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전달자와 해석자
1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예수의 가르침'이란 본래 어떤 것이었을까에 대해서 크게 관심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는 두 가지 전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가장 순수한 본래의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건 어느 때까지 유지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의 것은, 보통 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계까지 지속된다. 어떤 주장이 나오면, 자연 거기에 이론이 따르고 반론이 제기된다. 그러는 동안 본 주장은 이론화되어 본래의 그 모습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론화하기 이전의 순수한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는 '원점으로' 돌아가 본래의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둘째로, 사람에게는 언제나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욕구가 있어서 어떤 문제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려드는 버릇이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에게 알맞게, 자기 생활을 깔고서 풀이하려 한다. 심지어 설교자까지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은 데, '제 주제에 무슨 소리냐'는 핀잔이 예상되면 금방 그 말을 피하게 된다. 이러한 버릇이 성서해석에 작용해서, 단순하게 볼 수 있는 것도 괜히 비꼬아 보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 쪽에서도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 자신의 조건과 형편에 맞는 것만 골라 듣는다. 그래서 말씀에 변질이 일어난다.

이런 사정은 성서가 형성될 때 이미 있었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밝히려고 한다.

나의 체험이지만, 내가 처음 성서를 읽고서 느낀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아무래도 '살기 힘들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독일에 가서 10년 가까이 성서를 공부해보니, '예수는 점점 모르겠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귀국해서 이렇게 '속인'으로 살다 보니까, 성서를 보는 눈도 거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본래 신학이란 그런 경향에서 움직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신학자라면 고급 관리로서 풍요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데, 그런 생활 조건에서 형성된 신학은 아무래도 사변적이고 기교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성서에 대한 해석도 송곳같이 날카로운 것이 솜방망이 같은 무딘 것으로 바꿔지게 된다. 나 자신 이런 과정을 거쳤는데 근경에 와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자적인 생활에서는 자기 은폐가 가능하지만 어떤 면에서 수난자가 되니까, 성서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생활조건 특히 경제적 생활, 이를테면 집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생활은 성서의 배경과 다르기 때문에, 성서를 바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 참으로 덜 깼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생활조건이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과감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예수의 가르침의 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거기에 대한 몇 가지 대표적인 모습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2

예수는 우선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말은 그가 세상을 뜬 다음 최소한 40년 동안 구전(口傳)되어 왔다. 이를 구전시대라고 하는데, 직접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구전이란 설교자가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예수의 말을 전하는데, 그땐 청중들은 '예'든 '아니오'든 어떤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래서 구전이란 굉장히 힘을 갖는다. 설교란 원래 직접 말로 하는 것이지 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에밀 브룬너는 설교집을 하나 써내고는, '이걸 내는 게 아닌데' 하고 후회하는 글을 썼다.

설교란, 직접 말하고 그 말에 응답을 촉구한다. 예수 당시 제자들과의 관계가 그랬을 것이고, 또 초대교회 때 그 목격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한 40년 이어오다가 그 긴장이 약화될 무렵 복음서가 글로 씌어진 것이다.

이렇게 글로 남겨져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읽고 설교하고 또 듣는다. 이처럼 읽고 듣고 하지만 지나쳐 버리는 게 있다. 그건 자기의 생활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인데, 게다가 그 '말씀'에 신학자란 자들이 교묘한 설명을 붙여 솜방망이로 만들어 놓아서 우리가 아무리 얻어 맞아도 까딱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합리'에 감염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뛰쳐 나와서, 변증(辨證) 이전, 합리적 해석 이전으로 돌아가 본래의 순수한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먼저 관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말들이 어떻게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 올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우리가 듣기 힘든, 행하기 어려운 이 말들은 40년의 구전시대를 거쳐 누가 전해 주었는가를 알아 보는 것은 자못 중요한 일이다.

그 말씀을 전해 준 것은 공동체, 곧 복음 공동체였다. 그체적인 예를 들면,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려야 한다. 또 자기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모두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라는 거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누가 이 말을 따를 수 있는가? 없다면 이 말은 이미 없어졌을 건데, 어떻게 40년 간이나 계속 전해져 왔을까? 목에 걸릴 이 말이 어떻게 보존되어 왔을까?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마태복음 8장 22절에, "죽은 자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한다. 자기 부모의 장례까지도 버리고 따르라는 거다.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고자된 사람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결혼한 사람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한 마디로, 비가정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이라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은 이 말들을 '종말론적'인 언어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받지 않으려 한다. 예수는 그 때를 너무 다급하게 생각해서 곧 종말이 온다고 믿었을 거라고 해석해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40년 동안이나 그 말을 전해 준 전달자는 단순히 사변의 유회를 일삼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말을 그대로 지키면서 전했다는 말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 말은 그 시대상에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끝끝내 보존하면서 전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적어도 가정생활을 포기한, 탈가정한 그룹에 의해서만 가능했는가? 복음서에 보면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가정을 극찬한 곳은 한 곳도 없다. 대개 결혼을 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축사하는 사람들이 요한복음을 내세우지만, 그건 결혼을 축하한 게 아니다. 그것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한 것이지, 딴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도 복음서에는 가정을 파괴하지 않는 걸 전제로 한 이야기가 있다. 가령 누가복음 12장 53절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는 말이 있다. 마가복음 3장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고 한 말이 있다. 이건 물론 혈통적인 가정관은 아니지만 이런 말들은 가정을 가진 사람들도 전달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마가복음에는 이혼을 못하게 경고한 말이 전해져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짝지워준 것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부부관계를 일단 존중했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그 투로 보아 예수의 말로 받을 수 있다. 이건 예수가 창세기의 자료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남자 쪽을 욕한 말인데, 얼마나 악했으면 모세가 그들에게 안 살겠으면 이혼증서라도 써주어서 여자를 자유롭게 하라고 했겠는가고 하면서 예수는 결국 모세를 상대화하고서 너가 무엇인데 한 몸을 두 개로 나누느냐고 나무랬다. 이것은 계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와서는 마가복음의 전승을 그대로 받지 않았다. 그대신 '아내가 간통하지 않으면'이라고 이혼의 도피구를 제시했다. 이건 생활조건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받을 수 없게 된 구체적인 예이다. 신교(新敎)는 '간음한 연고 외에는'을 채택하고, 가톨릭은 마가복음을 채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건 생활조건과의 관계가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어쨌든 위에서 열거한 탈가정적인 말은 누가 전승했을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가정을 가졌고, '소유'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전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왜? 그들에게는 가시와 같은 말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전달자가 따로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출가했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소위 '반더프레디거(Wanderprediger)'의 그룹이 그것이다. 가정을 버리고 집을 떠나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예수의 말을 전했던 무리들이란 말이다. 이런 무리들이 당당 40년 동안이나 그 말들을 보존해 왔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들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그룹들이 또 있다. 아들은 부와 소유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돈에 대해서 극평을 한다. 오늘의 사람들과 크게 충돌하는 말들이다.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고 명령하는 말이 있다. 여기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변명하기를 이 말은 특별한 경우에 한한 변명 말이니 보편화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런 구석이 없다. 만일 돈 가진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그 말은 없는 것으로 하자고 했을 것이고, 40년 동안 지내 오면서 벌써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또 "땅에 보화를 쌓아 두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 역시 재산에 대한 경고이다. 이것은 적어도 재산을 가지고 살겠다는 사람에게는 거슬리는 소리니까 전승하기가 어려웠을 거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때 집이나 재산이 허용되어 있었다. 불과 50년경만 해도 상당한 재산가가 예수를 믿었다.

더구나 마태복음 6장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 구명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지금도 교회에 부자가 한 둘만 있어도 이 말은 설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40년이나 전해져 왔을까? 또,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한 날 걱정은 그 날에 족하다"는 말들이 있는데 이 말들은 오늘에 와서 몹시 공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들은 어떻게 보존되어 왔을까? 누구에 의해서?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가정을 가지고, 재산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유재산 같은 건 포기하고 그날 그날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무리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왔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떠돌이 설교자들'이었다. 이들은 2세기 무렵까지 이어져 왔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으로 세 번째 그룹들이 있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할 때 한 말로서 누가복음 9장 3절에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생활이 현대의 사회 구조에서 가능하겠는가? 해서, 학자들은 그것의 합리적인 해석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순전히 글자 그대로이다. 이건 열두 제자에게 뿐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에게 한 말이라 믿고 그렇게 살면서, 구전으로 전해 준 무리가 있었다. 이들이 누구였겠는가? '소유' 없이 그처럼 살아갔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야말로 문전걸식하면서 말을 전하고 다녔던 무리들이었는데, 위에서 열거한 말들은 그들의 생활 모습의 일면을 나타낸 데 지나지 않는다. 욕먹고 박해받으면서도 여기 저기 떠돌아 다녔다는 기록도 이들 모습의 단면들이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말씀'이 전해진 것이다.

이들 '반더프레지거들'의 또 다른 특징은 출가, 무소유, 방랑 이외에 그 활동무대가 주로 시골이었다는 사실이다. '반도시적인 것'이 그들의 특징인데, 이건 성서에 많이 나타나 있다. 우선 예수가 든 비유만 보더라도 거기에 등장한 소재들은 거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다, 농민들, 소작인들, 목자들, 포도원, 추수, 땅, 고기잡이 따위가 다 그것을 말한다. 여기에 반해, '화 있을진저!' 한 것은 거의 도시를 향해서이다. 그 저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극단화된 것도 그 까닭이다. 왜 반도시적 어군(語群)들로 가득차 있는가? 그건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의 상황 곧 그들의 생활조건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대상은 농민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사회계층으로 보면, 농민들이 제일 하층이었고, 그 위가 수공업자들이었다. 한 가지 기술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그래도 살기가 괜찮았다. 바리새 사람들 가운데 기술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바울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특히 사제족들도 수공업을 익혔는데, 그건 이들이 아니면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일부러 기술 훈련을 많이 받았다. 이와는 달리 '떠돌이 설교자'들은 농민군이었는데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이상에서 우리는 말씀의 전승자들의 삶의 조건을 볼 수가 있는데, 이 전승자 자신들은 그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그 말씀을 전해도, 자기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들이 그 말씀을 진실하게 붙들고 전해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말들이 이 사람들에게서 나왔느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전승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래디칼한' 말들은 결국 예수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에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왜? 초대교회의 생활양식이 그런 래디칼한 말을 만들어낼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설혹 에세네파들처럼 한 공동체로서 집단생활을 했다면 모르지만, 초대교회는 그렇지가 않았다.

예수는 떠돌이 설교자들과 같은 모습의 생활을 했다. 가정도, 고향도 떠났고, 소유라곤 전혀 없는 그야말로 '무소유자'였다. 따라서 가정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 '누구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어야지' 했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자연스런 말일 수 있었다. 그의 생활과 일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연스런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접촉했던 사람은 거의 농촌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말의 소재를 분석해 보면, 하층계급인 농민들의 일상생활과 관계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른바 테오리(이론)를 전개한 것은 한 곳도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헬레니즘의 지배권에 있었는데도 예수는 그 영향을 조금도 받은 흔적이 없다. 이 점은 성서학자들 사이에 일치한 견해인데, 그가 무식해서였든 의식적이었든 간에, 그의 사고는 철저하게 팔레스틴적이었고, 그의 언어 또한 조금도 전개적이 아닌 단순한 아람어적인 표현 그대로였다.

그리스도교는 소유를 버리고 집과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 다녔던 예수에게서, 그리고 그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았던 '떠돌이 설교자들'에 의하여 전승된 그 말씀에 기초해서 형성된 것이다. 문화, 경제, 권력 할 것 없이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철두철미 하층 계급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 때부터 이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울은 도시에서 도시로 다니면서 선교를 했다. 교회를 도시에 세웠지, 농촌에 세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다. 그가 이미 헬레니즘 속에 깊숙히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에게 와서 도시적 종교로 되어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도 달라졌다. 변증적인 과정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반론과 대결하여 이론화되었다. 교리는 이 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예수의 말은 결코 교리가 아니었다. 교리는 그리스도교가 도시인의 종교가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예수는 팔레스틴 농민들이 사용한 아람말을 썼는데, 신약을 도시인들이 사용했던 희랍말로 바꿔 씌어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도 정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교회도 생겼다. 거기에 따라 계층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안정과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맞게 말씀을 이해하려다 보니까 이론이 생겨나고, 교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만 보더라도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와는 달리, 지혜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들, 가문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자연 이들을 변호할 필요가 생기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본래의 예수의 말과는 거리가 먼 데로 나아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생활조건에 따라 복음을 이해하는 것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변증이 요청되었고, 교리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론(theory)이 우선해졌고 행동(praxis)은 뒤로 나앉게 된 것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논의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요한복음이 이미 그랬다. 마태복음에서도, 교회가 굳어지니까 거기에 맞게 예수의 말을 변질시켰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본 말에다 '마음'이라는 것을 앞에 두어, 가난의 사실을 정신화시켜 버린다. 예수의 래디칼한 말을 보편화한 것이다. 그러니 순수한 말이 달라질 수밖에.

누가복음은 마태에 비해 보다 더 순수하다. 누가는 예수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갈라 놓고, 그때는 이랬지만 지금은 이런다는 투로 구별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에 나타난 대로, "내가 너희들을 보낼 때 돈 주머니와 자루를 가지지 말라고 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 하고 반문하고서, "없었습니다"고 대답하니까, "이제는 돈 주머니 있는 자는 가지고 가라.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라"고 한다. 전혀 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이 말이 예수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활조건에 따라서 성서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말이라도 자기의 생활과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정당화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평안하기 때문이다.

나의 고백이지만, 네가 수난받기 전에는 성서가 현재처럼 보였던 가고 반문해 본다. 역시 그렇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관서만 연구했는데도 아까 말한 그 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박해받는 입장에 서니까 그점이 보였고, 그 말씀들이 그처럼 중요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자신이 그 입장에 서야 성서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 셈이다.

예수를 따르던 떠돌이들(Wandemachfolger)이 외친 그 생생한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어떤 지식이나 이론이 소용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가난한 근로자들이나 농민들이 사실 조금만 눈을 뜨면 우리 보다 훨씬 더 잘 성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지식인들이란 이미 마음이 오염이 되고 생활조건이 달라져서 그 자리에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 버렸다. 수세식 변기에 안 앉으면 변이 안 나올 정도로 이질분자가 되버린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다니라면, '저 무식한 것들은 밥먹을 때 손도 안 씻고 먹는다'고 경멸할 우리다.

이제 우리가 무기력하고 나태해진 상태에서 다시 일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이 원점에 비추어 자신을 고발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원점'이란 무엇인가? 변증교리 이전의 순수한 말씀의 자리에로 돌아가 자신을 철저하게 고발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보시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고백할 수 있을 때, 참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존』, 1979. 5)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