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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 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
1

B형 나는 근경에 갑자기 목회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그것은 요새 한 평신도로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 교회의 의의가 새삼스럽게 중해지든 차 얼마 전 친구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중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의 주장이 글자 그대로는 아니라도 궁극에 있어서는 그렇게 확신이 되면서 목회의 의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느낀 것과, 또 하나의 동기는 아무리 부패한 듯한 교회에도 그 안에는 진실로 진리를 사모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무리가 반드시 있는 것을 발견함과 동시에, 태반의 교회가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진실한 양들이 안타까이 그 목자를 이끌어 나가려고 애를 쓰는 슬픈 사실을 볼 때, 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 하는 공상 아닌 공상에 열중하게 되는 고로 목회자로 많은 경험과 문제를 갖고 있는 형께 이 글을 쓸 생각이 났습니다.

목회는 우선 교회의 본질 적어도 교회의 땅 위에 있어서의 의의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나의 권한 밖에 있는 탓에 그것을 담당한 학자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고, 나는 비교적 소박한 입장에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교회의 본질상 분명히하고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되풀이 같으나 우리의 교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계는 죄의 정의나 추궁만을 일삼는 인상을 줍니다. 교회의 설교와 그 수고는 죄를 규정하는 것과 죄의 방지에만 몰두하는 나머지 죄로 인하여 떨고 있는 죄인에게 그 해결할 방향을 가르치는 일에 등한한 것 같습니다. 교회는 "회개"나 "십자가의 속죄"를 말합니다만 실제로 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범죄했을 때 교회는 그에게 대해서 책벌을 내리기에 필요한 성경구절과 헌장을 잘 찾습니다만, 그를 불쌍히 보아서 죄에서 구원해 주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범죄한 교인은 머리둘 곳 없어 세상으로 물러 나가야하고, 일반인(불신자)은 교회는 죄를 추궁하는 곳으로 알고 자기의 죄를 정리하고야 비로소 교회로 나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상 근본적인 오류를 범한 현상입니다.

보이는 교회가 죄인을 향해서 돌을 들 권한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지옥과 천국의 열쇠를 보이는 교회가 가졌다고 믿는가톨릭의 교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오히려 죄인을 영접하여 사죄의 도리를 가르치며 그들을 죄에서 구하기 위한 사랑의 수고를 하는 장소일 것입니다. 교회는 제단이지 재판소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 자는 사제이지 심판자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범죄한 절망 중에 있는 탕자를 이끌어서 용서하여 주신다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함으로서 자포자기한 암흑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지시하는 곳일 것입니다. 기독교회가 유대교회나 다른 종교와 현저하게 구별되는 점은 이 점일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목회를 한다면 비록 그가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그를 통하여 내 안의 살인강도를 찾아내어 고통하고 또 거기서 사죄의 은총에 감격하는 곳으로 그 방향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책망만 하고 사랑할 줄 모르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도대체 교회의 책 벌이라는 것이 의의가 있다면 교회의 질서유지에 있는 것이지 그를 죄인으로 구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대표적인 산 교훈의 희생자입니다. 그런고로 사랑과 마음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책벌은 바리새적인 잔재입니다. 나는 예수께서 약함으로 범죄한 죄인들을 저주하거나 배척한 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교만하여 위선적인 위풍을 갖추고 돌을 들고 죄인을 찾아 다니는 무리를 저주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목회자의 채찍은 언제나 죄에서 신음하는 약자보다 오히려 다 된 줄 알고 남의 허물만 엿보는 장로나 오래 믿은 자들을 향해서 부지런해야 할 것입니다.

2

목회를 생각하면 나에게는 우선 교회라는 건물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적산가옥을 되는 대로 이용한 교회나 아무 생각없이 면적만 넓게 지은 싱거운 신식의 교회당이 아니라 언제나 가톨릭 성당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일대를 장엄하게 억압하고 내려다 보는 장엄한 면 때문만이 아니라 비록 적더라도 어딘지 은밀하여 나를 세속에서 감추어 줄 수 있으리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건물이란 기도하는 곳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지요. 즉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세상의 모든 잡신과 삶의 경계에서 격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분열이 없이 심신을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교의 교회 건물은 그 목적과는 전혀 상반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서 서로 듣고 쳐다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편리만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각형에다 낮은 천장을 하고 유달리 큰 창에다 내부는 전부 흰 벽이고 아무렇게 나바론 정면에는 꼴사나운 강대상이 덩그러니 놓이고, 그 뒤에 설교자나 사회자가 군중과 마주 앉아 있습니다.

그런 탓에 모인 무리는 눈 둘 곳이 없어 목사의 표정이나 옷 구경 이 아니면 옆 사람과 웃음을 주고 받든지, 단장하고 앞에 늘어 앉은 찬양대들의 인물 구경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창 밖의 풍경이나 바라보는 동안 저들의 마음은 자기가 온 목적을 떠나 일주일을 헤매이던 세상으로 손쉽게 흩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는 아닙니다.

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 이 교회 건물은 단연 뜯어 고치겠습니다. 기술적인 것은 몰라도 좌우간 모든 교인이 안심하고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과 사귈 수 있도록 그 구조와 색채와 광선은 조종할 것이며, 우상적인 것을 제외한 가톨릭 교당의 좋은 면을 주저없이 살릴 것입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보다 더 장엄하게, 보다 더 아담하게 하고 싶습니다. 또 교육적인 면에도 유의하여 주위나 정원을 이용할 것입니다(가령 그리스도가 사랑하던 백합화, 저주하던 무화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던 야곱의 우물, 겟세마네 동산 등등, 그리고 바울을 위시한 여러 성자들을 회상할 수 있는 명상 자료를 제공하는 등).

이런 공상에 대해서 반대적인 생각이 예상됩니다. 하나는 그것은 우리 나라의 경제사정을 모르는 소리다. 또 하나는 그것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신조에 위반된다하는 것입니다.

첫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충분히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나 성 베드로 사원 같은 것을 꿈꾼다면 그것은 교회는 곧 집만 구경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나의 꿈은 우리 교계의 세간살 이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우리가 교회 건물이 우리 신앙생환에 또는 불신자에게 주는 영향이 무엇인 것을 인식한다면, 현재 신앙적인 열심과 생활정도에서 훨씬 좋은 교회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며, 설령 그 예산 안에서라도 훨씬 좋은 예배를 도울 수 있는 장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요 일종의 강연회장이 아니라는 것만 분명히 알아도 그렇게 맹랑한 설계는 안할 것입니다.

혹은 예배가 무슨 장소에 관계되는 것이냐 하는 항의입니다. 궁궐도 초막도 좋지 않느냐, 어디나 우리의 영에 주님이 계시면 되는 것이 아니냐. 나는 일단 그것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무 생명도 감격도 없이 온갖 금은보석을 깔고 장엄한 의식을 나열하는 영국 대공교회(大公敎會)의 예배보다, 비록 통나무를 잇대놓고라도 감격과 긴장으로 드리는 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조국을 떠나 생소한 땅에 내려서 자기의 집보다 먼저 세운 교회에서 드리는 퓨리탄들의 예배가 훨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그 퓨리탄과 같이 초연한 신앙의 달인들만 모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태반이 반신적인 사조에 물들고, 그들의 영의 눈은 감겨졌습니다. 그 모든 세속적인 분위기에서 탈속하지 못한 채 주일이니 습관에 따라 교회로 모인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온 몸을 통해서 혼란된 저들을 청각에만 호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오관(五管) 전체를 이용하여서 그들이 잠겨 있는데서 떨쳐 나와 저 위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계시에서 오는 것이지 그런 종교심리를 이용하는 인공적인 수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한 문제라면 현재 청교도는 사실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습니다. 우선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그 말투들이나 나가서는 할 수만 있으면 온갖 마술적인 힘이라도 이용하기를 사양치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아주 아름답고 고상한 교회를 세워 보았으면! 그래서 멀리서 지나가는 행인도 옷깃을 여미고 그리고 일주일간 걸어온 세상에서 시달린 교인들이 찾아와서는 거룩한 품에 안기는 행복을 주며, 거기는 땅 위의 모든 근심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라고 느끼도록 했으면! 이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다음 나는 예배 문제를 생각하겠습니다. 우선 우리 교회의 예배는 마치 일본 시대의 '국민의례'를 포함한 강연회와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그것도 그만 못하게). 기도할 때에만 일제히 정숙해지고는 그 외의 순서에는 아무런 예배의 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유롭게 앉아서 부르고 듣고 구경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기도에 중점을 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들의 관심은 설교에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에는 사실상 예배는 없습니다. 기도에는 예배하는 태도는 있으나 마음은 없고, 설교에 관심은 있으나 예배의 한 순서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금 특히 광고시간 등은 입장료를 내고 만담을 듣는 태도입니다. 주일날 교회로 찾아 가는 무리들은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돌아올 때면 "교회를 가도 들을 것이 있어야지!"라는 불평을 하는 것은 예배에 대한 태도에 근본적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잘못해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예배 중심은 설교에 있다는 종교개혁 이후의 신교의 주장을 예배는 설교에만 의미가 있다는 듯이 곡해를 하고 다른 순서는 소홀히 하여 기도는 생각나는 대로 시키고 찬송은 '이제 설교자를 돕기 위하여 특별 찬송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독창이 있겠습니다'라는 식의 찬송에 대한 몰상식하고 모독적인 태도를 가지고 막상 설교에 들어서면 가진 만담, 촌극(寸劇), 지식 등을 지루하게 전람(展覽)하는 것으로 일삼으니 교인들의 태도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생각의 원인을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예배에 중심은 설교에 있다는 루터 주장의 오인, 그리고 예배와 교육(훈련)과를 혼용하는 것입니다.

루터 선생이 예배의 중심은 설교에 있다는 주장으로 당시 이미 생명을 잃은 가톨릭의 지배자들이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온갖 장엄한 장치와 의식으로 기만하던 바벨탑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교는 예배에서 성찬과 세례를 제외한 일체의 의식은 전부 거부했습니다. 그런 사상은 중세기의 교회를 통해서 내려온 모든 예술품을 많이 없앴습니다. 그 아름다운 벽화 또 조각품, 장식품은 프로테스탄트의 의분의 철추에 사정없이 파괴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며 또 만일 나도 그 시대의 사람이라면 그 반열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그 아무것도 개입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는 그런 우상은 없습니다. 우상은 외부에 있기 전에 마음에 있습니다. 나의 의견에는 루터의 공격의 목표는 나타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루터가 가톨릭의 모든 예배의식을 철폐했으나 거기에 대한 인식이 명확한 루터 자신이 예배를 지도한다면 반드시 가톨릭의 여러 의식과 달랐으리라고 결론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고로 루터는 잊혀진 예배의 본질을 밝히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나 그 표어를 현금의 예배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예배의 중심은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말도 완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설교만이 말씀이라는 생각도 옳지 않습니다. 설교는 오직 청각을 통해서 주로 지성에 호소하는 것인데 그것은 루터와 같은 이가 섰던 입장[대학]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르나 교회는 그렇게 지성적인 훈련을 받고 언제나 읽고 생각할 수 있는 행운아만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그들의 감관은 온갖 세속 문화에 물들고 피곤해졌습니다. 저들에게 지성만에 호소해서 그 잠을 깨우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런 고로 예배는 모인 군중이 전체를 받치도록 순서를 꼭 같은 것으로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예배와 교육을 실질적으로 분리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짧은 예배 시간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저들을 이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예배 시간에 훈련적인 목적을 혼용하여 설교는 마침내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예배대로 순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은 근본적으로 다른 면에 속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참된 예배를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정말 이 혼란한 세상에서 시달리다가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그 앞에 정성되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교회로 가면 예배 중에 찬양이나 기도는 소홀히 하고 예배의 3분의 2의 시간은 어느 친구의 말대로 예배에의 인내의 덕밖에는 배우는 것이 없고 맙니다.

교육은 치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배와 구별하여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선 나는 몇 명의 양이나 가꿀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대교회주의, 다량 생산주의가 싫습니다. 자기의 분깃도 모르고 그저 대량 수용만이 성공인줄 알아서 남의 교인이라도 끌어와서 자기 교회를 채우려고 쟁탈전을 하는 것은 목회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들은 교회에 들어 오는 것은 볼 줄은 알면서 뒷문으로 새어 나가되 악마의 자식이 되어 나가는 것은 볼 줄을 모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태 23:15)라는 그리스도의 책망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게만 돌리고 안심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자기가 책임질 성의도 없이 교인 쟁탈에만 열중하는 자는 자기 명예의 노예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과 사정을 알며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한 목자는 이백 명을 넘어서는 무리일 것입니다. 아무리 우수한 목회자라도 이백 명을 초과하면 벌써 불가능합니다. 나는 교인으로는 백 명쯤을 담당하고 그 외는 구경꾼이나 손님으로 취급할 것이며 만일 힘에 넘게 교인이 많아지면 곧 적당한 지역으로 분가하겠습니다. 내가 담당할 만한 수를 정한 다음 교회 내의 교육을 위해서 그들의 정도에 따라 학교의 학급과 같이 나누고 그들의 사정과 입장에 따라 시간을 정하고 따로따로 성도를 가르치겠습니다. 그들의 교회 밖의 생활지도를 위해서는 일정한 구역을 나누고 집사는 그 구 역별로 선정해서 그들의 지도를 담당하게 하고, 그 힘을 주도록 그 집사들만의 특별 모임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에게는 전 도인의 의식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정에 따라 직접 심 방하여서 그들의 사정을 살필 것이나 우리 교계의 유행되는 심방 지상주의는 따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저 여러 무리가 마치 면서기의 호적조사와도 같이 몰려가서, 듣기 싫은 혼성으로 찬송 한 절씩 부르고 다니는 것은 공연히 가난한 교인의 점심 밥을 축내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보다 나는 교인들의 형편에 따라 일정한 계획 아래 시간을 정하고 교회의 일정한 장소를 정해서 각기 그들의 문제를 알아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수고를 나누도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생각이 훌륭해서 저들의 교회생활지도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저들은 교회의 일원임과 동시에 정치나 특히 경제의 지반 위에서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저들의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간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이고 또 우리 교계는 엄두도 못하는 미개척 면인 탓에 지금 생각 되는 것이 있어도 다른 기회에 말씀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이런 플랜을 가지고 내가 목회로 뛰어 들면 곧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꿈은 가장 본질적인 관문에 부딪쳐서 주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 자신 즉 나 자신이 무엇으로 그렇게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건물과 아름다운 제도가 만들어져도 그것을 운영하는 목회자 자신이 죽으면 또다시 가톨릭의 고배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목회자가 된다면 나에게 신앙과 기도와 그리고 성경에 대한 부단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나가서 그 모든 것 외에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나 자신이 경계해야 할 것은 목회 자체가 직업적 또는 기계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를 쓰는 사람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합리적인 자기 신뢰에서 오는 타락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모순스러운 위치임을 바로 안다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참 목사는 고요히 하나님 앞에서 그의 엄숙한 요청을 받을 때 실상은 그것을 받을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할 것입니다. 또 설령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받고 사람들 앞에 나서면 그 쪽에서부터 오는 반대적인 애원이 조수와 같이 밀려 옵니다. 그는 만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선포하면 저 양들에게는 잔인한 것 같고, 그렇다고 그들의 애원을 이루려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끼인 목자나 그것은 얼마나 모순적인 것이며 순간도 안심할 수 없는 위험한 위치일 것입니까. 아래서 사람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고, 위에서는 석비(石碑)의 계명을 명령하고 있는 그 사이에 끼인 모세, 그것은 바로 목자의 딱한 위치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목자에게 자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칼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 탓에 이같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옳는 고백입니다. 정말 내가 설교할 수 있다거나 목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나를 기계로 만드는 마약일 것입니다. 언제나 나에게서 절망하고 초조한 중에 떨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요청이 다시 나를 밀 때 비로소 새 용기로 그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B형 나에게는 아직도 교회 도제 문제, 후계자 양성, 헌금, 구제 문제, 찬양대 등 여러 문제가 생각됩니다만 지금은 그만두렵니다.

붓을 놓으려는 이 마당에 참 목자를 기다리는 굶주린 양들의 신음 소리가 내 마음을 찌릅니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저들의 애원에 응할 수 있는 진실한 목자가 되게 하옵소서.

(『야성』 1952.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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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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