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1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 말은 주기도문에서 가장 본질적인 내용으로 가르쳐진 기도형태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 그러한 기도를 실제로 할 수 있는가. 또는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취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는 심리 사회학적인 문제로 나타낼 수 있으나 우리는 공관복음서 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우리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루가의 특수자료에서만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는 각기 다른 비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 '간구하는 친구에 대한' 비유(11, 5-8)가 나타나며, 그 다음에는 '간구하는 과부에 대한 비유'(18, 1-5)가 있고 마지막으로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비유(18, 9-14)가 나타난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각기 다른 형태가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한밤중에 그를 찾아온 손님에게 빵 한 조각도 줄 수가 없다. 두 번째 형태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어느 과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세번째 사람은 세리인데, 그는 자신의 불쾌한 직업 때문에 국수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비사회적인 인간'이며, 따라서 그 당시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자이다.

첫 번째 경우에서 우리는 그의 친구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있는 어떤 남자를 볼 수 있는데, 까닭은 그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 과부 역시 상대방의 약탈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단순히 그녀는 '강자'로 인해 자신의 인간적인 가치를 빼앗겼을 수도 있다. 하여간 그녀에게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어떤 생활 요소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졸라댔고 그녀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는 그 자신의 비인간화 때문에 고통받는 한 인간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그의 기도는 실제로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세리의 기도는 참된 기도를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업적을 표명하려는 바리사이인의 기도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예는 모두 실제적이며 진지한 기도를 하게 하는 같은 동기가 들어 있는데, 말하자면 인간의 실존적인 고난을 말하고 있다. 순수하며 진실한 기도는 배부른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으며 다만 실제로 무엇인가 부족한 자, 즉 고통에 시달리는 자에게서만 우러나온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그와 같은 상황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

2

가난하거나 또는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면, 즉 소외당하면 어느 경우에나 '하느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가난하기 때문에 부유함을 간구할 수 있으며, 또는 억압당했기 때문에 권력을 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곤궁이란 인간을 유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가 12장 31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볼 수 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러한 권고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따라서 실제로 곤궁에 빠져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말이다.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에게 들에 있는 새와 백합의 삶을 서술함으로써 하느님이 이러한 것들조차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가난 때문에 좌절할 수도 있고, 또는 끊임없이 근심해야 하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전제와 더불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너희들은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 이것과 더불어 예수는 결코 그들의 상황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가난을 극복하는 것과 대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러면 너희들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고려해 보자.

우리가 이 기도를 누가 실제로 자신의 기도로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고 묻는다면, 이것에 대한 대답은 기도의 내용 자체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관련시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체적인 소망이 따라 나온다.

맨 처음의 간구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 따라서 한 달 일 년 또는 평생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즉 하루를 위한 양식을! 이 간구가 그렇게 빨리 추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까닭은 살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보장도 받고 있지 않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이러한 간구를 출애굽 때에 역사적인 만나 사건의 배후에 서서 곧 이해했다. 예수 주위에 모여 있던 청중들 자신도, 즉 '무리들'(ochlos)도 이 기도를 완전히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까닭은 그들 중의 대다수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달리, 예를 들어 '부유한 농부의 비유'(12, 16-21)에 나오는 부자에게는 이러한 간구를 진정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러한 소망을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근심은 그가 소유한 것을 지키는 데에만 해당되었다. 일용할 양식에 관한 간구 다음에 나오는 다른 두 간구는 낮은 자, 즉 가난하거나 또는 무력한 자에 의해 실제로 기도될 수 있다. 까닭은 사실상 강한 자 또는 부유한 자들만이 소위 약한 자와 힘 없는 자 및 가난한 자들에게 무력행사나 또는 다른 짓들을 통해 실제로 범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용서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억압받는 자이다.

세번째 간구도 마찬가지다. 이 간구도 똑같이 그러한 자들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 까닭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곤궁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 또는 부유한 자는 실제로 언제나 의도적인 불법을 행하는 자이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욕심이 시험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소유하고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가 주기도문을 가르친 자들은 배부르거나 또는 힘 있는 자들일 수 없고, 권력을 가진 자와 부를 가진 자 아래에서 시달림을 받은 자들일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구는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는 첫 번째 축복의 말씀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들이 직접 하느님 나라와 결부되어 있다. 루가에서 축복의 말씀 속에 나타나는 가난한 자들은 실제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원래적인 의미를 너무 성급하게 옮겨놓거나 그 의미를 추상화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마태오의 이해에 의하면 그가 '마음이'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이 이미 해석되어 있다. 따라서 마태오에 의하면 가난은 경제적인 상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오가 경제적인 가난을 제외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축복의 말씀에 나타나는 가난을 마태오의 의미에서 이해한다 할지라도.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배부른 자는 없으며, 가난에서 고통받는 자만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구를 실제로 인지할 수 있으며 이 간구를 진지하게 기도드릴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임박한 하느님 나라에 직면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

끝으로 우리가 큰 만찬에 관한 비유를 루가의 이해(14, 16-24)에 따라 고찰해 보자. 이 비유는 같은 동기를 반영해주고 있는데, 그러나 특정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무엇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 서술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직면하여 두 가지 각기 다른 인간의 계층을 성찰하고 있다. 한 층은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를 거부하는 자들을 특징지우며, 다른 한 층은 그 초대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계층이다. 한 층은 가진 자들인 반면 다른 한 층은 가장 가난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가난한 자들, 불구자들, 절름발이들, 맹인들 등 간단히 말하면 이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첫 번째 사람들은 원래 초대된 자들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초대받은 자들이 아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초대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두 번째 계층은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계층을 다음과 같이 성격지을 수 있는데 첫 번째 계층에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결코 스스로 요구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반면, 다른 계층은 실존적인 필연성에서 이 기도만을 요구해야 한다. 이 두 계층의 구체적인 차이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마태오의 이해는 이 두 번째 계층의 구체화가 일반화를 통해서 제거되면서 이러한 대조를 퇴색시켰다. 루가의 이해에 의하면 가장 가난한 자들은 복되다고 일컬어진다. 까닭은 그들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를 무조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거절하는 자들은, 부유한 자들에 관한 대조가 명시되어 있는 루가에 의하면 축복의 말씀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바로 그들의 가진 것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소유 또는 재산이 임박한 하느님 나라에 직면하여 구별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구는 초대를 위한 전제이다. 초대 자체는 분류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있다. 초대는 현존하는 우선권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두 계층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구는 모두에게 말을 걸어온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 나라에로의 이러한 초대가 배타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면 따라서 이것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특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전적으로 인간의 태도, 즉 그가 이 초대에 자신을 열어 보이느냐. 아니면 이것과는 반대로 자신을 닫아 버리느냐 하는 태도와 결합되어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회적인 상황에 부착되어 있지 않다. 달리 말하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무조건 부유함 및 소유물과 대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유함은, 이러한 간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인간들이 이러한 간구의 내용에 따라 실제로 살 수 없다면, 이것은 그들이 임박한 하느님 나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고찰은 우리에게 복잡한 문제를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겨난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이와 똑같은 내용과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안락하게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와 그리고 가난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간구가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가지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가진 자는 가지지 '않은 것처럼'(hos me)"라는 바울의 진술을 하나의 열쇠로서 기억한다. 이러한 바울의 실천(Praxis)은 확실히 해결의 지침서일 수 있다. 그러나 hos me의 윤리가 현재의 소유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향윤리(Gesinnungsetik)로만 잘못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실현하기 위해서, 소유에서부터 자신을 실제로 독립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구가 진지하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4

마르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문귀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이 말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복음서가 예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가 나타나지 않았었다면, 그의 복음서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장 15절에는,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잘 알려진 바대로 예수가 행한 설교 내용의 요약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요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마르코복음은 하느님 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그의 복음서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예수가 나타나지 않았었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의 의미를 복음서들 가운데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오랫동안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뜻을 다만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만, 예를 들자면 비유 안에서만 찾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진정 무엇인가를 복음서들 안에서 찾고자 한다면 예수의 행위 전체를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마르코복음 첫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구절을 본인은 이렇게 이해한다. 즉 마르코는 어떤 교리적 진술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쓰려고 하는 것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의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단지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요 설교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시켰다. 예수의 말씀이나 메시지만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본인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한다.

물론 예수의 생애는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특징지워져 있다. 그러나 마르크가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가 군중(ochlos)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르코는 예수를 홀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특히 갈릴래아에서 예수는 거의 언제나 오클로스(ochlos)에 둘 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르코복음을 세밀히 관찰해 본다면 오클로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예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가 있는 곳에 오클로스가 있고, 오클로스가 모인 곳에 예수가 찾아 간다. 마치 오클로스는 예수의 일부이고, 예수는 오클로스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클로스가 예수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클로스가 누구냐는 것을 물으려면 그들의 특징이 무엇이냐를 살펴보면 된다. 그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 낙담한 자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세리와 여인들과 어린이들도 있었다. 사실 그들은 당시의 기존체제에 의하여 '죄인들로'낙인찍힌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주제가 취급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을 이러한 오클로스와 관련시킬 때, 그들을 단순히 루가가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로만 볼 수 없고, 보다 넓은 의미의 가난한 자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한마디로 특징지우자면 소외된 자들이다. 즉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의 기존체제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회의 체제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지배계층에 의하여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박탈당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말로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열고 자신과 일치시킨 대상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오클로스를 아무런 조건없이 그들의 생긴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예수는 오클로스를 친구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예수가 <죄인>이라고 불리운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친교를 가졌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현실적인 삶 속에서 그들과 친교를 가졌다고 하는 구체적인 증거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제로 친교를 실현하였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미리 가지고 있던 것을 그들에게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오클로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클로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긍정이다. 예수의 이러한 태도가 실제로 그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까닭은 그의 태도가 현상, 기존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현상과의 극단적인 갈등은 특히 마르코가 기술하고 있는 예수의 수난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는 오클로스를 예수의 가장 친근한 친구들로 묘사하고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그의 최대의 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예수가 가난한 자와 부자, 억눌린 자와 지배계급 사이의 갈등 한복판에서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나라'(Reich)로 형상화한 악마적인 세력에 대한 그의 투쟁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와 같은 예수의 태도를 가능하게 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였다고 하는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 확신은 팔복 중 첫 번째 복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너희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