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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동체
엡 2:12-22을 중심으로
1. 소유와 무력

내 눈에 비친 서구의 그리스도교는 하품하는 늙은 부자와 같았다. 그들의 재산, 조직, 건물 등은 굉장하다. 부족한 게 없다. 그런데 왜 하품을 하고 있나? 할 일이 없어서인가? 아니! 저들은 무수한 문제점들을 눈 앞에 안고 있다. 저들도 스스로 무력해진 자신들을 비판하고 있으며, 그 지루함의 만성병에서 놓여나야 할 것을 알기에 애를 쓴다. 그러나 좀처럼 힘이 생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저들은 게으른가?

아니! 저들은 부지런히 분주하게 돌고 있다. 매 15분마다 교회의 종이 울리고, 매일 새벽마다 미사가 있으며,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만들어 낸다. 그래도 힘이 없다. 왜 그럴까?

나는 단적으로 저들의 무력은 저들의 많은 소유 때문이라 했다.

저들은 천여 년의 유산을 계승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나 제도상의 지위로나 튼튼하다. 그러나 저들에게 민중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없다. 왜? 바로 부자가 됐기에!

무엇인가 존재하려면 소유가 있게 마련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을 점유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공간의 점유란 '자리'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공간을 많이 점유하면 할수록 점유한 자에게는 지루함이 오고 남과의 관계에서 무력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왜? 그것은 그 공간, 그 '자리'가 그 '소유자'를 소유해 버리기 때문이다.

비끄러맨다는 것은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뜻도 되지만 그 소유물 자체가 소유자에게 그 보존과 또는 그것의 확대를 위해서만 움직이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확실한 소유, 자리를 차지한 자에게는 일정한 법칙, 일정한 리듬이 반복된다. 자연물처럼 한 자리에 고착되고 만다. 그래서 지루하며, 매너리즘에 갇혀 버린다. 그래서 하품을 한다.

사람은 늙어지면 그 활동이 점점 둔화되듯이 어떤 공동체도 나이가 먹으면 그 활력이 둔화된다. 둔화된다는 것은 활동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어쩌면 더 많은 활동을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활동은 지금까지의 활동에서 얻은 소유된 것의 주변인 일정한 영역을 맴도는 활동이기에 새 것이 나오지 않는다. 말뚝에 매인 늙은 소처럼!

혁명을 기치로 들어 일어난 것이 공산세계다. 그러나 공산혁명 후 불과 50년이 된 소련에는 이미 혁명의식 따위는 없다. 까닭은 이제는 부국이 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혁명아들이 반대자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손에 넣고,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경제적으로나 국제적 지위가 커짐으로써 더 이상 모험을 할 생각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에너지는 모두 이미 얻은 소유물을 수호 확장하는 데 다 바쳐야 한다. 그로부터 변질됐으며, 다른 공산 국가로부터 수정주의니 새로운 제국주의니 하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특히 중공의 비판이 그렇다. 그러나 중공도 머지 않아 그렇게 되리라! 이러한 만성병을 그리스도교가 일찍이 치루었다. 그러니 그렇게 늙은 채 주저 않을 수는 없다. 까닭은 그리스도교는 원래 소유를 바탕으로 한 유물사관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시간성과 공간성

무엇이든지 존재한다는 데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이다. 시간(역사)의 특성은 지향성이다. 계속 앞으로 나간다. 이에 대해 공간은 정착성이 그 특성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공간은 언제나 끌어 앉힌다. 시간은 계속 낡은 것(과거)에서 탈출하게 한다. 그러나 공간은 자리를 마련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정착하게 하므로 과거의 줄에 매인 채 그것을 조금씩 확대 연장하게 한다. 시간은 이동하게 한다. 따라서 그것은 개혁(Reform), 변혁(Transform)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따라서 공간은 정착, 안정 마침내 보수를 강요함으로 일정한 틀에 가둔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은 이 둘이 있어서 가능하다. 아무리 공간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구현하려면 시간의 힘을 빌려야 한다. 공간적인 것은 시간을 타고 이른바 발전 즉 자기확대를 한다. 이에 대해서 시간적인 것(가령 정신 따위 등에)도 그것이 구체화되려면 공간성 즉 자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긴장된 관계를 가진다.

우리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서구인들의 말을 듣는다. 그것은 시간을 공간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리(공간)가 마련되고 그것이 늘어난다. 그런데 시간을 공간적으로 환산할 때 시간은 공간에 의해서 그 지향성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쓴다. Killing Time이란 말이다. 이것은 바로 지루하다, 무의미하다, 또는 허무하게 지냈다는 뜻이다. 무엇이 시간을 잡아 먹었나? 그것은 공간이다. 하루 종일 활동하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와 생각하면 허무하다. 왜? 그 활동으로 먹을 것과 재산이 생겼는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떤 공간에 매여 꼭 같은 일을 반복하는 동안(이런 상태를 기계의 부분품처럼이라고 한다) 얻어진 집, 가구, 지위가 생겼다. 그것은 모두 공간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나로 하여금 계속 그것들을 위해 맴돌게 함으로써 마침내 내가 왜 사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렸다. 말하자면 시간의 지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언제인지도 모르게 분명한 목표를 향해 가던 도상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므로 시간도 없고 공간의 소유에 의해서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게 노쇠현상이며 무력의 이유다. 그래서 지루하다.

공동체가 왜 늙느냐? 결국 시간의 지향성이 공간성 즉 자기의 소유로 환산됨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3. 야웨 신과 바알 신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적 신이라고 한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를 어떤 공간에 정착하거나 공간을 점유한 어떤 것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지향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성서는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협이 된 가나안의 본토의 신(바알)은 공간적인 신이다. 그 신은 구체적으로 대지의 신으로 정착의 신이다. 그 신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자리를 풍요하게 하는 신, 말하자면 소유의 신이다. 이 신은 대지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건설이 있고 문화가 형성된다. 그런 뜻에서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같은 신은 점유(공간)한 것과 직결되었기에 그 공간이 없어짐과 동시에 소멸될 신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국권도 영토도 그리고 모든 소유 즉 존재의 공간을 일어버렸다. 만일 그들의 신이 점유한 즉 공간과 밀착된 신이었더라면 이로써 그 신도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공간(소유)을 잃어 버렸어도 그들의 신앙은 그대로 관철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이 더 분명해졌다는 것은 바로 미래지향성 즉 약속을 믿는 믿음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이같은 '시간'의 신앙은 가나안에 정착하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율법을 만들어 제도화함으로써 시간(역사)의 하나님을 공간에 붙들어 맴으로써 생동의 신앙을 잃고 보수의 악순환 속에 주저앉게 됐다. 공간이 시간을 잡아먹은 것이다. 소유(자리)가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다. 그래서 늙었다. 그래서 저들은 유대 땅에서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공간적 신앙에 의한 공동체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새로운 공동체로 탄생한 것이 그리스도 공동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공간적인 것, 즉 예루살렘 성전, 유대 전통, 그 율법, 유대 혈통 따위의 쇠사슬에서 탈출해서(종말을 찍고) 시간적인 것, 즉 미래를 향해 달리게 한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성립됐다. 그들은 성전을 버리고 민족이라는 소유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앞으로 달렸다. 이것은 시간의 승리이다.

이 공동체의 탄생의 날은 부활의 사건이 있는 날이며 또한 오순절(누가)이다. 이것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만 존재하는 육체를 이기는 날이요, 네 것이다, 내 것이다고 하는 민족의 한계를 나타내는 언어의 장벽을 헐어버린 날이다. 그 때의 유대인의 공동체와 이 새로운 공동체를 잘 대조시킨 것은 요한복음이다. 이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입니까? 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은 신과 공간을 밀착시킨 유대적 종교를 대변하는 것인데 "이 산도 산이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니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고 대답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은 공간에 매일 이가 아니라 '이 때' 즉 시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즉 이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기득권, 소유 위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시간, 즉 앞을 향하는 시간(약속)의 신의 신앙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 새 공동체는 어떤 자리, 네 것과 내 것, 이 땅과 저 땅, 지방, 민족의 한계를 지향해서 어떤 영토도 어떤 자리도 절대화하여 주저앉아 "여기가 좋습니다"고 하지 않고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서, 이른바 엑소더스를 계속하도록 태어났다. 그렇지 않을 때 이 공동체는 무력해졌다.

4. 새로운 공동체의 특성

이상과 같은 전제에서 에베소서를 보자.

에베소서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므로 '전에는', '지금은' 또는 '그때는'—'지금은'이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이전과 이후를 구분한다. "그때 여러분은 그리스도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와는 관련 없는 이방인이었다"(2:12). 그것은 "전에는(그때에는)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았다"(2:2) 또는 "전에는 모두 육적인 욕심을 따라 살았다"(2:3)를 뜻한다. 그리스도를 멀리 떠난 삶이란 바로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산 것"이며 그것은 바로 "육적인 욕심에 따라 산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살았다"(2:12)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이 세상의 풍조에, 육적인 욕심에 따라 산 삶인가?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산 삶이다. 그러면 그것은 공간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공간적 삶이란 바로 소유에서 보장을 찾고 소유된 것에 노예가 되어(육욕에 따라) 그것에 끌려서 맴도는 생활일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도"(2:3)가 유대인을 뜻하는 것이라면 비록 하나님을 전제로 했으나 실상은 성전과 조문화된 기존의(손에 잡힌) 율법을 독점하고 그것에서 삶의 보장을 찾은 유대교도 역시 주어진 기득권, 공간적인 점유권에 의존해서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유대교는 네 것, 내 것에 철저했기 때문에 전통과 혈연에 매인 공동체로서 주어진 것에 정착한 채 한 발자국도 밖을 향하지 못했던 것이며, 미래를 향하는 지향성은 상실하고 율법에 의한 기존 질서를 지키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알았기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약속을 말하나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결론에서 사실상 정착적이 되어버린 것이며 성전에만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교리로서 사실상 시간(역사)의 하나님을 공간에 매어버렸으며, 역사(시간)적 하나님의 뜻을 조문화된 율법으로 대신하므로 역시 무시간적공간적 제도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희망, 즉 미래지향성이 없어졌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비이스라엘 민족인 이방인의 삶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었다. 저들에게는 역사관이 없었다. 비록 시간이란 것이 있어도 공간을 중심하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며 궤도에 따라 돌 수 있는 영원한 반복의 의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삶에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있을 수 없고 기존적인 것의 보존과 확대라는 욕망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이 됐다. 그리스도는 공간적 장소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요, 이방인, 즉 네 것, 내 것, 네 전통, 내 전통이라는 담이 헐어지고 모든 공간적인 담이 무너지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됐다. 그 사이를 가로막은 조문으로 된, 즉 공간적으로 자리를 잡은 계명의 율법도,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운 것이 폐기된 것이다. 낡은 인간, 원수의 관계는 모두 공간이 쌓아 올린 담이요, 잔해다. 공간적으로 점유된 관계에서는 소유물의 공정한 분배 또는 보상을 떠나서 화해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원수된 사이가 한 몸을 이루어 새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저들은 새로운 한 방향에로 향한 지향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가게 된 것"이다. 성령이란 바로 공간적인 것의 상반개념이다. 성령은 때(시간)를 타고 오는 힘이면서 공간을 시간으로 바꾸는 힘이다. 이스라엘, 이방인, 외국인, 나그네, 할례당, 무할례당의 구별은 모두 공간적인 정착성에서 구분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가 이런 것들을 모조리 극복하여 한 가정처럼 됐다는 것은 공간적인 것이 때(시간)로 환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은 바로 소유에 의한 낡은 공동체를 극복하고 시간과 목적에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그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의 그 부르심에 따르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4:4-5)라고 했다.

새 공동체의 특징은 희망이다. 하나의 희망을 향해 뭉쳤다. 희망은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언제나 공간적(소유) 제약에서 탈출하는 동력이며 그러므로 계속 새로운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희망한다는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존재론적인 필연인가? 아니면 유토피아적 희망인가? 성서 전반이 그렇지만 에베소서에서는 희망과 약속을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이 짧은 편지의 초반까지 '희망'이란 말이 네 번이나 나오는 데 대해서 '약속된 성령', '약속된 그 분깃', '약속의 계약' 등 '약속'이란 말도 세 번이나 반복되는데, 모두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희망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약속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한 건물을 이룬다",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을 이룬다" 또는 "하나님의 집이 된다" 등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공동체의 지향하는 바다. '성전' '집'이라는 표현에서 공간적인 것을 생각해서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다. 그것은 바로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1:10) 현실이다.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이며 그것을 향해서 계속 공간(소유)적 구속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이다.

5. 오늘의 교회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러므로 새로운 민족 국가 또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구상하는 공동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로운 공동체는 공간 즉 소유에 의해서 존재하거나 그것에서 보장을 구하지 않는다. 아니 새로운 공동체는 시간 즉 역사적 지향성에서 존재한다. 그것을 약속, 희망 또는 믿음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교회는 정말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려는가? 그렇다면 소유에 보장을 찾아 자기 사수, 자기확장을 그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참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라면 오히려 공간적 기득권들의 담을 하나 하나 무너뜨리면서 "하나님이 만민의 아버지가 되고"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실 수 있는"(4:6) 하나의 세계를 위해서 전쟁과 쟁탈이 없는 세계 즉 한 몸, 한 영, 한 희망에로 인류를 결속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매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이 교회상은 어떤가? 왜 분파 싸움과 자기 확대에는 그토록 열심인데도 그토록 무력한가? 왜 정의를 위해 불의 앞에 예언자적 용단을 해야 할 때도 그토록 움츠러만 드는가? 까닭은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 밑에 실은 바알 신 즉 소유, 기득권, 자리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인의 부르는 소리는 그토록 사면에서 높이 들리는데도 자기 확대로서 교회 건물만 높아가고 헌금은 자치비로 전부 '탕진'하며 내 것, 네 것, 내 교파, 내 자리 등의 공간적인 욕심으로 시간을 잡아먹어 버리기 때문이다.

새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자기를 철저히 버림으로 공간적 패배를 시간적 희망으로 승리한 그리스도에게서 출발됐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낡은 것에서 탈출하여 미래를 지향하게 한 하나님의 궁극적 의지요 명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통해서 이 공간성에 노예가 되어 무력해진 교회, 그리고 세계를 역사적 궁극 목적을 향해서 한 몸이 되도록 하실 것을 믿고 앞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현존』, 197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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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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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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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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