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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1. 기도의 정의

기도란 무엇인가? 종교학에서는 기도를 마법(魔法, Magic) 또는 주법(呪法, Spell)과 같은 범주에 넣고 본다. 마법이나 주법은 인간이 상의 힘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힘을 억제 또는 이용하기 위하여 마법 또는 주술을 쓴다. 가령 어떤 재난을 당했을 때, 어떤 신이 노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 신의 약점 또는 욕구를 알아내어 그것을 이용 또는 충족시키므로써 신과 타협함으로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위로 믿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재난을 주는 악령(惡靈)을 추방하기 위해서 그보다 더 강한 신의 이름으로 일정한 주문을 계속 반복하는 행위인 것이다. 대체로 한국의 무당들이 이런 것을 담당하는데 그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병든 사람을 놓고 찬송을 반복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병든 사람을 때리며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술에 속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또 기도와 비슷한 것으로 '명상'이 있다. 이것은 주로 희랍이나 인도에서 근원한 것이다. 희랍의 전통적 우주관은 그 자체에 하나의 완결된 영원한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사람은 이 법칙에 적응 되는 이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사람은 동시에 감성을 갖고 있어 그것이 그 이성을 흐리게 하므로 그 본래의 자리인 우주의 법칙의 수레바퀴에서 이탈 될 때 자기상실을 하게 된다. 명상은 이 감성적인 것에서 탈출해서 이성을 회복함으로 우주의 영원한 법칙에로 귀일(歸一)하려는 행위이다. 힌두교에는 브라만을 우주의 실재로 보고 그것에 일치할 때 비로소 인간의 궁극적 모습인 아트만(眞我)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개안은 현상적인 것으로 없어질 무상의 것으로 깨닫고 전존재(惟我)에의 귀일을 해야 하는데 그 행위가 바로 명상인 것이다.

마태오(6, 7)는 "기도할 때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안다"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메카니즘적 기도에 대한 경고이다. 그것은 주문과 비슷한 것으로 되도록 많이 계속 반복하는 기도 행위이다. 가령 힌두교에서 야판(Japan) 신을 계속 부른다든지, 불교에서는 나미아미타불을, 마호멧교에서는 '알라 일 알라'를 반복함으로써 그만큼 축복받는다고 믿는 것이라든지, 티베트인의 이른바 기도 맷돌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이런 행위는 잘못된 기도라는 것이다.

반면에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과 그 기도를 들어 줄 것이라는 약속이 무수히 나온다. 이것은 기도가 명상과는 다름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신관(神觀)의 차이를 나타낸다. 성서의 하느님은 완결 된 법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과의 교류를 원하는 이로서 인간에 있어서 볼 때 개방된 가능성이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주체와 주체의 만남과 교류의 행위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존재는 상황적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상황에 따라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할 책임적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관계적 존재라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코 홀로의 존재가 아니고 교류함으로 산다. 그런데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과의 교류를 원하는 분이다. 여기 기도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있다.

루가 18장1-8절에 기도에 대한 한 비유가 있다. 한 도시의 과부가 재판장에게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시오라고 졸랐다. 그 여인의 집요한 공세에 못 견딘 재판장은 "내가 정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자주 와서 나를 이렇게 성가시게 구니 그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한다. 이 예를 들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한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두실 것 같으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속히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다"고 한다.

여기 주목할 것은 바로 원한을 가진 그 상태를 그대로 전제하고 원한을 풀어 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첫째로 인간을 어떤 보편아(普遺我)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상황적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런 인간과 교류하려는 하느님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원한가진 상태의 정화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이런 예는 가령 세리와 바리사이인의 기도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다. 바리사이인은 스스로 자기의 수준을 자랑할 만큼 '흠없는 사람'인데 대해 세리는 세리대로 있었기에 감이 얼굴도 못들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할 뿐인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앞에 옳다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세리였고 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었다"(루가 18, 9)는 판단을 내린다. 세리의 기도는 '된 인간'의 것이 아니라 단지 개방된 상태에서 한 기도일 따름이다. 둘째로 이와 관련된 것으로 하느님은 원리적 귀일(歸一)을 요구하거나 同化를 위해서 교류로서의 기도를 요구하는 이가 아니라 한계적 존재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원수에 대한 원한이 찬 상태는 어떤 원칙적 인간관에서 보면 삐뚤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시정하지 않고 그 소원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는 것은 인간을 실존으로 상대한다는 뜻이 된다.

셋째로 이 하느님은 어떤 원리가 아니다. 인간에게 가능성으로 자신을 개방한다. 그러므로 밤낮 자기에게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원을 풀어주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능성을 실현할 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원한에 찬 기도가 무수하다. 가령 시편 13편에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 원수가 나를 쳐서 교만한 일을 어느 때까지 내버려 두시렵니까?"라고 부르짖는데, 이것은 저 과부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억지를 쓰는 어린자식의 떼를 결국 들어주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며, 기도는 '떼'를 쓰는 행위로 용납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도인(道人)의 명상과 같은 일종의 '수양의 방법'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원한에 찬 많은 군상들을 보고 있으며 우리도 바로 그런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수식없는 원한의 절규로 높아져가고 있다.

그것은 현실고발이 되고 한의 분풀이로도 된다. 까닭은 우리는 현재 어처구니없는 인권유린과 신앙의 자유마저 짓밟힘을 당하는 현장에서 한맺힌 수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기도와 행위

그런데 성서에는 기도의 몇가지 양상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는 골방에서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예수의 지시 중의 한 양상인데 그 이유는 "은밀한 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함이며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6, 6). 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는가? 이 지시는 회당에서나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유다인들의 기도와 대조시킨 것으로 보면, 인간들의 관심의 영역에서 떠나서 하느님과 단 둘만이 마주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미래의 나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미래의 나란 관계적 존재로서의 미래의 나이다. 거리에 선 나는 원한과 증오, 그리고 인간의 호응과 힘을 기대하는 혼돈에 빠진 나다. 이러한 나가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과의 사이에 일어난 문제들을 다 내버린 비역사적 존재가 되라는 말씀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관계에서 절망상태에 있는 나를 그대로 안고 그와 마주하는 것이다.

현대의 지성을 대표한다는 엘리어트는 자아(自我)의 감방에서 나올 수 없다는 비명과 더불어 문은 있는데 나갈 문고리가 없다고 절규한다. 사르트르는 죽음과 그리고 이웃이 바로 벽이 되어 나갈 문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현대인의 현실을 대변한 것으로 인간과의 차단이 죽음처럼 숙명화된 오늘의 상황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절망하면 할수록 골방에 들어가야 하는 필요성과 특권을 가진다. 그러므로 관계적 존재로서의 나를 찾고 이로써 새로운 확신으로 현실에 대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골방의 기도이다. 성서는 인간을 하느님 앞에선 존재임을 가르친다. 우리는 골방에서 이른바 양심을 재확인한다. 양심이란 더불어 안다는 말이다(conscientia; suneidesis). 백만인이 나를 오해해도 당신만이 인정하면! 그 때는 무서울 것이 없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 그 내용의 질(質)이야 어떻든 간에 그와의 관계에서 확신을 얻는 길이 바로 골방의 기도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삶은 뿌리를 뽑힌 것이 된다. 그것은 나—너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주의 가르친 기도도 처음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너'를 향한 것이다.

성서에는 광야에서나 어디에 홀로 숨어 기도했다는 보도가 많이 있는데, 예수도 제자들마저 떼어두고 홀로 산에 들어가 밤새 기도했다는 보도가 있다. 이것이 바로 골방의 기도이다.

둘째는 공동으로 하는 기도이다. 성서에는 합심해서 공동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많다.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공동체 속에 오시는 그를 말한다. 이것은 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로 되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경험과 더불어 곧 공동으로 모여 기도했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도와 고백으로 형성된 것이 신약성서이다.

공동체의 기도는 유다교의 전통이다. 저들은 18조항으로 된 공동의 기도문을 만들어 매일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비록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기도해도 이 공동의 기도를 드렸으므로 결국 공동기도였다. 예수도 공동으로 드릴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너'의 다음에 '우리'라는 복수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구체적인 것이다. 기도는 공동체의 호흡이며 절규며 고백이다. 주기도문은 초대 그리스도인의 공동기도의 표본으로서 이미 주후 50년경부터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그것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기적인 예배 외에도 오늘날 수요, 금요모임 등 계속 모여 기도한다. 더욱이 수난자를 위해 인위적 교파를 초월해서 원한에 찬 수난자의 가족들의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떼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권리요, 의무이다.

셋째 그런데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도의 양식이 있다. 그것은 행동으로서의 기도이다. 본문의 비유는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도록 가르친 비유라는 전제로서 한 과부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은 재판장"을 매일 같이 가서 조르므로 제 소원을 관철한 그 행위를 기도와 연결시킨다. 말하자면 이 과부의 기도는 불의한 재판장을 집요하게 찾아가서 성화시키는 '몸으로' 한 기도이다. 예수도 "구하라 주어질 것이요, 찾으라 찾아질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행동으로서의 기도를 가르친 것이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그것은 삶, 행동 전체가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의 삶, 그의 행동은 바로 그의 기도의 연장이며 기도 자체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의 결행 기도를 일연의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어 그의 기도에서 행동을, 행동 속의 기도를 실감나게 서술하고 있다.

나는 전태일이 유서를 쓰고 자기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한 것을 기도와 절규로 한 그의 일기를 읽었을 때, 그의 골방에서 공동으로 하던 기도가 마침내 절정에 이른,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 기도라고 단정했으며, 최근 동일방직공장의 여직공들이 인권유린에 항의를 거듭하다 끝내 들을 귀가 없음을 보았을 때 몸을 홀딱 벗고 시위했다는 보고를 듣고 그것은 바로 몸으로 한 기도라고 공감했다.

행동과 연결되지 않는 기도는 참 기도일 수 없다. 기도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행동이라고 볼 때 더욱 그렇다.

골방의 기도, 공동의 기도 그리고 행동의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것이 없이 저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셋으로 구분하지만 실은 하나의 행위이다.

3. 기도의 사건화

그런데 비록 골방에서, 공동으로 그리고 몸으로 하는 기도가 정말 응답되는가? 우리는 시편의 기도자처럼 "언제까지이니까?"를 얼마나 연발하고 있는가? 그 기도의 응답의 지연은 우리에게 회의를 가져 오고 마침내 기도를 드리면서 기도를 포기하고 하나의 액션의 도구로 삼아버릴 위험성마저 없지 않다.

때로 기도하다가도 이 세계, 나가서 우주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 한 구석에서나 또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너무도 하찮은 생각이 들어 허탈해지기도한다. 문제로 찬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내 문제, 우리 문제만을 꼭 해결해 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응답하리라는 생각이 어리석게 여겨질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낙심케한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이들을 위해 주어졌다. 이 비유는 재판장에게 "내가 정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자"라고 스스로 독백하게 하므로 그 따위 과부의 청원 따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현실임을 강조한다. 그러한 그가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는 것은 그 과부의 하잘 것 없는 떼가 하나의 '기적'을 낳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대조법적 서술이다. 이것은 기도가 반드시 응답하리라는 뜻으로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마태 7, 11)고 한 데서 "악할지라도"라는 전제를 강조하므로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과 대조시키므로 하나의 '기적' 같은 전제를 하고, 하느님은 기도를 물론 들어주신다는 서술법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 내시는 하느님"(로마 4, 17. 고전 1, 9)을 믿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원초적 신앙에 서야 한다.

우리는 오래 같은 제목의 기도를 골방에서 공동으로 그리고 몸으로 드려왔다. 그러나 때때로 하느님은 인간을 멸시하는 저 재판장 같은 생각이 돈다. 그러나 꼭 이루어주마고 약속한 하느님은 우리의 미미한 기도를 언젠가 우리의 기대를 뒤엎는 사건이 될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도 갑자기! 역사는 필연의 연속이 아니라 '사건화'로서 창조하는 하느님의 행동 과정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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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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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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