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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1. 선교의 개념

신약성서에서 선교라는 개념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역사적인 여건에 의해서 그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구원의 사건을 전한다는 사실에만 열중했었고 또 그것이 너무나 자명적인 행위였기에 그러한 개념을 설정하거나 규정할 필요도, 여지도 없었다. 이 사실은 신약에 "미션"이라는 말이나 개념이 없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신약에서 선교의 의미는 apostellein(보낸다)라는 말에서 만들어진 apostole(사도)직과 결부되어 발전했다. 사도라면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인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실의 목격자, 또는 증인을 뜻했기 때문에 이 예수를 통해 일어난 일방적인 구원의 사건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낸다'는 것은 반드시 사도직과 직결시킨 것은 아니다. 가령 마태복음 10장에서 보는 대로 사도 아닌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씌어졌다. "아포스텔레인"이라는 말보다 성격적인 것은 "poreumevol kerussete(going proclaim) 가서 전파하라"라는 말이다(마 10:7; 막 16:15).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라.' 이 말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1) '가서'— 즉 사람을 찾아 가는 것이다. 찾아 가는 대상은 무엇인가 새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것을 의식하거나 안하거나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전제한다. (2)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하늘나라 즉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디로 찾아 가라거나 어떤 행위를 위한 준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래를 말한다. (3) '전파하라'—그 사실을 선포 또는 선언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케리그마다. 이상의 분석은 신약의 선교 개념과 그 특성을 단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은 16세기 예수회(Jesuit)와 칼멜파에서 시작된 라틴어 "missio"에서 시작된 것이다.

2. 신신앙(神信仰)과 선교의 문제

초대 기독교의 선교는 처음부터 중대한 문제에 부딪쳤다. 그것은 구약과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선교의 사상이나 행위는 어느 민족이나 지역에 국한된 신신앙에서는 발생될 수 없고 오직 우주적인 신관에서만 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일찍부터 이러한 신관이 있었다. 저들은 다른 민족의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야웨(yaweh)는 모든 신을 종당에는 굴복시키는 우주적인 신으로 믿었는데, 특히 "야위스트"들과 예언자들의 신앙이 그러했다. 저들은 다른 민족도 궁극적으로는 야훼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이 점은 벌써 바벨탑 이야기, 노아 홍수, 아브라함에게 하는 약속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역사의 종말기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뒤에 전 인류에게 미칠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 이후에는 이러한 우주적인 신신앙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구약이나 후기 유대교에서도 선교행위란 성립되지 않았다. 저들은 다른 민족이나 문화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과시는 했으나 "미션"은 하지 못했다. 왜? 그것은 저들의 선민사상 때문이었다. 이 선민 사상은 저들의 율법과 결부되어 배타주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션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이 유산은 선교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즉 선민이 아닌 이방인에게 어떻게 선교할 수 있으며, 저들과의 접촉을 불가능하게 하는 율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 사상과 우주적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교차된 데서 온 문제다.

그러면 이 문제가 어떻게, 무엇으로 타개되었는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초대교회의 선교에 대한 정황을 살펴 보기로 하자. 선교에 대한 초대교회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팔레스틴 교회와 이방교회(헬레니스트적 교회)의 태도가 그것이다.

1) 팔레스틴교회

마태복음 10장 5-6절과 10장 23절 또는 15장 24절에 의하면 이방선교는 물론 사마리아마저도 선교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오직 이스라엘에 국한했다. 여기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일부를 말함이 아니고(Liechtenhan에 反하여)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말한다. 그것은 사마리아 및 이방인을 대조시킨 데서 볼 수 있다. 다가올 종말 앞에 이스라엘이 어서 돌아올 것을 바라는 제한된 입장이다. 우선 유대인이라는 사상은 마태복음에 보도된 딸을 구해 달라는 이방 여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대한 해석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식(이스라엘)의 음식을 개(이방)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저들은 이방인만이 아니라 디라스포라 유대인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마태복음 10장 23절에서 '마을에서 마을로'라는 지리적으로 제한한 데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제한은 당시의 유대교의 이스라엘이라는 한계는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성전을 중심하고 그 영향이 미치는(세금 등) 지리적인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입장을 누가 취했는가? 이것은 팔레스틴, 즉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이며 특히 '주의 형제'야고보가 그 중심 인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증거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이며 바울의 말대로 예루살렘 교회 기둥의 한 사람인 야고보가 얼마나 유대교적 보수주의자였나(행 11:15; 갈 2장 참조) 하는 것을 보면 된다. 저들은 이방인을 향한 선교에 반대한 것은 아니고 할례받는 일과 우상제물 먹는 것을 금할 것을 고집했다. 이것은 유대인의 우선권을 고집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먼저 유대인이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고집은 저들의 종말관에서 온 것이다. 저들도 복음의 우주성을(마태 8:11이하에 이미 나타나 있다)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1) 시간적으로 먼저 이스라엘이며, (2) 종말 후기에야 비로소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유대 종말관에 걸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저들은 아직도 종말은 순수 미래적인 것으로만 보았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저들은 아직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종말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계약사상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다.

2) 헬레니스트적 교회

이에 대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계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소위 스테반을 포함한 일곱 집사들은 바로 이 계열에 속한 자들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첫 박해는(스테반의 죽음)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고 바로 이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그 증거로는 저들만이 추방되고 야고보를 위시한 많은 그리스도 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건재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저들이 유대인의 우선권을 무시했기(반율법적) 때문이다. 저들은 과감히 이방인에게 전도했다. 그 그룹의 한 사람인 빌립은 사마리아 가사 지방, 가이샤라 지방을 포함한 서팔레스틴에서 활동했으며(행 8:5 이하; 26 이하; 21, 8 이하 참조)이 그룹은 다메섹(Damaoscus)에 교회를 세우고 베니케, 구브로, 안디옥에까지 선교했다(행 11:19 이하). 이들을 통해서 알렉산드리아 사람 아폴로, 구브로의 바나바 그리고 바울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저들은 이방선교의 선봉이 된 것이다.

저들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사도행전 6장 1-6절, 8-15절, 7장 54-82절, 8장 4-13절, 26-39절, 11장 19-30절, 12장 25절, 13-14장, 15장 1-33절, 마가복음 16장 15-18절,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마가복음 13장(특히 10절)과 성전에 대한 말씀(막 14:58; 요 4:1 이하; 행 6:13-14) 등에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반영된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종말은 바로 약속의 청취다. 그렇기 때문에 (1) 먼저 이스라엘에 이 구원이 왔다. (2) 그러나 동시에 이방인에게 구원이 뻗치었다. (3) 따라서 율법과 성전마져도 그 의미가 끝났으며, (4) 혈연적 이스라엘은 지양 되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그리스도인(행 11:26에게 처음 이러한 이름이 등장한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선교는 종말적인 의식과 더불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라는 사상은 종말사상과 불가결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건이 종말적인 사건이라는 사상이 확고해짐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교에 대한 폐쇄적인 세력은 후퇴되고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점차로 '할례'를 폐기하고 그리스도인 되는데 '세례'를 조건으로 한 것은 바로 낡은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계약관계의 때라는 종말의식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3. 선교 내용의 핵심

선교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사건이 종말적인 사건이라는 신앙과 직결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저들의 선교의 내용이다. 초대교회의 선교의 내용의 전행적인 것은 사도행전 8장 12절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교의 내용이다. 그러면 이것은 두 가지 구별된 내용을 권한다고 번역된 '유앙겔리제스타이'라는 희랍어 동사의 성격이다. 이 동사는 목적격과 동사가 함께 포함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이름이 함께 기쁜 소식으로 새로운 하나의 사실임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고 단순히 예수를 "유앙겔리제스타이"했다고도 한다(8: 35; 11:20-21). 즉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예수를 통해 일어난 사건은 유리된 사건이 아니라 둘 다 함께 종말적인 구원의 사건임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의 선교의 내용은 그리스도론과 직결된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누구든지 저(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표현은 선교는 곧 그리스도를 권하는 것처럼 들리나, 엄밀한 뜻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믿으라는 것이 처음 선교의 내용이다. 그러한 내용이 '예수를 믿으라'고 된 것은 그 본래 뜻이 이방 선교의 편의상 단축된 것이며, 또 그리스도론의 논쟁에 의해서 구원의 사실이 그리스도론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저들은 예수 자신을 권하는 데 처음 목적이 있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일어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 핵심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저들은 예수의 사건을 통해서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인간에게 어떠한 새 가능이 주어졌는지를 선포했다. 예수의 사건은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우주적인 힘들은 종말을 고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모든 세상의 힘들의 지배에서 풀어놓아 줌으로써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하나님의 나라) 아래 있을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전형적인 것은 사도행전 14장 8절 이하에 있다.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능력에 놀라서 저들을 신으로 (바울을 말 잘하는 헤르메스, 바나바를 제우스) 섬기려고 할 때 저들은 분개해서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와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지나간 세대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 사람을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선한심으로 자신을 알려 주셨다. 즉 전에는 세상의 제신들에게 모든 민족이 제멋대로 굴복하게 내버려 두셨으나 지금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낸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예수의 역할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8-19)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저들은 그리스도가 누구냐를 권하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하느냐를 권하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유대인에게 전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종말적인 사건이라는 점만 강조한 데 대해서 이방선교에는 반드시 세계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오직 한 분인 하나님을 전하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다(불트만의 『신약신학』 참조). 이러한 선교의 내용은 바울에게 와서 구체화되고 있다.

4. 바울의 선교 내용

바울은 그의 선교자로서의 임무를 "나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나라 사람들로 믿고 복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롬 1:5)라고 한다. 이 자각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낡은 것의 종말을 가져 오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다고 믿음으로 온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설명했다(롬 5:12 이하). 이것은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낡은 창조가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의 세계와의 화해 사건으로 선포한다(고후 5:19, 21). 이것은 곧 종말적 사건이다. 그가 율법의 문제를 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종말 의식에서 온 것이다.

율법은 낡은 시대의 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이다. 이 계약으로서의 율법에서 자유하지 않으면 선교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 율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해명하는 것은 선교와 직결된 문제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자유를 선언한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주어진 것으로서(갈 5:1) 율법까지 포함한 세계의 모든 힘들에서의 자유, 마침내 죄와 죽음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율법은 노예에 해당되는 것임에 대해서 자유는 아들의 특권이다(갈 4:21-31). 그리스도의 사건은 바로 이 율법의 종말을 의미한다(롬 10:4). 따라서 자유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주어진 것으로 그의 안에서만 가능한 자유(갈 2:5).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그 거짓 형제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 몰려들어 온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율법에서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바울은 종말론을 약속과 결부시킨다. 약속은 율법에 앞선다. 그는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에 주어진 약속의 성취가 종말이라고 봄으로써 율법을 이 약속과 성취에 예속시켜 버리는 것이다(몽학선생). 따라서 그는 율법의 행위 대신에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내세우며, 이 믿음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결부시킴으로써 아브라함의 미래적인 약속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현실화되었다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울을 선택의 사상을 변질시킨 거점이 있다. 바울은 선교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우선권(첫째가 이스라엘)을 전제한다. 그는 저들과 약속이 맺어진 것을 인정하기(롬 9:4 이하) 때문에 그 약속의 성취로서의 복음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우선권은 그 약속을 믿을 때만 이유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주장하려고 함으로써(데전 2:15-16)이 우선권을 거부했다. 이 거부는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이 먼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롬 10:16 이하; 11:7 이하).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폐기된 것인가? 아니 그는 이방인의 신앙은 이스라엘이 되돌아 올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롬 11:25 이하). 이것으로써 바울은 선택과 구속사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변질시킨 것이다. 이제는 혈연적 이스라엘은 끝나고 믿음에 의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되었다(고전 11:25; 고후 3:6 이하 참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또는 '교회'이며, 그것은 종말적인 하나님의 새 창조를 믿음으로써 그 대열에 참여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5. 결론―선교의 실제

이상의 성서적인 근거에서 선교의 형태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고찰해 보자.

(1) 선교는 세계와 인간에게 미친 새로운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미션"이란 개념에서 반영된, '세계를 기독교로 점령한다'거나 사람들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성서의 선교의 내용은 정죄하거나 논쟁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적극적인 소식을 알려주므로 새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의 길을 열어 주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성격을 순수히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미션"운동은 '기독교 절대주의'를 내걸고 그외의 모든 것을 규탄만함으로 배타적이고 폐쇄적이 되므로 또다시 유대주의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2) 선교의 내용은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계를 어떻게 변동시켰는가를 알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론으로 변질된 것은 논쟁적인 데서 온 소극성이다. 따라서 선교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누구냐(was)를 전하므로 형이상학적인 그리스고 사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냐가 그 내용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구원이 우리에게 어떻게(wie) 일어났느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단축된 말을 다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의 사실을 믿으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론에서 구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이 하나의 마술적 종교체험으로 전락된 데서 풀어 놓아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3) 성서의 선교의 내용인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종말론과 결부되어 있다. 선교는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도 윤리의 원리를 주는 것도 그 목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기존적인 것을 보다 낫게 하거나 또는 보다 낫게 될 길을 알려 주는 것이 선교의 임무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기존적인 것에 매어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것에서 해방된 것을 믿게 함으로써 오고 있는 새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일이다. 최근에 사회참여라는 말이 높아지고 그것이 곧 선교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 주장이 선교의 대상인 인간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 여건에 매여 있는 상황존재이기 때문에 사회 여건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라면 옳다. 그러나 사회참여가 곧 선교라는 것은 적어도 성서의 선교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선교는 확실히 여기, 지금 있는 구체적인 존재하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인간을 '여기, 지금'(상황)의 노예 상태에서 그 상황의 주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나 그것에 예속되어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4) 끝으로 선교를 교회주의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이 점은 (1)과 상통).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선교와 결부됨으로써 교회의 타락과 더불어 선교도 그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성서의 선교는 '가서 전파하라'이다. '가서 끌어 들이라가 아니라 가서 전파하라'이다. 선교 행위는 노아 방주의 홍수 이전의 행위가 아니라 홍수 이후다. 방주에 들어오라가 아니라 자신이 방주에서 나가는 행위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선교로 알던 데서 교회 밖의 세계에 구원이 임하고 있음을 선포하기 위한 무리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5) 이상의 결론을 종합한 결론으로서 선교는 언제나 희망과 직결되어야 한다. 예수의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었다. 그것은 오고 있는 희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 눌린 자, 수고하는 자, 병든 자 등을 축복하고 저들을 위해 왔다고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드(C.H Dodd)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예수의 선교를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오라'고 한 잔치의 초대의 소리와 같다고 이해한 것은 옳다.

(『군종 해군』, 196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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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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