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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이 세계 이 자연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지혜는 이 자연의 법칙을 알고 거기 순응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완결된 존재인가? 그래서 그 안에 그 운명의 핵이 이미 배태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사는 길은 그 안에 있는 가능성을 육성하고 개발하여 그것을 실현하는 일뿐일 것이다.

완결된 세계 안의 인간! 이것이 희랍적인 세계 그리고 인간관이다. 따라서 그것이 비록 그 사유(思惟)를 철학적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종당에는 자연과학적인 영역에 도달하는 길밖에 없도록 됐었다. 까닭은 모든 것은 이미 기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관찰의 대상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기존의 법칙밖에 없다. 사람도 그 어떤 것도 다 이 법칙 아래 연속되어 있다. 그 법칙의 생성 소멸의 과정을 밟는 것이라면 꽃이 피었다가 지듯이 인간의 생도 피었다가 지는 한 현상에 불과하다. 이런 마당에서 인간의 무상을 노래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유한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이 주어졌을 따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유물론에 정착될 수밖에 없으며 마침내 자연 인간 그리고 로보트 사이의 차이란 본질상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서구의 전통(희랍적―자연과학적)이 만든 사회는 역학의 사회이다. 그 안에의 삶이란 바로 그 역학적이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힘(에너지)을 점유하고 그것을 구사하느냐에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보다 많이 그리고 잘 먹으므로 이 에너지를 많이 보유하는 인간이 언제나 우위에 있게 됐으며 민족도 국가도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힘이 곧 진리이다'란 당연한 귀결이며 약육강식이란 그 삶의 철칙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쟁은 불가피의 생존수단이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도, 유물론적 계급투쟁도 그 필연적인 소산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참 의미의 사랑도 종교도 성립될 수 없다. 그런 것들도 모두 에너지 확보의 수단 이상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중추로 하는 그리스도가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 역사를 빚은 것은 그것이 서구인의 손에서 해석되고 조종된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이다.

성서는 인간을 그리고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이것은 역사관과 직결된 문제인데 로마서 8장 18-26절 안에 그 면모가 집약되어 있다.

1. 탄식하는 자연

바울은 지금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자연관이다. 들에 핀 한 포기 꽃을 보고 하나의 우주의 신비의 완결처럼 찬양하는 시인에 반해서 그는 그 아름다움 속에서 슬픔과 고통의 비명을 듣는다. 그는 비관주의자인가?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상주의자의 한 구절 시가 아니다. 그는 이 자연 이 있어야 할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에 머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통이며 해산의 수고이다. 그는 그 신음소리에서 오늘의 부정과 동시에 내일의 긍정의 소리를 듣는다. 오늘의 자연은 허무(Mataiotes)와 사멸(Phthora)의 노예가 돼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에게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의 내일을 기다린다고 한다.

서구적 사고에 젖은 현대인에게 이것은 생소한 자연관이다. 그래서 이것은 신화적 자연관으로 쉽게 처리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성서와 유다교 그리고 동양적인 사고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납득할만 한 것이다. 바울은 이 자연이 이렇게 된 것을 그 자체의 발전 과정에서 온 필연이라고 보지 않고 그렇게 한 이의 뜻에 의해서라고 한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7-18절과 관련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범죄 때문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자연은 그 미래 상태에서 그 본연의 발전을 못하고 있다. 자연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생산하는 것은 그 본래의 발전과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참된 미래에는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해 날 것이라'고 한다.(55, 13)

성서는 자연의 포악성을 본연의 모습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자연의 필연으로 보는 다윈 이후의 자연관과 그것을 거점으로 인간사회의 투쟁을 정당화하는 서구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본연의 자연의 비전을 이렇게 서술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새 세계란 단순히 인간의 도의성의 향상이나 사회 구조의 완결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의 복귀없이 새 세계는 없다. 그러므로 성서의 궁극적 희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을 말한다(이사 35, 17. 묵시 21, 1).

유다 묵시문학에서 그 새 하늘 새 땅의 창조는 모든 식물이 인간의 욕구를 총족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 바람과 구름마저도 향기로운 과일과 사람의 건강을 위한 이슬을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바룩서).

이러한 자연관은 동양인으로서 생소하지 않다. 까닭은 동양은 자연과 인간을 서구인들처럼 유리시켜 보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왕양명(王陽明)의 대학문의 한 소절은 동양적 사고의 그 전형이다.

한 사람이란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는 이이다. 그는 천하를 알기를 한 집같이 한다. … 한 사람이 능히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는 것은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의 속씨(仁)가 처음부터 그러하여 천지만물로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 그러기 때문에 어린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끔찍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새, 짐승이 슬피 울고 떠나는 것을 보아도 반드시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새, 짐승은 오히려 무엇인가 아는 힘이 있는 물건이다. 풀 나무가 부서지고 꺾어지는 것을 보고도 반드시 차마 못하는 마음들이 있다. … 풀 나무란 오히려 살자는 뜻이 있는 물건이다.

이것은 동양인의 사변의 소산이 아니라 그 삶의 현실을 대변한 것이다. 동양인은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켜 생각했기에 산야를 개간하거나 묘를 쓸 때에도 그처럼 조심했으며 심지어 나무 하나 돌 하나 찍거나 옮기는 데도 사람의 몸을 다루듯 했다. 그뿐만 아니다. 천재(天災)를 만나는 경우에도 언제나 자연의 한 현상으로 인간과 유리시켜 생각지 않았기에 인간의 사죄를 빌면서 자연의 노를 달랬다. 우리는 이날까지 이러한 사고를 비과학적이라고 나무래만 왔으며 그것은 근대화에의 가장 큰 장애물로 생각했었다. 분명히 그 표현들은 신화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중요한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생태학은 과학적인 고찰에서 모든 생물, 무생물, 즉 자연 전체가 얼마나 깊은 연관관계에 있음을 밝혀내고 있으며 자연을 하나의 정복의 대상으로만 안 인간의 과오가 마침내 지구, 자연의 운명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의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자연을 한갓 에너지로만 생각하고 그것의 실용가치에만 관심한 결과는 자연을 변질시켰다. 말하자면 욕심을 삶의 동력으로 삼은 서구문명이 자연을 함부로 난도질했기에 자연의 생명성의 순이 계속 잘려 나간 것이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요함이다. 히브리어의 인간 '아담'은 흙이라는 말 '아다마'와 같은 어원이다. 그것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이해이다. 그러나 서구의 사고는 한때 인간을 관념화함으로써 가공적 인간상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관념적 인간관은 인간절대 우위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들어 버렸고 그것이 기술과학이라는 반자연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러한 반자연적 문화는 오늘 지구를 가스통으로 둔갑하게 했다.

쉴러는 인간이 그 고뇌와 더불어 손대지 않은 자연(Welt)은 어디나 완전무결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어디 있는가? 그대로 방치된 자연이 어디 있는가? 비록 사람의 발이 미치지 못한 곳은 있다고 해도 오염된 대기와 물줄기에 의해서 이미 모두 부정을 탔다. 자연은 그 본의와 상관없이 인간의 욕망에 짓눌려 신음한다.

자연은 인간의 숙명과 역사에 말려들었다. 구약의 '신화'가 대지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았다는 신념은 잘못된 것인가?

사람들은 이것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한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정말 오늘의 자연정복은 생의 필수조건 때문만인가!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 전쟁필수품이 있으며 도락(道樂)에 빠진 사람에게 그것을 위한 필수품이 따른다. 오늘의 필수품이라는 항목들은 전쟁의 무기를 만드는 것과 향락의 도구를 만드는 것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출발을 기정사실로 하고 불가피를 내세우는 것이 오늘의 광적 윤리이다.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비관론적 자연관이 아니다. 바울은 자연이 신음하고 있다고 하나 뒤이어 그것에는 희망이 있다고 한다. 그 희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허무한 것에서 해방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 누릴 자유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이 뜻하는 희망은 새로운 인간 출현과 직결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신음은 참 인간이 출현될 미래를 기다림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내일을 위한 해산의 수고라고 한다. 이 해산의 수고, 새로운 세계의 여명을 위해서 참 인간의 출현을 기다린다. 그것을 일러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여기 중요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 서구인들은 자연과 역사를 엄격히 구별하고 자연에는 역사가 없고 역사는 인간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연을 인간역사와 유리시키지 않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의 역사화다. 역사는 단순히 정신사(精神史)거나 실존사(實存史)가 아니다. 이것은 구약과 유다교 특히 묵시문학파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생태학을 가르치려거나 자연론을 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고발하려고 한다. 아니!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다. 이 참회는 자연 자체의 존엄성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창조주 앞에서의 참회요 고발이다. 역사는 필연적인 것과 인간의 죄가 엎치락 뒷치락함으로써 사람은 이 긴장된 쇠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됐다. 본래적인 자연과 인위적 제2의 자연이 더 이상 분해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인간은 욕심이 삶의 핵으로 형성된 전체적 방향에서 개인으로서는 빠져나올 수 없도록 휘말려 돌아간다. 여기 인간의 신음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관심을 인간에게 돌린다.

2. 신음하는 인간

세계가 인간역사를 통해 오는 파괴를 직시하면 인간의 삶의 세계에 대한 관심에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본래적인가, 이 역사는 인간을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형성한 역사 바퀴에 휘말려 신음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인간이라고 할 때 인간 일반을 말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모든 인간이 신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자명적인 본향으로 알고 그 안에서 삶의 보장을 찾아 그것을 구축하기에 급급하다. 지금 신음하는 사람이란 이러한 역사의 끝을 기다리며 새로운 하늘과 땅을 그리워하는 자들을 말한다. 저들은 고난의 때에 산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오고 있는 새 세계에 속했기에 신음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에 당하는 고난은 오고 있는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내일에의 희망에서 오늘의 어려움이나 무상을 견디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사람은 모두 내일에서 오늘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오늘에서 만족하지 않고 내일의 가능성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산다. 그것은 보다 확실한 직업, 보다 높은 자리에의 승진, 또는 보다 행복한 가정생활, 또는 정치적 권력자 아니면 경제계의 세력가, 또는 자기 소질에 따라서 위대한 학자거나 예술품의 창작 등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희망은 현재의 상태는 외적으로써 만이 아니라 자신에 있어서도 만족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것은 이 희망 때문이다. 그의 희망은 그들에게 애쓰고 노력하는 힘이 되어준다.

이에 대해서 그런 것보다는 그런 노력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이 나라는 인격을 훈련하고 개발하고 그리고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희망은 어떤 상(像)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인간이 되리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상을 설정하고 예술가가 하나의 무형의 돌에 자기가 그리는 상을 투영해서 쪼아나가듯이 자기완성을 꿈꾼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정말 미래에 의해서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미래에의 희망이라면 그것이 현재의 삶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며 사나, 그러나 언제나 분열 속에 산다 사람들은 미래에 자기를 관련시킨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래를 희망하면서도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여 자기를 차단하고 있다. 내일은 희망의 대상이면서도 어쩐지 두렵다. 까닭은 내일이 무엇을 안겨 줄지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인간은 미래를 희망하나 실은 미래에 의해서 살지 않고 과거(지금 가진 것)에 의해서 살려는 것이다. 미래란 지금 가진 것을 보다 더 많이, 보다 확실하게 하는 보장 이상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에게 미래란 확대된 과거에 불과하다. 인간 사회의 죄악의 온상이 있다. 가진 자는 그것을 사수하려고 하며 그것을 확대하려고만 한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은 사회기구나 국가조직을 형성 이용한다. 그런 것을 형성하고 집권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비전을 내세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는 순간 그것을 절대화하고 자기욕심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러므로 언제나 내세운 비전과는 달리 역으로 미래를 차단하고 과거의 파수꾼과 '보다 더'를 위한 침략의 모체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인 관계에로 확대된다. 그래서 세계는 개발, 협조라는 미명 아래 실은 약육강식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는 자연을 황폐하게 하며 인권을 함부로 짓밟는다. 이런 마당에서는 나 외의 모든 것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도대체 오늘의 세계의 생산소모는 무엇을 위한 것이냐?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슬로건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냐? 복지니, 행복이니의 규정을 누가 내렸으며 누구를 위한 것이냐? 계급투쟁의 측면에서 역사를 보는 사람들은 집권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밑에서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은 정말 자유인들인가? 아니! 저들도 어떤 힘엔가 끌려가고 있다. 저들은 자기가 쟁취한 자리가 불가항적인 궤도를 타고 줄달음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나 그것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재간은 못 가져 신음한다. 그뿐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질주하는 이 괴물에게 깔리고 강요당하면서 신음하고 있다. 저들은 모두 필연이라는 이름 밑에 울며 겨자먹기로 본의를 역행해야만 하면서도 자기합리화를 위해서 혹을 백이라는 역리(逆理)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현상을 바울은 허무한 것의 예속이라고 한다. 인간은 상대적인 것이 절대로 군림한 현실에 사로잡혀 신음한다. 이것이 바울의 인간이해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죄를 묻는 데 초점이 있지 않고 참 인간이 되는 미래를 투시한다.

3. 참미래

참 미래는 참 인간의 출현과 직결되어 있다. 참 인간(하느님의 아들들)의 특징은 바로 자유다. 이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미래! 그것이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서 해방될 수 있는 날이다.

자유란 어떤 것인가? 바울은 이 자유의 성격을 이렇게 나타낸다. (1) 사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일, (2) 우리 몸은 완전히 속량해 주는 일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사멸의 노예 상태인가?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것. 지나갈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그것을 영원한 삶의 보장으로 알고 '내 것'으로 함으로 그것에 노예가 된 상태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소유욕이다.

인간은 "소유는 곧 삶"이라는 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인간을 속박한 것은 바로 이 소유욕이다. 소유욕은 피조물을 절대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모든 피조물을 변질시켜 악마화한다. 소유욕은 자연을 손에 넣음으로써 비자연화함과 동시에 악마화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을 소유하는 순간, 소유한 것의 소유물이 되어 그것에 완전히 조종받는다. 여기 실재 아닌 제2의 필연이라는 유령이 성립된다.

참 자유인은 기성적인 것을 필연으로 알고 그것에 매여 살지 않고 희망에 의해서 산다. 희망에서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산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나와 관련된 것을 기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이제 될 것, 즉 그 미래성에서 보는 것이다. 가령 대인관계에 있어서 지금의 그를 완성된 것으로 상대해서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래와의 관계에서 본다. 즉 그 이웃은 내게서 언제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그에게 절망하지 않고 그의 미래를 믿으므로 개방적이다. 그럴 때 그는 그 상대방을 내 이용물로 보거나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믿음희망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자유하다. 이것은 바로 사랑의 행위이다. 사랑은 언제나 바란다(희망). 사랑은 언제나 믿는다(신앙). 이런 자유는 자연물과의 관계에서도 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를 전부로 보지 않고 바울처럼 그것이 탄식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단순한 이용물로 보거나 법칙적인 에너지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을 미래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으로만 알고 정복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나는 그것의 미래를 위한 책임적 존재여야 함도 알 것이다.

인간의 사랑 또는 연민의 정을 인간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산천초목에까지 확대시키는 점에서는 동양인의 자연관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동양인의 자연관은 있는 그대로의 것에 머물기 때문에 쉽게 범신론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을 그것 그대로 보지 않고 역사의 틀에서 본다. 그러므로 자연의 현상을 단순히 심미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거기서 미래를 향한 진통의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역사를 이끄는 창조의 하느님의 신앙에서 성립된 자연관이다. 그러므로 이 창조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귀는 인간이나 자연만이 아니라 성령도 함께 탄식하는 것을 믿고 듣는다. 말하자면 오는 모든 것을 이 역사의 끝에서 보기 때문에 정지된 관조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희망을 찾아가는 행진의 대열, 새것을 탄생하려는 진통의 부르짖음으로 듣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을 동적 즉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을 이 끝에서 저 끝으로의 맹목적인 이동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역사는 새 인물의 출현. 즉 인간의 '몸의 온전한 속량'을 위해 진통한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화의 인간이 아니라 몸 전체로서의 새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의 출현은 자연의 이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참 구원은 미래적이다. 그것은 자연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그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어디서 오는가?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계시된 사실에서 이 신념을 얻었다. 그는 예수의 사건에서 이 역사의 끝, 그때 이루어질 새 인간상을 앞당겨 봤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를 새 인간의 맏아들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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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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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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