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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묵시 22, 10-20

요한묵시록은 '내가 속히 오겠다'는 약속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다림이 그 기조(基調)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묵시록은 '약속'과 '기다림'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요한묵시록은 벽두부터(1, 4) 주님을 "장차 오실 분"으로 전제하고, 여러 교회에 대해서 '속히 오겠다'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다림의 고백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라나타'라는 이 기다림의 고백 속에는, 절박한 위기에 직면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결단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기다림'의 정신과 자세에서 많은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1. 왜 기다리는가?

그런데 어째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려야 했던가?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할 역사적 상황은 무엇이었던가? 이것은 당시 아시아 일곱 교회에 한 말씀 중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열외없이 "수고와 인내"의 삶에 처해 있었다. 그중 서머나교회는 "환란과 궁핍"을 겪고 있었다. "보라, 악마가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던지려 한다. 너희는 환란을 당할 것이다"(2, 10). 이것은 이미 박해가 시작됐다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투옥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버가모교회에 대해서는 "네가 어디 사는지 안다. 그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2, 12). 그들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으며, 구체적으로는 "나의 신실한 종인 안디바가 사탄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죽임을 당했던"(2, 13) 처지에 있었다. 박해가 죽음으로까지 번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17장 16절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만이 알고 있던, 일종의 은어라고 할 수 있는 '음녀'라는 말을 빌려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여인(음녀)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7, 6). 피에 취할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린 현실이었다. 20장 4절에는 "예수의 증거와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를 증거하다가, 하느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증거하다가, 결국 목베임을 당했던 당시의 역사적 정세를 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를 기록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을 추적해보면, 로마의 카이저 도미티아누스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17장 11절에 "여덟번째 왕"이라는 말이 있는데, 카이저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1대 카이저로 본다면 8대 카이저는 도미티아누스에 해당한다.

13장에서는 도미티아누스를 다시 살아난 네로라고 암시한 데가 있다. 그만큼 도미티아누스는 잔인무도한 카이저였다. 그는 자신을 '우리의 주, 우리의 신'으로 부르도록 온 국민들에게 강요했고 주후 96년에는 그것을 칙령으로 공포했으며 만일 그것을 위반한 자에게는 심지어 '불경죄'로 몰아 처형까지 시켰다.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복종할 리가 없다. 결국 로마의 판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정치적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한 데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박해의 정황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더욱더 절실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라나타'는 그만큼 더 간절한 절규가 되었다.

2. 누가 기다리는가?

그렇다면 누가 기다리는 것인가? 기다리는 자, 곧 '마라나타'를 부르짖는 자는 한마디로 박해를 받는 자이다. 이 세상에 안주하고 땅의 보장을 받는 자에게는 기다림이란 없다. 아니 그런 자에게는 '마라나타'는 오히려 두려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라나타'를 부르짖는 자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불의한 것을 보고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불의를 보고 견딜 수 없는 자만이 '마라나타'를 갈구한다.

요한묵시록에는 당대의 '불의'를 여러 가지로 나타내는데, 그것을 집약하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인간을 한 조직 속에 감금하여 노예로 만드는 불의한 권력이다. 이 권력은 묵시록 여러 곳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모든 족속과 백성과 언어와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10, 11; 13, 7; 17, 15)이다. 이 구절 가운데 '언어를 다스린다'는 것은 언론의 통제를 의미한다. 언론의 통제란 어느 시대이고 독재권력의 구체적 상징이다.

또 하나는 "세상의 상인들"이다. 이 상인들 역시 당시의 박해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그들의 '불의'는 여러 가지로 열거되어 있다. 그 중 18장 11절 이하에 보면 그들은 "금, 은, 보석, 진주, 고운 삼베, 자주옷감, 비단, 붉은 옷감, 각종 향나무, 각종 상아기구". 그리고 더 나아가 "계피, 향료, 향, 몰약, 유향, 포도주, 감람유" 등, 갖은 사치스러운 것을 다 팔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노예와 사람의 목숨"까지도 팔고 샀다.

이 전체를 요한묵시록은 한마디로 '대도시'란 상징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권력 밑에서 최대의 사치를 누리고 돈을 벌고, 마침내 사람의 목숨까지 파는 상인들이 "땅의 권력자가 되었고 모든 나라가 네 마술에 속아 넘어갔고, 예언자들과 성도들의 피와 땅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의 피가 이 도시에서 발견되었다"(18, 23-24).

이러한 불의 속에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자에게는 '마라나타'는 필요가 없다. 아니 바로 그러한 무리가 땅을 점령한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의로운 자만이 기다린다.

3. 누구를 기다리는가?

그러나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막연하게 기다리지는 않았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들은 반드시 '오겠다'고 약속한 그분을 기다렸다.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니까 가다린다는 소위 존재론적 인간관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표류된 사람이 구조선을 기다리 듯 그처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꼭 오겠다고 약속한 그이를 기다리는 것이다.

성서의 '기다림'은 이미 만났던 그이를 기다린다. 따라서 우리의 기다림은 약속과 확증을 갖는 기다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약속은 단순한 말의 약속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약속의 신표(信標)를 남겼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일처럼 훗날에 틀림없음을 보이기 위하여 서로 나누어 가졌던 칼이나 거울처럼, 그러한 신표를 주고 갔다. 이 신표가 바로 부활의 사건이다. '부활의 사건',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주고 간 신표이다.

그런데 이 신표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흰 돌'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흰돌을, 그 신표로서 믿고 있었다, 원래 흰돌은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피고와 무죄를 나타낼 때 들어보이는 표시로 사용했거나, 혹은 왕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 입장할 때 패스포트 대신에 사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몸에 흰 돌을 지니고 다니면서 그것을 내보임으로써 서로를 알아보는 동지식별의 암호로 삼았다.

그들은 이처럼 구체적인 신표를 주면서 다시 오겠다는 그 약속을 준 그 이를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곳 이곳이 바로 교회다.

4.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기다린 것은 단순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옛것에 대한 감상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그들의 기다림에는 가장 중요한 기대와 목표가 있다. 그것은 그의 오심이 낡은 것에 대한 하나의 '심판'이 된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그런 권세와 상인들의 횡포가 사라지고, 그 세계에 안주하면서 노래하고 피리불고 춤추는 무리들이 사라지는 세계(18, 22), 곧 모든 불의의 세계를 물리치고 하느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기 위하여 "주는 죽임을 당하셨고, 그 피로 모든 족속과 언론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해방하셔서) 하느님께 드리고", "주께서 그들로 왕국을 이루게"(5, 9)하는 그런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세계에 대한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때는 빨리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지 않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렵니까? 또 우리의 피의 원수를 갚으시지 않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렵니까?"(6, 10) 하는 애달픈 기도와 절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새 세계를 기다렸다. 암흑이 극심한 한복판에서 그들은 기다렸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그들의 기다림의 절박함이 있었다. 암흑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보다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서 전반에 널리 깔려 있는 생각이다.

암흑의 심화는 위기와 심판의 전야이다. 요한묵시록 22장 10절에는 "때가 가까왔으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인봉하지 말라'는 말은 '공개하라'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도, 의를 행하는 자도 다 알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때가 가까왔다'는 말은, 검은 것과 흰 것이 뚜렷이 갈라지는 '위기'를 나타낸다. 위기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이기 때문이다. 보통 때는 흑백이 모호하고, 누가 누구인지 불분명하지만. 위기에 직면하면 그것이 분명히 가려진다. 그래서 그것은 신화의 의미를 빼고라도 심판이 된다.

그런데 암흑이 짙어지고 불의가 점점 드세지는 이 위기는 곧 '여명'을 고하는 하나의 전주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그래서 묵시록은 이제 올 주를 가리켜 '빛나는 새벽별'(22, 16)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예수가 분명히 온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시사다.

5. 어떻게 기다리는가?

주가 분명히 온다는 이 인디카디브(직설법)에는 언제나 인페라 티브(명령법)가 따른다. 이것은 성서의 어법의 특징인데 '내가 속히 오겠다'는 이 약속은 동시에 더욱 의롭게, 더욱 거룩하게 현재를 살라는 명령을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위로와 약속을 하면서도 동시에 명령을 한다. '죽도록 충성하라' 또는 '흰 옷을 깨끗이 빨아 입어라 또는 꼭 이겨라'는 명령들이 그것이다. 특히 사데교회에 하는 말씀은 가장 충격적인 명령이다. "죽어가는 남은 자들에게 힘을 넣어 주라"(3, 2). 이것은 맥이 빠지고 희망을 잃고 죽어가는 저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지 힘을 넣어주라는 명령이다.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힘차게 싸우면서 현재를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기다림의 본질이다. 정말 기다리는 자는 방에만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눈물이나 짜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묵시록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신부'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참으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그 자식을 거느리고, 손에 피가 맺히도록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한다. 그 행위가 곧 기다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실 그이를 확신하기 때문에 [마라나타]하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힘차게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만의 기다림에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망부석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그대로 돌이 되었다는 아내처럼, 기다리다 지쳐버린 민중을 갖고 있다. 우리는 비굴함과 체념과 절망에 빠져 시들어가는 저들을 살려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민중 전체가 '마라나타'를 자신있게 외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그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먹구름이 계속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수는 없다. 절망은 우리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조국의 광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그 '님'이 빨리 오지 않아서 속이 탔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애절함이 다음에 잘 나타나 있다.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고,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날 때 웃음을 주고,
떠날 때 눈물을 줍니다.
만났을 때 웃음보다,
떠났을 때 눈물이 좋고,
떠날 때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 있습니까?

다시 만나 웃을 때가 어느 때일까? 그게 한용운이 기다리는 조국인대 그 조국은 비록 분단됐을망정, 이미 왔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기다린다. 한용운의 심정으로 그렇게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는 조국은 어떤 조국인가? 그것은 정의와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참된 민주의 통일조국이다. 이 조국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마라나타'라고 한다.

물론 이 기다림은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마라나타'는 그보다 차원이 높은 데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실현될 때,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때이다. 그래서 '마라나타'를 2000년을 두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그 대열에 끼어서 오늘도 우리는 '마라나타'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속히 오겠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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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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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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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설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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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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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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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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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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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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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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