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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1. 내버려 둠과 자율

로마서 1장 18-32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죄악을 심판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심판에 대한 특이한 해석을 한다. 즉, 이 본문에서 바울은 세 번이나 '하느님이 인간을 … 내버려둔다'고 한다(24, 26, 28). 바울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음으로 벌한다가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리고 내버려두었다가 마지막에 심판한다가 아니라, 그대로 죄 속에 점점 빠지도록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이요, 벌이라는 것이다.

어떤 상태에 내버려두는가?

첫째, 저들을 저들의 욕정대로 내버려둔다고 했다(24절). 욕정이란 성적 쾌락인데 이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는 진리니, 양심이니, 공적(公的) 질서니, 체면 따위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상태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이다.

둘째, 좀더 그것에서 상승해서 구체적인 경우, 즉 욕정이 지나쳐서 변태 성욕에로 돌입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고 한다. 즉 동성과의 성교가 그것이다(26절).

셋째, 좀더 광범위하게 사회생활 전반에서 분명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서스럼없이, 그리고 마침내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하는 것을 하는 그대로 내버려둔다고 한다(28절).

인간은 스스로 제가 거둘 씨를 심는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를 조정하지 못한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그 자신을 자율적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자율적인 행위 자체가 곧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의 결과가 곧 하느님의 심판임을 선언하고 있다.

내버려두는 것 자체, 방종해도 아무도 막지 않고 방해받지 않게 되는 무풍지대와 같은 상태가 바로 심판이다.

커기는 아들은 부모의 간섭이 싫다. 커가는 아들은 이래라 저래라 이러면 안 된다는 부모의 걱정에 대해 자신도 납득 못할 반항심으로 맞선다. 저러면 안 된다하는 말 자체가 옳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간섭받기가 싫다. 그러나 부모는 자기(아들)의 역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간섭한다. 그래서 부모에게 반감을 갖다가 결국은 부모의 눈을 숨기면서 자기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두 번 하다가 들켜서 호되게 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그 짓을 한다. 이제 그 아들에게는 자기조정능력이 없어졌다. 어느 때부터 부모는 아무 말이 없다. 몰라서 그러는가했더니 아들의 반복적인 행동을 알면서도 내버려둔다. 몰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벌을 주려나 했지만 그러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이제 모든 간섭은 끝났다. 그는 점점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 알면서도 내디딘 일에 자꾸 빠져든다. 마침내 부모의 간섭도 없고, 자기 양심도 무시해 봐도 살 만한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그는 더이상 헤어날 수 없을 만한 상태에 빠져서 그것의 노예가 되고, 결국 자기를 완전히 망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의 부모가 자기를 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왜 날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뒀소? 너무 심합니다'고 원망할 때, 그는 자신의 자율이 곧 타율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그를 그렇게 하게 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내버려둔 것은 바로 부모가 자기에게 주는 벌이었다.

2. 자율과 방종

계획한 일이 척척 잘 되어간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재수가 좋다고 한다. 종교인들은 '하느님이 날 사랑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 일을 진행하는 자기의 방법도 쉽게 정당화시킨다. 이와 반대로 어떤 일이 제대로 안 된다. 될듯 하다가도 어떤 방해를 받아 와르르 무너지고 돌발사건으로 세워가던 것이 무너진다. 그럴 때는 '운이 나쁘구나', 아니면 '누구 누구 때문에'라고 원망하거나, 종교인이면 하느님이 내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일이 잘되거나 못거나 간에 언제나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다.

한 관리가 부정을 저지른다. 그리고 묘하게도 들키지 않는다. 점점 축재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양심이 허락되지 않은 일을 한 것 인데, 별일이 생기지 않으니까 '이래도 괜찮구나'하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의 부인이 한사코 그런 부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니까 잠잠하다. 그는 그의 부인에게 자기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는 그 잘 되어 가는 것, 누구도 관심하지 않는 것 자체 속에서 자기가 치명적으로 좀 먹어들어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부인이 침묵했던 것은 그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었다. 그 부인이 '너는 사람이 아니다. 희망이 없는 놈이다'라고 포기해 버린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부인이 보따리를 쌀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가 그동안 부인에게 심판을 받고 있었구나! 나는 나를 잃었구나!'고 인식한다. 나는 분명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데 얼마동안 그토록 충고하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절연해 버릴 때,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다. 아니, 그는 그들에게 이미 버림받아, 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람들, 이웃들이 내리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판정인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음식물을 엄격히 통제하다가 어느 단계에 와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으라고 할 때, 그것은 실은 그를 버린 순간이요, 그에게는 사형선고임을 알게 된다. 양심도, 친구도, 하느님도 전혀 간섭하지 않을 때. 내가 분명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데도 무풍지대처럼 거리낌이 없을 때, 그 때 그는 필경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 것을 모르기 쉽다.

3. 아픔과 권고

생리적으로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실은 아직도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증거이다. 통증이 있는 것은 빨리 치료하라는 적신호이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각혈을 한다. 그것은 '네 폐를, 네 건강을 검사해 보라!'라는 '삶'에게 신호하는 SOS다. 그가 그때 그것을 내 건강에 대한 간섭, 내 무질서한 삶에 대한 SOS라는 것을 알면, 그 각혈을 내가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통증도 없고 각혈도 없으면 그는 안심하기 쉽겠지만 실은 이미 희망이 없는 사경(死境)의 환자임을 의미한다.

양심에 아무렇지도 않고, 하느님 따위도 무섭지 않을 때, 그는 정말 이미 선고받은 자인 것이다. 침묵! 이것은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그것은 저 하는 대로 내버려둔 것이다. 우리도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 내버려두는 일이 많다. 어린애가 위험물을 계속 만지려고 한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다.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 순간은 실은 '너 한번 당해봐라. 그래야 안다'라는 심정에서 하는 일이다. 내 가까운 사람이 내 충고를 끝끝내 듣지 않는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를 내버려둔다. 그것은 그 결과를 '네가 당해 봐라' 하는 포기의 무언(無言)의 선언이다.

내 삶에 아직 문제가 많고, 하려는 일이하려는 대로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은 아직도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이것은 '내게 무슨 잘못이 있구나' 하는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불의한 방법으로 사는 데도 순탄하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으면 그는 대체로 이미 버림받은 사람이다. 내가 사람을 속였는데, 배신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했는데 하느님도, 사람도, 내 양심도 간섭하지 않을 때, 나는 실력도 없이 출세했는데도 그 명맥이 계속 유지될 때, 그럴 때 운이 좋다고 생각치 말라. 아니 너는 이미 버림받은 자로서 심판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

한 살인자가 수사당국도, 이웃의 어느 누구도 모르게 완전범죄를 했다. 얼마 지나니 양심도 괴롭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혹시 신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전혀 간섭이 없으니 아주 안심했다. 그러나 목사로부터 '하느님은 살아계시다'는 설교를 듣고 다시 무서워진다. 그래서 그 목사를 찾아간다. 그것은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그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사에게서 확실히 하느님은 엄존한다고 확인한다. 그러면 이 침묵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나? 그에게는 이 침묵에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왜 당신은 침묵으로 날 괴롭히는 거요? 내가 살인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벌을 주거나 용서한다고 확언하지 않는거요?'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에게는 그 침묵이 매보다 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이 죽음의 심연처럼 그를 조여왔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몰락되었을 때,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외치며, 이스라엘은 기뻐해야 한다고 했다. 까닭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관심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침묵은 무섭다. 예수의 십자가의 비극성은 그 하느님으로 절정에 이른다.

4. 스스로 망하게 하는 심판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알 만한 것을 보면서도 그 신을 묵살하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이유를 갈파한다. 그 행위는 그 신을 배제하고 그들의 불의한 삶을 인정해 주는 담보를 찾기 위해서이다.

희랍의 신들이 그렇다. 불의한 사랑을 보장받기 위해서 불의한 사랑의 신, 성적 쾌락을 연장하기 위해서 성(性)의 신 등등 무수한 신을 만들고 그 신전을 자기 정욕과 윤리적 갈등을 제거하는 담보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런 삶을 계속 지속시키려고 했다.

우리는 내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종교적 관념을 만든다. 세계관을 만든다. 국회의원이 된 한 목사가 시계를 대량으로 밀수하다가 세무당국에 적발되어 수사대상이 된 일이 있다. 그 때 그는 "내 순결함은 하느님만이 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신을 믿지 않고 있으며 그 침묵을 자기를 위장하는 데 이용하려고 한 최대의 사기꾼이다. 그는 정말로 버림받은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단지 하느님이 끝끝내 침묵해 줄 것만 확신한 것이다.

토착민들을 짐승처럼 혹사시킬 때, 스페인의 가톨릭 승려들은 하느님은 태초에 그 토착민들을 백인들에게 봉사하도록 창조했다고 증거했다. 백인들의 이러한 신앙, 언설(言說), 삶의 자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를 보여준다.

자기가 어떤 궤변을 할지라도 일단 저항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은 안심한다. 그러나 그는 그때 벌써 버림받고 있다. 현금은 무슨 짓을 해도 신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 부재의 세계 건설을 모토로 나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학자들도 이것을 지원한다. 신의 침묵이 신의 심판임을 저들은 모른다.

바울은 "그들은 스스로 지혜있는 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가진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욕정대로 서로 자기들의 몸을 욕되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그들의 자유에 맡겨 두시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바울은 하느님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를 정당하게 봐 주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것으로 심판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이 소리를 바로 듣는 자는, 그에게 살 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침묵이 심판임을 알 때, 그때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알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느님이 날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로소 다시 살 수 있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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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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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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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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