 물이 흐르는 것을 가로 막는 것을 알아서 제거해 주는 것, 그러나 물은 제 갈 길을 가고야 마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주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민중은 이미 제 갈 길을 알고 그 길로 가고 있는데,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의 뜻과는 다를 수 있어요. 괜히 우리가 개입해서 인위적인 것으로 그것을 왜곡시키면 안 되지요. 저는 그것밖에 말할 것이 없어요. 사실은!

물이 흐르는 것을 알아서 제거해 준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비록 소극적인 의미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역시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기가 막힌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무엇이 기를 막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기를 가로 막고 있느냐 …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상식이 되어 있지 않아요? 함석헌 선생의 평화론을 찾으면서, 그분의 말씀이 너무도 추상적이고 걸려 드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던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함선생이 국가주의를 끝끝내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 예요. 그렇게 되면 결국 무정부주의로 귀착되고 말죠. 함선생은 평화는 내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고, 민중을 민중되게 하라고 말씀하시거든요. 제 표현대로 하면, 그건 민중인 당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네 믿음이 너의 병을 고쳤지 누가 너를 위해 한 것이 아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죠. 네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뭔가 있다! 그것을 다시 환기시켜 주는 거죠.

정치권력은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을 통해 자꾸 분열을 시키고 기를 끊어 놓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우리의 기를 죽이고 생명성, 민중성을 자꾸 죽이고 있고, 그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죠. 이기주의가 조장되어 내 것, 내 것 하면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민중이 제 본 모습마저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거죠. 종교도 그런 점에서 무서운 작용을 하고 있죠. 교회구조가 극도로 비민주적이고 정교분리니 하는 온갖 교리들로 민중의 기를 죽이고 민중의 생명력을 잠재우는 원수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런 민중에게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일이 필요하죠. 이런 거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너무 자명한 것 아닌가?

선생님, 처음에 짚고 넘어간 것이긴 합니다만, 민중의 시대는 가고 시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거 웃기는 얘기라고요. 지금 정치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그것이 내세우는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소시민화시키는 거요. 결국 시민이라는 이름이라는 이름 아래서 중산층을 내세워 그것을 현실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모습으로 미화시켜 놓고는 그것에 이르지 못하면 사람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어요. 실제로는 가능한 것도 아니면서! 중산층 의식—그것은 자기를 상실하고 완전히 세뇌된 의식이라고!

로마서 8장을 보면, 만물이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만물이 신음한다는 표현은 구약에도 물론 있죠. 신음 하며 진통을 겪는 만물 속에서 사람도 잘못되어 속으로 신음하고 있어요.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민중으로 봅니다. 민중이 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는 거죠. 그것은 그들이 나타나면 해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은 프뉴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론으로 보면 큰 오산이고, 기가 한 없는 탄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거요. 기도 지금 막혀 있고 짤려 있기 때문이예요. 로마서 8장에서는 신, 인, 만물, 기,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데, 지금 하느님의 자녀, 참 사람이 등장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주저 없이 민중이라고 말해요. 기의 담지자인 민중이 나타나면, 자연까지 관통하는 해방이 이루어지지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종말적인 사건으로 가능해지겠지요. 민중이 주도하는 …

오늘 "기가 막힌 세상"이라는 주제로 매우 광범위하고도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민중신학이 확실하게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대담이 민중신학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밑바탕이 되고 이를 둘러싼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랜 시간 대담에 응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신학사상』, 73집,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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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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