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 13-14
1. 좁은 문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게 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좁아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태 7, 13-14).

이 가르침에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같은 뜻으로 쓰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넓은 문'과 '넓은 길'을 대비시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살림의 길'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의 길'이라고 한다. 길 역시 마찬가지로 두 가지가 있다. 무슨 뜻인가? 유교적 가르침에서는 군자는 큰 길(大路)로 가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좁은 골목길이나 산길을 타지 말고 크고 넓은 길로만 다니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말한다. 즉 공적으로 인정된 정정당당한 태도와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하라는 뜻이다. 뒷구멍으로 잔꾀를 부려 남을 속여 가며 하는 행위는 반군자적이 될 것이다. 과연 이런 뜻인가?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이와는 다르다. 우선 큰 길로 가라는 말과 좁은 길고 가라는 말 자체가 상반된다.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공자의 말은 군자(엘리트)의 자기 형성의 길을 말하는 데 반해 예수의 말은 운동적 차원에서 파악할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현실을 말하는가?

2. 넓은 문

예수 당시에 넓은 문, 넓은 길은 무엇이었을까? 로마제국에는 유명한 것이 많았는데 그중의 하나는 도로 곧 길이다. 그 길들은 군사도로였다.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닦아 놓은 그 길은 세계 약소 민족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들이는 혈맥(血脈)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렇게 살이 찐 로마는 세계의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에 모든 길은 결국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로마제국은 큰 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밑에 예속된 약소 민족들이 쉴새없이 드나드는 곳이 로마였으며, 특별히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야심을 갖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으려는 자들이 무수하게 드나든 곳이 바로 로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는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점령 지역의 세력자들을 로마로 끌어들여 친로마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넓은 문 또는 넓은 길이란 일차적으로 로마로 향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출세하려면 로마로 가라. 부호가 되려면 로마로 가라." 이것이 로마 점령지의 반동분자(나쁜 야심꾼)들의 구호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헤로데였으며 그 일가였다. 헤로데는 로마에 망명해서 세력권에 아부하여 국토도 국민도 없이 왕으로 임명되었고, 때를 기다리다가 팔레스틴에 군사를 거느리고 잠입해 들어와서 격렬한 싸움 끝에 땅을 차지하고 반국민적인 왕으로 군림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반로마의 길을 택하라는 말이 된다.

팔레스틴은 정신적으로 유다교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부 구조를 형성했고 로마는 그것의 권위를 뒷받해 주었다. 대사제가 우두머리가 되는 산헤드린은 로마의 괴뢰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유다민족 전체를 지배했다. 도덕이나 윤리적 기준도 그들에 의해 설정되었으며, 따라서 저들의 판정에 의해 민족의 일원으로 수용되기도 하고 죄인으로 소외되기도 했다. 저들은 로마로부터 경제수탈의 권리를 얻어내어 국민을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 착취한 것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 중심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 위에 군림하는 상징이요 경제착취의 수단이었다. "예루살렘으로!"가 그 때 당시 유다인으로서는 큰 문이고 넓은 길이었다. 예루살렘과 관계를 가져야만 무엇이나 성사될 수 있었다. 반면에 예루살렘과의 줄이 끊기면 저주스러운 존재가 될 뿐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충성하여 그것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넓은 길을 걷는 것'이 된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혹은 '좁은 길'로 가라는 것은 반예루살렘 반성전 반산헤드린의 길로 가라는 의미가 된다

좁음과 넓음의 의미는 서 있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로마나 예루살렘의 불의한 세력에 대해서 모두가 굴종만하고 있을 때, 이에 반기를 들고 폭력으로 대결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좁은 길, 좁은 문에 들어선 셈이다. 그러나 거꾸로 젤롯당이 우굴거리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폭력을 쓰면 안돼!"라고 맞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좁은 길에 들어선 셈이다. 물론 그가 반로마나 반예루살렘의 입장에서 있다는 전제를 가질 때 그렇다. 그런 사람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고 단지 투쟁하는 방법에 대해 자기 신념을 토로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애(民族愛)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면서도 같은 동지들에게 소외되거나 어쩌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유다지방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하는 큰 일을 거기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십시오(요한 7, 3-4).

여기서 말하는 유다는 엄밀히 말하면 예루살렘이다. 저들은 출세하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 예루살렘과의 길을 터야만 유명해질 수가 있다. 이것은 곧 변두리 갈릴래아에서 배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뜻으로,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넓은 문과 넓은 길이 무엇인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가 넓은 문, 넓은 길을 거부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때에 예루살렘에 갔다고 한다. 형제들의 충고에 동의해서인가? 아니, 비록 같은 길을 갔으나 예수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간 것이다. 까닭은 그가 대결하기 위해 간 것이지 그 세력을 등에 업으려고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가르침이 예수의 민중들에게 어떻게 들렀을까? 마태오복음이 쓰여졌을 때는 이미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함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은 초토화되고 그나마 지속되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어, 나라도 고향도 없는 민족으로 산지사방에 흩어져 이방 문화권과 이방세력 아래에서 수난을 당할 때였다. 게다가 예수의 민중들은 바리사이파가 중심이 된 유다교에 의해서도 박해를 받았고, 네로로부터 도미티안에까지 이르는 사이에 황제 숭배 거부 등의 이유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마태오복음 5장의 "나를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5, 11), 또는 루가복음의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또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우면"(6, 22)과 같은 표현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환난을 당하도록 여러분을 넘길 것이요 여러분을 죽일 것입니다"(마태 24, 9a). "여러분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24, 9b) 등은 저 유명한 마르코복음 13장 소묵시록에 추가 된 것으로 마르코복음이 씌어진 70년을 전후한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유다전쟁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더불어 유다교의 지도권은 완전히 바리사이파 손에 넘어갔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들의 박해는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는 말은 그런 세력들과 타협하지 말라는 말로 들렀을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저들과의 투쟁을 권고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3. 살림과 죽임

우리는 역대로 종주국 밑에 시달려 왔다. 중국은 동양에서 로마제국에 맞먹는 세력이었다. 그 밑에 있을 때 우리에게 넓은 문, 넓은 길은 중국이었다. 역대의 지배층은 예외없이 넓은 길을 택했다. 일제시대의 넓은 길은 친일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국이 종주국으로 군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은 현대판 로마제국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므로 출세의 길을 찾아 미국으로 몰렀으며, 그 세력을 등에 업어야만 권좌를 유지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이 바로 오늘의 넓은 문, 넓은 길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민족분단, 경제적 종속 그리고 독재 밑에서의 압살, 즉 죽임의 역사를 이어 왔다. 역대의 정권은 로마에서 임명된 헤로데정권과 별 차이가 없었다. 헤로데의 폭압정치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듯이 우리도 그런 비통한 역사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밀에 깔린 우리는 분단 고착화를 반대할 수 없었고, 평화통일을 말할 수도 없었으며, 진정한 우리의 대표를 뽑을 수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종속상태에서 독점자본주만 키웠다. 넓은 문을 선택한 결과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만은 좁은 문, 좁은 길에 나가 싸웠다. 그것은 죽임을 당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임당함이 노예처럼 무력했던 우리에게 '살림'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승만 시대의 누가 좁은 길에서 죽임당함으로 우리를 살렸는가? 분단으로 허리 잘린 채 죽어 가는 위기 앞에서 말을 잃고 있을 때 누가 "민족통일은 우리 손으로"라고 외치게 했나? 누가 자주 민족이 되기 위해 미국이 묶어 놓은 쇠사슬을 끊기 시작했나? 그것은 젊은 학생들이었다. 저들은 기성세대에게 냉대를 받으면서 외롭게 싸웠다. 정말 그 길로 가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 싸움은 죽임당하는 싸움이었다. 기성세대는 저들을 '철이 없다'고 비판했고, '무모하다', '불온하다'고 했다. 사실상 저들이 내세우는 구호나 언어는 기성세대가 엄두도 낼 수 없는, 무시무시하게 생각되는 그런 것이었다. 저들은 감히 '종주국'인 미국에 대한 비판을 행동으로 보였다. 미문화원 방화, 양키 고홈을 외치며 분신자살을 하는 저들을 누가 용인했나? 아직 반공법이 시퍼렇게 있는데 무조건 통일을 외치고 통일행진을 했다. 저들의 이런 싸움은 결국 자신을 죽이면서 이 민족을 살리려 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좁은 길이었다. 바로 그랬기에 살림의 길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판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받드는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나? 대부분의 교회는 친미반공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려는 역대 정부가 열어 놓은 문을 통해 넓은 길로 갔다. 다수는 가난에 시달리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우리의 경제를 독점하며, 권력과 결탁하여 자기들의 생산물을 수출하기 위해 막대한 농작물을 수입함으로써 농민들을 죽게 하는 마당에 독점자본체제에 대해 단 한마디 비판도 못해 왔다. 그러면서 좁은 길로 들어선 수난자들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아니면 저들을 비난했다. 그뿐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선 일부 그리스도인들 마저 '용공', '불순세력'이라고 매도했다.

그 결과 교회는 이 민족사에서는 있으나마나 한, 아니 사실상 죽은 시체처럼 무력하고 무의미한 하나의 이기적 종교집단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저들은 이미 3.1운동에서 선전(善戰)한 그리스도교회의 후예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의 관심은 자파의 세력을 확대하는 일, 자기가 속한 개교회를 늘리는 일에만 쏠렸다. 서울만 해도 자기 집 못 가진 사람이 절반 이상이나 되고 이른바 재개발지구에서 쫓겨나 집 없이 겨울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저토록 많은데 교회건물에는 수십, 수백 억을 들이며 더 크게 짓는 일에 경쟁하고 있는 판이다. 그 큰 교회의 넓은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설교되나? 살리는 설교인가, 죽이는 설교인가?

그러나 이 넓은 문, 넓은 길을 거부하고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서 외로운 싸움을 하는 일군의 젊은 일꾼들이 있다. 저들은 양지를 거부하고 음지로 찾아가서 내일에 대한 아무런 보장 없이 민중이 되어 민중과 더불어 나를 죽이면서 너를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다. 저들은 노동자의 최저 임금 정도의 보장도 없이 산다. 그들이 무엇을 하며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저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의 말씀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60여 곳에서 이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저들의 대부분 이 치열한 학생투쟁에 참여하여 여러 형태의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학생시절에 선택한 길을 그대로 간다. 그러므로 학생시절의 싸움이 '한때' 있었던 우화가 아니고 지속되는 현실이며, 삶 자체가 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정말 생명에 이르는 길은 작고 좁은가! 우리는 저들 때문에 죽임의 길에서 살림의 사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어 가는 한국 교회를 살려 일으키는 '종교개혁적인' 전기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4. 예수의 길, 우리의 길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 길은 바로 그 자신의 길이다. 그의 공생애를 마르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오셔서 …"(마르 1, 14). 그 선택한 때를 보라. 그때는 예수가 회개운동의 선구자로 알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그 세례자 요한이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다 체포된 때다. 공자는 세상에 도(道)가 있으면 나타나 활동하고 난세면 숨으라고 했는데, 예수는 바로 불의한 권력자가 의인을 향해 칼을 뽑은 그때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의도를 더욱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헤로데 안티파스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갔다는 사실이다. 그는 처음부터 좁은 길로 들어선 것이다.

갈릴래아는 당시에 울분에 찬 반로마, 반예루살렘의 민중들이 우굴거리는 장소였다. 저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폭력으로 빼앗는 일과 하느님의 주권을 되찾는 일을 같은 일로 알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폭력을 수단으로 선택하는 길(젤롯당)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금욕적인 은둔의 공동체를 결성하고 그때를 기다리는 에쎄네파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민중의 현장으로 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좁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또 다른 차원에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길에서 민중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떻게 이끌고 갈 수 있을까?

처음부터 많은 민중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고 몰려든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얼마나 많은 수가 동행했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예수와 동행하면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흔적이 있다. 결국은 그가 '힘 없이' 처형될 때 일단의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망쳤다고 하지 않나! 그뿐만 아니라 저들의 대표자마저 예수를 부인했고,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를 팔아 넘겼다고 하지 않나! 이런 보도들의 실상을 재현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의 죽임당함은, 그의 뜻을 이해하고 감격해하는 환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망을 안겨 주고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길은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정말로 좁은 길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므로 그것은 '큰 살림'의 길이었다.

우리가 어찌 모두 예수처럼 그런 길을 택할 수 있으랴! 그런다면 오히려 교만의 죄까지 짓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좁은 길로 가라는 그 가르침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여론대로 살고 모두 가는 길을 가고 '편리'라는 것을 지상의 가치로 삼고 어떤 수단으로든지 자기가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안다면 그는 예수의 뜻을 묵살하고 예수의 생애를 생활로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나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함께 죽임에 이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다.

TAG •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