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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1. 밤과 새벽의 분계선

여러분은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야 할 때가 벌써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그 때보다 구원이 더 가까와졌습니다. 밤은 깊고 낮이 가까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흑에 속한 행위를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는 사람처럼 단정하게 행합시다. 열락과 술주정, 음란과 방탕, 싸움과 시기를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읍시다. 그리고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마음을 쓰지 맙시다.

바울은 '여러분은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압니다' 하고 전제합니다. 이 때가 어떤 때인가? 지금은 깊은 밤이라고만 하고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들이 어떻게 '저들이 때가 언제인지 안다'고 전제를 하는가? 그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몸소 당하고 있는 고난과 역사적 상황을 바울 자신이 듣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참 이 때를 아는 사람을 그 때의 역경을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이 때'라는 것은 객관적인 분석자나 중립적 관찰자는 자세히 모릅니다. 몸소 겪어 본 사람만이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압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있는지 어느 정도 압니다. 그 때에 이미 로마제국은 유대인 박해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유태인들은 많이 학살 또는 추방을 당하고,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어 박해를 당했고, 또 로마의 화재를 자신들이 일으켜서 그것이 초토화 되었는데도 로마 시민들이 지금까지 참아오던 학정과 부정에 흥분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시민의 분노의 대상으로, 희생의 제물로 선택한 역사가 이미 벌어졌습니다. 로마는 지중해 일대, 소아시아, 유럽을 석권함과 더불어 군사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압도를 했으나 애굽, 시리아, 바빌론, 희랍 등의 잡신들과 신비주의에 휘말려서 역습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군사, 정치, 경제적인 승리만 되면 다 된다는 생각으로 마침내 정신적으로 혼란의 암흑 시대로 몰아넣게 된 시대입니다.

그래도 저들은 외적인 승리에 기고만장해서 점차 제왕권을 강화, 마침내 그것을 신격화하는 도상에 있었고, 이른바 '평의회'라는 것이 있었으나 사실상 제왕의 손발 노릇이나하는 것이었을 뿐―현재 국회의원들이나 마찬가지로―다른 역할은 없었고, 국정에 대한 관심 보다는 제왕의 그늘에서 방탕의 나날을 보내는 그런 현장이예요.

'여러분은 이 때를 압니다'고 했는데, 그 때는 바울의 순교가 눈앞에 가까이 와 있던 때였고, 불과 10년 이내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될 전야였습니다. 이런 각박한 현실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2. '때'의 양면성

때에 대해서 마벨이라는 사람은 '시간이라는 날개를 단 탱크가 달려온다'고 공포심에 걸린 사람처럼 말했고, 또 스티븐슨 같은 사람은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채 끝나기 전에 일락을 알리는 종소리가 무서워서 떤다'는 조바심에 찬 글을 남겼습니다. 때가 다가오는 것이 그렇게 그들은 무서웠던 것입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라는 탱크는 사정없이 굴러와서 짓눌러 버림으로써 일손을 놓은 채 죽을 것 같은 그런 공포에 그들은 떨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때는 자다가 깨서 맞이할 때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때'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을 가집니다.

하나는 이제는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때를 말합니다. 가령 우리 몸에 병이 나서 악화되었을 때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만회할 수 없는 그런 때, 혹은 국가적으로 정치, 경제, 윤리적으로 부패의 도가 지나쳐서 더 이상 바로 잡을 수 없을 때, 바로 그런 때를 말합니다. 즉 종말적인 때를 말합니다. 하루, 이틀은 괜찮다는 폭이 있는 그런 때를 말하지 않고 폭이 없는 점과 같은 그런 때. 이제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쓰러져서 끝장이 나는 그런 때입니다. 그것을 성서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평면적으로 갈라지는 과도의 때가 아니고, 11시에서 12시로 넘어가는 그런 과도적인 때가 아니고, 12시에서 1시로, 아니 24시에서 25시로 넘어가는 그런 때입니다. 그것은 곧 이미 지났다. 소위 독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이미 늦었다'(zu spät)의 때입니다

둘째로 때가 가까와졌다는 말은 이와 연결된 앞뒤 관계입니다만 민중이 속 깊숙이에서 기다리는 새 날은 이제 곧 온다는 말입니다. '새벽이 온다'그 말은 새벽을 뜻하는 주님이 오고 있는 그 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두운 때와 심판과 주님이 온다는 절망과 희망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 그런 때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시간이 흐르는 것, 때가 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killing time이라는 말을 합니다. 독일인들도 그런 말을 잘 씁니다. 그들은 흔히 die Zeit totschlage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간을 때려잡는다는 것, 때려잡아서 죽여버린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면서 시간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포조라는 사람이 친구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가 지루해서 그런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자꾸 꺼내면서 '사람을 못 살게 굴지 말아. 다른 날과 다름없는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었고, 그 같은 날 어느 날 나는 소경이 되었단 말이야. 어느 날 우리 모두는 귀머거리가 되겠고, 어느 날 태어난 것같이, 어느 날 죽을 것이고, 어느 날 어느 같은 순간!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 앉아서 아이를 낳을 것이고, 해가 잠깐 비치다 밤이 오는 거지.'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만은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의 좌절을 가장 잘 그려낸 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때'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바울은 밤이 깊다고 합니다. 만약 깊은 밤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만 하면 사람은 미치고 말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오늘과 같은 정치 현실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미치고 말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통행금지된 밤중에 5-6명의 불한당 같은 놈들이 달려들어 끌어내고 차에 짐짝같이 처박아도 누구 하나 손 쓸 수 없는 그런 밤중, 아무도 없는데 가택 수색을 당해도 어느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그런 밤중. 이 같은 밤이 깊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밤은 깊다고 하면서 곧 이어서 낮은 가깝다고 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눈, 두 가지 계산법이 있습니다. 가령 아이들이 자란다고 보는 눈이 있는데, 이는 평면적인 과거의 어느 때를 기점으로 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계산법도 있습니다. 즉 인간의 종점에서 볼 때, 그는 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로 가까와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자란다는 것은 하루씩 하루씩 죽는 날이 가까와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밤을 지난 낮에서 보면 점점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기점에서 보면 그것은 새벽과의 거리가 짧아진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언제든지 내일에서 오늘을 계산합니다. 어두움이 깊으면 그것을 낮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벽에서 계산합니다. 점점 가까와오고 있다는 계산법입니다.

바울은 밤이 깊을수록 그 암흑을 넘어서 곧 다가올 여명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어둠을 뚫고 오는 여명을 보고 있고, 그래서 비록 캄캄한 밤이라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고 삽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옥에 넣고 그들이 석방되기를 애태우는데 또 그들의 2세들이 속속 체포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캄캄함을 느꼈습니다. 12시가 지난 것처럼 통행금지가 된 꼼짝 못하는 그런 캄캄한 밤 같은 것을 느꼈을 때, 불현듯이 '새벽이 정말 앞당겨지는구나' 하는 예시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잠 못 이루다가 셀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를 읊어 보았습니다. 이 셀리가 찬 바람이 일어서 다 죽는 듯한 겨울처럼 앙상한 삶을 슬피 노래하다가 기껏 웃어본다는 웃음 밑바닥에는 고통이 도사려 있고, 기쁨을 부르는 노래 소리에도 언제나 한없는 슬픔이 깔려 있는 삶을 말하다가 맨 끝에 가서 "If winter come, can spring be far behind? 겨울이 가면 봄이 어찌 멀리 있을 수 있으랴" 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시인은 삶의 고뇌, 겨울같은 죽은 듯한 현실에서 고민하다가 이제 올 봄을 앞당겨 보고, 이제 마침내 그는 겨울에 도전할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풍을 향해서 '나는 네 울림이듯 네 거문고를 만들어라. 내 것이 저 나뭇잎처럼 떨어지기로 대수냐? 서풍아! 시들어진 나뭇잎을 날려버리고 다시 살려내듯이 내 죽은 마음을 누릿가에 날려버려라. 그리고 내 부르는 노래를 꺼지지 않는 아궁이에서 재와 불꽃을 날리듯이 내 언어를 인류의 마음 속에 흩어주렴아. 내 입을 거쳐서 잠든 저 땅 위에 예언의 나팔 소리를 들려다오 오오! 바람아!' 하고 읊습니다. 이렇게 그는 겨울 자체에 대해서 두려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도전하여 오라, 오라, 그 오는 것을 나는 이용을 하겠다는 승리자의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봄이 온다고 믿기에 그 찬 바람이 오히려 내 생명을 재촉하는 자장가로 들린 것입니다.

3. 밤을 낮으로 살라!

밤이 오면 도둑이 끓습니다. 도둑이 뜸한 것은 대낮인 증거입니다. 밤에는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지고, 더러운 자는 더욱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밤이 깊다고 하면서 깨어서 옷을 입고 낮에서처럼 행동하라고 합니다. 깊은 밤을 낮이듯이 깨어 살라는 말입니다. 낮을 낮처럼 사는 것과 밤을 낮처럼 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밤을 낮처럼 사는 일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새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밤을 공포에 떨지 않고 이용하며 기다립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때묻은 것, 더럽고 치사한 것 내 힘으로 털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겨울 바람이 힘으로 날려버리듯이 털어버리고, 새 날을 맞기에 적합하지 못한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계기로 삼읍시다.

밤에 있으면서 낮처럼 사는 것은 시대에 역류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밤 그래야 살 수 있는 밤에 낮에 사는 사람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양심대로 그 밤의 불의를 고발하는 증인이 되는데 이런 삶에는 수난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내일을 믿기 때문에 그 기다림에서 이 수난을 견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암흑을 이용할 재간을 가져야 하고, 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각박해져가는 이 현실을 비관하거나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밤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야 합니다. 빨리 깊어져야 합니다. 썩을 것은 빨리 썩어야 합니다. 살리려고 하지 말고 빨리 썩어야지요. 빨리 썩어야 그것을 거름으로 해서 새 생명이 움트지요.

우리는 밤을 우리 힘으로 깊게 해서 재촉하여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밤의 어두움은 여명의 태양빛이 내쫓는 것입니다. 태양에 의해서 밤은 도망가는 것입니다. 밝음은 어두움을 삼켜버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믿습니다. 이 어두운 밤을 떠오르는 태양이 내몰리듯 하느님께서 내몬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밤을 밀어낼 내 힘의 한계를 느낄 때, 우리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소위 말하는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우리를 향한 조롱을 감수하면서 그냥 그런 투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라는 비웃음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것을 밀어낼 태양이 뜨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이 밤에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겁내지 말고, 갑옷을 튼튼히 입고, 깨어나서 공포에 질식되지 말고, 현재의 자기를 끝끝내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날이 옵니다. 새벽은 옵니다.

그러나 이 밤에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눌린 자에게 외치는 이 외침을 우리가 계속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밤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깊은 잠에 안주하려는 자들에게 새벽을 고하는 닭소리를 낸 것인데, 우리도 이 새벽의 닭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우리들이 할 일이고, 기도이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시 한편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봅니다.

아직도 어두움은 남았는데
검은 껍질은 그냥 남았는데
시몬의 가슴에 불을 지른
닭의 울음은 있어야겠는데
너희들끼리의 세대는 껍질 속에 묻혔는데
방황과 허무에 불을 지를 예루살렘의 닭은 있어야겠는데
밤을 울어 목이 터져도
목아지에 피가 움켜 꽉 막혀와도
내가 이제 닭이 되야겠다.
내 죽음의 세대를 울어야겠다.
깨어나지 못한 이웃을 위하여
어두움에 눌려있는 형제를 위하여
홰를 치고 우는 닭이 되야겠다.
주여, 내 가슴 속 불을 울게 하소서.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하게 하소서.
시몬의 가슴이 되게 하소서.
- 출처 : 시인 전재동 '닭이 되어야겠다'(1969년)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찮은 닭 한 마리의 외침이 온 동리를 뇌동하게 해서 사건화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닭이 울면 굳게 닫혔던 성문, 옥문, 방문은 결국 열리고야 말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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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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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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