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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목회
—그룹 운동의 방향

이 글은 서울 한 교회를 구경한 O 교수의 소개("내가 그리는 교회생활", 『야성』 6집)를 읽고 감격한 한 학도의 편지에 대한 그 교회 한 장로의 회답이다.

박군! O 교수의 소개만으로 그처럼 우리 교회를 흠모한다고 하니 기쁘기는 하나 오히려 표면적인 인상에만 사로잡힐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 군의 요청대로 우리 교회의 역사만을 말하기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서 군의 그룹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그룹이 그처럼 우정으로 신앙적인 결속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알고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룹이란 정과 이념의 일치에서 출발되어야지 어떤 일을 위해서 억지로 모아 보아도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룹의 생명은 언제나 그 안에서 그리스도(진리)가 이기는 모둠이어야 합니다. 그룹의 독소는 에고이즘과 그에 따르는 히어로이즘입니다. 이 점만 넘어서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들은 완전히 희생할 각오만 서면 반드시 큰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 완성을 위하여, 무엇보다 성경 연구와 기도로써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일이란 속에서부터 '다이나마이트'처럼 터져 나와야지 밖에서 "룰"부터 짜서는 허위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내적 충실 없이 무슨 기구나 만드는 것이 기독교 운동인 줄 알아서 모의 작당만을 일삼는 무리는 사실상 진리의 원수들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연히 연결된 동지입니다. 대학 시절에 별다른 목적도 없이 단지 신앙적 갈구에서 자주 대학 정원 또는 연구실에서 모이던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한 후도 어쩐지 잊을 수 없어서 가끔 모였어도 주로 기도하는 일에만 힘썼을 따름 아무 계획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를 이루기로 결단한 것은 본래 우리의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 각자의 꿈과 야심을 버리는 것이며, 나가서는 가정적인 향락이나 개인적인 세계까지 단념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때 그 결심에 이를 때에는 수도사적인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의 그룹 운동은 교회 운동이어야 한다는 확신은 지금은 더욱 분명합니다. 참 의미에서 우리는 이 저주받은 땅을 구출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지 이 땅의 썩어진 역사를 연장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구속운동이란 교회를 제외하고 따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있다면 다 간접적인 교회운동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여서 이루는 것입니다. 지체란 곧 그리스도의 신도들이니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사는 장소, 즉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들어서 그의 마음(윤리)을 그대로 이루고 사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의 뜻의 대강령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형제를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니, 교회는 곧 사랑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센티한 종교병 치료실은 아닙니다. 신도의 오락장도, 목사구호소도 물론 아닙니다.

나는 교회를 한 방주(배)라고도 생각합니다. 이 죄로 찬 홍수에 휩쓸려가면서도 아무 발 디딜 자리도 힘도 갖지 못한 저 무리들을 건져 낼 것은 교회뿐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끝없는 심연 속에서 그대로 절망하여 죽어 가는 저 무리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상징, 하늘나라의 질서가 지배하는 하늘나라의 지점 같은 방주입니다. 우리는 하루속히 단 몇 명이라도 모여서 이 방주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교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사실 극도로 우리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었습니다. 밖으로는 공산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란이 자유 세계의 힘을 총동원하여서도 해결할 길이 없어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혔었고, 안으로는 정계의 부패, 경제의 파탄, 그리고 질서를 잃은 사회에는 윤락의 남녀와 유랑 고아가 범람하고,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는 특권층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아니 그보다도 찰라적 육감적인 환락주의… 그러나 이 절망에 빠진 민족을 구해야 교회는 교권 싸움과 목사들의 거짓으로 황폐하여 민중의 조소의 대상이 되고 똑똑하다는 청년들은 교회에 실망하여 고립주의, 또는 냉소주의의 흐르지 않으면 문화운동이니 사회운동 해서 제 잘난 멋에 쓰러져 가는 유행병에 희롱을 받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남을 구하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이 그 사태에 휘몰려 갈 것 같았습니다. 우선 우리가 탈 방주, 그리고 우리와 인연된 이들을 건질 방주를 만들자! 그리고 남은 무리들에게도 이것을 권해서 각기 발 디딜 자리부터 만들고 그리고 한 사람씩이라도 끌어올리고 절망한 저 무리들에게 살 수 있는 산 모델로 보여야겠다! 이것이 그 교회의 발촉이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교회는 남을 위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살고 싶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여 구한다는 일과 유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산다는 것은 곧 수난에 참예한다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루어야 했던 교회는 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설교를 하게 마련된 시간에 교인들은 설교 값이나 들고 죽은 부모의 산소를 찾아보는 기분으로 한 번씩 참예하면 다인 줄 아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구속받은 무리들이 결속하여 거기서 살아가는 자리여야 하며, 따라서 거기서 사는 사람은 그저 피동적으로 남을 의뢰하고 출입하고만 있을 수 없었고, 각자가 그리스도의 증인 된 자각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말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사는 시대였습니다. 귀만으로는 신용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는 실증주의적 시대였습니다. 우선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산 증거를 보이기 전에는 아무런 제스츄어에도 민중은 따르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남을 가르친다거나 입으로의 설교보다 먼저 자체가 그래도 산다는 일에 충실하자 하는 것이 우리의 결심이었습니다.

이런 평신도들의 목회를 위해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는 각자가 밥벌이가 되는 기술을 배운다는 일, 그리고 철저하게 말씀을 연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대로가 우리의 선구자였습니다. 한 손에 장막 짓는 도구를 들고 다른 한 손에 복음을 들고 나가는 그에게는 산다는 일과 복음을 전한다는 일이 따로 있지 않고 그 상태가 삶이요 전도였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일과 밥벌이와는 구분할 일, 이것은 평신도 목회에 중요한 조건입니다.

군의 그룹 중에는 세 명이나 의학생이라니 다행입니다. 문과를 하는 친구들도 학적으로 사회가 인정할 정도의 본격적인 수준에 올라서 가르치고 또는 쓰는, 기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주력하십시오, 능률적이기 위해서는 각기 앞으로의 목회를 위해서는 후계자를 기르는 기관을 위해서 제 몫을 분담해서 집중적인 연구에 치중하여 최소한 거짓 없는 직업인이며 거짓 없는 목회자로서의 실력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준비에 애쓰는 한편 우리의 손으로 일터를 장만해야 했습니다. 정신적인 준비가 갖추어진 다음에는 땅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우리같은 가난한 무리들에게 그럴 힘이 있어야지요. 있는 것과 재주를 다 모아도 서울 장안에 집한 채 장만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숨은 종들의 피땀을 모은 정성을 합해서 겨우 오백 평쯤 되는 터를 산 것입니다. 토목기사인 K 장로의 지휘로 우리는 흙을 만지면서 겨우 교실 셋을 짓고, 있는 집을 수리해서 병원으로 만들고, 그리고 판자와 천막으로 백 명쯤 앉을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거기서 첫 예배를 드릴 때, 아! 그때의 감격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배를 졸라매며 이해 못하는 처자와 늙은 부모를 달래가면서 눈물을 머금었는지요, 그러나 거기에 오히려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주먹으로 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세워가는 기쁨이란 비록 초라한 널집이라도 가만히 앉아서 외국인들의 손만 쳐다보는 달러 교회주의자로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가 오늘 같이 웅대해진 것은 우리의 힘은 아닙니다. 전혀 예상도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O 장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장로는 무역상으로 악전 고투하여 모은 재산을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다 바치고, 우리와 일생을 함께하려고 그 식구들은 이 울타리에 두고 여전히 활동하시어서 지금도 우리의 경제적인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군들이여! 절대로 외부적 조건은 염려말고 오직 믿음으로 매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다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았습니다. 우선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평신도의 교회"라니, 누구보다 예민한 것은 목사님들의 눈입니다. 오해 또는 무조건 새 것을 반대하는 보수적인 이들의 공격은 그런대로 때를 기다려도 됐으나, 번연이 우리의 의도를 알면서도 파벌적인 질투심으로 움직이는 무리들의 파렴치한 방해란 격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기성 교회를 헐거나 방해할 마음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인데, 만약에 본의 아닌 잘못이 있었다면 후진(後進)의 전도(前途)와 그보다도 복음의 승리를 위하여 직접 타일러줌이 옳을 것이거늘, 오히려 갖은 비겁한 수단을 다하여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인격을 중상하기에 겨를이 없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길러주시고 협력하여 주신 이들 중에는 목사님도 물론 많습니다. 하여간에 우리에게 박해가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기보다 이런 길을 택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헌신한다는 것은 곧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외적인 난관보다도 참 문제는 오히려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한 대로 교회란 그대로가 삶의 장소인 한 그 안에는 정말 산상 보훈의 그대로 그 질서요 윤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못된 근성은 자꾸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egocentic(자아중심적)한 것인데 그것은 명예욕, 소유욕, 지배욕, 주관적 고집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것에 접할 때처럼 절망되는 때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개는 그 가정과 연결되어 가족들 사이의 충돌, 아이들의 싸움 문제, 아! 지금도 생각하면 가정이란 저주스럽도록 거친 돌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주동 멤버는 독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바로 해결하고 그 위에 한 질서를 세울 수 있어야 비로소 보편성이 있으며, 이것을 이으려는 수고가 그대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로 암운이 덮혔다가도 우리는 곧 뉘우치고 울면서 고난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박군! 군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수난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피상적인 꿈쯤은 누구나 다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운동은 사실 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룹 자체도 그것은 한 방법이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룹은 한 향락의 방편일 수도 있습니다. 그 따위 그룹운동쯤이야 장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그룹이란 그 목적은 진리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제단 앞에 바칠 용의가 있어야 하며 또 진리에 거리끼면 언제나 부수어버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 교회도 만일 그 생명이 그 외부적 구조에만 있다면 누가 그런 것을 못하며, 그것이 실상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여러 인연되어 모인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을 위해 모인 것이기 때문에 혈연관계로나 이해관계로는 혼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정말 "누가 내 형제리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질서를 이루는 일에 결사적인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완수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을 위에서부터의 요청이니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혈연 관계라면 그것까지도 사정없이 끊을 만한 용의가 있어야 비로소 참 성도의 사귐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다 이루었다' 하고 최후의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와 인연된 사람들과의 사랑을 영원한 데로 옮기게 되는 그 순간 외에 또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 날까지의 우리의 싸움이며 또 앞으로의 싸움의 과제인 것입니다.

박군! 우리는 비상한 때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애매한 것은 용인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앞에는 Entwede-Oder(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ego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살리든 가, 그리스도를 죽이고 에고가 살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상전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용사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정말 결사적인 무리는 왜 이렇게도 볼 수 없는 것입니까. 군이여! 그리고 그 그룹들이여 이제 강철같이 뭉치십시오. 그리고 전선의 출동명령을 기다리는 용사의 마음으로 준비 태세를 갖추십시오. 그 앞에 영원한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야성』 1953. 1)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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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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