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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1

자유란 본래 희랍적 개념이다. 희랍 사람들은 자유를 폴리스(도시 국가)와 결부시켰다. 폴리스란 대우주의 이데아가 땅 위에 실현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폴리스의 질서는 '누스'(nous)라는 우주적 법칙이다.

그런데 폴리스 안에서는 인간이 두 계층으로 나뉜다. 하나는 노예이며, 하나는 자유인이다. 노예는 생존권의 보호를 받을 권리도 없었고 또 폴리스에 참여할 정치권도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자유인은 폴리스의 법의 보호를 받아 생존권을 누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참정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인이라고 하여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스'에 근거한 국가의 법을 따름으로써 국가에 충성하고 목숨까지 버릴 자유를 갖는 것이다. 즉 희랍적 자유의 개념에는 기존 질서라는 제약이 있었다. 이런 사고는 그대로 서구의 전통이 되었다. 괴테는 "법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희랍의 폴리스가 무너졌을 때, 자유의 의미는 내면화됐다. 폴리스가 있을 때는 그 법과 자기의 이성을 일치시키는 데서 자유의 뜻을 찾았으나 그것이 무너지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안에 있는 영원한 법칙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데서 자유를 찾게 되었다. 그러기 위하여 인간들은 자기 안에 있는 감각적인 욕구의 줄을 끊고, 자기 안의 우주적 질서인 이성에 매달림으로써, 외계의 영향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것이 스토아적 자유이다.

성서에는 이 같은 자유의 개념이 없다. 구약에는 자유에 해당하는 명사는 따로 없고, 다만 '무엇에서의 해방'이라는 뜻으로 가진 동사만이 있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성서에서 충성의 대상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국가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고 해도 그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행위에서이다. 이처럼 성서에는 희랍의 폴리스에서처럼 영원한 법의 소유체인 국가개념은 없고, 단지 하느님의 뜻을 시행하는 공동체만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희랍의 '이데아'의 자리에 '하느님의 뜻'을 놓았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데이라는 것은 세계 또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사변적 관조(思辯的 觀照)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존재와 운동의 기점이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쟁점이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은 동적 의지(動的 意志)다. 그는 정점(靜點)이 아니고 이 세계, 이 역사 안에서 인간을 변화시켜 어떤 궁극적인 데로 이끌고 가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란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유하게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보낸 그리스도가 이 세상, 이 인간을 낡은 것에서 '해방한다'는 뜻이다. 악한 것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 낡은 것에서의 자유라기보다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교의 자유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자유란 독립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이 해방운동에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다. 이 역사를 악의 세력에서 해방하는 운동에 가담하는 것, 여기에 바로 '자유'를 위한 그리스도교 운동의 본질이 있다.

2

그렇다면 예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유하게 했나?

마르코는 "때가 차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를 존재케 하는 법칙으로서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낡은 세계를 새 세계로 변혁시키는 하느님의 행위를 선포한 것이다.

인간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궁극적 현실 앞에 섰다. 그 앞에서 '회개하라!'는 것은 이 낡은 세계에서 '자신을 해방하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도래의 선포는 그러므로 낡은 세계에 매어있는 인간에게 던지는 자유의 선언이다.

루가는 이 자유의 선언을 구체화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루가 4, 18-19).

이것은 이사야 61장에 있는 예언자의 말이다. 이 선언은 '주의 은총의 해'를 전제한다. '주의 은총의 해'는 인간의 궁극적 해방과 자유가 실현되는 때로서 성년(聖年) 또는 희년(禧年)이라 한다. 이것이 곧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때이다. 이러한 궁극적 미래 앞에서 해방과 자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이 다같이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일, 그런데 이 일이 예수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이것을 정신화(精神化) 또는 '종교화'(宗敎化)해 버린다 그러나 이 말은 외적인 역사적 상황과 내적인 정신적 상태를 구분할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이사야서는 모든 예언서가 그렇듯이, 역사적 상황에서 실제로 포로되고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한 말이다. 바벨론 포로생활의 온갖 쓴 경험, 그 안에서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 말할 수 없는 그들이 슬픔과 비참을 목도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불신앙과 절망에서 재기하도록 저들을 권고한 말이다. 이 말은 정말 구체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글에서 눌린 자의 불쌍한 상태에만 눈을 돌리고,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해방만을 생각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역사적 의미를 간과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가난한 자가 있으면, 가난하게 하는 자가 있고 눌린 자가 있으면 억누른 자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위의 선언이 해방과 자유의 선포라면 그것은 동시에 현실적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불의한 세력에 대한 싸움의 선언이기도 하다.

'주님의 은총의 해'란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의 때이다. 그것은 정치적 차원을 넘어선 하느님만이 줄 수 있는 새 세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는 과정은 정치적 차원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성서가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된 자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산상설교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전제하면서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그리고 미움받아 내어쫓기고, 욕먹고 누명을 쓴 자들을 축복했다. 왜일까? 이것은 윤리나 종교적 가치판단과 상관없이 순전히 사회, 정치적 부조리 속에서 신음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에 대한 자유의 약속에는 정치적 동기를 무시할 수 없으며, 그들을 위한 해방의 선언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싸움을 낳게 한다. 저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저들을 속박하는 힘과의 싸움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루가는 저들을 축복한 다음, 곧 뒤를 이어 "지금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지금 칭찬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들이야말로 저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빼앗는 장본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정면적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 26)고 한다. 이 초대의 말에는 윤리적 종교적 모티브가 없다. 글자 그대로 눌리고 굶주림으로 무거운 짐을 진 피압박자들을 오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권이 유린 당한 자들이여!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에게 짐을 지우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에게 이 초대는 무관한가? 이것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란 말과 통한다. 여기에서도 윤리, 종교의 모티브는 없다. 여기에서 '의인'이나 '죄인'이란 말에는 단서가 붙는다. 그것은 기득권자들이 규정한 의인이며, 죄인이다. '죄인'이란 그 세계에서 소외된 자다 그런데 이 소외된 자를 부르러 왔다는 것은 저들에게 어떤 관념이나 제도적 구별로 하여 소외된 저들을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의미 이상 아무것도 없다.

이른바 '죄인'이라고 규정된 자들의 편에 선다는 것은, 저들을 '죄인'이라고 단정한 집권층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저들을 죄인이라고 단정한 것은 잘못이다. 저들은 죄인이 아니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이와 꼭 같은 뜻이 탕자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탕자는 이른바 '죄인'이다. 그래서 저는 소외됐다. 그런데 예수가 저를 무조건 영접한다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했다. 이것은 낡은 가치관, 낡은 질서에 대한 정면 대결이 아닌가. 이것이 집권자들에게 어떻게 들리겠는가? 그것은 맏아들의 태도가 잘 대변하고 있다.

3

그런데 예수의 생애와 말이 인간의 정치적 해방이나 자유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도 사실인 면이 있다. 예수는 인간의 정치활동에서 궁극적인 구원이 온다고 보지 않았다. 구원은 하느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가 궁극적 자유의 현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구축하는 유토피아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역사의 한 가운데 도래한다.

예수는 은둔자가 아니다. 바로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상대했다.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고 사회 구조 안의 일원이다.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이 성서에 여러번 보도됐다. 그것은 그의 교류가 기득권자와의 충돌을 낳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것은 정치적 관심에서 일으키는 행위는 아닌데도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의 기본 자세는 정치적 권력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것은 이 세대를 악마가 지배한다는 대전제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 도래라는 것 자체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권력층에 두려움을 주는데 이 세대를 악마가 지배한다는 말은 그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예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과 그 나라 도래를 동시적으로 보았다. 그뿐 아니라 사실상 예수는 악귀쫓는 일을 계속했으며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탄의 개념을 사회정치적 차원과 상관없는 어떤 고정된 종교개념으로 처리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정치 차원을 넘어선 어떤 힘이라고 해도 그 세력은 현실적으로 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본 것은 틀림이 없으며, 그러한 정치차원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루가는 마리아 찬가에서 예수가 온 목적을 "주께서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의 권력을 낮추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 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루가 1.51-53)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회정치적 변혁이 아닌가?

마르코는 종말 때의 경고로서 그 종말은 하느님이 하는 일로 전제하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시오. 당신들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회당에서 매를 맞고 또 나 때문에 총독과 임금들 앞에 서서 나의 증인이 될 것이요"라고 한다. 왜 법정, 회당, 총독, 임금이 박해한다고 하는가? 이것을 그는 사탄의 세력의 거점으로 본 것이 아닌가. 사실상 사탄이란 오늘에 있어서는 구조악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예수는 법정에 서고 유대 공회와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처형됐다. 그것은 오해에서 왔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제국의 눈에는 저들의 질서를 파괴하고 위태롭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수는 정치활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정당을 만들거나 제롯당처럼 폭력으로라도 이스라엘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결사대를 조직했거나, 또는 민중을 선동해서 기존 세력에 항거하는 운동을 일으켰다는 보도는 없다. 그는 단지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 서서, 짓밟힌 저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저들을 그 처지에서 일으킴으로써 저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저들을 억누르는 모든 관념, 제도, 권력 내지 종교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왜 하필이면 갈릴래아를 그의 활동 무대로 삼았는가? 그것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버림받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그는 죄인 여인 어부 등 가난하고 눌려있는 계층과 교류했으며 그 제자들도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갖었다. 그는 피지배자의 자유를 위해서 언제나 그의 관심을 쏟았다. 성서에는 그가 '죄인들'을 책망하는 데는 한 곳도 없다. 다만 저들을 정죄(定罪)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왜일까? 그 이유는 잘 모른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기득권자, 폐쇄된 선적 봉건체제의 아성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성전을 깨끗케 하는 등 마지막 활동을 벌이다 끝내 정치범으로 잡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처형됐다.

4

이러한 그리스도를 '주'(主)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따르는 것인가? 그를 따르는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나 눌린 자들의 인간회복을 위하여 온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길이다. 이것이 예수와의 '자기 동일성'을 산다는 뜻이다. 예수와의 자기 동일성을 산다는 것은, 그의 말대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던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살았던 그의 삶을 자기의 삶으로 걸머지는 일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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