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기다림
묵시 22, 12-13
1

"내가 속히 오리라." 이것이 요한묵시록의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걸 바꾸어 말하면 오리라는 그를 기다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묵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무수한 박해를 받았고, 또 큰 박해를 목전에 두었거나, 그런 것이 일어날 전조 앞에 선 그런 상황에서 쓰인 말씀입니다. 이제 곧 임한다—하여튼 그 날이라 했거나, 혹은 그 나라라 했거나, 혹은 주님이라고 했거나—그 날이 곧 올 것이라는 말씀은 묵시록의 주제만이 아니고 성서 전체의 주제입니다. 복음서의 설교의 중심도 결국 하느님의 나라가 곧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도 예수의 다시 오심의 선포가 그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올라가신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 크게 보아 교회의 역사는 이제 다시 오실 그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역사입니다. 요한복음도 후반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다시 오실 예수를 거듭 강조합니다.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고 그리고 다시 오리라."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 내림의 기다림이 중추적인 기대가 되어 있는데 그것이 좀더 확대되어 우주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탄식하면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16세기에서 20세기의 초반에 이르는 동안 사람들은 어떤 새것에 대한 기다림을 갖지 않았습니다. 지금 눈앞에 되어가는 일에만도 취하고, 또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만 잠겨 있어, 오히려 어떤 돌연한 사건이 개입되지 않을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묘한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과학의 발달에 의해 점차적으로 이룩될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기대에 부풀고 있는 한편, 전혀 다른 새 세계를 기다리는 마음이 또한 그만큼 부풀어 가고 있습니다. 블로흐(Ernst Bloch) 이래로 희망, 혹은 기다림이 철학의 주제가 됐습니다. 사람의 삶은 기다림에서 현재가 결정되고,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나하는 것이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 뒤에 신학도 역시 그 주제가 희망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희망의 신학'이라는 것이 한창 팽창해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기다림, 그것은 오늘의 무드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을 깊이 해석해 보면 역시 새것에의 기다림을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다린다는 사실은 산다는 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삶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기다림으로 가능합니다. 기다림은 곧 삶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다림은 어떤 존재의 주변에 있어 가질 수도, 안 가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 자체요, 존재 구조성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이 없음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살았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2

사람은 사실상 어떤 형태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내일을 기다리고, 금년은 보다 나은 명년을 기다리고, 부모는 자식을 클 날을, 학생은 졸업을, 약혼자는 결혼 날짜를 … 이런 등등으로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이루어져도 기다림은 정지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기다림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또 기다립니다. 이것은 자기의 눈앞에 구체적으로 설정한 이러한 기다림의 대상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궁극적인 것이 너무 막연하니까 시간을 토막내고, 사건을 토막내서 기다림의 표상으로, 기다리는 길의 징검다리로 하는 것이 보통 우리가 하는 기다림의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실상 내가 설정해 놓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이름은 짓지 못하지만 다른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기약이나 확증도 없이 덮어놓고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구조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처럼 우리는 아무 약속도 없는 그 무엇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상과 약속, 또는 그 약속의 담보를 분명히 갖고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다림은 바로 이런 기다림입니다. 성서에서는 막연한 것을 기다리거나 혹은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만났던 그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오리라고 한 약속의 확증을 가진 기다림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는 갔습니다. 슬픔을 안겨주고, 가도 억울하게 갔습니다. 그러나 꼭 다시 오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약속만이 아닙니다. 약속이 참된다는 실증으로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이 약속의 신표입니다. 이 구체적인 확증을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입니다.

"내가 속히 오겠다"고 한 그이는 또한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이걸 이런 관계에서 풀이해 보면, 알파는 사랑하던 때, 처음 만났을 때 인연을 맺었던 때 곧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는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메가입니다. 이것은 그가 반드시 올 것과 그의 사랑의 완결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말 만났던 그이는 반드시 다시 올 것이라는 그런 확증으로서 그는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와의 관계는 알파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메가가 온다는 것입니다. 묵시록에는 2장에 그가 흰 돌을 준다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흰 돌이란 희랍의 법정에서 쓰는 것인데 배심관들이 흰 돌과 검은 돌을 들고 앉아서 피고가 유죄면 검은 돌을. 무죄면 흰 돌을 던지는 그런 흰 돌을 말하는 것입니다. 흰 돌을 그가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흰 돌 위에는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준 흰 돌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오면 바로 기다리고 있던 그였음을 입증하는, 또 그가 나를 분명히 받아들일 그러한 신표입니다. 이 흰돌을 우리에게 준 그이가 이제 곧 오겠다고 합니다. 속히 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묵시록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이 기다리는 무리는 그저 막연하게 있는 그런 이들이 아니고 절박한 상황에 있습니다. 위기에 놓여 있고, 억울함에 사로잡히고 원수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는 그런 이들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에는 "오실 그이가 오면 저 포악한 자들은 전멸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 억울함에서 풀어 주고 자기 품에 안아 줄 것"이라는 집념 혹은 신념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염원이 "생명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문을 통하여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 두루마기를 깨끗이 빠는 자는 복이 있고 …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란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악하는 자는 다 밖에 있을 것이다"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들이 함께 섞여 있지만 이런 것들이 완전히 갈라지는 그 날, 그가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을 믿는 그 날을 그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실상 무엇인가를 참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토막난 어떤 때의 어떤 일 말고, 정말 궁극적인 때 궁극적인 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이런 기다림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캘린더의 절기들 그것이 부활절이든, 오순절이든, 크리스마스든 이런 것들은 궁극적인 그 날은 아닙니다. 단지 이제 올 그 날에 대한 하나의 신표, 그가 주고 떠난 신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날들과 시간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그가 꼭 올 것을 재확인합니다. 단지 그것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올 것이라는 이 기다림의 신념을 갖지 못하면 이러한 날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그이는 이미 우리가 만난 이입니다. 만나지 않았으며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언제 만났느냐 할지 모르지만 정말 내 마음에 기다려지면 우리는 그를 언제, 어떻게인가 만났습니다. 만난 그이는 이제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가 속히 오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이 묵시록의 기자는 이 글의 붓을 마지막으로 놓으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대표하여 몸 전체로 이런 고백, 아니 이런 기도, 소원을 말합니다.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은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결론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했을 때나, 무슨 일을 당했을 때나, 그것이 슬펐던, 기뻤던 혹은 수난 속에 있었던, 어떤 암흑 속에 있었던지, 혹은 성공, 사랑, 심지어는 싸움, 아니 도적질 … 아니, 그 이상의 어떤 짓을 했던지 간에 마지막으로 내 말이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것이 내 마음에서 나오는 참 소원이라면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3

그런데 그의 오심은 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오심은 나의 기다림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는 자에게 그는 올 수 없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네가 열어주어야 나는 들어간다"는 말씀은 이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가 기다려야 그는 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는 복음서의 말씀은 이 내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는 다름아닌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는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용운 씨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됐어요. 어서 오세요.
당신은,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참 삶의 깊이를 체험한, 참 바로 알고 있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즉 내가 기다림이 없이 그가 오실 수 없습니다. 내 기다림과 그가 오심은 동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기다림에 어느 정도 지쳐서 그가 오신다는 말씀에 마비되기 쉽습니다. 모르는 동안에 우리도 이처럼 마비가 되어서 기다림을 포기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 내게 남은 일이야 자식들이 제 구실하는 것을 보는 일밖에 없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비참하게 보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그 기다림을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가 오셔야 합니다. 정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이 기다림이 우리에게서 떠나면 우리에게 준 모든 약속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날은 꼭 온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은 기다림의 민족입니다. 그 숱한 야화는 전부 기다림으로 차 있습니다. 망부석 이야기 같은 것은 참 한국적입니다. 그 모든 전설들은 한국인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 어미 같이 된 바위를 보고서 저것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돌이 되어 버린 어느 여인이라고 한 것은 어떤 면에서 자기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돌 같이 된 한국인의 마음을 거기 투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인은 이 기다림에 지쳐서 어떤 의미에서 몸을 더럽힌 민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그 때는, 그이는 꼭 옵니다. 그 날이 꼭 온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요, 그리스도인의 임무입니다. 한용운 씨는 그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그 님에 대해서 그 님은 처음 만났던 님이었기에, 이미 만났던 님이었기에 꼭 올 것이라는 마음을 계속 노래로 읊고 있습니다. 그 님이 잃어버린 한국이었는지, 혹은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쳐 있는 한국민족에게 그런 노래를 부르고, 또한 절망에 잠긴 자기 마음을 다시 깨워 일으키기 위해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나지 않은 것도 님이 아니요,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을 만났을 때 웃음을 주고
떠났을 때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 웃음보다
떠날 때 눈물이 좋고
떠날 때 눈물보다도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 있습니까.

참 마음에 사무치는 표현을 했습니다. 한번 만났던 그이니, 그 이는 꼭 오고야 말 것입니다. 나를 울게 한 그이는 꼭 나를 웃게 할 것입니다. 그는 이런 희망을 걸고, 이것을 기다리는 한국의 마음을 다시 살리려는 노래를 읊은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슬픈 현실 속에서도 역시 그날에 대한 기다림을 잃지 말고, 삶에 지쳐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어 던져버린 내 이웃에게도 그가 꼭 온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참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