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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팔아 보화를 산다
—신 부재의 현장에서
마태 13, 44-46
1. 신 부재의 현장에서

아키노 정권이 들어서고서 한참 지난 뒤에 필리핀을 돌아본 한 젊은이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뜻있는 여러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의 마르코스 추방과 아키노 승리를 열렬히 환영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 비친 필리핀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은 필리핀이 마르코스 시절의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때의 부조리한 구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통치력의 이완을 악용하는 부패한 세력이 날로 더해서, 수많은 피로 건진 필리핀일지라도 이제는 이 수렁에서 헤어나리라 기대할 수가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목도하면서 그는 마침내 신에 대한 회의에 빠졌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도달했다고 끝말을 맺었다. 옳은 판단인가? 그는 신과 정의를 일치시켰거나 적어도 신은 정의의 수호자라는 대전제에 매달려 있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언젠가 단상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그 말에 적극 찬동하면서 동지를 새삼 만난 듯이 손을 내밀었고 어떤 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말씀에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고 '경고'했다. 나는 군사독재가 시작된 이후부터 공석에서 자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니 하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했다. 까닭은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결코 심은 대로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당들의 횡포에 분노하면서도 힘없는 자신에게 체념하면서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렸으면 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오히려 저들은 말을 바꿔 타고 대를 이어 가면서 계속 영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결코 그 청년과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2. 신을 믿기 때문에

구약성서는 한 나약한 민족이 모순과 갈등 속에서 해방되기 위해 신에게 절규해 온 기록이라 하겠다. 그 안에 나타난 신은 결코 사필귀정을 책임지는 교통정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결코 "그러니까 신은 없다"는 결론에 주저앉는 일 없이 끝까지 그 신을 '물고' 늘어진다. 마치 야곱이 야뽁 강가에서 신과 격투하듯이. 그러므로 구약에는 탄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중에 시편은 탄원시로 메워져 있다. 그중 하나를 읽어 보자.

야훼여, 어찌하여 멀리 계십니까?
악한자들이 웃어대며 미약한자를 박해합니다.
저들이 던진 올가미로 저들을 덮치소서
악한 욕망 품고도 자랑스레 뽐내고
탐욕으로 악담하며 야훼께조차 코웃음칩니다.
악한 자 우쭐대며하는 말,
"벌은 무슨 벌이야?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그의 생각의 전부입니다.
당신의 심판은 아랑곳 없이
날이면 날마다 그의 생활 흥청거리고
반대자를 비웃으며,
"내가 망하는가 두고 보아라.
나에게 불행이란 없으리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내뱉으면 저주요,
입 안에 찬 것은 거짓과 폭언,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뿐입니다.
마을의 길목을 지켰다는
죄없는 자 쳐죽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엾은 사람을 노립니다.
숲속에 숨은 사자처럼
불쌍한 이 덮치며
불쌍한 이 기다리다가
그물 씌워 끌고 가서
죄없는 자를 치고 때리며
가없게도 거꾸러뜨리고는 하는 말이,
"하느님은 상관없지
영영 보지 않으려고 얼굴마저 돌렸다."
일어나소서 야훼 나의 하느님. 저들을 내리치소서 …(시편 10편).

뜻하지 않게 긴 인용은 이 본문이 바로 우리 얘기인 것 같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간격이 있고 사회구조도 달랐는 데 드러나는 양상이 이렇게도 같을 수가 있을까? 악당들의 횡포에 대한 서술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신 부재(神不在)의 현실 고발이 꼭 같다. 이 본문이 묘사하는 현실에는 부조리와 그것에서 연유하는 고난의 계속 그리고 그런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탄원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탄원하는 이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바로 신부재의 현장이기에 신을 부른다. 더욱 애타게, 저들의 애탐과 탄원은 오히려 신을 믿기 때문에, 신의 심판을, 그의 정의를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현실에 대한 예민함이나 분노는 일찍 사그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죽박죽이 삶 자체이려니 해서 길든 짐승처럼 죽는 날까지 비참한 삶인 줄도 모르고 그 삶을 이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절망을 모르며 패배를 모른다. 현실을 고발하면서 마침내 멀리 있는 신을 힐책하며 신의 직무유기를 추궁한다. 그러니까 신을 향해 어서 일어나서 제 할일을 하라고 명령 같은 탄원을 토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신마저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이 담겨 있다.

2. 간여하지 않음으로써 심판하는 신

시편의 시인과 같은 자세는 예수사건 이후에도 성서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 한 예는 바울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서두부터 로마 상류사회의 부패상을 집중적으로 폭로하며 고발한다. 그는 그 사회의 부패상과 잔악성 그리고 교만함을 그 당시의 언어를 총동원하여 공격한다(로마 1, 29-32).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부패도 상류사회에서 시작되었다. 세계 약소민족에게서 찬탈한 부를 독점한 계급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행태다. 그런데 그것이 점차 아래로 전염되어 작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에까지 침투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역사의 주재자라는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악의 횡포가 판을 쳐도 신은 간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이 역사와 신의 영역을 분리함으로써 여전히 '신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신이 간여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심판하는 신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논리로 그의 신념을 편다! "신은 내버려둠으로써 심판한다. 즉 신은 부패해 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철저히 부패하게 하며, 포악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어 점점 더 포악해지게 함으로써 마침내 자멸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간여하지 않음으로써 간여한다는 것이다. 신이 당장 간여하기를 갈구하는 사람에게 이 얼마나 억지인가! 그러나 바울은 궁극적인 신의 심판 즉 심판하는 신을 믿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런 논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간여하지 않는 신은 현실에서 볼 때 존재하지 않는 신이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신을 믿은 바울은 그러므로 무신적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적어도 그가 신 부재 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선구라고 하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 부재의 현실을 가장 고민한 것은 예수의 민중이었다. 예수의 민중들은 예수를 만나기 전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앙의 전통에서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저들의 새 세계(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은 체념상태에 빠져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남으로써 꺼져 가던 불이 되살아나듯 그 나라에 대한 열망의 불을 다시금 붙였을 수 있다. 하여간 성서에는, 예수를 만날 때의 저들의 작태가 그저 일상생활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들 이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거나, 심지어 민족의 적으로 간주되는 세리가 되어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하는 놈도 있었다. 또 그중에는 젤롯당 출신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도 이미 기진하여 그 대열에서 이탈한 후 갈 바를 모르다가 예수를 만난 듯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예수를 만남으로써 저들에게 신에 대한 신앙, 새 세계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활동하면서 모든 희망을 예수에게 걸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모든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출현과 활동은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

그런데 그런 예수가 갑자기 처형됐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같은 '하느님의 사람'의 말로가 어찌 그렇게 끝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마도 저들은 예수가 힘 없이 죽임당했다는 일 자체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것은 바로 예수가 그토록 억울하게 죽어 가도 간여하지 않는 침묵의 하느님에 대한 회의다. 저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신이 개입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유신론자들처럼, 기적이 일어나 저가 그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저 불의한 세력이 벼락이라도 맞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못을 박는 자와 못박히는 자, 찌르는 일과 찔리는 일 그 사이에 아무것도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았다. 배신자와 그를 마지막까지 따르는 자로 말이다. 그런데 배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군중의 함성은 있었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시위는 없었다. 그를 끝끝내 부정하지 않은 자는 몇몇 여인들뿐!

그런데 그러한 패배의 역사에 대한 증언은 우리 이야기 서두에 말한 그 청년의 증언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은 착착 진행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의 편은 붕괴과정만 밟는다. 게쎄마니의 고투는 처절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예수 홀로의 고투일 뿐 그의 편은 무지와 무력함만 드러내며, 그중의 하나는 스승을 배신하여 적대자에게 밀고한다. 가장 측근인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치고 베드로마저 예수를 생명부지의 집착과 쉽게 바꾸어 버린다. 해체다! 와해다! 그런 와중에서 예수의 처형은 아무런 차질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 된다. 운명을 앞에 둔 예수는 마침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탄원과 함께 알 수 없는 큰소리를 지르고 운명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이쯤하면 그 신을 부정할 만도 하지 않나? 그러나 예수의 민중들은, 그런 운명에 처한 예수 자신이 하느님을 부정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기에 죽어 가면서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난 속에서 절규하는 시편 시인의 절규를 운명하는 예수의 입에 담았고, 그럼으로써 예수의 수난에 대한 이해는 극치에 이르게 된다. 예수에 대한 그런 이해는 동시에 예수의 민중에게 이어진다. 비록 그들의 스승이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죽음을 죽었어도 하느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그들의 신앙으로. 바로 이런 신앙의 고수가 예수의 수난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신은 더 이상 사필귀정이 아니다. 또한 전능한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다. 아니 그는 불의 앞에 무력한 신이다. 그러므로 불의한 세력의 손에 피살되는 신이다. 예수의 민중들은 바로 예수의 피살현장에서 신의 피살을 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피살된 것이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운명을 대신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로써 십자가 사건은 패배의 사건이 아니라 신의 자기초월의 사건이며 사랑의 극치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같은 십자가 이해는 신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신앙으로 인해 가능했고, 이런 신앙에 의해 다시 일어선 저들은 놀랍게도 신의 부활을 경험한 것이다. 이 체험을 통하여 저들은 신 따로 나 따로, 신은 구원의 주체, 나는 객체라는 사고를 극복했으며 그 양자가 부활사건으로 하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게 된 것이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바울의 확신은 바로 이 예수의 민중들이 다다른 현실인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부활은 나와 상관없는 신의 사건이거나 한 방관자로서 관조한 사건이 아니라 그 안에 자산들도 함입되어 있는 사건이라는 예수 민중의 믿음은, 저들 자신이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의식지평의 혁명적 전환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저들은 더 이상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신의 행위를 관조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그것에 참여하는 주체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 하느님과 더불은 '우리'라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초대 예수 민중공동체의 자의식이다.

그런데 그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다.

3. 가라지 비유

위에서 서술한 대로 당당하게 출발한 공동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사실을 암시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가라지의 비유(마태 3, 24-30)다. 알곡만 심은 밭에 가라지가 섞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대로 두면 알곡에도 피해가 간다. 알곡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가라지를 하루 속히 뽑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농부의 주장이다. 밭 주인은 생각이 다르다. 가라지가 섞인 것은 원수들이 밤에 잠입해서 한 짓이다. 그러므로 공존할 수 없는 대결의 대상이다. 그러나 지금 가라지를 뽑다가는 알곡도 뽑을 수 있으니 가만 두라는 것이다.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급진파와 온건파의 차이인가!

"내버려 두라"는 말에서 우리는 다시 바울의 심판이해를 연상하게 된다. 그의 이해대로라면 내버려 두는 것은 온건한 타협이 아니라 더 무자비한 심판의 진행을 의미한다. 그런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어설프게 손을 대는 것은 그 낡은 것의 수명을 연장하는 '개량주의적'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썩는 것을 빨리 썩게 함으로써 완전히 끝장을 내야 완전한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은 혁명론자의 입장이다. '내버려 두는 시간'은 신 부재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버려 두라는 것은 타협이 아니라 심판의 신을 철저히 확신하는 자에게만 가능한 '여유'다. 내버려 두는 단계는 철저한 심판, 즉 가라지는 뽑아 단으로 묶어 불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에 거두는 궁극적 심판을 전제하기에 가능하다. 내버려 두는 기간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둠"의 기간이다. 충분히 자랄 때에야 비로소 밀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가려지겠기 때문이다.

4. 다 팔아서 보화를 산다

우리는 성서의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았다. 암흑시대를 산 그들이 하느님을 전제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곧 하느님 나라의 성취를 전제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물음은 여기에서 그칠 수 없다. 우리는 묻게 된다. 그러면 결국 "믿음만"이면 된다는 것인가? "내버려 두라"는 것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노자(老子)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와 같은 것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판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무신의 시대를 신앙으로 살았던, 간여하지 않는 신에게서 극단적인 간여를 읽었던 성서의 사람들은 그 암흑의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갔는가?

우리가 문제 삼은 가라지 비유 다음에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이어진다. 이것들도 그 구도가 가라지 비유와 같다. 밭에 씨를 뿌린다거나 여인이 누룩을 가루 속에 넣는다는 것까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부분으로 그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사람이 간여할 부분이 없다. 그 다음에 가라지 비유에 대한 해설이 따르는데, 그것에서도 사람이 해야 할 영역이 없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극히 짤막한 세 가지 비유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셋은 마치 한 문단과도 같이 밀착되어 있다. 그런데 첫 부분의 두 얘기는 위의 비유들과 대조를 이루며 끝부분의 얘기는 내용상 가라지 비유와 일치한다. 아무튼 이 비유들을 가라지 비유와 관련시켜서 사람의 할일에 대한 우리의 물음을 계속해 보자.

이 비유들은 가라지 비유와 직접 연관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둘 다 하느님 나라 비유라는 점이다. 둘째, 그러나 둘 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what)인가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 끝으로 만일 이 세 개의 짧은 비유를 의도적으로 묶어 나열한 것이라면 마지막 비유는 전체의 전제면서 결론으로서, 그 내용의 일관된 흐름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여 집에 돌아가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13, 44).

하늘나라를 보물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 자체에서는 그 나라의 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귀중하다는 것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 전부를 팔아 그것을 샀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런 시각에서 사람들은 그 나라의 현실을 "기뻐하며"에서 찾으려 했다. 즉 하늘나라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극히 애매하다. 기뻐하는 것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감정이니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내용일 수 없다. 이 비유에서 중심되는 것은 역시 "있는 것(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에 있다. 그 다음에 있는 진주 발견의 비유에도 "기뻐하여"라는 구절은 빠져 있지만 이와 똑같은 서술이 있다.

그 밭을 사는 데 필요한 만큼의 소유를 팔았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샀다고 한다. 이것은 이윤추구의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아니 그 귀중한 것에 전체를 바친 것이다.

이것은 결단의 행위를 나타낸다. 결단이란 언제나 포기를 내포한다. 선과 악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은 결단이 아니다. 아니! 양쪽에 선과 악이 섞여 있는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결단이다. 그러므로 다른 한쪽에 포함된 선한 것도 악한 것과 더불어 포기하는 행위다. 그 귀중한 하나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진다. 아니 희생한다. 이러한 희생의 각오 없이 귀중한 것을 보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모험행위다.

5. 우리 시대의 보화들

우리는 지금 신의 빛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야말로 깜깜한 시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흙에 덮인 보석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신(無神)의 시대에 반짝이는 보화들. 그러나 그 반짝이는 보화를 쳐들어 올리면 밤의 세력에 의해 희생될 수 있다.

우리는 보화가 연속해서 노출되는 엄청난 때에 살고 있다. 도대체 이같은 이기주의 시대에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리되, 제 몸을 불살라 버리는 젊은이들이 뒤를 잇는 이런 사회가 어디 또 있을까!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기에 우리는 그런 일에 무감각해질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분신하거나 투신하는 이들의 뜻을 소중한 보물로 떠받들 경우 우리는 이유 있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귀중한 생명을 그렇게 내버리는 것은 생명에 대한 모독이다. 저들은 부모들의 가슴에 영영 뽑을 수 없는 못을 박았다. 그런 행위는 무모하고 어리석다. 길을 가로막는 돌 하나라도 걷어차고 죽지, 그렇게 죽다니! 그런 행위는 자신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곧바로 후진의 자살을 유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행위를 찬양하는 자는 남의 희생을 선동함으로써 무엇인가 얻으려는 파렴치한 자다. 그렇다. 이런 비판이나 비난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타당한 비난이라도 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저들의 순수한 동기나 목적의식을 상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익환 목사를 시발로 여러 사람들의 '허락되지 않는' 방북이 큰 물의를 일으키고 그런 것들이 이른바 공안정국의 빌미가 되었다. 저들의 행위를 잘못된 소영웅주의니 북한의 공작에 이용됐느니, 통일의 길을 지연시켰느니, 더 나가서는 재야세력을 붕괴한 무책임한 짓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렇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하고 이유 있는 비난을 해도 저들의 민족 사랑 바로 그것에서 우러나온 통일염원의 순수성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임수경양 이 전대협(全大協)을 대표하여 비밀리에 방북했다. 그때는 벌써 문 목사가 구금된 때이기에 그는 그같은 수난을 각오한 것이다. 그런데 임 양의 행위에도 꼭 같은 이유있는 비난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은 임양의 그 순수한 목적에 찬동하는 표시로 문 신부를 북으로 파송했다. 저들은 그로 인한 모든 비난과 비판을 각오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 신부의 행위에 대한 정부의 선전적인 차원에서 비난이나 운동 전술적인 차원에서의 비판이 빗발치는데도 끝끝내 임 양과 문 신부의 편에 설 것을 다짐했으며, 그것을 정죄하는 실정법인 보안법 철폐운동을 펴기로 했다.

우리는 귀중한 보물들이 이렇게 연쇄적으로 노출되는 현장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보물을 그저 안일하게 주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뜨거운 불 속에 있는 황금덩이를 주워 내는 행위와 비교할까. 이 칠흑 같은 신 부재의 시대는 그것을 주워 내다가 손을 데도 상관없다는 그런 각오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런 현장에서 땅에 묻힌 보물의 비유를 풀 열쇠를 찾는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에서 지금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보화 하나를 사는 하느님 나라 건설자들을 보고 있다. 저들은 한 가지 보물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 전체를 내던졌다. 생명까지!

우리는 어떡할 것인가? 그저 그런 것을 보고 있는 관찰자로 머물 것인가? 아니다. 어떤 비난과 박해가 와도, 저들이 발견한 보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버린 그 뜻에 동의하며 그 대열에 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곡식과 가라지가 충분히 자라도록 기다리는, 신 부재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이며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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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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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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