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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1. 예수와 민중공동체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한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 교회는 점점 더 제도화되었고 그럼으로써 예수의 본래 뜻과는 반비례해 왔다. 원래 예수는 제도적 교회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라는 말의 희랍어 원뜻이 회중임을 감안하면 예수도 이미 교회를 이루고 행동했다. 그것은 건물도 없고 악기나 집기 따위도 없는 공동체였다. 물론 예수는 일정한 사람들(열두 제자)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을 결코 기성교회의 장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이 공동체에 오는 사람에게는 아무 조건도 없었다.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오클로스라는 병자, 창기, 거지떼들과 같은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이었다. 이 공동체는 받은 것이 아니라 주었다. 가르치는 내용은 과격했다. 하느님의 나라가 문전에 임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을 의미한다. 까닭은 지금까지의 기존 질서를 모두 거부하고 하느님의 주권만이 지배하는 신천지가 도래한다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리라", "앞선 자가 뒷서고 뒷선 자가 앞선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등은 그 나라의 성격의 혁명성을 충분히 반영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그의 명령도 매서웠다. 그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행동의 시간적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를 것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돌아 앞으로 가" 해서 계속 앞으로 나가는 길뿐이다. 기존체제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럼으로 그의 전진에는 충돌이 연속되었다. 유대의 기존체제의 상징인 바리새파와의 연속적인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기존체제에 대한 무시는 가치관의 전도에 기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잘난 자들이 조소해도 못난 자들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갈릴리의 예수의 집단이 로마제국에 붙어사는 어용집단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자 곧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뿔뿔이 흩어졌으나 예수는 저들의 온갖 누명을 등에 업고 정치범으로 가장 참혹하게 처형당했다. 이것으로 한마당은 끝났다. 예수는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 물론 땅 한 조각도, 모일 수 있는 천막도!

지리멸렬했던 그의 민중들이 그렇게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과 자기들 자신이 절망 속에서 부활했다는 체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저들은 도망쳤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였다. 그 곳은 예수가 철저히 패배한 장소이다. 그 곳은 동시에 유대 종교 귀족들의 본거지다. 그들이 모인 그 자리에는 온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바로 그 앞에서 어제까지 그처럼 비겁했던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사건을 증거했다. 그들의 말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어느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었다. 이것을 경험한 많은 청중들이 얼떨떨하여 놀라고 이상히 여기면서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제각기 날 때부터 쓰던 나라말을 그들로부터 듣고 있으니 어떻게 된일이오" 하고 크게 당황했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교회의 탄생이다. 그 특징은 다음 세 가지다. 하나는 교회의 탄생이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언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 주역은 귀족도 종교인도 아닌 바로 그런 계층에게서 천시를 받던 갈릴리 민중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출발한 갈릴리 민중의 교회는 인정을 받으면 받은대로 박해를 받으면 박해를 받는 대로 로마제국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만든 길을 역이용하여 착착 로마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저들이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돈을 모았다거나 교회 자체를 위해서 돈을 썼다는 기록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신 투구할 따름이었다.

2. 향린교회의 출범정신

향린교회의 출범은 625라는 민족상잔의 쓰라린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수십만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민족적 대이동을 낳은 이 엄청난 사건들 속에서 그리스도교회가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이 충분히 노출되었다. 이것을 몸소 경험한 20대 후반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제도 교회대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 아래 새로운 그리스도인 운동을 일으킬 것을 다짐하기 위해 전란 중에 한 장소에 모여 살며 기도와 성서 연구로 마음을 다져왔다. 거기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교회의 주역이 될 만한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그럼으로써 부분적인 것이 아닌 전체의 삶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 회원들은 비록 각기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으나 한 곳에서, 한 가마솥의 밥을 나누어 먹으며 사는 것이다.

둘째는 평신도 교회이다. 이것은 목회자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목회자에게 월급을 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 밖의 사람들은 무조건 수동적이 되거나 관조자가 되는 그런 체제는 그리스도 공동체일 수 없다. 공동체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어떤 형태로거나 그리스도 전선에 서야 한다. 교회는 세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세계에서 도피하거나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이 공동체는 역사현실에 참여하며 헌금은 거의 전액을 '밖의 일'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가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향린의 평신도 운동은 세계에서 평신도신학 운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셋째는 입체적 목회라는 것이다.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기존 세계에 예속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단 몇 시간만 구별하여 다른 분위기를 경험시킴으로 그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온갖 사회적 문제에 연결되어 있는 삶인데 이른바 영적인 지도나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전체(Whole Being)를 보지 않는 증거이며 그 결과도 뻔하다. 그럼으로 삶 전체의 구체적인 문제까지 관여하고 도와주는 동반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기본원칙을 정해 놓고 계속 함께 기도와 성서연구를 하면서 다음의 일은 하느님께 묻기로 하자라는 것이 이 교회 출발시의 각오였다. 마침내 서울 한 지역에 함께 모여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유(私有)를 배제한 공생의 목적은 끝끝내 성취해 보지 못했다. 그것은 가정이라는 이기성 때문이었다. 공동체성은 실패한 셈이다. 이로써 입체적 목회라는 목표도 달성되지 못했다. 그것은 숙명적 공동체 의식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평신도 교회의 성격 뿐이었다. 말하자면 세 목표 중의 하나는 이루어 보지 못했고, 또 하나는 실패했고, 마지막 하나만이 남은 셈이다. 이로써 또 한마당이 지나간 셈이다. 그 후 분명한 재정비나 선을 긋지 못한 채 20여 년을 '연명'해 왔다. 마침내 12년 전에 기성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담임목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향린교회의 처음 꿈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주역들의 한계 때문이지 그 정신이 잘못 되어서가 아니다. 교회는 너(세계)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유기적인 삶을 창조해야 한다. 교회의 코이노니아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이 정신은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잘못된 바가 없다. 그럼으로 이 평신도 교회는 그렇게 적은 교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년만에 교회 하나를 개척할 수 있었으며 비록 해묵은 낡은 방법이기는 했으나 있는 돈을 다 털어 주변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입체교회와 공동체 생활이라는 사상이 현실주의와 타협해서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 동백리에 세워진 수련장이며 향린동산이다.

3. 현실에서 본 교회상

원리적인 이야기에서 잠깐 벗어나서 이 교회가 처하고 있는 현실을 보자. 세론은 향린교회를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 중산층 이상이 모인 비교적 부유한 교회라고 한다. 이것은 칭찬일 수도 비난일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모인 집단인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심성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겠다. 첫째로,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이다. 냉혹한 생존경쟁에 일주일을 버티다가 교회를 찾을 때는 스트레스에서의 해방을 원한다. 교회는 이 욕구를 충족해 줄 의무가 있다. 둘째는, 대도시 안에서의 무명성과 반복되는 생활에서 오는 무의미성에서 자기됨을 재확인하게할 수 있는 곳이 교회다. 이에 대해 교회가 저들을 격려해 주고, 저들의 삶에 보람을 의식시켜 주고 존재의 의미를 재확인시켜 주는 일 등은 중요하다. 셋째는, 역시 대도시에는 자기 마을과 친족을 떠난 생활로 인해 이민적인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많이 교회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 소속감을 주고, 서로 형제자매로서의 우애를 나누는 이른바 코이노니아의 역할은 필요한 교회의 몫이다. 위의 세 가지 사실에 호 응하여 교회는 되도록 기분 좋은 예배 분위기를 살리며, 설교도 격려와 사랑과 기쁨을 말하며, 또 이름을 기억하고 궂은 일 좋은 일에 참여해 준다. 이상의 시각에서 볼 때 향린교회는 무난하게 그 역할을 해냈다. 사실상 이상의 필요성을 주안점으로 하여 거의 교회의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것은 교회의 예산안과 사업내용을 보면 잘 드러난다. 700여 명이 모인다는 교회가 2억 5천만원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의 전액이 내수용으로 쓰여지고 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시각을 달리해서 보자.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글자 그대로 격동기이다. 국민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민족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학생계와 노동, 농민계가 집요하게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저들에게 사상이나 동기의 차이는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뚜렷한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민족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다는 충정이다. 내가 아는 대로 80년 이래로 15명의 학생, 노동자가 분신 자살로 이 민족에게 호소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한 달 사이에 한 대학에서 4명의 희생자를 내는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 생겼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나 있을 수 있었던 사건들이 교회 밖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교회의 존재 의미가 어떻게 반영될까! 세상이야 어떻게 됐든 아랑곳없이 자기 만족이나 하는, 천 만을 육박하는 집단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민족사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을 것인가! 이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럴 수는 없다. 더욱이나 예수의 이름을 독점하고 이런 행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환상에 빠져 있거나, 어떤 혁명적인 개혁안을 전제로하고 이 교회가 있어야 할 위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모이는 제4의 동기가 있다. 그것은 콤플렉스에서 해방되기 위해 교회의 일원이 되어 어떤 보람있는 일을 이 시점에서 하려는 바램이다. 자기를 내놓으면서 이 민족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커다란 흐름을 대할 때마다 박수를 보내면서도 자신은 직접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콤플렉스에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모두가 투사일 수 없다. 각기 성격의 차이도 있고 생활의 조건도 다르다. 나는 평범 한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직접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집단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일상성을 넘어선 비상성에 참여하고 싶다. 그들을 이같은 콤플렉스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교회는 집단으로 할 과제가 있다.

세상은 비리로 가득차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억지가 차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눈에 분명히 보이나 내게는 그것에 항거할 용기도 없거니와 시간도 없다. 나는 날로 일상성에 위축이 되어 작아져만 간다. 내 힘으로는 나는 이 거미줄 같은 것에 포위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로 온다. 적어도 교회는 이러한 염원에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목이 터지도록 나도 함께 외칠 수 있는 장소! 나를 붙들어 맨 일상성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장소 말이다. 이 마지막 요청에 교회가 대응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라고 자각한다면 교회의 성격에 대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목표를 세웠든지 목회자의 설교에나 기대한다든지 그가 만들어 놓은 다 된 잔치에 참여나한다는 자세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당회만 쳐다 보아서도 안 된다. 아니 교인 전체가 교회방향을 설정하고 추진해 나가기 위해 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나 당회는 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힘을 진실한 방향으로 집결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인으로 하여금 나아갈 길을 결정하게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응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각계 각층의 의견이 최대한으로 반영되어 교회의 방향을 이끌어 나가는 협의체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향린 청년』, 1986.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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