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빌라도의 사찰
마르 3, 1-6, 22
1. 감시 혹은 사찰

타이센(G. Theissen)이라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약학 교수는 사회학적으로 예수 공동체를 연구한 책을 내놓음으로 갑자기 세계적 학자로 지목되었다. 독일계의 학자란 원칙적으로 자기 전문에만 몰두하며 학문적 논문만 쓴다. 그런데 타이센은 갑자기 소설 한 권을 써냈다. 그 제목은 Der Schatten des Galiläers인데 마침 내가 독일에 초청 받았을 때 이 책이 출간되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교류가 있는지라 이 책을 받아들자 단숨에 읽어 나갔다. 그래서 그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게 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낸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다. 그런데 오래 전에 읽은 이 책의 내용이 새삼 생각난 것은 바로 윤석양 군이 폭로한 보안사의 감시 대상자 기록 카드가 폭로된 것과 때를 같이한다. 저들의 감시망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걸려 있다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른바 6.29선언으로 출발한 이 정권이 여전히 국민을 적으로 삼고 작전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타이센의 그 책이 생각난 까닭은 그 작품의 발상이 로마총독(빌라도)이 식민지통치에 감시대상자들을 정하여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비밀정보원들을 두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비밀정보원은 바로 로마통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잘 알거나 거기 가담했던 자가 적격인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런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민중들이 반로마 시위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군에 체포되었다. 시위한 중요한 이유는 빌라도가 수로(水路) 건설비를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의 재산을 가로겠기 때문이었다. 그중에 갈릴래아 지방의 수도인 세포리스에서 곡물 상을 하는 안드레이라는 청년도 끼어 있었다. 그는 한 로마 장교에게 심문을 계속 받았는데 저들의 관심사는 에쎄네파, 젤롯당원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일당에 대한 정보였다. 심문하는 장교는 그가 교육받은 사람일 뿐 아니라 갈릴래아 도시의 중류 이상의 이스라엘 집안 사람이고 히브리말과 로마의 말을 잘 알고 있다는 점 등에서 그를 정보 스파이로 이용하기에 적절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상관인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간다.

빌라도는 부하들이 올린 정보 내용을 훑어보고 있다가 그에게 한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문을 연다. 그는 대뜸 안드레아가 심문에서 중요한 것을 감추었다고 협박했는데 그것은 그가 일 년 동안 어디엔가 숨어 지낸 사실이었다. 안드레아는 사실 반노스라는 광야의 은둔자를 찾아서 그 밑에서 일 년 동안 지낸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뜻있는 사람들 중에는 산이나 광야에 은둔해서 저항할 준비를 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이처럼 협박할 수 있는 구체적 정보를 손에 쥐고 빌라도는 그의 목을 졸라 자기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유죄임을 단언하면서 로마로 압송도 할 수 있다는 협박 등으로 공세를 취한 다음 협상을 제의했다. 빌라도는 "나는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지금 이후로 이 나라 안에 있는 어떤 특정종교의 움직임에 관해서 나한테 은밀히 알려 주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너를 당장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해주마"고 했다. 이 장면은 윤석양 군이 당한 처지와 그렇게 닮았다.

그리고 그는 "현재 너희의 종교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민중 속에서 뭔가 싹트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 예언자와 설교자들이 이 땅의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러한 새로운 운동들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기가 우리에게는 몹시 어렵다 … 나는 이 나라의 안전은 바로 그러한 단체들에 달려 있다고 본다"고 말 한다. 이로써 그의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또 그의 판단은 정곡을 찌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은 안드레아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우리는 너에게 종교적 순교자의 위엄을 만들어 주겠단 말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너를 석방해준다. 그러면 모든 신앙단체 들은 너를 신뢰할 수밖에 없고 너는 그들 속을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며 그들의 내막을 알아내어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참 교활한 음모다. 그를 종교적 피해자로 만들어 사찰의 대상에게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사찰요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안드레아와 빌라도 사이에서 여러 고비의 줄다리기가 있었으나 결국 그는 거미줄에 걸린 작은 날벌레처럼 꼼짝 못하고 타협해야 했고 구체적인 사찰대상은 에쎄네파를 중심으로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라는 지시를 받는다.

갈릴래아 지방은 빌라도의 통치구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사찰의 대상은 오히려 그쪽에 있었다. 까닭은 그 지대가 반로마의 불온지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안드레아는 뜻하지 않은 정보요원이 되어 두 달에 한 번씩 빌라도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사찰 행각에 나선다.

2. 예수의 경우

복음서를 읽어 가면 언제나 그를 감시하는 적대자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들을 일괄해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라고 하고, 그들이 지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양식사학파들은 이런 단서를 단 얘기들을 "대결설화"라는 틀 속에 묶어 놓고 그것은 현실과 상관없는 편집작업이라고 처리해 버렸다. 즉 예수의 말의 뜻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가상의 인물설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보냄받은 자들이란 말이 정보부, 치안본부 그리고 보안사의 사찰의 그물 속에 걸려 있는 현실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간단히 처리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이유를 찾아 수없는 사람들이 수많은 논문을 썼다. 복음서는 바로 로마의 전성기에 씌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애당초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십자가에 처형된 것을 은폐할 수 없는 한 그것은 로마제국에 의한 처형임을 부정할 길이 없다. 그러나 로마를 정면으로 원수라고 규정하기에는 너무도 이름 없고 힘이 없는 예수의 민중들이었다. 그 대신 로마와 제휴한 바리사이파나 예루살렘 세력에 그 죄를 규명할 수는 있었다. 까닭은 저들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 그 세력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로마나 총독의 주둔지인 가이사리아 필립보 대신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결국 '로마의 정보요원'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고충이 노출된 것은 체포나 재판과정 서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마르코복음 10장에 있는 수난 예고에서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겠고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사람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다"라는 서술에서(10, 33) 볼 수 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유다교, 예루살렘 세력의 상징인데 저들이 로마정권에 넘겨준다는 직접적 표현을 피해서 '이방사람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방인들이라고 번역된 '에트노스'는 엄밀하게는 민족이란 뜻이다. 이것은 로마를 가리키는 민중의 밀어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처음에는 무리들이 예수에게 모여들고 그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는 보도 다음 그 무리의 성격을 2장 4절에서 처음으로 오클로스라는 말로 공개한다. 그리고 곧 그 뒤를 이어 사찰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을 율법학자들(2, 6)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저들의 전면이 노출되지 않는다. 그 후부터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 또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 등이 계속 예수운동에 사찰자로 따라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저들의 이름이 무려 15회나 거론되는데 저들은 중요한 사건 때마다 개입한다. 그중에는 두 차례 예수가 저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들도 포함되어 있다(8, 15; 12, 38). 그뿐 아니라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갈릴래아에서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이 제휴한 것으로 서술되고(3, 6)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제휴했다고 한다(14, 1). 그리고 저들의 사령탑을 드러내는 말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이란 표현이 3장 22절에 나타나고 있다.

흥미있는 것은 갈릴래아 지방에서는 바리사이파가 주동이 되는데 예루살렘 영역에서는 대제사장이 앞장서며 바리사이파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리사이파는 동시에 율법학자인데 위의 서술경향으로 미루어 현장에 파견된 사찰자의 대명사요 대제사장은 저들을 파견한 거점을 상징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저들은 주로 율법문제로 예수를 사찰하거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협박을 했다는 서술이지만 그것만이 관심사였을 까닭이 없다. 그중에 카이사르에게 세금바치는 문제를 제기한 것도 저들이라는 대목을 보아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사찰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야 그렇게 많은 과격한 반로마 투쟁자가 많았는데 하필이면 예수를 십자가에, 그것도 그리 급박하게 처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빌라도라는 인물의 잔인성이나 교만함을 미루어 보아(이러한 기록이 복음서 외에 충분히 전해지고 있다) 부패한 종교인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로마의 주권을 똥칠하는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예수의 죄명을 "유다인의 왕"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을 잘 입증한다.

이러한 상상을 하게 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예수의 거동에 대한 서술에서 볼 수 있다. 그중에 그가 자주 숨었기 때문에 제자들마저 행방을 몰라 찾았으며 그는 주로 외국과 인접한 국경주변에서 넘나들거나 민중을 이끌고 광야로 갔으며 또 그가 줄곧 비밀을 지키라는 지시를 내리는 일이 있다. 복음서에서 그것은 홀로 기도하러 간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의 비밀에 부치는 명령을 이른바 메시아비밀이라고 간단히 처리하는데, 그것이 메시아의 비밀일 수 있으나 곧 '정치적 메시아' 운동이라는 뜻을 배제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 그의 이런 행동을 예루살렘에서 낮에는 군중 사이에 끼어 활동하다가 밤에는 예루살렘 밖으로 나간 것으로 서술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찰망을 피하는 행동이었다고 상상할 때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본인의 책 『갈릴래아의예수』에서 이런 입장을 입증해 보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상상은 그가 사찰의 대상이었다는 시각을 뒷받침한다. 로마제국의 꼭두각시 노릇하는 헤로데 안티파스도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졸개들을 풀어 사찰했는데(마르 6, 14-16) 로마제국이야 당연하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폭력으로 쟁취한 불의한 정권은 사찰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3. 오웰의 『1984년』과 한국의 1990년

1948년에 낸 조지 오웰의 『1984년』은 기계문명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사회 전체, 마침내 사람의 사상 전체를 감시하게 될 전체주의 국가를 상상하는 정치소설이다. 동아일보 「횡설수설」에 발췌된 그 소설의 단면은 이렇다.

창 밖은 추워 보였다. 거리 저편에 한줄기 바람이 먼지와 휴지를 날리고 해는 빛나고 하늘은 맑은데도 사방에 붙은 포스터 외에는 도대체 색채란 게 없어 보였다. 검은 수염의 얼굴이 높직한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스터는 맞은편집 앞에도 붙어 있었다. 검은 눈이 원스턴(소설의 주인공)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太兄(당을 뜻함)은 그대를 감시하고 있다'면서 으르고 있었다.

멀리서 헬리콥터가 지붕 사이로 스치며 쇠파리처럼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회비행하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을 창문으로 엿보는 경찰기였다… 문제는 사상경찰이다. 원스턴의 등 뒤에서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달성에 관해 텔레스크린이 지껄이고 있었다. 이 텔레스크린은 저쪽에서 오는 걸 방송하는 동시에 이쪽 것을 전송해 간다. 원스턴이 내는 소리는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모두 걸려 든다 … 물론 언제 감시를 받는지 알 수도 없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오웰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 정보망으로 사람들의 삶을 조이고 있다. 그것은 기술문명이 오웰의 상상보다 훨씬 앞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상공에는 매 15분마다 외국정찰기가 보이지 않는 높이에서 비행하고 있다. 그 높은 데서 축구공과 농구공을 구별할 만큼 정확하게 지상의 동행을 알아내고 있다. 전화통신은 물론 방 구석구석 어디에나 쥐도 새도 모르게 도청해낼 수 있는 장치가 가능하다. 우리가 주민등록증을 받을 때 이미 전산의 그물 속에 맡겨져 버린 것이다. 그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그의 삶을 그 어디에서나 단추만 하나 누르면 포착할 수 있다. 이 첨단 기술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비밀도 드러낼 만큼 발달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어떤 집단이 정권을 잡고 어떤 목적을 갖느냐에 따라서 이 기술문명은 악마의 손이 될 수도 있고 천사의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오웰의 소설을 읽고 그것은 소련의 스탈린 시대를 반영했거니 했다. 지금에도 그것을 적용한다면 아마 북한체제에나 해당될 수 있으려니 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특히 사상사찰 대목에서 그렇게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 남한 사회도 그렇다. 그 기자는 지금의 우리 상황을 이렇게 집약한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안기부, 보안사가 행정기관에서 군부대에서 기업체에서 언론기관에서 종교단체에서 택시 안에서 위장 술집에서 집 안 방 장롱 밑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대화를 추적하고 감시하고 있다고 해서 야단이다." 이것은 실제로 공개된 사실을 집약한 것이다.

629선언으로 출발한 이 정부가 군사정권 이래로 첨예화된 사찰정치를 이렇게 하고 있다. 그것이 폭로되니까 국방부가 공식으로 한 변명은 유사시에 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보호하기 위해서? 그럼 정부요원이나 여권 인물들은 보호할 가치도 없어서 사찰 명단에 올리지 않았나? 바로 이 점이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의 심각성을 노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들이 국민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나 하는 것이다. 국민을 삼척동자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저들의 머리가 그렇게 나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못하는 저들에게 정권을 안겨주고 또한 정보권을 독점하게 했으니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큰 문제인 것이다.

정보부란 이름이 악명 높아지니까 전두환이 그 이름을 안전기획부라고 고치고, 또 보안사도 결국 보호하고 안전하게 한다는 간판인데 그것은 이 민족의 안전이나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으니 이게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새삼 놀라게 하는 것은 보안사의 범죄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마당에 자신이 바로 보안사 사령관이었으며 그 범죄 장본인인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에 대한 전쟁"이라는 '중대'한 선언을 한 사실이다. 그 소리는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말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아니 오늘의 우리 사회를 문란하게 만든 게 누군데?! 국민의 분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그 무슨 허술한 연극인가! 이렇게도 국민감정과 단절된 집단에게 칼을 잡히고 있으니 언제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지?!

4. 자성

불의한 가해자일수록 폭력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찰강화란 자기불안의 노출이다. 참사람은 남에 대한 사찰보다 자성(自省)이 앞서는 법이다. 자성으로 자기 잘못을 노출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피해자의 반격이 두려워 사찰을 한다.

맹자는 하루 세 번씩 자성한다고 했다. 자성할 줄 모르는 자에게 칼을 쥐여 주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 우리는 백담사에 은신하고 있는 전두환이 얼마나 자성할 능력이 없는지를 잘 보고 있다. 바로 그러니까 잔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도 그 핏줄을 이어 받았다.

자성을 못하는 자는 결국 압력에 의해 굴복시키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이 정권의 자성을 촉구하기 전에 이런 집단에 칼자루를 쥐여 준 우리 국민 자신의 자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미 저지른 일이라 되돌릴 수 없다면 오늘의 이 폭정에 대해 방관하는 지금의 자세에 대한 자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자성의 빛이 없는 것이 문제다. 도대체 수십 수백억의 건물을 짓고 매주 수만 명을 모아 놓고 설교나 하는 것으로 무얼 기대하는 것인가! 설교래야 모인 사람의 손톱 발톱을 뽑고 온 몸과 의식을 마비시킴으로 무감각하고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 아닌가?! 그 죄에 대한 자성 없이 당신들이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윤석양 군은 자기 동료를 잡는 일에 협조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대도 그것으로 속죄되지는 않는다. 그의 지성은 목숨을 건 행동으로 온 국민을 움직이게 했으며 빌라도의 후예들에게 치명적인 강타를 가했다. 우리는 빌라도에게 잡힌 저 안드레아의 꼴이 되지 않았는가? 불의에 대한 방관은 결국 방조죄다. 정부는 이른바 불고지죄로 국민들을 체포했는데 그것은 정권보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불고지죄가 이 민족사회를 위하는 것이라면 타당한 죄목이다. 우리는 지금 불고지죄에 빠지고 있다. 이 정권이 사회의 재벌들의 불의를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그런 것을 고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 앞에 불고지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고발하지 않고, 평화니 화해니 사랑이니 하고 설교하는 것은 자기 죄를 은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정부의 사찰의 대상이다. 그것과 싸워야하는 까닭은 그것이 집권욕에서 나온 작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찰을 받아야 하며 받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한 사찰이다. 당신의 이름이 이 정부의 정보기관의 사찰명부에는 없다고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찰명부에 오르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까!

TAG •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