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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교
막 1:40-45; 16:1-7; 히 13:10-14을 중심으로
1

하느님의 선교, 이것은 오늘날 세계 교회와 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주된 노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할 때를 맞이했다.

한국에서는 최근 동남아 사태를 계기로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하여 국가 안보와 국민총화를 역설해 오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당한 지난 날의 처절한 체험 때문에 오늘의 반공이야 말로 바로 그들의 '실존의 문제'가 되었으며, 따라서 반공의식은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공산주의와의 대결 전선에 굳게 서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의 대열에 나서야 한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민주회복을 부르짖고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옹호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싸워 온 모든 행위를 멈추어야 하는가? 그것이 정말 이적행위이며 반안보적 행동인가?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한 것인가?

이러한 회의가 감도는 오늘, 우리는 성서의 기본적 입장을 다시 물음으로써 하느님의 선교의 뜻을 찾고, 나아가 우리의 입장을 밝혀보는 것은 의의 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산당과 대결해야 할 몇 가지 이유를 들어야 하겠다. 첫째, 역사적으로 보아 공산주의를 낳게 한 책임은 그리스도교에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기존 세력에 안주하여 자기를 상실하고 자신의 중심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을 때, 공산주의란 것이 생겨서 그것을 도둑질해 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그가 잃어버린 자기의 사명을 도로 찾기 위하여 공산당과 대결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둘째, 공산주의는 오늘에 와서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저들은 신 대신 역사를, 하느님 나라 대신 공산세계를, 성서 대신 맑시즘의 저서를 내세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 눌린 사람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역으로 이용해서 계급투쟁의 도구로 삼았으며, 유신론 대신 무신론을 내세워 반신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하느님 신앙에 기초한 인권의 근거를 없애고, 따라서 사회정의를 말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를 제외한 물질 분배만을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고, 인간을 소외시켰다. 그리고 오직 공산정권이라는 체제와 그것을 조종하는 집권층만이 '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이 사이비 종교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

여기에 하느님 선교의 물음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이 물음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냐의 물음을 함축한다.

2

하느님의 선교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있어 온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다. 구약에서는 물론, 신약에서도 그렇다. 역사의 주인공은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중세에 있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교는 교리와 정권이 그 기능을 나눠 맡음으로써 그 영역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성속의 구별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두 나라설'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루터의 본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 결과 영적, 내적인 것은 교회의 소관으로, 정치와 경제 따위는 정권의 소관으로 돌려져서 그 둘 사이에는 불가침의 경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협력키로 한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그렇게 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권이 비대해지고 산업, 기술이 발달하자, 마침내 교회의 기능은 침해를 받아 점차 줄어들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교회는 모든 권리를 다 넘겨주게 되었고 끝내는 '예루살렘의 신성'만을 지키는 데도 허락을 받아야 할 형편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드디어 교회는 권력과 경제의 지상주의가 인간의 뇌리까지 점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까지도 그 구조 속에 예속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기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예배당, 예배, 의식 뿐,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신앙의 자유와 행위를 잃어버린 채 무신 세계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한편 세계는 '인간 소외'라는 기현상을 빚게 되었다. 이에 교회는 하느님의 축소를 목격했고, 그나마 고수하려다가 마지막에 하느님의 참된 특성마저 다 빼았긴 데 이르고 말았다. 하느님은 성전 안에서만, 예배 시간에만, 믿는 사람에게만 전능한 이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나? 그 까닭은 교회주의와 세계의 무신적 자율성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가 하실 일을 그만 뒀나?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복음화에만 있고, 인간화 또는 인간 회복은 일반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복음화'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이고 '인간화'는 어떤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를 잘못 보았거나 왜곡한 데서 오는 소치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선교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나는 이제 예수에게로 돌아가 하느님 선교의 의미를 밝혀 보기로 하겠다.

3

마가복음 1장 40절 이하를 보면, 예수는 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나서 말하기를, "가서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데 대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사람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일렀다. 이 말은 '전도'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전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는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병을 낫게 해 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서 저의 편이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회의 일원을 만드는 것이 참 복음인가?

예수 당시, 나병환자들의 대우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에서도, 동리에서도 추방됐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은 '죄인'으로 지목되어서 인간으로 취급받기조차 못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나병 환자에게 예수는 아무런 전도도 하지 않았고, 피안의 위로도 주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잃었던 권리, 식구들과 종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생존권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제사장에게 가서 나은 몸을 보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당시 제사장의 확인이 있어야 그의 나음이 모두에게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에게 정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경우 예수는 기존질서를 이용한다. 무조건 그것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시사를 받는다. 우리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잃어버린 저들을 '사람'으로서 대우받게 하기 위하여, 이들 역시 하느님의 아들, 딸로 살 권리를 가지게 하기 위하여, 법과 제도를 통하여 그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깨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서에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많이 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에게도, 창녀에게도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하면 부자 청년과 같은 경우에는 "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도 한다. 왜 예수는 그런 상반적인 언명(言命)을 할까? 그것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해방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에게 해방일 경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모든 소유로부터 떠난 것이 해방이 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 해방의 역할이 기존 질서와 체제에 정면 충돌될 경우가 있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일 때문에 안식일법 위반이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인간회복과 해방을 위해서는 어떤 기존 질서와 법이라도 과감히 파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 인간 회복만을 위한 게 하느님의 선교인가?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반체제적이고, 반권력적인가?

4

예수는 기존 질서를 짓밟고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기득권자의 손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됐다. 불법으로, 복수심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가 부활했다. 가장 처음된 기록인 마가복음에는 아주 중요한 말이 있다. 죽은 예수를 보려고 찾아간 여인들은 죽은 예수도, 그렇다고 산 예수도 보지 못했지만 그대신 한 청년의 전갈을 들었다. "그대들도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뵈올 것이라고 전하라."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왜? 그가 억울하게 죽은 그 예루살렘에서가 아니고 왜 하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만일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만일 그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아마도 그곳은 복수의 장이 될 수 있었으리라. 기득권자를 뒤엎고 패배자가 그 자리를 쟁취하려는 혁명의 장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예수는 그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다.

갈릴리! 이곳은 예수의 활동무대였고, 제자들을 처음 만난 곳이다. 그는 여기서 흩어진 힘을 재정비해서 예루살렘으로 추격하려 함이었나? 주후 70년쯤 씌어진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우리가 놀란 것은 부활의 승리에 취한 제자들이 복수를 꾀했다거나, 예루살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는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갈릴리! 이곳은 버려진 땅이다. 이 땅에서 바로 새로운 세계가 선교된 것이다. 이제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렇다고 갈릴리를 중심으로 봉기한 반예루살렘 반로마 세력과 야합하자는 것도 아니다. 갈릴리는 유대 배타주의의 벽을 뚫고 다음의 새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거점이었다. 그런 뜻에서 이곳은 제삼의 거점인 것이다. 이곳은 하느님의 선교의 새로운 발판이다. 갈릴리, 이곳은 이 역사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행위의 새 거점이다.

하느님의 선교는 좌와 우, 상과 하, 상전과 종의 양극적 현실에서 어느 하나에로 넘어가거나 어느 하나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제3의 세계로 계속 진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의 세력도, 유대주의도 다 깨뜨리고 이 세계에 제삼의 새 기원을 마련하자는 그리스도교의 자세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의 선교는 이른바 단순한 사회개혁이나 혁명과는 다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의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정신에서 보면, 어느 하나를 궁극적인 것으로 선택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선교는 자본주의를 이루어 복사사회를 만들다든가, 공산세계의 이념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든가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공산주의의 죄악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의 결함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교의 목표일 수는 없다. 한님은 이 양극화의 현실에서 제삼의 자리, 곧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는 데 뇌동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단순한 화해 같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칫 그리스도인들은 양쪽에서 용공주의니 또는 자본주의의의 앞잡이니 하는 비난을 받게 된다.

만일 예수가 유대 민족주의나 친로마주의 어느 한 편에 섰더라면 그렇게 미묘한 고난은 당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유대 민족주의나 세계주의 어느 한 편에 섰더라면, 그 같은 미묘한 최후를 당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는 언제나 갈릴리, 곧 제3의 자리의 창조 속에 있다. 여기에 수난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미래지향적일 뿐, 현실에서는 몽상적이어야 할까?

5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성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히 13:12-13).

이것은 주후 100년경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결단이다. 유대 속죄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흠없는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바치고, 그 가죽과 살과 똥을 성문 밖에서 불태워버리는 일이다. 생각하면 잔인한 짓이다. 죄는 인간이 범했는데 애매한 짐승을 그처럼 잡아 죽인 것이다.

이처럼 예수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는 마치 기존 사회의 오물이나 병균인 듯이, 희생물로 바쳐진 그 짐승의 가죽이나 똥처럼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처형된 것이다.

또 하나의 속죄법은, 짐승에게 인간이 범한 죄의 누명을 씌워, 무인의 광야로 추방하는 일이다. 예수 또한 이런 짐승처럼 산 채로 성문 밖에 추방되어, 거기에서 처형된 것이다. 마치 죄 없는 죄를 지고 억울하게 광야로 쫓겨나서 끝없이 헤매다가 죽어간 짐승들의 원한을 한 몸에 지니듯이.

여기에 착안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고 한다. 성문 밖에, 기득권 밖에! 거기에 누가 있는 것인가? 기존권에서 버림받고 쫓겨난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활동의 장을 본다. 하느님의 선교 현장은 기득권의 세계가 아니라 성문 밖이다. 세상에서 쓸모없는 놈이라고 내쫓긴 이들이 있는 곳, 잘못이 없으면서도 기득권의 존속 때문에 밀려난 무리들이 있는 곳, 바로 여기가 하느님의 선교의 현장이다. 이곳이야말로 바로 과거의 그리스도가 눈을 감았던 자리이다. 어제의 그리스도교는 모두 성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확장하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0년 전 히브리서 기자는 성문 밖으로를, 즉 Exodus를 명한다. 내 교회, 내 교파, 이른바 방주로서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아귀다툼을 일삼던 교회를 향하여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성문 밖으로 쫓겨난 이에게로! 여기가 하느님 선교의 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자신의 할 일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입이 되고 손발이 되어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되찾아 주고 지켜 주려는 노력이다.

6

우리는 공산세계에 성문 밖으로 쫓겨나 짐승 취급을 받는 무리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저들이 내세운 것을 보면 프롤레타리아 해방, 약소 민족의 해방이다. 이것은 성문 밖으로 쫓겨난 이들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성문 밖으로 쫓겨난 무리들의 참다운 친구는 예수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랬고 한국 최초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었다. 그런데 한국 그리스도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성 안에서 중산층의 집단이 되어, 하느님의 선교의 장을 멀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이제야 '역사'라는 하느님의 채찍에 잠을 깨어 성문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성문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를 소란케 하자는 것이나 이적행위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갈릴리로, 성문 밖으로 쫓겨난 현재의 그리스도에게로, 수치를 걸머쥐고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는 하느님의 명령이며 여기 바로 하느님의 선교의 장이 있다.

그럼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성 안에 있는가? 성 밖에 있는가? 성 안에 있다면, 성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제 구실을 하려면 모두 성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눌린 자, 버림 받은 자가 있다. 어찌 이것이 교회의 일과 상치되는가?

(『현존』, 197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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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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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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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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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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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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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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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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