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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60년대에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의 하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와 그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성과 자체가 전혀 새로운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성과를 크게 평가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그 체질에서 볼 때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내부적 혁신은 그것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 밖에와의 새로운 관계를 초래하며 마침내 그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영향력은 그것 자체의 개혁의 농도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마치 전투 태세에서 진지를 옮기고 대열과 전법을 변경함으로써 그것을 향해 방어 또는 공격 준비를 하던 적진에 어쩔 수 없는 변동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일치를 내걸기에 앞서 이미 프로테스탄트 교회측에서는 교회일치 문제를 국제기구(WCC)를 통해서 제시했었다. 이미 1961년부터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를 위한 공동신학연구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1937년 에딘버러에서의 신앙과 직제 회의, 38년과 39년에 조직된 국제신학위원회를 거쳐서 1952년 스웨덴 룬트에서의 모임이 있었다. 1963년 이 위원회의 연구발표와 토론은 (1) 교회, (2) 예배, (3) 인터 콤뮤니온(Inter-Communion)의 문제였다. 중요한 결론은 바로 세 번째의 문제로서 모든 교파가 서로 자유롭게 성례전과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허락하면 교회일치의 길은 가능하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역시 교리(신앙의 내용)와 제도가 일치될 때만 가능하다는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물론 사크라멘트의 신학적 이해와 그것을 베푸는 사목(司牧)의 권위의 소재론에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통틀어 말하면 교회론에 귀착된다. 그러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관은 어떤 것인가를 문제해야 할 것이다.

1.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이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관을 그 자체로서 진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까닭은 이 두 진영의 교회관의 차이란 상호반응적 요소가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것을 빼고 보면 같은 근원에서 출발된 교회관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서 찾아 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교회관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바울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정의된 것이기에 프로테스탄트에서도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신비'라는 말에서 이해를 달리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는 '신비'라는 말을 따로 쓰지 않으나 그것을 다음 두 가지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1) 교회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 보이는 교회는 복수일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어디까지나 단수다. 그것은 모든 자연적 또는 역사적 제한의 차이를 초월함으로써 여기까지라고 금을 수 없는 것이다(Una, Sancta, Catholica Ecclesia). 그러므로 이 교회는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체라고 할 때에는 보이는 교회의 구별 자체에서마저도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초월성을 말한다. (2) 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종말시에 비로소 그 전모가 구현된다. 이것은 하나의 교회는 현재로서는 어디까지나 가리워 있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현금의 어떤 것과도 일치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은 위의 규정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며 동시에 그것의 의미를 규제하는 정의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그 중심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있고 그 안의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 이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정의에는 성직의 위계제도나 사제와 평신도 간의 구별이란 직능상의 이유 이상을 넘어 설 수는 없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목사는 장로의 한 사람으로 직능상으로 구별될 뿐이며, 장로는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셋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졌고 또 그 말씀에 의한 성도의 공동체다. 말씀이란 구체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성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성서에 의해서 계시되는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공동체는 교회일 수 없으며, 반면에 그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교회의 본질을 위한 요건일 수는 없다.

이상은 바티칸 공의회에서 문제로 한 범위 안에서 본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관을 약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관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이 원칙과 보이는 교회와의 실제적 운영에서 오는 많은 문제가 남게 된다.

2. 문제점들

먼저 셋째 번의 정의는 가톨릭과 신교 사이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의 성벽이었다. 그것은 계시 문제다. 가톨릭에서는 원천들(Fontes)이라는 복수를 사용해 왔다. 즉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신교는 성서만을 계시의 유일한 원천으로 고집해 왔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에서는 교회의 생명 전체가 성서에 의해서 지배돼야 할 것을 명시하며 교회 안에서의 사목활동, 사크라멘트, 설교 등 모든 것을 성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강조했다. 이 정신은 사크라멘트 헌장에서도 반영되어서 성체(聖體) 제의에 있어서 먼저 그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성서의 말씀을 읽고 설교와 시편의 공동봉창과 기도를 전제하고 있으며, 사목양성에 관한 교령(敎令)에 있어서도 성서가 그 중심이 돼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성서의 해석권의 문제다. 이것은 성서해석의 주체가 누구냐라는 문제보다는 이른바 무오권이 더 문제다. 바티칸 공의회에서 법황의 특권이 대폭 주교들의 공동체에 이양됐다는 것은 교회일치의 큰 진전을 뜻한다. 신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성서해석에 있어서의 무오를 주장할 수 없다. 까닭은 목사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 줄 것을 믿는다(불트만)는 긴장 속에서만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에서 '성서만'이라고 주장한 것은 가톨릭에서 '종이의 법황'이라고 비판한 그 비판에 대해서 엄숙히 반성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성서만'이라는 구호는 역시 서구 기독교사에서 형성된 반작용적 표현이다. 그것은 교회의 제도적 권위, 로마 교회만이 유일한 구원의 장소라고 한 역사에의 도전이다. '성서만'이라고 함으로써 신교는 이른바 문자주의성서주의축자영감설에 빠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성서를 빙자해서 실은 해석자 자신(개인)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또 성서연구에 의해서 이 이상 교회가 먼저냐 성서가 먼저냐라는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 돼 버렸다. 이것은 벌써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성서는 그 문자 자체 형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달 내용이 문제다. 성서의 형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그 거점이 있다. 이 점에서는 교회 형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교회냐 성서냐할 때 성서를 문서화된 그것 자체를 의미한다면 오히려 교회가 먼저라고 해야 하겠다. 까닭은 성서의 개념이나 표현양식이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성서연구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둘째와 첫째의 정의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두 경우에 마찬가지로 문제되는 것은 여전히 가톨릭이 주장하는 무오권이다. 법황 또는 주교 공동체에 의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경우에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째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일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움으로써 신비체로서의 교회라는 특수성을 침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의 미래를 봉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이 공동체 사이에 직접성을 침범할 수 있다. 둘째는 법황이나 주교 공동체가 판단의 절대권을 주장함으로써 그와 다른 체제를 가진 다른 교파와의 관계는 종속관계는 될 수도 있으나 평등한 위치에서의 일치를 사전에 가로막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 분열의 책임을 어느 일방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함께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이라든지 로마 교회만이 가톨릭의 전부가 아니며 다른 교회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결정이 형식에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무오권을 주장하는 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은 불가능하게 된다. 법황이 무오하다는 입장을 고집하는 한 어쩔 수 없이 과거의 로마 교회의 역사를 모두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개혁 당시에 법황의 무오권이 문제된 것이 아니라 "의인"의 교리가 문제였다고 했다. 그러나 신교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이 무오권을 부정하는 것과 유리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이상과 관련된 문제는 법황의 엑수시아의 수여권이다. 법황의 수여권이 바로 교회의 열쇠를 땅 위에서 가진 베드로의 그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법황을 모신 로마 교회만이 궁극적인 교회의 엑수시아의 열쇠를 장악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의회에 참여했던 신교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틀림없으나, 교회의 일치는 말씀과 사크라멘트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것이지 무오의 교권에 의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입장에서 나온 결론이다. 이같은 입장은 또한 성직이나 그 외의 수여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받을 수 있다는 입장과 직결된다. 물론 신교에서도 교회 공동체의 조직 속에서 안수를 받는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그것은 직능상의 수여권 이상이 될 수 없고, 성직을 받는 본인은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가톨릭에서 중요시하는 사크라멘트 문제, 마리아론 등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사크라멘트 같은 문제는 신교에서도 통일된 교리는 없으며 마리아론 같은 것은 그것과 평행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로 논의할 바가 못된다. 공의회에서의 헌장이나 선언 등에서는 교회 일치를 방해하는 것은 별로 없고 율령(律令)에 있어서는 피차 오랜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달리 할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치명적인 장애가 될 것은 없다.

3. 현재와 앞으로의 과제

교회 일치를 위해서는 왜 분열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근원에서 풀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교리와 제도는 결코 유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 둘이 함께 해결되기 전에 가능한 것부터 찾아서 공동으로 소급해서 시비를 따지고 맺힌 것을 풀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또 그같은 여유도 없다. 교회 일치는 반드시 교회 내적인 관심에서 출발될 수 없으며, 그것은 이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 미래개방적인 공동체며 그럴 때만 산 것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런 뜻에서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미래)의 도래 앞에 선 하나님의 백성이며 따라서 믿음에 의한 구속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교에 있어서는 기존의 교리나 제도보다 더 중시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로서의 그 나라의 도래에 대비하는 데 있다. 그런 뜻에서 안정과 질서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탈출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해 왔다. 탈출의 공동체라는 말은 마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떠나서 바로 이 세계에 나가 버린다는 급진적 주장도 있으나, 교회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옳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 교회는 결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가 이 세계를 위해 존재한 것처럼 이 세계를 위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런 주장은 이른바 "디아스포라 교회"라는 개념을 낳게 했다. 이것은 교회에서 세상에로라는 급진적 주장에까지 번지었으나, 교회는 자기 방어적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개방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가톨릭에서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의 교리 제도 등 전통적 유산이 교회 일치를 위해서 거침돌이 되며 이런 것이 다 조화를 이루어서 일치되는 날에 비로소 교회의 일치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앞 길은 암담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이 불일치의 난점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의 몇 가지 제언은 교회 일치의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 일치는 그 통일성(Unity)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획일성(Uniformity)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통일성은 위에서 제시한 범위 안에서 벌써 피차에 승인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외의 것에 있어서 교리상의 언어나 표현, 또 강조점의 차를 없애야 한다든지 또는 제도상으로도 일치를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획일성을 노리는 것일 수 있다.

획일적 일치만이 유일한 일치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보이는 교회가 경제, 문화, 정치 등의 차이를 가진 이 세계 안에 있는 공동체라는 점을 잊어 버린 것이다. 이 세계 안에, 한 공간과 시간 안에 위치하는 한 어쩔 수 없는 문화의 틀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많은 차이점들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이같은 필연성 앞에서 피차 과거에 교리로서 절대화하던 것들은 많은 경우 사실상 문화권적인 특성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또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연구의 결과에 의해서 이미 성서 자체도 그 문화권의 차이에 의해서 같은 신앙을 다른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이 마당에 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애당초 교회 일치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2) 보이는 교회 사이의 차이는 하나님의 뜻에서 볼 때 기능의 차이지 본질의 차이는 아니다. 그 안에는 바울이 비유한 손, 발, 입, 귀와 같은 각기에 부과된 임무가 있다. 각 교회는 Missio Dei라는 큰 뜻 안에서 각기 제 맡은 것이 있다. 그 분열의 동기는 어떻게 됐을지라도 현실적으로는 각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톨릭 없는 그리스도교도 생각할 수 없거니와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와 그 공헌을 빼고 그리스도교의 존립을 생각할 수도 없다. 물론 그 기능이란 고정화해서 성격지을 수는 없고 역사적 정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맡아야 할 임무가 따로 있다. 더욱이 이른바 다원화의 세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 다양화에 최대한에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그 성격상 무수하게 분화됐기 때문에 전체적 기동성이 결여돼 있으나 반면에 게릴라 전투대원 같은 기민성이 있다. 가톨릭은 그 거구성 때문에 민활하지 못하나 그 통체적 유기성 때문에 커다란 방파제나 교두보의 역할을 한다. 이 둘의 일은 둘이면서 하나다. 그러므로 사로 지원할 때만 하나의 교회일 수 있다. 초대교회는 이같은 각기의 기능을 재빨리 알고 피차 승인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을 향해, 이방교회는 이방인을 위해 할 일이 있음을 알고 서로 분담했다. 물론 그 사이에 상충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집한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 뜻에서 앞으로의 과제는 피차에 자극을 받아 없는 것을 보충하는 경쟁적인 자세를 지양하여 피차의 기능을 서로 알고 분담의 유기성을 실현하는 데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3)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있지 않고 이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갈라져 있는 교회가 어디에서 함께 공동전선을 펼 것인지를 말한다. 싸우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나치나 공산권 감옥에서 바로 우리의 공동 과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어디서 만나야 할 것인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각 교회는 바로 이 세계 한가운데 있으면서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세계를 위해 존재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삐오 구세나 십세는 이 세계의 오류요목(誤謬要目)을 선포함으로써 정죄했다. 그러나 지난 공의회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현대 세계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이른바 세속화 신학 이론을 수립함으로써 바로 이 무신 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할 일을 모색했다. 전쟁과 평화, 전통과 혁명, 물질과 정신 등의 긴장 관계에서 교회는 이 세계의 나갈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이같은 과제가 바로 우리가 만나야 할 주어진 장소이며 그 장소에서 서로 차이점 때문에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상황은 변화산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다. 병든 자와 또 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산하(山下)다.

(4) 끝으로 한국에 있어서의 교회 일치문제다. 한국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할 것 없이 겨우 피선교 상태를 면하려고 하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둘은 함께 박해 속에서 뿌리를 박았으며, 이 민족의 불우한 역사 속에서 제할 일을 모색했다. 이 땅에서는 두 교회의 분열의 역사도 없었으며 또 피차 싸운 일도 없다. 비록 양 교회가 그 거점을 외국에 갖고 있기에 국제적 유대관계가 있으나, 한국이라는 고유한 문화권과 역사적 상황에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만이 함께 걸머져야 할 과제가 있다. 우리가 서로 경원하는 역사를 가진 것은 우리 사이에서 된 일이 아니라 서구에서의 여파 때문일 뿐이었다. 우리가 진리를 서구 교회에서 받은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왜 저들의 싸움에 소급해서 말려들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서구의 두 교회가 정면에 교리 싸움을 내세웠던 것이 많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교리 때문에 분열됐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루터의 거동이 정치적 세력이 개입하지 않았던들 결코 분열에까지 이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신교가 분열을 거듭할 때 내세운 것은 교리이나, 실은 외국의 힘과 연결된 헤게모니 싸움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정말 신조의 차이 때문에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가 될까? 많은 경우 가톨릭 자체의 각 종파 사이의 신조적 격리보다 가톨릭과 신교의 신조가 더 가까울 수도 있고 신교 사이의 거리보다 가톨릭과 더 가까울 수 있다. 한국의 교회는 반목의 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반목의 역사에서 형성된 교리의 차이만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마당에 한국의 교회가 자주적으로 결단하여 교회 일치를 모색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목』, 197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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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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