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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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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1. 제물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언성을 높이면서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화가 난 채 훌쩍 나가더니 밤 늦게야 만취해서 들어왔다. 보통 때면 아빠 오신다면서 아이들을 부르며 그의 옷을 벗기고 자리를 펴고 야단하던 어머니는 까딱하지도 않고 하는 바느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침한 꼴이 보기 싫은지 "이놈의 집안"하면서 훌쩍 윗방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했느냐는 물음도, 권함도 없다. 소년은 "엄마"를 흔들면서 아버지 시중을 들어주기를 권했으나 평소 부드러운 엄마의 얼굴은 굳어만 간다. 할 수 없이 윗방에 조심히 올라가서 누어 있는 "아빠"를 흔들면서 "저녁 먹어" 해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이 어린것을 가운데 두고 밤마다 웃음이 오가던 집이다. 어린것은 너무도 쓸쓸해서 술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슬픔을 안고 그 어두운 시골의 암흑 속에 우두커니 서서 늑대라도 왔으면 했다. 이렇게 어린것이 어두운 밤을 밖에서 서성거리는데 엄마, 아빠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초가 처마 끝에서 참새소리가 들렸다. 거의 반사적으로 큰 아이들에게서 배운 대로 그 새를 잡기 위해서 사다리를 벽에 걸치고 올라갔다. 그런데 그 사다리가 뒤로 넘어지는 통에 이 어린것은 그 밑에 깔렀다. 비명을 울렸다. 그 순간 아래 윗방문이 동시에 열리 더니 엄마 아빠가 맨발로 뛰쳐나와 그를 안아 방에 눕혔다. 팔이 탈골된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것 저것 지시하면서 팔을 힘껏 잡아당겨 뼈를 맞추고 길쭉한 판자를 대고 팔을 붕대로 휘감았다. 어린이의 몸에는 열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 곁에서 앉은 채 밤을 샌다. 이 어린것을 두고 서로 말을 주고 받는다. 저절로 해빙된 셈이다. 어린것은 엄마 아빠를 번갈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가 잘못했다'면서 그의 손을 잡는다. 어린것은 아빠의 손도 끌어다가 엄마의 손등에 얹어놨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고 아빠는 "자식이" 하면서 그대로 응했다. 셋은 함께 웃었다. 어떻게 그 장면이 행복했든지, 어린 마음은 그들의 화해에서 받는 기쁨 때문에 아픈 것을 잊었다. 그후 여러 날 그는 팔을 매고 다녔으나 상한 그 팔이 대견해서 만지고 또 만진 기억을 오래오래 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나서 자라나는 데는 많은 희생물을 전제로 한다. 조그마한 풀 포기가 땅에서 돋아나서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도 많은 거름이 있어 가능하다. 한 씨의 핵이 살기 위해서 그 껍질이 철저히 썩어야 한다. 한 어린 생명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눈물이 강요되는지, 참 부모란 자식이 자라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들을 계속 썩히면서 그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젖은 곧 그의 피가 아닌가!

서구 그리스도교회에서는 펭귄의 그림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미가 가슴을 헤치고 그 새끼들에게 자기를 뜯어 먹게 하는 그림이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의 심볼을 삼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삶은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참 삶은 너에게 나를 제공하므로 성장되는 '너' 속에서 가능하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런 원칙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면 삶은 병이든다.

모든 사물을 보는 데 두 가지 눈이 있다. 그것은 소극적인 것을 보는 눈과 적극적인 것을 보는 눈이다. 어떤 사람은 이즈러지는 것, 썩는 것, 죽는 것, 손해된 것만을 보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자라는 것, 살아나는 것, 유익한 것에 더 관심한다. 하나는 음지만, 다른 하나는 양지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 두 현실은 둘이 아니라 한 사실의 양면이다. 사람은 한 면만 볼 수 있어서 웃고 울 수 있는지 모른다. 만일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런지 모른다. 꽃 한 포기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심취하는가, 그 뒤에 그것을 있게 하는 수많은 시체들을 본대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데 자연이나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이런 원칙을 자명적인 것으로 아는데, 우리의 정신세계는 이 원칙이 이기적 욕심에 의해서 계속 저지당하고 있어 사람의 세계는 본래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내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어떤 희생과 시체를 밟고 있는지를 의식하는가?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내가 희생당하고 썩고, 경우에 따라서 하나의 시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가?

2. 복음의 전진

여기 투옥된 한 그리스도인이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저항하는 선봉에 섰던 과거를 가진 바울이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 편지를 썼다. 그 목적은 저들에게 자세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게 무엇인가? 그가 억울하게 투옥됐으니 진상을 밝혀서 오해를 풀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를 투옥한 자들의 불법성을 고발하는 것도 아니요, 더욱이나 그의 구명운동에 도움이 될 어떤 것을 알리려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복음은 전진한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복음 자체의 위력을 경험했다. 복음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위축됨이 없이 전진한다. 비록 복음 전선의 총수격인 그가 투옥되고, 교회 내에는 아직 불순한 동기에서 움직이는 자들이 있어도 복음은 전진한다. 그러므로 비록 난관이 있어도 실망하지 않으며 또 실망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런데 바울은 한 관망자로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감옥에 매여있는 자로서 "그래도 복음은 전진할 것이다"라는 추상적인 신앙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전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 당한 일"과 복음의 전진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지금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당한 일) 보면 그는 단순한 피해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전했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 아니다. 까닭은 당시까지는 아직 로마정권이 그리스도교를 불법 단체로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복음의 사자(使者)로서 살아왔다. 그렇다면 그가 투옥된 것은 오해에 기인했거나 아니면 정치적 측면에서 그를 위험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억울한 일이며 그를 그렇게 해야 하는 현실은 암흑이요 부조리의 사회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바울은 자기의 처지와 이 세계를 원망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당한 일 그가 희생되는, 있는 현실에 초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적극적인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전진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서 전진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을 밟고 가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복음은 구체적인 역사의 현실을 따르면서 전진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언제나 희생의 제물이 뒤따른다. 바울은 그가 당한 일이 그러한 희생의 제물이 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 친구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할 것을 절감한 것이다. 상한 팔에서 오는 고통에 울어야 할 어린것이 그것을 계기로 그 부모의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가 당한 일로 복음이 전진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으로 입증됐다. 그가 투옥된 것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의 계기가 됐다. 첫째는 그가 투옥되므로 바로 그를 투옥한 권력층과 접촉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됐다. 둘째는 전에는 반신반의했거나 바울에 의존하여 피동적으로만 움직이는 친구들이 복음선교의 전선에 나서게 됐다. 저들은 그가 당한 일을 계기로 그 책임을 넘겨받았다는 의식을 찾은 것이다. 세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권위를 등에 업고, 바울을 질시하던 교회 안의 일파들이 그가 투옥되므로 복음선교 전선에 나서게 됐다. 그 동기는 불순하다. 그러나 그런 불순성을 타고 복음은 전진한다. 바울은 이 복음이 전진한다는 사실 앞에서 자기가 "당한 일"이 비로소 무의미한 희생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의 믿거름이 된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 밑거름이 된 사실에서 자만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를 짓밟고, 자기를 밑거름으로 전진하는 복음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발견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3. 사건으로서의 선교

복음은 그 자체로 전진한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위축됨이 없이 전진한다. 그러나 복음은 전하는 자를 매개로 전진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선교의 사명을 강조한다.

그런데 복음선교란 그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며 교회를 조직하는 것에 국한되는가? 분명히 바울의 행로는 그런 행위로 성격화되어 있다. 그는 지중해 일대를 초인적으로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논쟁하면서 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바울이 투옥된 것은 그만큼 복음전진에 큰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전진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의 당한 일이 선교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왜 그럴까?

바울이 투옥된 이유는 그의 편지에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데 만일 통설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사도행전 21장에서 보는 대로) 로마에 이송되어 거기서 이 편지를 쓴 것이라면 복음전파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누명을 쓰고 투옥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보도대로 하면 그를 없이 하려고 한 자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로마 정권은 사회안정을 해쳤다고 보아서 그를 체포했다. 그러나 역사적 배후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른다. 사도행전에도 로마군의 천부장(聯隊長)이 바울을 "폭도 4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그 애굽 사람이 아니요"(21, 38)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것은 반로마적 메시아 운동의 하나였다. 당시의 로마정권은 반로마 메시아 운동에 신경이 날카로웠는데 그렇다면 바울을 반로마적 위험 인물로 보았는지 모른다.

하여간 그는 복음을 설교하는 행위가 아니라 투옥이 된 사건 자체에서 새로운 사실을 경험한다. 그것은 그에게 이러한 사건 자체가 결과적으로 복음선포의 행위가 됐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당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진의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중요한 발견이다. 더우기 그가 지금 억울하게 수난당하는 일이 복음 전진의 계기가 됐다는 것은 그가 미쳐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이론을 따지고, 말에 내용을 싣고, 조직교회를 세우는 등의 직접적인 선교행위와는 다른 복음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관념적인 논리를 타고 전파되는 선교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까닭은 그것은 개인들에게 호소하는 말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역학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능력이나 계획에서 된 사건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복음 자체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인간의 지략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의 전진은 그 이상 어떤 것을 계기로 삼을 지 예측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지식으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어떤 동기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으니 나는 그것으로 즐거워합니다"고 한다. 어떤 동기로 되든지 그것은 종당에는 하느님이 하는 일이다. 바울의 투옥이 복음전진의 계기가 된 것도 자신의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이것은 위대한 발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교는 원래 그렇게 시작됐다. 예수의 선교는 말이기에 앞서 사건이 아니었던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바울이 투옥된 조건들과 본질상 같지 않은가?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바울의 경우처럼 극히 모호한 동기로 애매한 죄목으로 처형된 사건이다. 그것은 말씀의 사건이기에 앞서 사회역학적인 사건이다. 말씀(논리)을 앞세우고 그것에 부합된 것만을 진리라고 보는 인간에게 이 사건은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만일 예수가 정치운동을 했기 때문에 처형됐다면 그 죽음과 그 의미 사이의 연결성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닌데 정치범의 누명을 쓰고 죽는 데도 아무런 구원의 손길이 없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이런 '간접적인 사건'을 복음 전선의 사건으로 만든 것이 부활 사건이며 이 부활 사건이 하느님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곧 Missio Dei다. 누가 이 억울한 처형, 사건 당시의 역사가나 정치가들이 예외없이 묵살한 미미한 사건이 세계의 사건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 될 것을 짐작했으랴! 그리스도는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 복음은 탄생했고 전진했다. 바울은 바로 이 전진의 대열에 섰을 따름이다.

4. "내 당한 일이 도리어"

우리에게 내 당한 일에서 "도리어"라는 거점이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억울한 상황에 처할수록 그렇다. 내 당하는 일이 납득이 갈 만한 것이면 그 자체로서 대답이 가능하다. 내 한 일과 내 당한 일이 일치될 때 증언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쉽게 좌절해 버리거나 원망 아니면 영웅적 공로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내가 당하는 일이 어떤 뚜렷한 것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 분명하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남는 것은 억울함밖에 없다.

그러나 내 잘못이 없는데도 범법자로 취급되며 내 한 일과 내게 부과된 죄목이 전혀 달라지는 경우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솟아날 힘은 나와 이 지평 밖에서만 올 수 있다.

"도리어"는 과거의 필연적 연속이 아니라 창조적 전환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도리어"는 창조자에 대한 신앙에서 생긴 사건이다. 창조자는 "당한 일"을, 언어도단의 정황을 "도리어"의 새 현실 창조의 전기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도리어"는 내 안에, 나의 계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필립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에 있어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내게 들려 주시오"(28)라고 한다. 까닭은 의외의 사건, 이유없는 박해가 오는 경우에는 그것에 미리 대비할 말이 없기 때문이며, 그렇다고 그런 경우를 사전도피 할 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당하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이 "도리어"의 창조활동을 어떻게 전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서워하지 않는 일이다. 어떤 일에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도리어"의 창조신앙을 가진 자에게 가능하다.

따라서 "희생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에 들어서는 행위와 뜻밖에 당하는 고난에서 점차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기가 신념에 따라 어떤 행위를 했는데 예기하지 않은 수난이 왔다. 그런데 처음부터 제물이 되겠다는 숭고한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억울한 일이 "도리어"의 사건을 일으킨다. 그 사건은 내 당한 일의 필연이 아니다. 이 일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상상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당한 일"이 이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면 그것은 내 공로와 무관한 것이다. 까닭은 내 당한 일을 그 같은 계기로 만든 것마저 새 창조의 행위에 포함 되기 때문이다. 그 어린이의 팔이 부러진 것과 그 엄마 아빠의 화해와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적어도 그 어린이에게는 우연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는 환희마저도 예기했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환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복음이 전진한다. 그 어떤 악조건, 우발적 사건도 역이용하면서 전진한다. 이 감격적인 발견은 "내 당한 일"에서 충실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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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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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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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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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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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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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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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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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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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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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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