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1

"십자가를 질 각오로"라는 말이 지각없이 오용되고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며 그것이 지닌 진리의 핵인 십자가의 의미가 왜곡된다. 일단, 특히 정가(政街)에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오용은 반드시 악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무지에서 연유됐다고 생각되므로, 그런 말과 관련된 범위 안에서 십자가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전달해 줄 의무를 느낀다.

십자가의 의미가 왜곡, 퇴색되게 된 책임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회가 져야 한다. 저들은 십자가를 함부로 매도하고 있다. 몇가지 일상적으로 듣고 볼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어떤 장로가 "나는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고 한다. 그게 무엇인가고 했더니, 등산갔다가 발을 다친 바람에 상한 다리를 수술했었는데, 어떤 계절만 되면 그 다리가 가렵고 아프니까 그것이 자기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어떤 여인은 나는 십자가를 지고 산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물었더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시어머니를 대고 하는 소리였다. 이렇게 지극히 자질구 레한 모든 고통스러운 상처나 여건―그것이 자기 잘못에 기인했건 남에게 가해된 것이 건, 나가서는 어떤 야욕을 이루는 데 거리낌이 되는 조건 따위도 '자기 십자가'라고 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앞에 장애물이 되는 것을 십자가로 표현함으로 그들이 밤낮 입으로 말하고 눈으로 보는 예수의 십자가의 뜻을 얼마나 격하시키고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만일 저들이 감상적으로 상기하고 눈물을 짜는 대상으로서의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나, 그들의 구원의 열쇠처럼 반복하는 십자가 교리와 자신들이 졌다는 십자가라는 것을 연관시켜 보면 자신의 망발에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연관시키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잘못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오도된 생각에도 하나 건질 것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를 고난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2

십자가의 의미가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독점화 된 서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십자가의 '형틀'이 그대로 장식품으로 둔갑하여 마침내 여인들의 목걸이로까지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되는 데는 긴 탈바꿈의 요인과 과정이 있었다.

종교사적인 고찰에 의하면 옛부터 세계 도처에 십자가의 형태 또는 그와 유사한 모양의 것이 장식용으로 또는 마술적 표적 또는 제사의식의 표식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것은 점차 세계(우주)를 상징하는 심볼의 역할을 했는데 그리스도교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할 때 이런 표지를 이용했다. 그런 흔적이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에 그리스도교를 토착시키기 위해서 이미 이집트에서 삶의 표상으로 사용되고 있던 십자가형과 유사한 것을 그대로 그리스도교의 표상으로 사용한 경우를 위시하여, 스웨덴, 인디안 그리고 몽고에도 그런 과정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리스도교는 자신 안에서 십자가상을 자체의 심볼로 만드는 과정을 밟았는데, 초기에는 그것이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됐다. 그 하나는 종말적인 검인으로, 다른 하나는 구원 사건의 심볼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처음의 것은 점차 부적과 같이 보호받는 담보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둘째의 경우는 점점 십자가형을 기도의 대상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이 둘째 경우는 역사적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한동안 이슬람교도들이 메카를 향해 경배하듯,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처형장인 동쪽을 향해 기도한 기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역사의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어떤 마술적인 힘을 현존적으로 기대한 것이기에 주술적인 요소가 더 강했던 것이다. 콘스탄틴대제의 어머니가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전설(inventio Crucis)이나 십자가 칭송제(exaltatio Criucis) 같은 것은 위와 같은 탈바꿈의 역사의 산물이다. 결국 이 두 조류가 합쳐짐으로 십자가는 예배의 대상이 되어 교회 앞 중심 벽에 걸려졌는데, 그것은 적어도 주후 3세기에는 일반화됐다.

이것이 교회가 로마의 국교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예술품화되어 십자가형이 아니라 그 위에 처형된 예수상이 부착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주후 4세기초부터이며, 그후 십자가는 집에, 몸에, 교회 건물에 그리고 무덤에까지 수호신처럼 붙어 다니기에 이른 것이다.

3

이러한 과정을 밟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성서의 구절이나 거기 나타난 종교의식을 해석하는 것으로 뒷바침이 있었다. 생명을 보호하는 표지로 몸에 지니는 규례가 구약시대부터 있었는데, 그것이 에제키엘서(9, 4)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것을 착취와 박해를 당하고 있는 자들의 이마에 표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보호의 뜻도 되지만 장차 올 새 세계를 위해 선별됐다는 신표였다. 이와 유사한 계율이 여러 곳에 나온다(창세 4, 15. 이사 44, 5 등). 그런데 이런 종교적 표상에 젖은 사람들이 바울서신이나 그밖의 서신의 십자가 해석을 쉽게 그들의 종교의식과 결부시키게 했다.

유다 사람들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이 유다 사람들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 사람(희랍)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는 하느님의 능력이요…(고전 1, 22-24).

이상과 같은 표현에서 사람들은 쉽게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라고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서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없이 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둘을 한몸으로 만들어(에페 2, 16)

십자가가 우리를 고소하는 문서를 치워버린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주권과 권위의 무장을 해제했다(골로 2, 14-15).

이 표현들을 역사적 예수 처형의 사건을 뛰어넘어 '십자가' 자체의 위력으로 받는 경우, 십자가형의 물체 자체가 화해의 위력을 발휘하고, 박해자로 임하는 권력자들의 횡포에서 보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같은 과정으로 십자가는 점점 비역사화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종교적 상징 내지 부적과 같은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심리를 이용한 십자가의 남용은 중세에 그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요인은 이방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 토착화를 위한 노력에서 파생된 십자가 '전용'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4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그의 신학적 이해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에게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둘이 아니라 한 사건의 양면이다. 그가 십자가를 말할 때 예수의 처형을 전제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을 직결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 또는 '십자가와 부활' 또는 '십자가의 도(道)' 따위의 표현을 계속하면서 그것의 구속사적 의미는 계속 말하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형이 예수에게 '왜' 그리고 '어떻게'지워졌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물론 그 배후에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있다—십자가의 사건을 크로노스(年代)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카이로스적으로 파악했다. 이 말은 누가, 언제,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됐느냐가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물음을 해명하는 데 집중했다는 말이다. 그 대답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은 카이로스적(開關의) 사건, 즉 종말적 사건으로서 낡은 세대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고 새 세대가 개벽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설명할 때, 우리의 죄를 씻고(낡은 인간은 없어지고) 새로운 창조물(인간혁명)이 되게 한 사건, 우리의 죄를 대신한 죽음의 사건이라고 하게 됐는데, 이 해석은 그 시대의 법적, 제사적 발상법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분명히 십자가의 사건이 종말적 사건, 그러므로 구원의 때를 오게 한 사건이라는 증거로서 부활이라는 사건을 증언하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이 바로 이런 뜻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묵살함으로 그것을 비역사화 해버린 점이다. 그것은 한 작은 지역과 사회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을 보편적이고 세계사적 사건으로 승화하기 위해서 부득이한 과정인지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십자가 사건의 오해와 오용의 길이 터질 뿐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도케티즘화(假顯化)의 길도 터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의 결정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와 권리다.

5

십자가형의 역사는 예수의 처형 이전으로 소급한다. 그것은 중동 일대의 처형법으로 가장 잔인한 처벌이다. 그것은 극악한 죄인에게 주는 형벌이란 말이다. 만일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누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한다면 스스로 최악의 무법자가 되겠다는 것을 선고하는 뜻이 된다.

유대의 독립군들의 슬로건은 한마디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까닭은 점령세력이 정치적 봉기자들을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이런 처형법을 도입했다. 이 처형법은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악질로 간주되는 범죄자들에게 적용했는데, 그들의 국내에서는 반역한 노예—가령 신전을 더럽혔다든가. 그 주인을 사살했다거나, 다른 방법으로 치명상을 입혔다든가―에게, 그리고 점령지에서는 반(反)로마 정치범에게 십자자형을 감행했다. 로마제국은 점령지의 일반 민사범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풍습이나 종교를 존중했고, 주로 점령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하고 경제수탈에만 집중했다. 그런 정책을 세운 저들에게 최대의 위험분자는 반로마 운동자들임은 당연하다.

유대민족의 독립운동은 가열됐다. 로마가 세금징수를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루가 2장에 반영됨) 그에 저항하여 조직화된 민중운동이 구체화됐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로마의 세금징수 거부운동을 폈고, 그와 더불어 세금징수의 앞잡이인 세리들을 최악의 적으로 간주했는데, 그런 입장은 전 유대인에게 호옹을 받아 세리는 죄인으로 규정, 특히 부각시켜서 '세리와 죄인'이라는 관용어를 사용할 정도가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 그룹으로서는 젤롯당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을 이끈 이들 중에는 메시아로 추앙된 인물들이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과 메시아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저들의 목표는 로마 세력을 내몰기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그들의 싸움을 야훼 신의 뜻이라고 보아 '성전'(聖戰)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들의 반로마운동의 일차적 대상은 친(親)로마 세력인 자기 민족의 지배층이었다. 예루살렘은 성도(聖都)라는 이름으로 성별(聖別)됐으나, 바로 그것이 미끼가 되어 점령세력과 타협하고, 나아가 서는 어용화하므로 민족을 팔아넘기는 세력의 근거지가 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외세 그룹은 탈(脫)예루살렘과 동시에 그들은 힘을 모아 예루살렘을 저들의 손에서 되찾아 숙청하는 것을 그들의 프로그램의 첫 과제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어용세력은 저들을 싫어한 나머지 저들을 즐겨 '강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십자가에 처형됐다. 그들은 민중에게는 메시아 운동가요 '예루살렘파(派)'들에게는 강도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됐는데, 그것은 십자가형에 의해서였다. 예수와 더불어 두 사람이 동시에 십자가형을 받게 됐는데, 사람들은 흔히 저들을 '강도'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르코 15장 27절에 의한 것인데, 마태오도 그렇다. 이 표현은, 처음에는 독립군의 한 부대를 지휘하다가 투항한 뒤 친로마 어용사가로 변절해서 『유대사』를 쓴 요세푸스 같은 사람이 썼는데, 이 말은 고려없이 썼거나 아니면 정치상황을 고려한 말이다. 그들이 독립군이라는 사실은 그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고 옥에 갇혀있는 소요자('폭도'란 번역은 적당치 않음)들 중" 운운(마르코 15, 7)하는 서술에서 분명하게 암시되어있다. 루가 기자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았기에 '강도'를 '죄수'라는 말로 고쳐쓰고 있다(23, 32).

예수는 역시 정치적 소요범으로 처형된 것이다. 그의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기록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죄명은 로마 치하에서는 정치적 메시아 운동가들에게 쓰여졌다.

이상의 사실에 근거를 둔다면.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 될 것인가? 그것은 우선 권력자에게 처형될 각오를 하겠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처형 이유 여하에 따라서 그 말의 뜻은 좀더 복잡해진다. 만일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반로마 메시아 운동의 일환으로 예루살렘을 숙청하기 위해서 한 부대를 끌고 입성했다면, 그는 무력적 혁명가로서 처형된 것이다. 이에 반해서, 그는 정치적 차원에서 무력으로 체제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억눌린 민중의 친구가 되어 새 세계(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설교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지배층에게 오해를 사서 정치범으로 몰렸다는 이러한 견해에서 보면, 그의 십자가는 오해에 의한 억울한 수난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십자가 사건은 집권자에 의해서 처단된 사건이란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

6

성서에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이 있다. 이것은 마르코의 전승인데 Q자료(루가 14, 27; 마태오 16, 24)에는 부정형으로 전승돼 있을 뿐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은 마태오 11장 29절의 "내가 너희에게 주는 '멍에'"로 해석하려고 한다(T. Arvedson). 어떤 이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화인을 찍어 종말적 예수에의 소속자로서의 표시를 받으라는 뜻으로 풀이하며(Dinkler), 나아가 이것을 세례로 해석해 버리는 이들도 있다. 이런 따위의 해석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시켜 실현 가능하게 하거나, 추상화해 버리려는 노력이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와 결부시키는 해석도 있었는데, 그런 해석은 십자가를 고행주의에 결부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따위 해석은 그 말이 지니는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려는 전제에서 하는 헛수고다.

7

일반적으로는 '십자가를 지고'를 '수난' 또는 '죽음'까지도 각오하라는 것으로 추상화해서 받아들인다. 그런 뜻이라면 왜 하필 십자가냐?

이 말은 우리에게는 낯선 말이다. 그러나 로마 치하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그것은 절대로 낯설지 않았을 것이며, 단순히 수난이나 죽음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까닭은 예수 당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가 쓰여질 무렵까지는 수많은 메시아적 독립 운동가들이 십자가에 처형됐으며, 그 피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을 때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이 바로 십자가에 처형됐던 것이다. 이 복음서의 초기 독자들은 이 말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을 생각했는지 모른다(J. Gnilka).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다. 슐라터(A. Schlatter)는 이것을 젤롯당의 운명과 그들의 슬로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가톨릭 신학자 그닐카(J. Gnilka)는 최근에 낸 마가주석에서 이 말의 뜻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배제하고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으며, 젤롯당에게도 그러한 각오가 서 있었음을 전제하고 이 말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는 예수의 처형과 결부시켜서 고난과 죽음의 각오를 표명한 것이라고 본다. 사실상 이 요구 앞에 어떤 도피구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누구의 귀에나 그렇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 머물면 쉽게 고행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지 않을려면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의 역사를 물어야 한다.(혹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하여 그런 물음을 포기하거나 나가서는 금기처럼 규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록 그 사실을 재생시키지 못하더라도 그 물음을 포기하면 그런 함정에 빠진다.) 우리는 최소한 '사도신경'에 포함시킨 표현인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라는 것을 거듭 의식하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뜻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빌라도는 바로 로마제국을 대표한 하수인이다. 그러나 예수는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됐다. 로마제국은 점령세력이다. 이 점령 세력은 구체적으로 군사 세력이었다. 저들에게는 작은 민중 따위의 종교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로마제국의 점령권과 그리고 경제적 수탈에만 관심했다. 그러니까 저들은 반로마 독립군은 극형으로 십자가에 단 것이다.

성서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점령세력에 고소한 것처럼 서술돼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죄명을 중구난방으로 씌우려다가 결국 자칭 '유대의 왕'이라고 했다는 것으로 로마법에 걸 수 있을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누가 고소했건 로마세력에 의해 처형됐다. 유럽 그리스도교는 반유대인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때 유대인이 예수를 처형한 민족임을 내세워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당치도 않은 억지다. 비록 유대인이 종교적 이유로 예수를 증오했다고 해도, 저들은 로마세력을 등에 업은 어용적 유대민족 지배층이다. 그들은 이권(利權)에 의한 타협과 양보로 지배권의 많은 부분을 행사할 수 있는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쪽이 예수 처형의 원흉이든 십자가는 권력자의 눈에 거슬려서, 그 권력이 도전당한 데서 생긴 사건이다,

8

이상에서 십자가가 '부적'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십자가를 보호의 표지로 아는 경우를 빼면 결국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사실에 근거하는 관점과 의미로서 보는 관점이다. 사실에 근거한 십자가는 정치권력에 의해 처형된 사건이니까, 이에 따르면 '네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정치권력에 의한 박해 내지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이되며, 그 의미로서 '남의 죄를 대신한 죽음' 또는 '남을 위한 죽음'이라는 신앙고백에 근거하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겠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안에서 두번째 의미로 십자가를 진다고 해석한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까닭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유일회적 특성이 그리스도론과 더불어 확고한 교리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실에 근거해서 정치적 권력에 수난 또는 죽을 각오로!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아니!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순교를 최대의 성업(聖業)으로 생각하던 시대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순교의 각오는 정치적 권력이든 종교적 권력이든 권력에 의해서 수난당한다는 각오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동기는 어디까지나 이른바 '종교적인 것'이다. 이 말은 이 같은 각오는 종교적 고행주의에 뿌리를 둔 것으로 십자가를 비역사화하는 행위이다.

TAG •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