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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봉화(人間烽火)
마르 8, 31-38
1. 체코에서의 봉화

지난 16일, 체코의 프라하 대학의 철학과 학생 얀 팔라치 군이 벤체슬라스 광장 국립박물관 앞에서 소신(燒身)을 했다. 그는 15명 결사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지난 8월에 자유를 부르짖고 일어선 체코의 봉기가 소련 탱크에 의해서 무참히도 짓밟혔을 때, 세계는 흥분했으나 비교가 안 되는 체코의 무력의 열세와 어느 나라도 대항할 생각을 못한 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의 오늘도 힘이 곧 정의라는 폭력만능상주의가 행동으로 집행됐으며, 인간들은 그 앞에 굴복하고 만 줄로만 알았다. 자유에의 선봉에 섰던 드브체크도 결국 이 힘 앞에 굴복해 타협주의로 나가고, 민중은 체념 상태에서 힘 앞에 입을 다물기를 4개월, 그리고 세계는 이 사건은 아랑곳 없이 그대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아직 어른들이 애숭이로 생각하는 20세를 전후한 학생 중 15명이 이러한 힘에 굴복할 수 없어 결국 죽음으로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분신항거결사대를 조직했다. 폭력과 비겁한 굴종만이 지배 되고 있는 체념의 암흑 속에서 이 15명은 '죽음'으로 항거함으로 새 가능성의 길을 트기 위해서 어느 구석에서 조용히 다짐했다. 저들이 누구 먼저 죽을 것을 제비를 뽑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팔라치 군은 이 추첨의 첫 희생자로 뽑혔다. 그는 그의 유서에 "본인은 이 추첨에 의해 첫번째로 인간봉화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차지했다"고 했다. 무력에 호소함이 아니다. 죽음으로 전체를 살리려고 한 것이다.

인간봉화! 전자두뇌로 인간을 대치할 수 있다는 이 과학만능의 낙관주의의 대낮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이것은 정말 체코의 집권자의 말처럼 철없는 짓인가?

'인간봉화!' 그러나 민중은 이들의 행위, 얀 팔라치 군의 죽음을 놓고 철없는 짓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해서 40만 명이나 몰려들었으며, 그의 장례에 교회는 애도의 종을 울렸고, 어린 아이들이 관(棺)이 거리를 지날 때 촛불을 들고 나왔다고 하며, 그를 애도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항거리, 유고, 이태리 등에서 학생들이 봉기했으며, 이 동정의 물결은 지금 세계에 퍼지고 있다. 오늘 아침 보도에는 이 학생의 애인이라는 18세 소녀가 그를 뒤따라 소신했다고 하며, 벌써 7-8명이 동정자살을 기도했다. 인간봉화는 세계에 높이 들려, 세계에 점점이 터지고 있다.

얀 팔라치 군의 행위는 철없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의 죽음이 금방 소련의 폭력을 무찌르지 못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 죽음은 무력과 과학으로 무장하고, 역사의 방향을 그 손안에 넣고 조종할 수 있다는 현대세계의 교만은 그 몽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예언자적 경종이다. 역사는 결코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학의 공리(公理)로 예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영구불변의 아성은 없다. 역사에는 이러한 기적이 계속 일어나서 인간이 절대화한 아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 사건을 '기적'이라고 했다. 그것은 과학적 공식에 담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간'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간디가 영국에서 그 조국을 해방시킨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가 바늘 하나 손에 들지 않고, 대영제국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런 기적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권력과 100만 군인을 가지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파렴치한 폭거를 서슴치 않았다. 그가 만일 빈 주먹인 철없는 학생들의 분노로써 그렇게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는 기적을 알았다면 그런 만용(蠻勇)은 못했으리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더욱 정치권력에 자기를 무장하면 이런 기적은 잊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해진다. 우리는 쉽게 이런 사고에서 체념해 버린다. 새 가능성은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인간사는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하여 그 체념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기적은 있다. 얀 팔라치 군은 인간이 잊어버렸던 기적을 다시 보여주었다. 과학적인 계산에서는 맞지 않는 이변을 일으켰다. 어느 구석에 살다 죽어도 아무도 모를 하찮은 그 몸을 던져 불사름으로써 세계에 경종을 울리며 적어도 불공(不攻) 아성인 공산세계가 결국 깨어지고 말 쐐기가 됐는지 모르며, 언젠가는 터질 폭발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이러한 인간봉화로서 세계의 역사 바퀴를 전환시킨 사건은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것이다.

2. 예수라는 봉화

물론 목적도, 상황도, 방법도 달랐다. 그러나 무명의 청년, 무식한 나사렛에서 온 청년 예수는 봉화가 되어 결국 로마대제국을 항복케 했고, 세계의 영원한 인간봉화가 됐다. 로마는 예수의 죽음을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동포인 유대인 자신들도 그러했다. 그랬기에 그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슈바이처의 표현을 빌리면, 이 무명의 청년이 만용을 부려 단신으로 굴러가는 역사의 거대한 바퀴를 가로 막다가, 거기 찍혀 죽어버린 이 사건인데, 그 사체(死體)가 그 바퀴에 붙어 점점 비대해지더니 마침내 역사의 방향을 전환할 줄은 그 어느 누구도 몰랐으며, 지금도 인간들은 그 사실을 늘 잊어버리므로 그런 기적을 계산에 넣지 않고 삶을 영위한다. 예수는 빌라도가, 또는 유대인이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 기자들은 그것은 타살이기 전에 자살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본문에 예수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줄달음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오는 베드로가 예수를 가로막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고 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고 질타했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가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확신의 단편이다.

예수는 참 첫 인간봉화다. 그는 자기 몸에 석유를 붓고, 하느님이 유대인 또는 빌라도의 손을 빌어 불을 그어댈 것을 기다린 자살자였다. 이것으로 예수는 두 가지 사실을 계시했다. 첫째는 역사는 하느님의 손에 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사람의 참여로 실현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참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버릴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35절을 통하여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자기를 구원할 것이다"고 말한다. 무소유가 전체를 가지는 것이요,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이요, 무위(無爲)는 유위(有爲)라는 등은 오히려 동양식 지혜의 말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는 그것을 실행한 것이다. 버리는 것은 '나 하나'인데, 그것이 인류라는 전체를 얻는 기적을 낳는다.

'나를 위해'라고 안으로 움크리면 죽는다. 나를 상실한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동물 이하로 떨어지는 치사한 존재가 된다. 내가 한 사람과의 관계를 가질 때, 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한다. 그럼으로 '자기'라는 감옥에서 죽는다. 나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은 죽음의 각오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으로 나는 나를 잃을런지 모르는 모험을 안고 뛰어들 때, 그때 우리는 그를 내 것으로, 내 사람으로 만나고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써 나는 나를 살게 하며, 그 결과는 '인간'에게 파급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개방을, 적 앞에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다. 무엇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그런 와중에 무슨 일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것은, 상대를 믿는 행위로 기적을 낳는다.

예수가 제 몸을 예루살렘에 드러낼 때, 내맡기기로 결심했을 때 승산이 있은 것은 아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는 이미 그것은 승산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예수가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그 동산에서의 기도는 '승산'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그러나 그래야만 되겠기에 내맡긴 것이다. 하느님은 내맡긴 그것에서 기적을 행했다. 개인과 개인, 가정, 단체에서 나는 나를 제물처럼 내맡겨라. 그 때 기적은 일어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그 어떤 것도 절대란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절망은 없다. 대세니 숙명이니 하는 체념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언제나 희망에서 살자! 하느님이—기계가 아니라—인간을 통해서 하시는 기적을 믿자! 단지 우리가 믿고 해야 할 일은 내 몸에 언제나 석유를 붓고 있는 일이다. 그 석유에 불을 대고, 안 대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필요할 때는 나 아니면 어느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계속 장작을 쌓아 두자. 불은 누가 붙일 런지 그것은 별문제다.

둘 사이에, 가정에, 교회에, 국가에서 나는 내 몸에 석유를 붓고 기다리자. 유사시에는 나를 불사를 수 있는 각오만 세워두자! 그 때만이 기적은 일어난다.

'나는 지기 싫다, 양보할 수 없다. 죽기 싫다' 그러는 한, 나는 비겁하고 결국 그대로(그래도) 죽는다. 아니, 과감하게 '너를 위하는 일이면 지겠다. 양보하겠다. 나를 죽이겠다' 하라. 그 때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34)고 하신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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