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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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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1. 때

이 본문에는 '때'에 대한 각성이 있다. 그리고 이 때는 밤이다. 밤은 어떤가? 이 본문에는 그리움이 전제되어 있다. 무엇인가 새것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기다리는 자가 하는 간곡한 편지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끼리 기다리는 자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기다리는 자에게 '때'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는 이에게 '때'는 없고 오직 '흐름'만이 있다. 때를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밤과 낮, 즉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다. 그러나 때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밤이나 낮이 다를 바 없다. 내 선 자리, 내 상황이 밤인지 낮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제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러한 구별이 없는 사람에게는 많은 일 중에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때에 대한 관심은 동양 사람들에게 불투명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계속 반복된다는 자연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때에 대한 관념이 없어진다. 때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한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확실해진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때라는 생각을 계산에 넣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털같이 많은 날에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날이지' 하는 편의주의적 처세철학이 나온다. 이것은 '오늘 못하면 내일하지' 하는 경우에 오늘과 내일이라는 사이의 시간이 그 상황을 어떻게 변동시키는가에 대해서 무지함이 폭로된다. 니힐리즘의 특징은 '시간이 죽었다'이다. 즉 '어제나 오늘이나 같다'고 생각하는 자는 허무주의에 빠진 자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가 "그런 시간에 관한 얘기를 자꾸만 꺼내면서 사람을 못살게 굴지 말라니까! 다른 날과 다름없는 어느 날 저 놈은 벙어리가 되었고, 또 한 어느 날 나는 소경이 되었단 말이야.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겠고, 어느 날 태어나고 어느 날 죽을 것이오. 그리고 어느 날 어느 같은 순간 그만하면 되지 않았소?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 앉아서 아이를 낳을 거지. 해가 잠깐 비치다가는 다시 밤이 오는 거요"라고 말한다.

같은 날 같은 일의 반복만 아는 사람은 지루함밖에 있을 것이 없다. 따라서 그의 움직임은 이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동작된다. 그러나 그 동작은 또 지루함에 도달한다. 그런데 그 동작은 무엇을 하든지 시간을 죽여버리는 일이다. 영어의 Killing Time이나 독일어의 die Zeit totschlagen 등이 그런 현실에서 나온 표현이다. 사람은 시간을 죽이면서 지루함에서 죽어간다.

2. 기다리는 자

이에 대해 바울은 '여러분은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압니다. …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그 때보다 구원이 더 가까웠습니다'고 한다. 때가 그저 영구회전(永久回轉)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바울이 말하는 '여러분'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편지가 주후 60년경에 쓰여진 것이고 보면 저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저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곧 다시 온다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쳐 있었다. 저들은 로마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어두운 밤 같은 상황에 있었다. 저들에게 구원의 때가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 날이 가까왔다는 사실에 관심하기 전에 지금은 아직도 밤이라는 전제다. 낮이 아니고 밤이다. 그 상황은 허무주의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밤이 어두운 것이라면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어둡다. 밤이 외로운 것이라면, 밤이 무서운 것이라면 마찬가지다. 이 차이는 둘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이 밤이라는 것을 폐쇄된 현실로 알고 그것을 전부로 아는 데 대해서, 다른 하나는 밤이 깊었다, 그러나 그것이 낮이 가깝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올빼미처럼 밤에 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어느 날 밤에 시간이 죽은 것을 느꼈다. 밤이 정지되었다. 그 순간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자고 있는 집식구들을 모조리 돌아가면서 깨웠다. 그때 나는 어떤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다가 빨리 누구를 만나서 이것을 알리고 어떻게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생각했는데 이미 통행금지된 밤이었다. 그대로 앉아 있자니 그냥 적막이 심연처럼 다가왔고, 나는 거기 잦아드는 느낌뿐이었다. 시간은 정지되어 나는 거기 고착되어 있었다. 그 때는 내일 아침이 오리라는 것은 도무지 현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625때 충청도 한 산골로 피난을 갔다. 8월 12일까지 서울에 있다가 꿈을 꾸고, 아직 2개월이 더 있어야 유엔군이 들어오리라는 생각으로 그 산골에 있었다. 낮에도 불안에 싸여 있었는데 밤은 더 무서웠다 밤에는 동리 공산당들이 동리 사람을 동원해서 밤새 적군(赤軍) 노래를 부른다. 10월 11일 밤 다음날 새벽에 탈출하기 위해서 새벽을 기다렸다. 그 밤은 무서웠다. 그러나 내일이 꼭 온다는 희망이 '밤이 깊다'를 '아침이 가까와 온다'로 바꾸어 계산할 수 있게 했다.

2.5에 무교회 그룹에 속한 의사 안학수 씨는 자살했다. 그는 그 밤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했기에 그리했으리라. 우리도 그 밤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했다면 부역을 했거나 아니면 죽었으리라. 그러나 그 밤은 지난다고 희망했기에 그날 그날을 보낼 수 있었다.

밤은 깊다. 아니 밤이 깊은 게 아니라 낮이 가깝다. 이것은 희망에서 사는 사람의 계산법이다. 어려움이 깊으면 깊은 만큼 새벽이 다가오고 고개가 높으면 높은 만큼 내리막길이 가까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기다리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밤이 지나고 낮이 오듯. 궁극적으로 다른 현실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기다림! 이것은 인간 구원의 열쇠이다. 마르셀(Marcel)은 인간은 기다림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들이 전사한 것을 알면서도 매일 그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사는 노모를 예로 설명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나? 멀리 간 자식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가? 사놓은 땅값이 오를 날을 기다리는 것인가? 내가 진 빚을 갚게 되는 날인가? 그 따위 말고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나? 정말 궁극적인 구원을 기다림이 없으면 그러한 상대적인 기다림에 삼켜져서 죽게 된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기다렸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3. 기다림과 윤리

무엇인가 기다리는 자는 그 삶이 달라진다. 낮을 기다리는 자는 밤에도 낮의 준비를 한다. 돌아올 애인을 기다리는 자는 헝클어진 머리대로 있지 않고 화장을 한다. 625때 산골 마지막 밤에는 모두 있는 대로의 내복을 입고 신을 신고 밤을 새웠다. 비록 밤이라도 잠옷을 입을 수 없었다.

밤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겨 버린다. 밤의 풍속에 젖고 밤에 치인다. 바울은 암흑에 속한 행위. 즉 밤의 일을 벗어 버리라고 한다. 그것을 연락, 술주정, 음란, 방탕, 싸움, 시기라고 했다. 이러한 것은 로마 사회의 흐름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살다보면 그런 것에 젖어버린다. 이것은 밤의 옷이다. 밤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면 이에 걸맞는 옷을 입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옷을 벗어버리라고 한다. 왜 그런가? 아직도 밤인데? 그것은 여명을 기다리기 때문에 비록 밤중이라도 낮의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한다. 비록 밤이라도 낮처럼 살라, 비록 밤이라도 낮의 옷을 입으라! 그 옷을 일러서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한다. 내일, 밤이나 밤에 살지 말고 낮에 살란다. 즉 내일에서 오늘을 살란다. 내일이 안 왔으니, 내일을 앞당겨 살라고 한다.

나는 지금 곤고하다. 나는 암담한 현실, 칡 빛깔의 한 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 시달린다. 그렇더라도 그 속에 잠기지 말아야 한다. 내일, 그런 것이 완전히 뒤집히는 매일을 살라는 것이다.

밤에 있으면서도 낮에 사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시대 풍조에 타협하며 살 수 없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야 산다는 밤의 현실에서도 낮의 현실로서 양심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수난도 온다. 그러나 내일을 믿기에 이런 수난을 견딘다. 기다림은 밤을 낮으로 바꾸는 기적을 가져온다.

민족시인 한용운은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서 밤과 기다림을 통하여 민족의 희망과 독립을 노래했다.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짜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했더니
개똥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데서 오고 어데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 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 넘어로 가서
악마의 웃음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베어서
일천 토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이 짜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한용운은 그의 시를 통하여 밤을 그냥 밤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운이 무르익는 그런 시간으로 보았기에 33인의 대부분이 민족 변절자의 길로 들어섰어도 그는 기개있게 절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다.

바울은 낮이 가까왔다고 증거한다. 그는 밤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깊은 잠에 들려는 자들에게 새벽을 고하는 닭이 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성탄을 궁극적인 낮의 도래를 확증하는 증거로 믿고 기다리는가? 만약 우리에게 그렇다면 이 사실을 내 이웃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어두움은 남았는데
검은 껍질은 그냥 남았는데
시몬의 가슴에 불을 지른
닭의 울음은 있어야겠는데
너와 너희들은 아직도 잠이 들었는데
너희들끼리의 세대는 껍질 속에 묻혔는데
방탕과 허무에 불을 지른
예루살렘의 닭은 있어야겠는데
밤을 울어 목이 터져도
모가지에 피가 엉켜 꽉 막혀 와도
내가 인젠 닭이 되어야겠다.
이 죽음의 세대를 울어야겠다.
깨어나지 못한 이웃을 위하여
어두움에 눌려 있는 형제를 위하여
홰를 치고 우는 닭이 되어야겠다.
주여, 가슴 속 불을 울게 하소서.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하게 하소서.
시몬의 가슴이 되게 하소서.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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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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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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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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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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