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시편 39, 5-13
1. 시간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기 위한 도구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시간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의 일생이란 긴 역사에로 잘라서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생을 실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괴로움을 지탱해 가기 위해서이다.

시간에 대한 정확한 의식은 자기 갈길, 자기 의무를 완수하기 위한 채찍이 된다. 그러나 반면에 시간은 사람이 설정한 것인데 사람은 이 시간에 계속 쫓기고 있다. 마치 사람이 만든 기계에 인간이 쫓기듯이.

시간을 토막 내면 낼수록 사람은 바빠진다. 그것은 거대한 기계에 마주 선 수공(手工)의 입장과 똑같다. 계속적으로 궤도에 따라 돌아 가는 기계의 어느 부분에 계속적으로 무엇을 맞추어야 하는 수공이 얼핏한 실수로 그 책임을 놓쳐버리게 되면 전체 제조 과정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놓친 책임을 채우기 위해서 쫓아가다가 그 다음다음으로 밀려오는 책임을 놓치게 된다. 그는 앞뒤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에는 아주 손을 들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기계는 공전(空轉)한다.

시간에 쫓기는 인간은 분단된 그 시간 안의 책임을 못했을 경우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못다 한 그때 그 일을 만회하기 위해 뒤쫓다가 계속 밀려오는 다음의 시간이 갖다주는 책임을 못 하게 된다. 결국 당황하다가 어떤 단계에 가서는 멍청히 삶을 정지해 버린다. 그 때 시간은 그 앞에서 공전한다. 그는 시간 밖에서 있게 되며 현실은 그를 아랑곳 없이 계속 진행한다. 기계야 잠깐 멈추어라! 시간아 잠깐 기다려라! 태양아 정지하라! 이것은 시간에 쫓기다 밀려난 사람의 부르짖음이다. 그러나 태양은, 시간은,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이래서 사람은 마침내 살시자(殺時者)로 둔갑한다. 시간을 죽여 버리자―Killing Time; die Zeit totschlagen!―사람은 시간을 죽여버리는 일 또는 시간을 축출하는(zeitvertreib) 재간을 가졌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시간을 아주 조소해 버린다. 소털같이 많은 날인데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날이지. 이것은 시간이 주는 어떤 변동도 묵살해 버리는 수법이다. 시간은 결코 새것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으로 구성된 현실은 그를 역습한다. 시간을 무시하려다가 오히려 그것에 중압되어 신음해야 하는 현실에서 사람은 이 시간에서의 도주를 꾀한다. 그 머리는 시간 밖에 어떤 외점을 설정하는 재간을 가졌다. 그러나 육체와 그 감각은 그런 재간을 못 가졌다. 머리를 따르지 못하는 육체와 그 감각은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래서 그 육체의 감각을 죽여버리는 작업으로 나선다. 그것이 종교적 고행주의로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 시간을 도박하므로 시간의 본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시도가 있다. 어제도 내일도 없다. 있는 것은 요 순간뿐이다.

시간을 순간에 고착시켜 버리려는 시도이다. 모든 감각을 흥분시켜 그 극에다가 시간을 고착시킨다. 감각적인 스릴의 추구가 그것이다. 도망가는 짐승을 뒤쫓아서 거리를 맞추어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에 시간을 정지시킨다. 이러한 사냥꾼의 행위가 확대되면 전쟁에까지 이른다. 도박기구의 초점이 자기가 점쳐 놓은 그것과 일치되는 그 순간에 시간을 점으로 압축시킨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것이 즐거웠던 때의 대명사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른 것이 즐겁단다. 그건 시간은 갔는데 몰랐단 말이다. 결국 스스로 속은 것을 기쁘단다.

이것을 사상과 행동으로 발전시켜 이동화한 것이 실존주의라는 간판을 걸고 등장한다. 순간에 산다는 것이 속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아니! 시간으로 구성된 모든 질서에 항거하자. 시간은 전통을 형성하고 질서를 세우고 가치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런 것들을 쳐 없애자. 그런 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가공적(假空的)인 실재다. 시간에 항거하기 위해서 그것이 디디고 있는 그런 것들을 파괴하자. 때라는 것이 보편율을 만들어낼 권리는 없다. 시간을 토막토막 내어 그 실존에 분배하자. 분단된 시간은 그 이상 내 상전이 아닐 것이며 내 손에 들어온 나를 위한 도구가 될 따름이다. 분배된 시간은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 내 시간이다. 아니 그것은 이미 시간이 아니라 순간이다.

좋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다. 그 순간을 처리할 그 나는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시간 밖에 어떤 외점을 가졌는가? 만일 그것이 없다면 순간은 또다시 시간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말게 아닐까? 그래서 실존주의라는 매너리즘에 허우적거리게 되지 않나?

2. 낡은 해, 새 해(로마 13, 11-14)

마치 새로운 여명이기라도 한 듯이 소란스럽게 맞이했던 1970년도 영원히 지나가려 한다. 많은 다짐도 하고 희망도 걸고 불안과 기대를 안고 맞이했던 한 해이다. 이 한 해에 무엇이 일어났든지 간에 영영이 지나가려고 한다.

한 해가 지남은 삶의 무상을 신호하기에 슬프다. 그뿐이 아니다. 이해는 지나가도 죄책감은 남는다. 하려다가 못다 한 것들이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나 이것은 한 해가 저물 때만 가지는 불안이 아니다. 하루가 지나고 밤을 맞이하면 그 하루에 못다 한 일들이 마음을 고문한다. 깊은 밤이나 연말이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바울은 "여러분은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압니다"라고 한다. 그는 때의 망각을 권하지 않는다. 아니, 때에 대해서 각성할 것을 촉구한다. 그가 말하는 때는 어떤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때이다. 그는 이 때를 '그 때' 보다 구원이 더 가까워진 때라고도 하고 낮이 가까운 때라고도 한다.

그는 시간을 과거에서 계산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을 오고 있는 어떤 것과의 거리에서 계산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간다고 하지 않고 시간이 가까웠다고 한다.

그는 무엇인가 기다린다. 따라서 그 때는 막연한 시간이 아니라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무상의 신호가 아니라 기다림의 궤도이다. 시간은 지나간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타고 앞으로 나간다. 따라서 시간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유상하다. 그러기에 밤이 깊었다고 하면서도 거기 머물지 않고 낮이 가깝다는 데로 곧 옮겨간다.

그는 '낮이 가깝다?' '구원의 때가 가깝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는 낮도 아니며 구원의 때도 아님을 전제한다. 그는 기다림으로써 때에 대한 각성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 이 때는 누구에게나 유용되는 때이다. 이 때는 밤이며 구원을 못 받은 때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상황이다.

밤의 현실과 낮의 현실은 다르다. 낮에 움직이던 것들은 밤이면 자고 낮에 자던 것들은 밤에 움직인다. 밤은 사람을 자도록 강요한다. 사람은 그 강요에 순응하는 것을 의무로 알며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깊은 밤을 '잠에서 깨어야 할 때'라고 한다. 그는 '깊은 밤에는 깊은 잠을'이라는 상식의 세계를 뒤엎고 '깊은 밤에 맑은 정신으로'라고 한다. 그는 이 때가 밤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밤의 강요에 항복하지 않고 오히려 밤을 자기 것으로 전용(轉用)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 그러나 바울은 낮이 되서 밤을 몰아낸다고 생각한다. 아니! 낮이 와서 밤을 삼켜버릴 것으로 믿는다. 그는 말한다.

이 장막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합니다. 그것은 이 장막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5, 4. 고전 15, 54 참조).

그는 죽음 다음에 영원한 생명이 온다고 보지 않고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제 올 낮에 거점을 두고 밤을 맞 이하며 영원한 삶에 서서 죽음을 행하고 있다. 따라서 밤에 살면서도 낮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죽음의 영역에서 참 삶의 맥박을 듣는다. 그러므로 그는 '낮에 행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한다. 낮이 되었으니 낮의 행동을 하란 말이 아니다. 밤에 낮을 살라는 말이다.

낮을 기다림이 밤에서 그를 구해냈다. 그러나 밤이기 때문에 그는 기다렸다. 따라서 밤은 그의 구원의 장소가 된 것이다.

한 해가 저물 때 사람들은 초조하다. 그 해에 저지른 많은 것들에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새해를 기다린다. 새해는 새 출발의 계기를 갖다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한다. 그러나 새해가 어디 있는가? 묵은해 가지나면 새해가 저절로 오는가? 그러한 새해는 아무런 새것도 가져 다 주지 않는다. 낡은 해는 영원히 지나갔어도 그것이 남겨 놓은 업 보는 나를 계속 붙들어 맬 것이며 새로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철든 사람에게는 새해에 대한 희망보다 오히려 세월이 흐른다는 사실에 침울하다. 달력의 새해 자체는 새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11시에서 12시가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달력의 새해가 새로운 가능성이 되는 길은 기다리는 자에게만 있을 수 있다. 기다리는 자는 언제나 12시와 1시의 경계선에서 있다. 기다림은 밤에하는 일이나 언제나 여명과 마주서 있다. 그 사이에는 어떤 것도 개재되지 않는다. 시간이 그 사이를 가로막지 못한다. 까닭은 시간이 곧 그리 움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송년과 새해를 맞는 것은 소란할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자는 그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그 소란을 타고 조용히 임박한 궁극적인 낮의 도래의 소리를 듣는다. 수천년 전에 한 기다리는 이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나의 끝 나의 날들의 길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소서.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허무한지 인식하게 하소서.
당신은 나의 날들을 손바닥 넓이 만큼 만드셨습니다.
나의 일생은 당신 앞에 무와 같습니다.
……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나의 희망은 당신께 있습니다(시 39).

이 시인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상을 실감한다. 그러나 그것에 묻히지 않고 무상을 희망의 장소로 삼는다. 우리 시대의 시인 라베(W. Raabe)는 이렇게 노래한다.

영원은 고요 속에
무상은 소란속에
하나의 뜻은 침묵 속에
땅의 소동을 밟고 간다.
Das Ewige ist Stille
Laut die Vergänglichheit
Schweigend geht Gottes Wille
Über den Erdenstreit.

이 시인은 무상을 가져다 주는 시간의 소란 속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그 소란 속에서 고요한 침묵으로 오는 하느님의 뜻을 듣는다. 그는 무상을 도피하지 않는다. 아니! 그 무상을 타고 오는 하느님의 발자욱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바울이 밤의 길에서 낮의 도래의 소리를 듣고 깨어서 낮의 옷을 입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두움만이 도사려 침묵뿐인데
오. 주여! 내 혼이 당신께 무릎꿇고
두렵고 어두운 데 잠깁니다.
주여 말씀하소서! 나는 조용히 기다리렵니다."
Die Dunkelkeit ist da, und alles schweigt;
Mein Geist vor dir. O Majestat, sich beugt.
Ins Heiligtum ins Dunkle kehre ich ein.
Herr, rede cu, lab mich ganz stille sein.
—Terrteegen

이것은 새해를 깨어서 맞이하는 한 혼의 노래이다.

3. 크리스마스

첫 크리스마스의 고지(告知)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누가 1, 34)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는 시간 자체가 가져다 주는 필연이 아니다. 처녀가 잉태했다는 설화는 크리스마스의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혼한 처녀가 때가 와서 그 약혼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그것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일은 달력의 낡은 해 다음에 오는 새해와 다를 바 없다. 또 낡은 해가 될 새해, 또 자라서 그와 비슷한 아이를 배출하고 늙어 죽을 어린이, 그런 것이 기다림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처녀가 아기를 뱃다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낮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예수가 세상에 난 것은 분명히 달력의 그 어느 시간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아기가 구원자라고 할 때 그것이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해결되리라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란 말이다.

매년 12월 25일은 온 세계가 크리스마스 축하에 들끓는다. 그것은 세계적인 축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달력의 크리스마스지 참 크리스마스와는 무관하다. 달력의 크리스마스는 또 하나의 축제의 날을 증가시킴으로써 시간적 삶을 윤택하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되는 크리스마스 자체는 아무것도 가져다주는 것이 없다.

첫 크리스마스는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무관했다. 저들은 그날을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들이 기다리던 궁극적인 구원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였다. 그러기에 마태, 누가를 제외하고는 그날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 맨 처음 된 마르코복음은 그 날을 전혀 묵살했으며 요한도 바울도 그 날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그들이 초점을 둔 때는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그날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밤의 사건이다. 밤이기에 로마의 정권과 유다 종교인들이 야합해서 무법의 처형을 한 것이다. 그 밤은 철저히 어두운 밤이다. 제자들의 비겁, 유다의 배신, 군중의 무비판은 밤을 상징한다. 그 밤은 하느님 마저도 침묵하는 밤이다. 허무함 그 자체이다.

이 사건은 그 허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이 때가 밤임을 또 그것의 허무성을 철저히 폭로한 사건이다. 바로 이 밤의 사건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새 아침의 빛을 앞당겨 보았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의 수난의 빛을 통해서 첫 크리스마스를 이해했다. 그 아기의 탄생은 곧 구원 자체는 아니었다. 그 아기의 탄생에서 수난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럼으로써 그 아기는 세상에 자리할 처소가 없어서 말구유 위에 나셨다고 했으며 마태오에는 헤로데가 그 아기를 없애기 위해 그 마수를 뻗치었으며 애굽에 도피했다는 기록이 있다. 루가에 전승된 시므온의 예언은 무엇보다도 단적으로 이 사실을 드러냈다.

보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중에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 세워진 분입니다. 또 슬픔이 날카로운 검과 같이 당신의 마음을 찢을 것입니다.

첫 크리스마스는 그 안에 이미 수난을 배태했다. 이 아기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야 한다. 자정인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바울은 첫 크리스마스가 지난 60년 후에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한다. 그가 기다리는 낮은 크리스마스도. 십자가도 또 부활사건도 아니다. 그것은 이제 올 구원, 즉 내림(파루시아)이다. 이 궁극적인 구원의 낮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밤을 낮과 같이 '단정히' 살라고 할 수 있게 했다.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꼭 오리라는 확신은 철저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나? 예수가 이 땅에 왔다는 사실, 그의 십자가 부활의 사건을 궁극적인 구원의 때가 반드시 온다는 구체적인 증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낮에 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때가 밤임을 더 밝혀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것은 그날 자체가 구원이거나 기쁨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그 궁극적인 구원의 낮이 반드시 오리라는 확증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날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