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적으로 볼 때 역사의 주축을 흔들어 놓는 듯한 일대 전환적 시기가 있었지만 90년대를 향하는 이 시대만큼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혁명적 전환기는 없었다고 본다.
오늘의 대변혁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그리고 그 어떤 다른 주의도 아니고 민중의 힘에 의해서 이룩되어 가고 있다. 나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어느 개인이나 또는 지배 집단의 머리에서 창출된 것이라고 보지 않고 구조적 지배 밑에서 죽어가면서 염원하고 희구하던 그때 세계에 대한 민중의 구상을 과감히 수용함으로 구체화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결코 사변적인 신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에서 보이지 않게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민중의 의지를 수용한 결과라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상상 못하던 분단 독일의 담을 헐어버린 것도 순전히 독일 민중의 힘이었으며, 용병으로 상품화되어 수출당하던 네팔의 민중들, 사회주의권인 중국의 민중들까지 마침내 들고 일어났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의 세력권 안에서 신음하던 민중운동도 예외일 수 없다. 저들이 아무리 무기상들과 야합한 권력으로 세계를 제패하던 지난날의 "영화"를 지속하려고 해도 민중이 주도하는 역사는 마침내 저들로 하여금 자기 땅 밖의 모든 기지들에서 철수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힘이 배경이 된 군사력과 무기들을 철수 또는 폐기하게 할 것이다.
한편 이미 소련과 중국에 의해서 강제로 합병된 소수 민족도 독립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것은 대연합이라는 명분 밑에 깔려 있던 민중적 소수 민족들의 봉기를 의미한다. 나는 이런 운동이 소련에서만 아니라 중국 그리고 미국에서도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이른바 패권주의의 막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베트남과 아프리카니스탄에서 입증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작정치도, 돈도, 탱크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전혀 다른 힘이 이 역사 안에 잔재하고 이끄는 것을 인지하게 된 셈이다. 이같은 90년대의 문턱을 넘어선 한국은 어떤가?
한국 정치계는 민자당을 형성하는 변(辯)에서 신사고, 대개혁이라는 말을 부각시키고 있다. 무식의 소치인지 자신들도 세계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자는 어처구니없는 장난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여야가 야합해서 숫적으로 압도하는 것이라고 이해 한 것인가? 그것은 마치 데땅트에라도 견줄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는가? 대개혁은 다시 5공에서 유신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러므로 세계 진보적 사고에 물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일군을 일소해 버리는 것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신사고의 특징은 과거의 허구적인 적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만용을 깨닫고 사실 앞에 정직하자는 일종의 세계 정치사적인 회개운동이다. 대개혁이란 바로 이런 회개운동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사고니 개혁주의니를 내세운 우리의 정치계는 국민에 의하여 성숙 되어 가던 모든 운동을, 군사정권 이래로 오래 숙달된 방법으로 유린해 버리고 몇몇이 밀실에서, 그것도 권력 분배의 묵계로 야합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도 국민에게 사과는 고사하고 얼마나 거만해졌나. 노동자운동, 학생운동, 재야, 선생들 그리고 언론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실현해 보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 폭력 이상 대응한 것이 무엇인가! 일면 공작정치와 또 한면 국민을 기만하는 밀실정치 그리고 경제적 부정 행위가 여전히 국민을 호도하는 중요한 무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집권당 자체에서 스스로 노출을 하지 않았는가!
정부는 천고의 원수처럼 국민을 세뇌해 오던 공산 세계와 비밀리에 접촉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소련의 수뇌부를 만나는 것을 "영달의 길인 양" 내부적으로 경쟁하며 저들과의 접촉을 큰 공로로 내세우면서도 국민은 여전히 반공법이 중추를 이루고 있는 보안법과 안기부법으로 꽁꽁묶어 놓고 정부의 비위를 건드리면 이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므로 국민을 극도로 혼미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단 한 번도 공산주의에 대한 정부의 수정이나 입장표명도 하지 않은 채 일부 재벌과 권력층은 이 보안법을 완전히 초월한 행동을 자유자재로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 우리의 민족적인 큰 과제인 남북교류 문제에 있어서도 국민을 빼돌린 채 집권층만이 홀로 기만적인 방법으로 추진할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미 그런 작태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때 정부가 국민의 세력에 밀려 갈팡질팡하다가 제안한 것이 창구역할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창구역할에도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국민의 눈에는 그 기준이 오직 친정부측이냐 아니냐하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말 신사고나 개혁의 의지가 있다면 모든 것에 앞서서 민족통일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분단 역사 속에서 얼마나 허무맹랑한 가상적 원수를 만들어 국민을 희롱해 왔는가! 이 분단 상태를 새롭게 사고한다면 우리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대부분의 조건들이 허황한 것임이 폭로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게서는 민족통일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통일의 길은 독일의 경우처럼 행동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민중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오늘 한국의 정치는 세계의 흐름을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민중의 힘을 얕잡아 보고 있는 증거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최근에 서구의 카테드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교회당을 일부러 둘러보고 상상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한편 나는 다방이나 음식점 수보다 결코 적지 않아 보이는 교회들을 보면서 그것이 이 민족에 대한 역할보다 그것을 재산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세력이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보았다. 세계가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흠모마저하고 있는데 그 허구성을 아는 사람은 두려운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장력이나 재산 자체를 문제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요는 이 집단이 무엇을 위한 집단인가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제는 단순히 양으로 보아도 이 민족 사회 안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민족의 장래를 망칠 수도 있고 반면에 이 민족 역사 발전의 중요한 부분을 담지할 수도 있다.
한국 교회에는 정교분리라는 사고가 교리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구 사회 여건에서 형성된 결론이지 우리 역사의 장에서 이루어진 결론도 약속도 아니다. 정교분리는 기독교가 정권과 대등한 세력과 위치에 있을 때 양 세력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서구적 타협의 산물이다. 정치가 모든 분야를 휩쓸되 사생활에까지 침범하는 오늘에 있어서 절대 세력으로 군림하는 정권이 교회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는 정교분리 주장이 유효하며 또 정당한 권리주장이기도 하다. 그것은 약자의 자기보호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력한 정권이 무슨 짓을 해도 오불관(吾不關)하는 것이 정교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상 무서운 착각은 없다.
기독교가 비록 목회적 입장에서만 선다고 하더라도 정교분리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싸워야 한다. 까닭은 교인의 어느 누구도 정권의 영향권 아래 조종받지 않은 이가 없는데 그들이 불의한 정권에 의해서 호도되어도 정교분리의 원칙 때문에 오불관하는 것이 목회자적 양심인가? 가령 이 정부가 소수의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결과로 땅 값 이 치솟고 그와 더불어 집 값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대다수의 생활조건인 전세 값이 폭등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전 가족이 같이 자살을 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교회는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 다수의 교인들에게 위로나하고 피안의 약속이나 하면 되는 것인가? 교회가 사랑, 평화, 정의 등등을 매일같이 설교하지만 그것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세력을 뻔히 쳐다보면서 그것과의 대결을 피하는 것이 교회 밖에 사람의 눈에 위선 이상 무엇으로 보이겠는가!
한동안 국민 사회를 온통 지배하던 서구의 교회는 텅텅 비었다. 그 웅장하게 지은 교회당들이 지금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 이상의 역할을 못한다. 종교심의 고갈 때문인가? 그러나 놀라운 현상은 인도를 위시한 여러 동양계의 다른 종교의 배경을 가진 신흥종교에는 기적에 가까우리 만큼 많은 젊은층들이 모이고 있다. 독일에서도 교회는 일체 나가지 않는 젊은층들이 교회의 테두리 밖에서 2년에 한 번씩 일주일을 계속하는 교회의 날(Kirchentag)이라는 집회에는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운집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들이 종교를 버린 것도 아니다. 주어진 기득권에 안주하며 젊은이들이 당면한 불붙는 사회문제에 등한한 기성교회에 대한 거부 내지 불만인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도 저력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권력의 보호를 받은 기독교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서 억눌리고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그러하다. 그것은 이번 동구에서 일어난 민중운동에서 드러났다. 동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저들은 공산권 밑에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그들의 정체를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정체성에 예민했으며, 마침내 민중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계속 수난의 길을 피해온 역사를 반복했다. 선교사들이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권력과의 마찰을 피함으로 안전지대를 추구한 것이 그 주된 "공로"로 인정되고 있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 민족의 대열에 참여하고 무엇보다도 고난의 역사의 선두에 설 때만이 이 민족 안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으며 생존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회복하는 길은 교회라는 게토 속에 숨어서 추상적인 설교나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아니, 이 민족의 고민에 참여해야 하며, 바로 살기 위해서 당해야 할 고난의 선두에 서야만 한다.
한 집에 강도가 들어 소리를 질러도 그 이웃에서 아랑곳하지 않는 서구적 이기주의가 날로 판을 쳐가는 이 판에 교회마저 개인구원, 개인구원만 떠들어대니 결과적으로는 이 민족 전체를 자루 안에 든 모래처럼 만드는 악역밖에 하는 것이 없지 않는가! 개인구원만이 정말 기독교의 내용이었다면 왜 기독교는 출발부터 피를 흘리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었겠는가! 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그 중에도 예언자들은 예외없이 그 처참한 수난을 계속했겠는가? 만일 우리가 역사적 현실에 초연해도 되는 것이라면 예수는 역사 속에 올 필요도 없었거니와 또 그렇게 처참한 수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에 참여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먼저 해야 할 것은 회개뿐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한국 교회가 살길은 철저한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밖에 없다. 개인이 윤리적으로 이 민족 앞에 저지른 죄, 이 민족 사회를 이토록 도탄에 빠지게 한 죄,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구원만 추구한 죄, 그리스도 이름 밑에 하나로 뭉쳐, 파멸로 치달아 가는 이 민족의 타락의 길을 가로막지 못한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만 한다.
민족통일을 생각할 때 먼저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시대의 극복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아야 한다. 반통일적 현실인 분단 상황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공투쟁전선에 기수로 선 것과 그로 인해서 사랑에 반하는 민족간의 증오를 정당화하고, 공산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무능하다는 불신앙을 가졌던 죄에 대한 회개이다.
우리는 회개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반공주의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자체가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일 것이라는 기독교 바깥 사람들의 단정도 하나의 기우가 되도록 자기 체질을 개선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공산주의는 강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강하다"는 것쯤의 신념에서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민족통일의 문제는 남북분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분단된 한 영역에서도 지역 간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리고 사상적인 차이 등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젊은 세대와 구세대의 대립도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고, 종교(특히 기독교)와 비종교인간의 거리감도 만만치 않다. 이 분열상은 구체적으로 불신풍조라는 것을 낳아 민족공동체 의식을 날로 희석시키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남북교류가 어떤 형태로나 성립되면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그 기득권을 통일을 위해서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구체적으로 교파간 경쟁을 지양하며, 개교회주의에서 해방되며, 교회가 상업주의적, 자본주의적인 사고와 방법에서 탈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물적, 인적, 재산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통일의 제단에 바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러한 비장한 결단이 없으면 한국의 기독교는 멀지 않은 날 갑자기 민족적 유기체에서 떨어져 나간 군살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새누리신문』(창간호), 1990.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