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1. 배고픔

배고팠던 경험이 있는가? 그날 그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애쓴 경험이 있는가? 밥상 위의 자기 밥그릇에 밥이 줄어드는 것을 서글픈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의식한 경험이 있는가? 다른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부엌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듯 서성이면서 때맞추어 밥상을 함께하지 않는 어머니, 때로는 밥상을 함께했으나 언제인지 모르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변명 같은 뒷말을 남기며 다시 부엌으로 가는 어머니를 의식한 경험이 있는가? 그 어머니는 밥 한술이라도 덜 축내 식구들에게 그만큼 더 돌아가기를 바라고 배고픔을 선택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경험 못한 세대는 불행한 세대다. 그 세대는 인간의 불행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를 잃어버린 세대다. 그 세대의 사람이 도둑질하는 사람의 심정을 어떻게 추측할 수 있으며, 너에게 밥 한술이라도 더 먹게 하기 위해 스스로 배고픔을 선택하는 사람의 깊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삶의 기초며, 삶의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밥은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그런데도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그것은 비천한 사람에게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기에—그것에서 초연할 수 있는 정신세계 같은 것 따위가 있다고 자부해 보려는 계층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는 수도자들이라기보다는 유교의 영향 아래서 엘리트의식을 길러 온 우리 나라의 사대부 또는 양반계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들은 밥 따위를 경시하면 하는 만큼 양반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므로 바천한 사람들이 자기 밥그릇 흔적도 없이 먹어치워 바닥내 버리고, 곁에 있는 사람 것까지 넘나보는 데 비해 양반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그릇에 반쯤은 밥을 남겨야 양반의 체면이 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위선이다. 이런 위선으로 저들은 쌍놈들과의 신분적 차이를 시위했으며, 저들을 멸시하는 기준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 "금강산도 식후경"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런 것들은 어느 신분/계급에서 나온 것일까? 사람들 앞에서 위세를 부리는 양반 자신들에게서 나온 솔직한 토로인가? 그러므로 현실주의에 항복한 것인가? 아니면 저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는 민중들이 저들의 허상을 폭로한 것인가? 체통을 지키기 위해 수염을 석 자씩이나 기르고, 농부는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똥을 주는 일로 분주한 판에 선인이나 된듯, 속세를 떠난 듯 금강산을 찾아 다니면서, 마치 일반 대중이 먹는 것과는 다른 양식을 먹고 홉족하게 사는 체하는 그 허위를 질타한 것일까?

농민들은 쌀 한 톨을 그렇게 소중히 여긴다. 그들에게 쌀 한 톨은 사변의 결과가 아니라 실제로 몸으로 피와 땀으로 그리고 배고픔을 인내하면서 얻어낸 바로 그것이다. 이 쌀 한 톨이 그의 피와 땀과 노동 고뇌의 결정체다. 이 쌀 한 톨이 사람을 살리게도 하고 죽이기도하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생산하는 주체가 바로 '농민인 나 자신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는 진정으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쌀의 생산 주체인 농부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에서 무슨 까닭에서인지 늘 소외된다. 내가 생산한 이 쌀이 어디로 옮겨지는가? 그것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지주들에게 옮겨지는 것이다. 토지소유권이 경작소유권을 눌러 버리고 그 생산품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빼앗아 가는 저들이 쌀 한 톨의 귀중함을 알 까닭이 없다. 배고픔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저들의 밥맛이 농부들의 밥맛과 같을 까닭이 없다. 저들에게는 노동의 희열이 없다. 내가 내 손으로 피땀흘려 장만했다는 대견함도 없다. 있다면 남의 노동의 결과를 가로겠다는 죄책감 정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주는 비록 농부의 손에서 쌀을 빼앗았으나 쌀로부터는 소외되는 것이며, 배가 부른 까닭에 밥의 진미를 맛보고 인식하는 길이 막혀 있다.

밥을 먹고 살면서도 밥을 경시하는 배부른 자들, 밥이 모자라 언제나 배를 곯으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밥을 존중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둘 사이에는 뛰어넘으려야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 그대로의 상태에서 공통의식에 도달하거나 공동의 과제를 가질 수 없다. 그들 사이에는 쌀 한 톨이 하늘과 땅만한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종교들에서 중요한 딜레마를 볼 수 있다. 이른바 고상한, 고등종교이면 종교일수록 모든 것을 탈물화(脫物化)하고 정신화한다. 정신화의 극치를 걷는 것이 불교다. '심'(心) 그것은 반물화(反物的)인 상징이며 정신의 근거다. 부처도 결국 '심'(心) 중에 존재하는 것이지 '물'(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원칙에서 보면 절마다 안치되어 있는 불상은 자가당착이다. 심(心)을 반역한 현상이다. 그런데 불교는 진일보한다. 아무 설명 없이 한 걸음 더 내디딘다. 불상에 제물을 바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심(心)이라고 하지만 먹는 것을 뺀 궁극적 실체란 도저히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먹는 것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존재여야 사람과 관계 있는 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제물을 뺀 종교란 없다.

모든 종교는, 신도 사람처럼 오장육부를 가진 존재로서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을 먹음으로써 사람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이 신으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가시적으로는 축나지 않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제물을 바치고 신이 몸소 그것을 받아 먹는 의식을 정중하게 거행한다.

원시종교는 물론 유대교도 그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반성전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습성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먹는 것을 빼고 성립될 수 없듯이, 여기서 사랑의 성만찬이 사크라멘트적 성격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떡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신의 현실에 동참하고 그럼으로써 한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하다. 야훼 하느님은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의 현장에 직접 개입한다. 예수는 단지 정신적으로 어떤 궁극적인 것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와서 함께 먹고 마셨다. 그의 고통은 정신적인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살을 찢고 피를 흘리는 육적물적 고통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가난하고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을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굶주림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그렇다. 배고픔을 모르는 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밥과 유리되고 무관한 상황에서는 사람과 신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참으로 밥 먹는 신이 신이다. 밥 못 먹으면 죽는 신이 참 신이다. 그런 하느님만이 진정 굶주린 자의 하느님이고 인간의 고뇌를 아는 하느님이 될수 있다.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제자들이 예수에게 특정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정해진 기도는 고백과 같은 것으로 예수 당시의 종파들마다 기도문을 갖고 있었다. 그 기도문은 이렇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당신 나라가 임하소서.
우리에게 날마다 그날그날의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루가 11, 2-4)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마태오복음 6장 9-13절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다만 마태오의 것은 다른 마태오의 것은 다른 본문과 마찬가지로 훨씬 수사적이고 설명적이다. 루가의 본문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설화된 것이므로 루가에 따르는 것이 좋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기도 다음에 그날 그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가 바싹 뒤를 따르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과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하라는 기도의 구체적인 것으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한다. 하느님 나라를 쉽게 피안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많은데, 예수는 그것을 그날 그날 먹는 양식이 주어지는 현실과 직결시키고 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그날 그날의 양식이 해결 되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너무도 물적이고 세속적이다. 예수는 가난을 알고 배고픔을 안 분이다. 복음서에서도 그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는 이야기와 그를 따르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흘씩이나 굶었다는 이야기는—그 마당에 예수가 홀로 먹었을 까닭이 없다—그가 굶주림의 현장에 살고 있었음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의 공생애 출발 이전에 광야 사십 일의 시험이야기가 있는데, 그때 그는 사십 일 간이나 굶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굶주림의 문제가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로 등장한다. 저 돌들로 하여금 떡이 되게 하라. 이것은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환상이다. 굶주린 민중과 더불어 사는 예수에게 저 돌들을 떡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소원은 일차적인 것이었으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다는 것과 날마다 그날 그날 양식을 달라는 것이 직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일 년, 한 달 아니 단지 이틀분의 양식을 저장한 사람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날 그날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가 절실하다. 그들은 거리의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사갈 것을 기다린다. 그야 말로 노동시장/인간시장이다. 한국에도 이러한 노동시장이 엄연히 있다. 저들은 그날그날 고용될 것을 기다린다. 바로 그것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일 수밖에 없다. 누가 그를 고용하지 않으면 그날의 양식을 얻을 수 없다.

노예들에게도 이 기도는 현실이다. 노예는 의무만 있지 권리는 없다. 아무리 일을 많이 했어도 그 대가로 먹을 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양식을 얻는 것은 그 주인의 마음씨에 달린 것이다. 그 주인은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다. 그런 그에게 날마다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그 주인에게 그날 그날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게 했을까? 왜 이틀이나 사흘분을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모세가 광야에서 히브리를 이끌고 갈 때 그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저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모세의 간곡한 소원에 야훼는 만나라는 것을 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날 그날 먹어야 하는 것이며 저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축하면 썩어 버렸다. 예수의 이 기도에는 이 히브리의 만나 이야기가 모델이었을 수 있다. 거기에 물론 예수의 고유한 해석이 따랐을 것이다. 먹을 것을 저축해 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저축한 그 물질이 나를 대신하므로 나 없는 나의 삶을 가능하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저축이 있을 수 없다. 숨을 쉬는 것도 저축할 수 없다. 그때 그때 반복해야만 숨이고, 그런 숨이 사람을 살려 낸다. 예수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저축도 하지 않는 새나 꽃의 존재양식을 내댄 것이라든지, 일 년 내내 충분히 먹을 것을 쌓아 두고 물질의 보장에 안도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은 위와 같은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날 그날의 양식을 주소서. 이것은 나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소서라는 말이거나 나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소서라는 소원은 아니다. 가난한 자의 목표는 그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날 그날의 양식이나 희구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부자가 될 길이 없으니 이런 기도나 가르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부자가 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이런 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까닭은 부자가 얼마나 이웃과 하느님에게 범죄할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팔레스틴은 갈릴래아 지방을 빼면 박토였고, 비도 고르게 내리지 않아 자주 흉년이 들었기에 양식은 언제나 부족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가난한 층이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도 비록 적은 수이지만 엄청난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라삐의 기록에는 일 년의 수입만으로 예루살렘 주민 전체를 먹여 살릴 만한 부자가 네 명이나 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목축에서 얻은 수익의 십일조로 바친 송아지가 무려 일만삼천 마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의 축적은 권력을 등에 업고 남의 것을 뺏는 일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합법적으로 차곡차곡 늘려 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여유있는 지주가 수확하여 먹고 쓰고 남은 곡식을 곡간에 저장해 두었다가 우리의 보릿고개와 같은 때를 맞아 외상으로 빌려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아들였는데, 그 값이 평소의 16배에 달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외상 곡물을 빌린 사람은 결국 가을에 거둔 곡식을 몽땅 바쳐야 했거나 그것도 모자라 빛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이런 상태로 두세 해를 넘기면 가진 재산 몽땅 빼앗기고 마침내 가족을 노예로 팔아 넘겨 풍지박산이 되었다.

부자란 쓰고 먹는 것이 남아도는 사람이다. 그것은 하나의 자본이 된다. 그는 자기 힘 외에 자본이라는 힘을 빌어 이웃에 군림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도 된다. 그 자본에 남을 예속시킬 뿐 아니라 자신도 예속된다. 자본으로 자기 힘을 확대하려던 것이 자본에게 예속됨으로 비인간화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부자들을 그렇게 비판하고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 주라고 했을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것에는 나를 굶지 말게 해주소서라는 소원과 더불어 자본의 노예가 되지 말게 하소서라는 말도 포함된다.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이 기도가 위에서 해석한 것과 같은 뜻이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자의 기도지 가진 자의 기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민중이 이런 기도를 거듭했으면 저들은 가난한 집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밥술이나 장만한 사람, 직장이 보장된 사람들은 이 기도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일까? 사실 일 년, 아니 일생 먹을 것을 쌓아 놓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 기도를 어떻게 반복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어떤 형태로든 나름대로 이 기도를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해석이든 그것이 자신의 소유를 합리화하고 거기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 기도의 왜곡이다.

이 기도의 바른 해석에는 다음 사실이 절대조건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날 그날 먹을 것을 달라는 가난한 자들과 연대함으로써 그 가난의 문제에 동참하게 하는 그런 기도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라고 오래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는 배부른 경험을 하고 있는 자다. 그 만끽상태가 얼마나 타락한 인간상인가를 체험했을 것이다. 아마 배를 가득 채우고 누워 곤히 코를 고는 돼지에게서 자신을 보았을 수 있다. 실컷 먹고 밥상을 물리고서 트림을 유별나게 하면서 평양감사 부럽지 않다고 하는 순간의 그 사람에게서 구역질을 느꼈을 수 있다. 배고픈 자가 가득한 세상에 만끽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만족해하는 자가 옳은 사람일까? 세상이 문제 투성인데 자신만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배를 하느님을 삼고 있는 사람' 아닌가.

내게 일용할 배고픔을 달라는 것은 '너'의 고뇌 '너'의 결핍을 나누어 갖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가로막는, 가진 것을 버리게 해 달라는 기도일 수 있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권했듯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포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이해할 수 없고 나를 필요로하지 않으며 그리 움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자기 만족 속에서 죽어 가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기도일 수 있다. 이 기도는 그러므로 배고픈 사람과의 연대관계를 갖고 싶다는 소원의 표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예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했다. 지금 굶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분명히 편파적인 선언이다. 루가는 여기에다 부요한 사람은 화가 있다. 지금 배부른 사람은 화가 있다는 말을 대비시킴으로써 그 편파성을 더 뚜렷이하고 있다. 이 가난하고 굶주린 자는 바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공동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마태오는 '마음에 있어서'(영에 있어서)라는 말과 '의를 향해서'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로써 그는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영에 있어서 가난함은 물질적 가난과 다른 것이나 가난하다는 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리지는 않으나 의를 향해서 주림으로 만끽한 자와 배고픈 자의 만남이 아니라, 무엇엔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상태에서 연계될 수 있다. 영에 있어서 가난하라는 말은 쉽게 추상적인 도피처를 제공할 수 있기도 하나 오히려 그에게 더 어려운 주문이 될 수도 있다. 가지면서도 가지지 않은 듯이 가졌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지속, 가졌으나 그것 때문에 가지지 않은 자를 향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을 가져야하는 그런 상태에 있으라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의 입장보다 훨씬 고뇌스럽다.

의를 향해 주리고 목마른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나(우리)의 배고픈 문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부조리, 불공 정한 분배구조 때문에 생산한 자가 살길이 막히는 세상에 대한 진정한 분노를 갖게 되며, 마침내 그런 옳지 않은 세상을 바꿔 놓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리라.

배부름은 우리를 타락하게 한다. 남아도는 시간은 우리를 썩게 한다. 초가 자신을 태우는 한 초의 생명인 빛을 발하듯 사람은 자신을 넘어서 '너'를 위해 (애)태움으로 '나'로서 살 수 있다. 내게 먹을 것이 있어 배고프지 않고,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에 참여할 수 없다면 그는 먹으면서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우리)에게 배고픔을 주소서. 너의 배고픔이 나의 배고픔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만끽해서 오는 비대함에서 풀려나 그날그날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너'와 연대하여 진정한 '우리'로 살게 하소서."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