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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오늘은 31절의 68돌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에게 준 제목은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제목을 수락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러분은 안내문을 통해 내가 이야기해야 할 내용을 벌써 활자로 적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소원에 승복하는 뜻으로 여러분이 지적한 순서에 따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첫째는 예수는 누구인가? 둘째는 그가 만든 공동체가 역사 속에서 어떤 고백을 했는가? 셋째,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어 나갔는가? 끝으로, 오늘 한반도의 예수운동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은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추려서한다 해도 적어도 두 시간 이상씩 네 번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에는 도저히 이 이야기를 다할 수 없으니까 여러분의 '욕심의 죄값으로' 제목마다의 특성 있는 것만 단축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31운동을 위에서 얘기한 시각에서 한 두 마디로라도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예수는 누구인가?

마르코복음 8장에 예수의 두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하나이고 대상은 둘입니다. 처음 것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 즉 세평을 물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 즉, 이 질문은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느냐라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둘의 경우에 대답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세평은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온다고 전설처럼 믿고 있던 엘리야라고도 했습니다. 이 세평은 예수가 억울하게 죽어간 세례 요한이 도로 살아난 이였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때에 다시 나타난 예언자이면 좋겠다, 아니면 메시아가 오는 것을 알리는 엘리야였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대답은 일보 전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잘못된 세상을 하느님을 대신하여 철저히 심판하는 영광과 권위의 왕자라고 믿었습니다. 너무도 한스럽고 고난에 찬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이런 염원에 차 있었습니다. 저 불의한 세력들을, 저 비겁한 배신자들을, 저 잔인한 착취자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는 불의 심판이 왔으면! 그래서 밤낮 짓눌려만 살고 억울하게 그늘에서만 울고 신음하던 우리들도 한번 소리쳐서 웃고 승자의 개가를 불러 볼 때가 왔으면! 제자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에는 이러한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신상발언을 합니다. "나는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환영이 아니라 배척을,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죽임을 당하되 그것도 그때의 부패의 상징인 종교 귀족들에게 당하리라는 것은 도저히 용납 될 수 없는 신상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는 극단적인 책망을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이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도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의 신상예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민중들의 환호가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을 수 있고,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할 때에는 이것이 심판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어두운 그림자가 예수의 행태에 감돌고 있었고, 그의 말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해방절 만찬에서 하신 예수의 행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투, 체포, 재판, 사형선고, 이런 과정에서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어느 순간엔가 무슨 이변이 일어나서 그가 구출되리라는 것을 상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실망했습니다. 아니 절망을 했습니다. 한때 갈릴래아에서 그토록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병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쫓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정죄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 더니, 종교 귀족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친구로 삼으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도도하게 선포하더니, 가는 곳마다 배고파 굶주린 이들에게 있는 것을 다 털어 나누어 먹이더니, 그러면서 이제 악마가 지배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하느님의 평화롭고 의로운 주권만이 지배하는 신천지가 개벽된다고 선포하더니, 그러던 그가 어째서 이런 비극적인 마지막을 맞아야 하며, 그때 그 권능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어쩌면 저들은 이 예수에게 속았고,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방 총독에게 체포되어 재판 현장에 섰을 때나 로마 병정들이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유다인의 왕이라고 그에게 절을 하는가 하면, 침을 뱉기도 하고 때리기도할 때, 마침내 무고한 고소로 어처구니없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로 끌려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야하는 처지에 이를 때까지 그는 아무 저항도,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쳐다보는 사람 혹시나 하느님이 개입해서 저를 구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하느님은 죽은 그 자체처럼 아무 관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람들 모두가 그를 버렸고, 그의 제자들도 그를 버렸고, 마침내 그가 온 몸을 바쳐서 믿던 하느님마저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최후의 비명으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운명했습니다.

이상으로 역사의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의 운명은 특히 7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민중이 당하는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2. 예수의 공동체와 고백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말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다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저들을 다시 모이게 했는가? 그것은 부활 경험입니다. 부활 경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의 수난, 십자가의 의미가 계시된 순간이며 고난의 사건에 참여하는 순간입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니 죽음까지도 결코 끝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마침내 불의한 세력을 심판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합니다. 이같은 확신이 계시처럼 와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에 대해서 고백한 것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필립비 2장 6-11절에 있는 그리스도 찬가라고 알려진 저 유명한 그리스도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높은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종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는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자기 사명 즉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실패자요 패배자인 바로 그가 모든 만물 위에 있으며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가치관의 철저한 전도가 있습니다. 심판한 자가 심판을 당한 자에 의해서 심판받고,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한 자에 의해서 심판받고, 이긴 자가 진 자에 의해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를 못났다고, 사람은 물론 하느님에게까지 저주받았다고 조잘대던 입술이 그 보잘 것 없는 예수를 나의 주님 또는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저들은 예수의 이같은 무능한 죽음 속에서 자기들의 무능함과 비겁함이 죽는 것을 경험했고, 예수의 무능과 죽음이 결코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안식과 더불어 저들은 부활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공동체의 고백은 십자가라는 한마디로 집약이 된 것입니다. 이 십자가 고백은 불의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또는 죽으면서도 마침내는 이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고 이 땅 위에서 악을 제거해 버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야 만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 표현이 예수의 피와 살을 나누어 먹음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성례전의 전통을 낳게 한 것입니다.

이 운동은 전형적인 민중운동입니다. 지면서 이긴다는 신념을 가진 예수의 민중들이 세계제국인 로마의 세계 정복의 군사로를 없애고 폭력 자체를 심판함으로써 마침내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런 싸움에서 예수의 민중은 그 역사를 순교자의 피로 점철했습니다. 저들은 순교자의 길이 바로 예수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광으로 알고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멸시를 받던 갈릴래아의 민중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 뿌리를 박고 이방인의 땅 안티오키아에 거점을 두고 오늘의 서구 세계를 정복한 것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공동체의 행로를 너무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도 견해들이 통일되지 않고 예수에 대한 고백들도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 하나를 지적하겠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처형한 로마제국이 기세가 등등하고, 예수를 로마 세력에 사주한 유다교도 엄존하는 현장에서 둘 중의 한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처형한 자들과 정면 대결을 할 것인가 아니면 충돌은 피하면서 생존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층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즉 되도록 저들과의 정면 충돌 없이 서서히 복음으로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에서 본 그리스도 고백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가 종의 모습을 입었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복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어디서, 왜, 어떻게는 쏙 빠져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고백입니다. 고린토전서 15장에도 일찍부터 형성된 부활의 그리스도 고백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예수의 죽음을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만했지, 누가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합니다. 이런 고백 형성은 교회의 생존을 염려하는 지도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울로는 이러한 고백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로마제국의 판도를 그의 선교의 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의 민중으로서 그 공동체 일원이 되었으나 이름 없는, 말하자면 밑바닥에 있는 이들은 그러한 고백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예수의 피가 대지를 적시고 예수를 처형한 저들이 지금도 난무하며 또한 그가 우리들에게 천지의 개벽을 약속했고,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철저히 우리 편에 서서 싸운 흔적이 갈릴래아 도처에 생생한데 이런 사실을 빼고 어떻게 신앙고백이 가능하냐는 반론을 폈습니다. 저들은 교회의 존재를 걱정하는 것보다 예수의 사건을 목도한 것을 증언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당국자들에 의해 유언비어 유포죄로 정죄될 위험을 무릅쓰고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승했습니다. 저들은 틀에 박힌 고백형식 대신 예수의 이야기,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의 이야기, 그 애환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그것은 그대로 예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공적으로나 문서로 밝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럴 수 없었고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진원지가 알려지지 않은 채 계속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민중 그리스도 고백을 수집해서 처음 세상에 내놓은 책이 바로 마르코복음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메시아도 아니고 영웅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대에 이상화했던 모범적 종교인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수난사를 보면 이 사실이 확실해집니다. 수난 받는 예수는 이것을 전승하는 이름없는 민중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권력자가 체포하면 잡혀서 끌려가고, 폭력으로 누명을 씌우고 죄 아닌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언도를 내리고 십자가에 처형까지 해도 저항할 수가 없고, 입이 있어도 말할 권리가 없고, 글자 그대로 패배자로 역사에서 소멸되는 그런 민중의 모습 그대로 믿으며 그의 최후를 그린 것인데 어떻게 이러한 무능한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그들은 예수를 고백하면서 자신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는 그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 즉 민중들의 고난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예수의 사건 전체를 마르코는 복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오늘 한반도의 예수운동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예수사건과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기 전에, 한국의 오늘의 현장에서는 예수사건에서 볼 수 있는 거의 그대로의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싶습니다. 그 많은 얘기들을 다할 수 없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박종철 군의 이야기를 집중해 보겠습니다. 박군은 수많은 학생 중의 하나인 이름없는 이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생동안 그 이름을 전혀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국과 같은 군국주의와 경찰 통치하에서는 거의 무에 가까울 만큼 무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경찰에게 끌려 갔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경찰이 찾고 있는 사람들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끌려 갔던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도 없는데 그는 전격적으로 고문당했습니다. 경찰은 욕조에 얼굴을 박아 넣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폭행을 은폐하려고 하나, 증인으로 데려간 사람을 잡아가자마다 욕조에 머리를 박는 그것 자체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것인가를 입증합니다. 신민당에서는 저가 물고문에 의해서가 아니고 '전기고문에 의해서 죽었다고 증언' 합니다. 검찰은 박 군의 온 몸에 멍든 것이 볼펜으로 쿡쿡 질러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이름없는 그 학생의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여론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어떻게 했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여간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현장에 갔던 젊은 의사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이미 있었던 많은 경우에서처럼 자살로 처리하고 말 수도 있었습니다.

박종철, 왜 그렇게 맥없이 죽었는가? 왜 그렇게도 질기지 못한 생명을 가졌었는가? 그런데 그의 죽음은 지금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잘것없는 그의 죽음이 전국민을 궐기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막강한 정부는 이 하잘것없는 한 학생의 죽음 앞에서 정권적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만의 경찰을 동원하여 그의 죽음과 더불어 양심이 부활한 민중들의 궐기를 진압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궐기하는가? 저들은 박군의 죽음에서 자기 자식들의 죽음을 본 것입니다. 저들은 박군의 무능에서 자기들의 무능과 비겁을 본 것입니다. 저들은 박군의 이 죽음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본 것입니다. 박군을 이렇게 죽여버리는 권력이 횡포하는 영역에서 아무런 대비없이 사는 것은 박군처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까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박군의 죽음을 디디고 자신의 부활의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태일의 죽음에서 노동자의 양심의 부활을 경험한 사건이나, 계속되는 학생들의 분신 자살에 이어서 학생들의 절규에 눈을 뜨는 것이나 본질상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장입니다. 이런 현장에서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이른바 대교회주의를 보십시오. 거기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교회 밖에서는 의를 위해서 계속 그 투쟁을 죽음으로 점철하는데 한국 교회에 단 한 사람의 순교자라도 나올 수 있는 여건입니까?

나는 한국의 예수 공동체로서 이 작은 교회에 세 가지 사실만 권고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증언하되 몸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네가 받고 영화는 내가 누리겠다. 십자가는 예수가 지고 나는 구원만을 받겠다, 이런 종교적 이기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코 오래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둘째, 이 공동체는 예수의 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은 지금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성문 밖에서, 그것도 하느님도 예수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큰 교회는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눈을 돌리고 있으나 여러분은 거기에 바로 현존한 예수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합니다. 증언한다는 것은 그 사건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일치시키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 속에 또한 그리스도가 현존할 것입니다. 셋째로,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즉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를 나누어 먹는 일입니다. 그 의미가 이른바 성례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누어 먹는 일이 성례전으로 고착됨으로써 그 본래 의미가 예전적으로 경직되어 버렸습니다.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일면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식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식구, 그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바탕입니다. 예전(사크라멘트)이 아니고 정말 수고와 고통도 나누며, 반면에 사랑의 구체적 행위로서 없는 자나 있는 자나 함께 네 것,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밥을 나누어 먹는 일입니다.

끝으로 이런 관점에서 31절에 대해서 한 가지 사실만 비판적으로 지적해야겠습니다. 31 민족봉기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어난 운동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라는 전제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것이 바로 하늘의 명명(明命)이며 시대의 대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같은 낙관주의가 왔습니까? 이 낙관적인 생각이 1917년 공산혁명을 성공한 레닌이 이른바 '평화선언'에서 주변의 약소민족들에게 독립을 위한 지원을 천명했는가 하면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에 윌슨이 모든 식민지의 요구를 조정할 것과 민족자결권을 선포한 데 연유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기대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독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과 투쟁을 계산에 넣지 않은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고난과 민족자결에 의한 독립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으로 쟁취하지 않고 국제적으로 주어진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31절과 더불어 십자가의 의미를 심각하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성남 주민교회, 1987.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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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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